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화 - 거래(1)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까지 뭘 들으신겁니까?”
레인의 말에 노아는 순간 자신이 만든 냉기에 소망이 뒤섞인건가 싶었다. 이럴리 없는데, 그 모든 걸 알고도 이렇게 태연히 얘기할 수 있던가?
마법사라는 자리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들은 콩고물이라도 얻기 위해 노아에게 달라붙었다가도, 그 마법사들이 모인 중앙 마법사단이 그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을 그었다. 더러는 썩은 동아줄을 잡았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 썩은 동아줄은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을뿐인데도.
온 몸에 뒤엉킨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레인의 녹빛 눈동자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되려 흔들리는건 노아의 파란 눈동자였다.
‘어떻게, 어떻게 저렇게 곧을 수 있지?’
“괜찮을겁니다.”
신기하게도 노아는 그 말에 불안으로 요동치던 마음이 잔잔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있던 것처럼 믿을 수 있겠다는 영문모를 신뢰가 피어올랐다. 참 이상했다.
오늘에서야 인지했던, 초면에 가까웠던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닫힌 마음이 열릴 수 있던가?
노아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레인이 브로치 가운데에 박힌 보석을 눌렀다 떼었다. 보석이 브로치 안 쪽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튀어나오며 빛을 뿜자, 허공에 홀로그램 화면이 펼쳐지며 중앙 마법사단에 통신 마법을 발동시켰다. 연결중인 화면은 작은 사각형과 큰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라, 마치 화상통화 모니터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제 샬레인은 부서져서 쓸 수 없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멀쩡하리란 생각도 않았습니다만.”
“당신, 제법 눈치가 빠르니 얘기하긴 좋군요.”
“별 말씀을.”
어깨를 으쓱인 노아가 습격자의 상태를 살피겠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떠났다. 제게서 멀리 떨어지던 노아를 붙잡으려던 찰나, 화면이 하얗게 켜지고 곧 모니터 너머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비춰졌다. 얼음에 붙잡혀있는 습격자를 굳이 견제하는 노아의 모습에 레인이 한 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앞서 얘기한것으로 짐작해보건데, 노아가 있으면 연결조차 되지 않으리란 판단에 일부러 화면에서 벗어난 게 분명했다.
그 지긋지긋한 치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다 똑같은 사람이고, 마법사인데. 제까짓 것들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사지로 몰아?”
“통신 장애로 인해 연결이 늦었습니다, 수석마법사 A…가 아니군요?”
“.....참 나.”
비상용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은 연결 속도였다. 흐릿하던 모니터가 선명해지고 행정 마법사로 보이는 이가 나타났다. 건들거리는 태도로 일관하던 그가 곧 통신기를 사용한 인물이 노아가 아닌 걸 알자 자세를 바로 고치고 바로 마법사 전담 수사관을 보내겠다고 하며 무성의한 응대 태도를 사과했다. 어이가 없었다. 사과같은건 바라지도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결국 레인은 화면너머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그에게 매몰차게 덧붙이고 말았다.
“그 사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받아야겠는데. 이 일은 대마법관님에게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끝까지 구질구질하다. 불쾌함을 참을 수 없던 레인은 호출기의 전원을 강제로 꺼버리고 외투 가슴팍에서 브로치를 떼내고서야 끓어오르던 속을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가슴속에서 요동치며 레인의 목구멍을 두드렸다.
할 수만 있다면 소리치고 싶었다.
‘이런건, 이런 대우는 나 하나면 되잖아!’
“다 했습니까?”
화면이 사라지는걸 본 노아가 다시 레인의 곁으로 다가섰다. 모든걸 지켜보고 있었을텐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무어라 말하려던 레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15분내로 수사관이 도착할겁니다.”
“그렇군요.. 쉬셔야 하는데, 고생하셨습니다.”
쥐어짜듯이 인사를 건네는 노아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차마 고맙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걸 입 밖으로 내버리면 정말 비참해질 것 같았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었다. 그래도, 애쓴건 애쓴거였으니 인사치레는 반드시 해야했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어쩌면 이미 모두 알고 있을- 사실을 누군가가 아는건, 참으로 불유쾌한 경험이었다.
“이름이 ‘A’입니까?”
잠겨있던 상념 사이로 레인의 물음이 파고들었다.
“아닙니다. … 맞긴 하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진 않군요.”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수석 마법사?”
“노아(NOA). 노아라고 불러주시죠.”
“노아..좋습니다. 저는-”
“레인.”
노아의 시선이 레인이 걸치고 있는 외투 주머니로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간 레인이 주머니의 틈새에서 익숙한 종이 끄트머리를 보고 꺼내들었다. 처음부터 구겨넣은 것이 움직이느라 더 엉망으로 뭉치고 망가져있었다. 실금이 간 자신의 얼굴을 본 레인이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유명인이란게 이럴땐 좋다.
“모르는 게 이상하지.”
“뭐… 오늘 아침까지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노아’.”
“이제는,이라….”
왜 그 말에 이질감이 드는걸까, 레인에게 되묻고 싶었지만 그의 웃음 뒤로 가려져있던 익숙한 그늘이 보였다. 그건 고독이었다. 거울로 보아왔던 고독과는 결이 다른, 하지만 동떨어진 것에서 보이고 있었다.
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 꼭대기에 떠있던 해가 조금 기울어 있었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해를 따라 그늘이 늘어지며 레인을 뒤덮고 있었다. 군데군데 쌓인 눈이 설탕 코팅처럼 얼어붙을 날씨니 부상자인 레인에게 치명적인 추위가 될 수 있었다.
공터 너머에는 아직도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노아가 레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늘이 짙어집니다. 저쪽에 햇빛이 잘 드니 이동하는 게 어떻습니까?”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마침 양팔로 몸을 감싸고 떨고 있던 레인에게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그래서 망설임도 없이 바로 노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노아가 햇살이 넓게 퍼지는 곳으로 레인을 부축해갔다. 햇빛이 잘 드는 곳이라서일까, 그곳에 쌓여있을 눈은 진작 녹아내려 마른 들풀이 누렇게 누워있었다. 레인을 그 위에 앉히고 몸을 녹일 것을 찾아 힙색으로 뻗은 노아의 손에 습격자에게서 회수한 스틱이 스쳤다. 정신없는 상황에 정작 물어봐야 할 것을 잊고 있었다.
스틱의 출처는 수사관이 습격자를 데려가 취조하면 나올것이니 노아의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샬레는 얘기가 다르다. 마법에 관한 것은 마법사의 영역이고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제조자니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것이다.
더는 지체되게 할 수 없었다.
“이런 샬레는 처음보는데, 뭐 아는 거 있으십니까?”
노아가 내민 스틱은 다른 마법사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짧은 막대 형태의 스틱이었다. 끝에 흰 보석이 달린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한 레인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건 왜 물어보는 겁니까?”
“샬레는 연구원과 마법사의 공동관할이지만, 사건이 일어나면 보고서는 제가 써야하니까요. 이 출처모를 샬레가 뭔지 알아야 써 넣을수 있을텐데 지금껏 본적도 없던 속성의 샬레라 아는게 있을리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도 아닌 레인, 당신에게라면 더더욱 물어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만.”
“나도 모르겠다고 하면?”
“그렇게 되면 특수 상황으로 보고 대마법관님께 당신과 이 스틱, 둘 다 들고 찾아가야겠죠. 아까 호출기로 통신하는거 들었는데 어느 대마법관님이랑 안면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다들 제 스승님처럼 호락호락한 분들은 아닙니다.”
“협박입니까?”
“거래입니다. 서로 손해는 없지 않습니까?”
“...얘기하기 좋은 상대라는 말은 취소해야겠군요.”
“눈엣가시가 말상대로 좋은 사람일리가 없지 않습니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이 팽팽히 오갔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스스럼없이 하대하는 노아의 언행에 안 그래도 구겨진 레인의 미간은 더욱 깊이 패였다.
상처받으면서 아프지 않은 척 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내서 덧그리고있다. 아픈것이 반복되면서 무뎌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좋을리가 없다.
-레인은 그런 아이를 알고 있었다.
왜, 잊고 있던 그 아이가 지금 노아의 모습을 보고 떠오른걸까.
가증스럽게도, 염치없게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답을 얻기는 글렀다 싶어 스틱을 도로 챙겨넣던 노아의 손이 멈칫했다.
“잠깐이지만 당신과 얘기하는 건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그 스틱에 관해 지금 당장 얘기할 수 있는게 없기에 원하는 답을 얻을 순 없을거라는 의미였습니다. 당신도 얘기했다시피, 그런 속성은 저도 처음 본 속성이니까요.”
매서웠던 노아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렇다면..”
어느 새, 비아냥 섞인 언행에도 진심이 어리고 있었다.
“보고서 작성은 조금 미루도록 하죠. 레인, 당신이 답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 정도라면 썩 괜찮은 거래 아닙니까?”
“협상에 제법 소질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레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한 손을 내밀었다. 멀뚱하게 서서 그를 바라보던 노아가 내민 손을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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