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쓰임새

오리지널(w. 사헌)

명사

1. 쓰임의 정도나 쓰이는 바.

한이관의 홍보대사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사실 제법 민망하고, 때론 귀찮으며 생각보다 다양한 일을 부가적으로 해야 했다. 예를 들자면 티비로 송출되는 공익광고를 찍는다던가 브로셔 또는 홍보물용 촬영을 한다든지, 드물게 인터뷰를 하거나 외부로 강연을 나가는 식이었다. 기실 강연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문 편이었는데 근래 들어 일정이 자주 잡히는 것은 얼마 전 한 언론사를 통해 이능력자 폭주로 인한 사고 및 민간인 사망 통계가 공개되면서 여론이 위험한 이능력자의 활동에 대한 제약을 좀 더 강화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크리처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능력자들의 도심 및 도시 근교 활동에 제약을 두는 것은 스스로를 위험에 밀어 넣는 꼴이나 다름없다는 의견도 곳곳에서 반박처럼 쏟아지긴 했으나 압도적인 쪽은 여전히 제약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해당 언론사야 원래부터가 자극적으로 기사를 써내곤 하는 곳이었으므로, 한이관은 공식적으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교묘하게 과장된 것을 바로잡거나 반박—이능력자의 활동으로 막을 수 있었던 여러 손실과 피해의 규모에 대한 자료 같은—자료를 공개하는 것이 도리어 이 논제에 괜한 장작을 추가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한이관 측에서는 회견 등을 통해 공식적인 목소리를 내는 대신 ‘이능력자 인식 개선을 위한 강연’을 곳곳에서 시행했다. 물론 이는 내부적으로 부르는 명칭일 뿐이고, 대외적으로는 한국이능력관리기관을 홍보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강연 일정이 잡히는 곳은 주로 고등학교나 대학교였다. 아주 가끔 시청과 같은 타 기관에서도 진행하곤 했으나 학교에서 여는 것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야 어떤 식으로든 강연을 듣는 일 자체에 약간의 강제성을 띠게 마련이니 (비자발적) 참여도가 높을 수밖에. 

“곧 휴게소네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데, 들를까요?”

“아뇨, 전 안 들러도 괜찮아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희연이 고개를 돌리며 대꾸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사헌이 그럼 지나치겠다 대답을 되돌려 주었다. 오늘의 강연은 서울에서 약 두 시간은 꼬박 달려야 도착하는 한 대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동안의 강연은 대체로 한이관의 홍보를 위해 대외적으로 얼굴을 내민 적이 있던 요원이나 팀장 중에서 한 사람씩 각기 다른 곳의 일정을 소화하는 식이었는데, 열에 셋 정도는 두어 명이 함께 나가는 경우가 있곤 했다. 오늘은 해당 학교에서 강연을 듣기 위해 참석하는 학생의 수가 많을 테니 되도록 얼굴이 많이 알려진 요원이 강연을 나와주면 좋겠다나 뭐라나. 웃기고 있네. 그렇게 생각한 희연은 심드렁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진심으로 궁금해서 강연을 들으려는 학생은 10퍼센트도 될까 말까일 것이고, 나머지는 학점이라든지 출결 관리를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채우는 학생들일 게 당연하지 않은가. 희연은 짧게 끝났던 자신의 대학 생활을 잠시 곱씹었다. 졸업할 때까지 쭉 다녔더라면 저도 출결 관리를 위해 듣고 싶지 않은 수업이나 강연에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참석해야 했을까. 결코 경험할 일 없는 시간들을 떠올려 보는 사이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난 차는 훨씬 부드럽고 조용하게 도로를 달리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강연을 위해 찾아와 주셔서 고맙고,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학생들의 청강 태도가 적극적이어서 저희도 즐겁게 강연했습니다.”

사헌의 정중하고 매끄러운 대답에 그렇습니까 하며 반색한 총장이 퍽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웃었다. 그가 과연 그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준 것에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싱글벙글한 낯을 하고 사헌과 희연에게 악수까지 청한 총장은 마치 금붕어 똥처럼 옆에 붙어선 사무처장을 뒤꽁무니에 달고 멀어져갔다. 

“고생하셨어요, 선배.”

“희연 씨가 더 고생 많았습니다. 아까 곤란했죠.” 

“아니에요. 솔직히 아주 예상을 못 했던 건 아니라서요.”

사헌의 낯에 보일 듯 말듯 쓴웃음이 떠오르다 흩어진다. 희연은 조금쯤 식은 미소를 지어 보이곤 조수석에 올랐다. 그리 특별하고 유별난 사건 축에도 들지 못할 일이었다. 으레 남학생들에게 자주 관찰되곤 하는, 짓궂음의 허물을 덮어쓴 무례 같은 것 말이다. 차량이 부드럽게 출발하자 기대어 있는 등받이 쪽으로 가벼이 몸이 쏠리는 것을 느끼며 희연은 팔짱을 낀 채 한 손을 들어 제 턱을 매만졌다.

‘일하시면서 능력으로 민간에 피해를 자주 야기하시는 것 같던데 그런 점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자리는 따로 안 만드시나요?’

‘피해 복구를 위해 월급을 반납해야겠단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비꼬는 거 아니고 진짜 궁금해서요.’

‘임무에서 요원님 때문에 시민이 사망하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지금까지 직접 만드신 피해 규모는 알고 계세요? 나쁜 의도로 드리는 질문이 아니라 그런 정보도 알고 계시나 해서요.’ 

딱히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타격이 있는 질문들도 아니었다. 한참 어린 녀석들이 일침을 날리는 척 긁어봤자 뭐 얼마나 긁히겠는가. 거기 더해 사실 한 사람의 시민이라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라고도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이 피아구분 없이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성질의 능력인 것도 사실이고. 어떤 의도로 던진 질문인지 속내가 빤히 읽힌다는 점이 웃길 정도였다. 

각자의 생각에 잠긴 두 사람을 실은 차가 고속도로에 접어들며 점점 속도를 더해갔다. 달리는 속도에 의해 생겨난 바람이 단단한 차체를 훑고 부딪으며 일정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바이크를 타면 맨몸으로 바람을 맞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에, 희연은 특히나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타고 있을 때면 이런 점에서 차가 좋긴 하구나 같은 싱거운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물론 그렇다 하여 스물여섯 이후 지금까지 줄곧 타온 바이크를 버리고 차를 운전해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기동성 면에서 바이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희연에게 특히 치명적인 약점인 탓이다. 

“희연 씨.”

“네, 선배. 뭐 필요하세요?”

“기분은 괜찮습니까? 생각이 많아 보입니다.”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사헌의 음성 아래 스민 걱정의 기색을 읽은 희연이 가벼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괜찮아요. 아주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들이었다면 당황했을 것 같은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어서 그냥 흘려들었어요.”

“흘려들었다면 다행입니다만….”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것처럼 흐려지는 말꼬리에 희연의 시선이 운전 중인 사헌의 옆 얼굴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을까. 그 시선을 못 느낄리 없는 사헌이 조금은 머쓱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희연 씨가 그 말들 때문에 또 괜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아닌가 염려돼서요.” 

희연이 의아한 듯 고갤 기울였다. 사헌이 내뱉은 말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곧, 지난번 사헌과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 속에서 건져 올렸다. 정말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고 그때도 두 사람의 의견은 평행선을 달리다시피 했지만 말이다. 

“괜한 생각이라면… 센티넬이 제어능력을 상실할 것 같을 때 미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했던 거요?”

“…네.” 

“음……”

희연이 말을 고르듯 검지로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사헌이 덜 싫어할까에 대해 잠시간 고민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사헌이 싫어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오늘 강연에서 고의적으로 무례한 질문을 던진 녀석들에겐 아무 타격도 받지 않았지만요, 그거랑 별개로 제 생각은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아요. 센티넬이 폭주 위험도가 높아지면 사살하는 게 맞다고 봐요.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해 버리기 전에요. 저처럼 피아구분을 하지 못하는 능력이라면 특히 더 그렇게 해야죠.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는 선택지를 골라야 하니까.” 

사헌이 답답한 듯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희생하게 되는 것과 시작부터 최악의 루트를 희생으로 결정하고 시작하는 건 스타트 라인이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

“사람의 가치관을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건 알지만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희생이라는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건……. 희연 씨, 희생은 때론 이기적이에요.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어요.” 

희연은 저 스스로가 제법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희생’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대화를 나눌수록, 사헌 역시 저 못지않게 고집불통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이 주제에 대해 사헌과 제 의견의 간극이 메워질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배, 저 하나의 희생으로 더 큰 피해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면 그건 가치 있는 일이에요. 저희는 피해가 더 적게 발생하는 쪽으로 행동하게끔 배웠잖아요. 그리고 전 그게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요. 민간인을 지키려고 이 일을 하는 건데 그 스스로가 제어 능력을 잃고 시한폭탄이 되면 안 되죠. 그러니까 저는 만에 하나 삼척 때처럼 또 통제력을 상실할 위기를 마주하면 스스로라도 죽을 거예요. 이젠 망설이지 않을 거라고요.” 

“…희연 씨는 사실 다른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 아닙니까?” 

마치 이기적이라고 꾸짖는 듯한 음성에 설핏 웃음 지은 희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이기적인데 저도 한 번쯤은 이기적이면 안 되나요. 선배, 그 마음이란 것도 주인이 살아 숨 쉬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저는 스스로를 쉽게 포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절 내던질 각오를 한다는 건 설령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되더라도 그들이 숨 쉬고 살아가길 바란다는 뜻이에요.”

“……”

희연은 자신이 죽는 것으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에 희생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지도 않았고, 딱히 박애적인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굳이 그 생각을 뒷받침할 이유를 찾아 붙여야 한다면 가이드에게 패널티를 지워가며 자신의 패널티를 해소하고 안정을 되찾는 존재로서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는 탓이라 부르는 게 좀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희연은 제 목숨을 쉽게 내던질 수 있었고, 그것이 못 견딜 정도로 아깝거나 힘들지도 않았다. 

“알잖아요, 살아있으면 상처는 아물고 덮이게 마련이에요. 그리고 선배도 세상 모든 것엔 대가가 있다는 걸 잘 알 테고요. 뭔가를 얻어내려면 하나를 놓아야죠. 그 어떤 것도 잃지 않으려는 건 나이브한 이상론에 불과해요.” 

그의 생각에 나이브하단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어쩌면 선배 되는 이를 섭섭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았으나, 희연은 부러 그 표현을 콕 집어 내뱉었다. 물론 사헌의 이상을 진심으로 그렇게 치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상을 존중하고 이해했다. 다만 그 이상을 함께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 아닐 뿐. 어쩐지 조금쯤 서운한 듯도, 혹은 조금 화가 난 듯도 한 옆얼굴을 한참 쳐다보던 희연은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눈길을 돌려 차가 달려 나가는 앞을 가만 주시했다. 음악도 틀지 않은 차 내부는 오래도록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의 소음만이 맴돌았다. 

“희연 씨, 아물지 않는 상처도 있습니다.”

그대로 대화가 끊겼다는 생각을 할 무렵 불쑥 들려오는 말소리에 반응한 희연이 고갤 돌리자 짧게 시선이 마주쳤다. 

“이기적으로 굴라고 권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해요.” 

희연은 사헌을 이해한다. 그가 겪어온 시간과 사건의 윤곽을 생각하면 누군가를 또 잃을지 모른다는 가정 자체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희연은 그것이 사헌을 약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마음이라 생각했다. 버릴 수 있다면 버리는 것이 옳다고 봤다. 물론 이런 생각에 대해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고 혼나도 할 말이 없으리라.

“저는 적어도 선배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는 없을 거라고 믿어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쓰임새와 역할이 있다고 오래도록 믿어왔다. 대단히 크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해 운명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희연이 그리는 미래에는 자신의 자리가 존재치 않았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이능력을 떠안고 쭉 살아가는 것에 피로를 느껴버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뿐. 제 자리 없는 미래를 곱씹을수록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 잡았다. 궤변일 수 있겠으나 어쩌면 땅의 속성 탓일지도 모르겠다 싶을 때도 있었다. 땅은 지탱하고 받치는 역할을 하지 않던가. 그러니 땅을 움직이는 저 역시 그 영향을 받아 다른 이들과 나란히 서는 대신 그들을 받쳐주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제가 제 역할과 쓰임새를 다 하게 두세요. 선배는 선배의 역할을 하시고요.”

“희연 씨는 고집이 너무 셉니다. 마음을 조금 바꾸었으면 싶은 부분에서 특히나 더 그래요.”

옅은 한숨을 내쉬는 사헌으로부터 미약한 포기의 기색을 읽은 희연이 소탈하게 웃었다. 흩어지는 웃음기 뒤를 잇는 것은 분위기를 흩어보려는 가벼운 농조다. 

“선배도 고집이 센 건 마찬가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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