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you

🦁x👟

난향녹차 by 참참
38
1
0

눈을 감으면 야시장의 소음은 두 배로 크게 들린다. 직전에 했던 써니가 목소리 방향 같은 거 아무 도움도 안 된다며 버럭 역정을 내던 이유를 저절로 이해하게 되었다. 날이 서지 않은 작은 도끼를 잠자리채나 되는 것처럼 허공에 휘적거려 본 슈는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슈, 아하, 하하하! 그쪽이 아닌데, 이쪽! 이쪽이야, 슈!"

"걔 말 듣지 마. 무시해, 슈."

"왼쪽, 아니 오른쪽! 오른쪽으로 두 걸음만!"

늘 여유롭게 걷던 사람이 엉거주춤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신선했다. 두 눈을 꼭 감은 슈의 몸이 이리저리 조금씩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루카는 어쩔 수 없이 파안했다. 화려한 유카타 아래 훤히 드러난 발목 한쪽에는 처음 보는 발찌가 걸려 있었다. 페트라가 여자애들 주겠다며 뭘 바리바리 싸들고 왔더라니, 슈는 인심 좋은 누나를 두었단 이유만으로 또 발 한 짝 내어주고 만 모양이다.

"오른쪽! 조금만 더!"

"한, 그 뭐냐. 10도만 꺾어 봐!"

"그게 말처럼 쉬워?"

게다를 흉내낸 얇은 슬리퍼만 신은 맨발이 찔끔찔끔 움직였다. 직전까지 뻔히 다 보고 있던 길인데, 블록으로 만든 길은 그렇게 높지도 않고 여차하면 받아줄 수 있는 친구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눈꺼풀과 미간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습하고 더운 공기, 요란하고 시끄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목청들, 달콤하거나 짭짤하거나 고소한 냄새와 파도마저 들떠서 요동치는 듯한 물소리 따위가 그 슈 야미노마저 긴장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주춤거리는 맨발을 빤히 바라보던 루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웃었다. 목소리 끝이 폭죽 근처를 맴돌다 꼬리털을 그을린 개처럼 꼬부라진 건 아무도 몰랐으면, 싶었다.

"옳지, 잘한다. 이쪽, 이쪽!"

"슈가 개냐?"

거의 동시에 써니가 우렁차게 폭소해서 루카의 어설픈 웃음소리는 얼추 묻혔다. 어정버정 느리게 걷던 슈가 코너를 돌 때가 다가와서 마음이 급해진 렌은 무의식적으로 집에서 기르는 개 부르듯 휘파람을 불었다가, 아뿔사 이게 아닌데 미안한 눈치가 되었다가, 휘청거리는 슈를 보고는 또 제 차례보다 더 심각하게 펄쩍 뛰며 두 팔을 뻗었다. 눈 감고 몇 걸음 걸었다고 슈가 넘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렇게 저렇게 가라고 떠드느라 바쁘던 써니도 성큼 다가와 빈 손을 어정쩡한 위치에 두는 게 아닌가?

루카도 은근슬쩍 둘 사이에 끼어 정강이 높이쯤 되는 블록에 발가락 끝이 닿도록 붙어 섰다. 슈를 올려다 보고 있는데 눈이 마주치지 않는 건 처음이지 않나, 하는 데 문득 생각이 미쳤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슈는 고개를 꼿꼿이 든 채 정면이나 그 위나 하는 곳을 어림해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면 어떤 풍경은 감은 두 눈꺼풀 안으로 절로 스미기라도 할 거라는 듯……복도 창문에 턱을 괴고 있다가 루카가 부르면 곧장 내려다보며 눈을 맞춰주던 모든 순간이 잠깐 무색해졌다가,

"자꾸 장난치지 말고, 루카! 나 떨어지기 싫어. 이거 새 옷이라고."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면 그건 슈가 항상 그를 기다리거나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펑, 그에게만 들리는 소리를 내며 색색의 불꽃으로 터져버렸다. 작은 폭발이었지만 사람 하나 심장이 덜컹 떨어져 화들짝 놀라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게으른 여름밤이 슬금슬금 다가와 알록달록한 건물 위를 새까만 배경처럼 덮었다. 땅거미가 휩쓸려간 자리에 루카만은 시작되지도 않은 불꽃놀이를 벌써 보는 것처럼 두 눈만 빠르게 꿈뻑거렸다.

"이제 어떻게 가?"

"……왼쪽으로 조금만 와 볼래?"

"왼쪽? 아닌 것 같은데……."

써니와 렌이 '또, 또 저런다' 하고 혀를 차는 건 못 들은 척했다. 장난인 척 어깨로 둘을 마구 밀치자 때로는 만만한 친구 같고 때로는 든든한 형 같은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불쑥 솟은 욕심이 부끄럽기도 하고 오기 비슷한 것으로 변해가나 싶기도 했다. 후덥지근한 공기, 비교적 선선한 밤바람, 멀고 가까운 웃음소리에 함께 묻어나는 물결의 술렁거림, 가장 좋아하는 친구들의 손길이나 눈길, 그를 느슨하게 둘러싼 모든 좋고 즐거운 것이 불씨처럼 심장 위를 툭툭 뛰어다녔다. 콩콩 발을 구르며 이제 두 눈을 꼭 감은 슈 앞에 홀로 남은 루카의 입술을 바짝 말렸다.

"앞으로 쭉 와."

"더?"

"응, 조금만 더."

"진짜? 이거 맞아?"

"맞다니까? 나 못 믿어?"

"좀 그런 편이긴 하지? 앞으로……이만큼……더?"

드러난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며 슬리퍼 앞을 훑으려다 도로 쏙 들어갔다. 슈는 진작에 돌아가야 할 모서리 블록 끄트머리까지 와 있었다. 한 걸음만 더 과감하게 내딛으면 그대로 허공을 밟게 될 만한 자리에서 우뚝 멈춰 버린 까닭에 루카는 초조하게 혀를 깨물었다. 까만 밤하늘 아래로 알록달록 수도 없이 다양한 축제 조명이 산란하고, 더없이 익숙하다고만 생각해 온 검은 머리카락에도 길게 형형색색 그림자를 밟고, 가까운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파르르 기나긴 속눈썹을 스칠 때마다 빛나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불꽃처럼, 어쩐지 땀이 밴 루카의 두 손에까지 따끔하고 뜨끈한 잔상을 남겼다.

뼈대 도드라진 발목에 걸린 얇은 고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믿는다?"

소심하게 잘금거리던 걸음과는 정 반대로, 멈춰 섰던 슈가 성큼 내딛은 한 걸음은 평소의 두 배는 되었다. 걷어차일 뻔한 루카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무너지는 몸을 받아 안았다.

품에 쏟아진 사람보다 주변이 더 빨리 더 요란하게 반응했다. 헛숨을 삼키는 친구들로부터 저만치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짤막한 비명까지, 그러나 그런 소리는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순식간에 흘러나갈 뿐이다. 놀라서 바짝 굳어버린 허리를 꽉 껴안으며 루카는 상체를 조금 젖혔다. 얼어붙었던 팔이 급하게 올라와 목과 어깨를 껴안으며 무게를 더 실었다.

치렁치렁 긴 검은 머리카락이 그 너머로 주렴을 드리우고, 있는 힘껏 헐떡이는 숨은 코나 턱끝에 고스란히 닿아 절로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어린 동생처럼 가볍지도 않고 어울려 놀던 여자애들처럼 작지도 않은데, 이상하게도 한 품 가득 쏟아진 몸이 꼭 맞는 부품이나 되는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이대로 날이 샐 때까지 안고 있으래도 그럴 수 있을 것처럼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버겁거나 무겁다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하게끔 그를 몽롱하게 만드는 것이 이 얇은 허리인지, 가엾을 만큼 불규칙한 호흡인지, 온갖 음식이며 화약 냄새 사이에서도 눌리지 않고 기어이 비강을 간질이는 익숙한 향기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어 루카는 두어 번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 찰나마저도 아까워 다급히 입을 열었다.

"거 봐, 내가 잡았잖아……내가 잡았어, 슈."

불꽃놀이가 언제쯤 시작되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놀라 크게 뜬 눈이 서로 마주쳤을 때, 여름밤보다 검은 바다보다 어스름을 살라먹은 축제의 열기보다 더 짙은 보랏빛 눈동자 한 쌍이 불 붙인 심지처럼 반짝 빛났을 때 루카는 벌써 그날의 가장 큰 불꽃을 보았으므로.

그 안에 폭죽을 한꺼번에 터뜨린 것처럼 커다란 진동이 일고 눈부신 마음이 맥동하고,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백 가지 천 가지 불빛을 덧그려 온 세상이 다 번쩍이다가 소란한 불꽃으로 그를 영영 삼켜버렸다. 너무 덥고 시끄럽고 즐거워서 다른 건 다 지워진 것 같다고, 오직 이 익숙한 두 눈과 그만이 한여름에 남은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루카는 겨우 깨닫기를, 너도 같은 생각을 할까, 그건 모르겠지만,

이래서 사람들이 축제에서 첫키스를 하고 싶다고 하는 거구나.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