지지

春信

오리지널 (w. 이훈)

제야의 타종 행사를 지나 보내고 새해가 밝아오면 한국이능력관리기관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기색으로 부산스러워진다. 아카데미에서 모든 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이 성인이 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한이관 소속의 요원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입관식은 3월 초—대개 2일—에 이뤄지므로, 그전까지 한이관의 여러 부서가 동시에 바빠지곤 했다. 강당에 현수막이 걸리고, 오와 열을 맞춘 의자가 줄지어 놓이는 등 약간의 과장을 보태 기관 전체가 파릇파릇한 새내기 요원들을 맞이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현직 이능력 요원의 대부분은 입관식 준비와 큰 인연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입관식을 준비하는 일은 당연하게도 한이관의 행정직 직원들이 도맡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달리 말해보자면, 희연은 흰 메모장을 켜둔 모니터 앞에 앉아 골몰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조금은 억울했다는 뜻이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훈련 내지는 수업을 위해 조교로 파견되는 요원들은 매해 입관식에서 새로운 출발점에 선 후배들을 위해 으레 짧은 축사를 건네곤 했다. 재작년엔 특별히 팀 리더로 진급하기 전까지 조교직을 겸했던 사헌이 했고, 작년엔 다른 조교가 축사를 했으니 올해엔 희연이 할 차례였다. 여전히 새하얗기만 한 빈 메모장을 마주하던 희연이 턱을 괴고 긴 한숨을 내뱉는다. 몇 년 전에 했는데. 속으로 투덜거려보지만 그 또한 희연 혼자 그런 것은 아니었으므로 별 의미 없는 꿍얼거림일 뿐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내용을 써야 하지. 언제까지 써야 하더라? 솔직히 애들이 그렇게 귀담아듣지도 않을 텐데.

“……!” 

잡다한 상념에 점차로 빠져들고 있을 무렵, 갑자기 들려오는 요란한 알림음에 희연의 어깨가 움칫 튀었다. 머리가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뻗어나간 손이 핸드폰을 집어 든다. 화면에 떠 있는 긴급 현장 지원 요청 알림을 빠르게 읽어내림과 동시에 몸은 이미 바이크 키를 집어 들고 주차장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요원 전원에게 발송되는 일반 콜이 아닌 특정인에게 발송되는 긴급 콜은 대체로 이유가 있게 마련이었고, 희연을 찾는 긴급 콜은 으레 그러했다. 현재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빠르게 지원 출동을 해야 하는데 헬기를 쓸 수 없거나 차량보다 빠른 이동을 해야할 때. 

한달음에 주차장으로 달려나간 희연이 헬멧을 뒤집어쓰고 핸드폰을 거치대에 눌러 붙이듯 고정했다. 내비게이션으로 경로를 맞추어 이동 소요 시간과 대략적인 경로를 훑는 눈이 바쁜 움직임과는 대비되게 차분하다. 지원 요청이 온 현장은 청평호, 소요 시간은 한 시간. 시원스레 뒷바퀴를 회전시켜 바이크의 머리를 돌리며 곧장 출발한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면 약 사십 분 안으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속 과태료 고지서야 깨나 날아오겠지만 희연에겐 그보다 현장에 있을 동료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선 차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고, 달리고 있는 차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지나가는 등 위험천만한 운전 끝에 청평호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발견한 희연이 속도를 더 높였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저만치서 어수선한 현장 임시 본부의 모습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동시에 크리처의 기이한 울음도 공기를 찢어발기며 귓가에 부딪혔다. 청평호 주변은 그럴듯한 경관 탓에 캠핑장이나 숙박업소가 제법 모여 있었는데, 그 영향으로 생각보다 많은 수의 민간인이 멀리서 벌어지는 전투 현장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현장 통제를 위해 차출된 경찰들이 접근과 촬영을 막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서서히 속도를 줄여 차가 모여선 곳에 바이크를 세운 희연이 헬멧을 벗고 곧장 통제선으로 다가갔다. 제가 할 말은 아니긴 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인들은 안전불감증이 있는 게 맞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크리처가 출몰한 현장이 뭐 그리 대단한 구경거리라고 옹기종기 모여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안달인 건지. 

“누구십니까? 이 안쪽은 출입 금지입니다.”

“한이관 요원 가이아입니다.”

희연이 지갑에서 신원증을 꺼내 내밀어 보였다. 팔을 뻗어 가로막고 있던 경찰은 얼마간 신원증을 찬찬히 살피다가, 곧 확인했다는 듯 길을 터 주었다. 지갑에 신원증을 대충 쑤셔 넣어 겉옷 안주머니에 밀어 넣은 희연이 성큼성큼 현장 본부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상황 전달 및 기록을 위해, 화이트보드를 대신해 쓰는 얇은 판이 이런저런 내용들로 빼곡했다. 

“아, 가이아. 왔네요. 곧장 투입 가능하죠?” 

“네. 그럼요. 간단히 상황 브리핑만 좀……”

임무에 참여 중인 요원 리스트를 훑던 희연이 눈을 찌푸렸다. 내가 뭘 잘못 봤나. 희연은 제게 전달되는 무전기와 인이어를 기계적인 손길로 장착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명단에 있는 골리앗이 혹시 올해 아카데미 졸업생인가요?”

“예, 맞아요. 지금 현장 투입 중이고요.” 

희연의 한쪽 눈썹이 쓱 치켜 올라갔다. 아직 정식 요원도 아닌 애를 또 현장에 보냈다고? 아무리 등록번호가 1월 1일을 기준으로 배부된다고 해도 아직 입관식도 치르지 않았는데? 삼척에서 아직 학생 신분이었던 걸 그렇게 부려 먹은 걸로도 모자라서 또? 삼척의 임무는 특수한 케이스로 일반적인 임무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평소의 임무는 그보다 인원이 훨씬 적으니, 그 말은 곧 각자가 짊어져야 할 몫이 더 크고 무겁다는 뜻이다. 

“아직 입관식도 안 한 아카데미 졸업생을 벌써 현장에 씁니까?”

“골리앗은 이미 삼척 임무를 통해서 현장 경험도 있고 해서…”

“그래봤자 이제 겨우 입관식을 앞둔 애라고요. 고작 특수한 현장 경험 한 번에 이렇게 바로 투입하는 게 말이 됩니까?”

희연은 기가 찬다는 듯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몇 마디 더 따지고 들 생각이었으나, 인이어를 통해 전해지는 다급한 상황에 쌀쌀맞은 눈으로 금번 임무의 팀장을 쏘아보곤 빠르게 자리를 떴다. 물론 정식 요원이 되면 언제 어떤 임무에 차출될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하거니와 파릇파릇한 새내기들도 깨지고 부딪혀 가며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희연도 알았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입관식을 마친 후부터 체득해도 되는 일이 아니냔 말이다. 이런 일을 서둘러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빠르게 현장에 접근할수록 크리처와 씨름 중인 여러 인영이 선명해졌다. 소형 개체 한 마리, 인원은 넷. 하지만 현재 팀장이 부상을 입고 뒤로 빠져있으니 크리처를 상대 중인 인원은 셋뿐이란 소리다. 기록판에 휘갈겨 적힌 내용으로 전후 사정을 파악했을 때 물가에 나타난 소형 개체 하나라 몇 안 되는 적은 인원을 출동시킨 것 같았으나 일반적으로 파악된 소형 개체보다 유달리 빠른 움직임에, 공격을 피해 물속으로 숨어들려 하는 특이행동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다 지원 요청을 한 것 같았다. 

약 오십 미터 안으로 접근한 희연은 곧장 능력을 써 다른 요원들과 대치 중인 크리처의 뒤쪽 땅을 깊고 길게 갈랐다. 이렇게 해두면 물속으로 기어들어 가려는 행동을 일차적으로 저지할 수 있을 터였다. 땅의 갈라짐에 희연의 존재를 알아챈 다른 요원들이 멀리서나마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왔다. 그 가운데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이훈이 있었다. 한바탕 굴렀는지 흙투성이에 잔 상처가 가득인 몰골을 일별한 희연이 무어라 말을 건네기도 전에, 대치 상태에 머물러 있던 크리처가 제 왼편을 막고 선 이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리처의 움직임을 본 희연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확실히 일반적으로 봐오던 크리처의 속도를 상회하는 모습이었다. 뭐야? 뭘 먹고 저렇게 빠른 거야. 그저 소형 개체 하나라고 만만하게 볼 정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러니 지원 요청이 들어오는 거지. 희연은 당장 전면에 나서 크리처와 직접 부딪히기보다, 기존에 대응 중이던 요원들을 보조하는 식으로 움직이며 이 크리처에 대한 특징을 하나둘씩 파악해 나갔다. 

물속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으며 서서히 압박해 가자 크리처의 움직임이 한층 더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평균적으로 마주하는 크리처보다 빠르고, 공격적이었다. 물을 다루는 센티넬과 희연이 합심하여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동 속도를 떨어트리고, 그 틈을 타 이훈과 가이드 요원이 크리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중이었으나 시간을 끌면 끌수록 체력은 더 소진될 뿐이리라. 거기 더해 이미 다들 크고 작은 부상까지 입지 않았던가. 전투가 길어질수록 불리한 것은 이쪽인 것이다. 크리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희연이 툭 내뱉었다. 

“물로 몇 초만 움직임 잡아둘 수 있겠어요?”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죠.]

인이어로 들려오는 목소리엔 아직 약간의 여유가 스민 것으로 보아 괜한 허풍을 떠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희연의 시선이 이훈에게 흘긋 닿았다 크리처에게로 돌아간다.

“좋아요. 잡아두는 사이에 내가 크리처 아래 땅 꺼트립니다. 골리앗, 현재 총기 소지하고 있습니까?” 

[네. 갖고 있습니다.]

“땅 꺼지면 곧장 나머지 두 사람이 크리처 머리 조준하여 사격합니다.” 

희연이 그간 아카데미에서 봐온 이훈의 사격 실력은 솔직하게 말해 아주 정밀하진 못했다. 이훈의 특기는 확연하게 체술 쪽으로 트여 있었으므로. 거기다 이훈 스스로가 사격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알아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센티넬이라 해도 늘 이능력만으로 임무를 해결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지금 잡아둘게요!]

보이지 않는 힘에 방울방울 이끌려 온 호수의 물이 크리처에게 달라붙어 하나의 물줄기를 이뤄 움직임을 막는다. 크리처가 발버둥을 시작하려는 순간 희연은 단단히 땅을 딛고 서서 온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했다. 쿠르릉, 둔중한 울음을 내뱉은 땅이 무거운 몸을 내려 앉히며 금이 가고 뒤틀린다. 연차가 제법 쌓인 지금이야 능력을 세밀하게 다루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지만, 그렇다 하여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희연은 자신이 다루는 땅이 저만의 것이 아님을 잘 안다. 자칫 피아구분에 실수가 있었다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호숫가의 땅이라, 겉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땅처럼 건조하고 단단할지 몰라도 속은 물기가 많아 무르다. 물론 그만큼의 수분을 머금고 있으니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겠으나 건드릴수록 쉽게 형태가 무너지게 마련이다. 희연은 다른 요원들이 딛고 선 지점으로 번지는 지진의 영향까지 휘감아 제어했다. 그러는 사이 여러 발의 총성이 주위를 울리기 시작한다. 탄환에 찢기거나 관통당한 크리처의 외피 위로 체액이 흘렀다. 격렬하던 크리처의 움직임이 조금씩 둔해졌을 무렵이었다. 

“…!”

“도이훈!”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양 낫처럼 휘둘러진 크리처의 다리가 이훈의 허벅지 옆을 푹 파고들었다. 그 서슬에 크게 휘청였을지언정 다리에 힘을 줘 버티고 선 이훈은 곧장 총을 던져버린 뒤 제 능력을 사용해 크리처의 다리를 손으로 뽑아내 내던졌다. 마치 이훈을 푹 꺼진 땅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듯 매달려있던 다리가 스르륵 아래로 모습을 감추고, 몇 발의 총성이 더 울린 끝에 가이드 요원의 입에서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흘러나왔다. 휘청이면서도 억지로 버티고 서있던 이훈은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클리어 신호에 곧장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훈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희연의 눈가가 순간적으로 흠칫 경련을 일으킨다. 쓰러지는 이훈 위로 그동안 수없이 목격해 온 선후배들의 마지막 모습이 겹쳤다 흩어졌다. 능력을 흩어내고 한달음에 달려간 희연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기가 무섭게 이훈의 상처를 살폈다. 

이미 온 다리가 핏물로 척척하게 젖어 들어 있었다. 허벅지는 기본적으로 출혈량이 많은 부위라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을 잃는다. 희연은 곧장 무전으로 중상자가 발생했음을 알리고 구급팀을 요청하며 환부를 힘껏 내리눌러 지혈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꿀럭꿀럭 새어나온 시뻘건 피가 옷은 물론이요 주저앉은 땅까지 적셔나가고 있었다. 지혈에 정신없는 사이 희연은 제 팔뚝을 붙드는 손길을 느끼곤 이훈의 낯에 시선을 주었다. 눈물과 고통이 엉망으로 뒤섞인 얼굴은 이미 창백했다.  

“으…조, 조교님, 흐… 다리가….”

희연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웬만한 고통으론 아프다는 소리도 잘 하지 않던 녀석이 울며 아픔을 호소하는 걸로도 모자라, 벌벌 떨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차마 제 상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이훈이 매달리듯 희연을 붙들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헉…, 흑, 저 좀……”

“도이훈. 정신 차리고 조금만 참아. 구급팀 지금 오고 있으니까, 알겠어?”

구명줄이라도 잡은 양 팔뚝을 움켜쥔 이훈의 악력에 희연은 팔뚝이 부러질 것처럼 욱신거릴 정도였으나, 내색하지 않은 채 몇 번이고 이훈의 의식을 붙들고 다독이길 반복했다. 당연히 부상을 입지 않은 저보다 불안정한 상태의 이훈을 챙기는 게 우선이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들것과 구급가방을 챙겨 든 구급팀이 달려와 이훈의 상태를 체크하며 응급처치를 위해 부산스레 움직였다. 구급대원이 상처보다 높은 위치에 지혈대를 꽉 조여 맨 뒤에야 희연은 상처를 압박하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어냈다. 

“출혈이 완전히 안 잡히네요.”

그러나 상처에서 새어 나오는 피는 완전히 멎을 줄을 몰랐고, 이송하는 동안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중얼거린 구급대원은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가방에서 다른 물건을 꺼내 들었다. 희연도 몇 번 본 적이 있어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알약 같은 것이 가득 채워져 있는, 바늘이 없는 굵은 주사기. 무식하게 상처에 직접 찔러넣어 알약 형태의 특수 지혈 스펀지를 주사하면 피를 빨아들인 스펀지가 팽창하여 상처를 압박하는 식의 지혈 도구였다. 

“다른 분들이 팔다리를 강하게 붙들어 주셔야 합니다. 몸부림치면 안 돼요.”

지혈 도구의 멸균 포장을 벗겨내고 준비를 마친 구급대원이 일견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희연을 비롯한 다른 요원들에게 당부했다. 희연은 저것을 직접 써본 일이 없지만, 상처에 쑤셔 넣는다는 점에서 지독한 고통을 동반하리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른 구급대원과 희연을 비롯한 요원들이 이훈의 몸을 붙들어 내리누른다. 

“조… 조교님…”

사지를 붙들린 이훈이 고통 속에서도 불안한 기색으로 희연의 팔을 재차 움켜쥐었다. 두려움 스민 눈을 마주하며 희연은 단단한 어조로 내뱉었다. 

“지혈만 할 거야. 아파도 참아야 돼. 그래야 병원까지 무사히 갈 수 있어.”

눈물이 일렁이는 이훈의 눈을 잠시간 말없이 마주하던 희연이 구급대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지극히 당연한 내용들임에도, 요원 생활을 하다보면 간과하기 쉽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희연이 줄맞춘 의자에 정복을 입고 앉아있는 아카데미 졸업생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몇 번이고 본 광경인데도 강단에 서서 앳된 얼굴들을 내려다볼 때면 괜스레 제 기분까지 묘해지곤 했다. 그들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무뎌져 갈까. 잃는 슬픔에 익숙해질 것이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소모해 갈 것이다. 

“그러나 앞서 꼽은 것들을 여러분의 머리나 마음에 새기라는 말은 안 할 겁니다.”

희연의 시선이 학생들 틈에 섞여 앉아있는 이훈과 마주쳤다.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의자 옆 바닥에 목발을 내려둔 상태였다. 그렇다는 건 아직 혼자 움직이기엔 힘든 상태란 뜻일 텐데 입관식에 참석하려 무리라도 한 모양이었다. 물론 평생에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행사이니 빠지고 싶지 않을 법도 했다. 

“사실 제가 여러분께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그냥, 어깨에 힘 빼세요. 애써 일 인분의 몫을 다하려 무리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다 하지 못한 건 선배들이 이끌어 줄 것이고, 그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스스로를 안전히 지키세요. …이상입니다.” 

입관식을 이틀 앞둔 날까지도 축사를 반도 쓰지 못해 거의 머리를 쥐어뜯다 겨우 어찌저찌 내용을 채우긴 했으나,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좀 더 멋지게 포장된 말을 해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마찬가지로 정복을 갖춰 입은 희연이 평화로운 얼굴 아래 머쓱함을 감춘 채 강단을 내려와 옆으로 빠졌다. 언제까지 아카데미의 훈련 조교를 맡을지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 또 한동안은 축사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 속이 다 시원했다. 뒤이어 입관식을 진행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매끄럽게 다음 순서를 안내하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는 예비 요원들의 움직임에 작은 소요가 인다. 그 사이엔 목발을 짚고 기어이 일어서는 이훈의 모습도 섞여 있었다. 못 말린다는 듯 희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활짝 열려있는 강당의 입구를 통해 바깥 공기가 가벼이 살랑이며 불어들었다. 조금은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냄새를 품은 바람이 분다. 어느덧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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