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보고생각

[독서모임 2회차]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업로드용 by 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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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류이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1974-75년 일제전범기업 연쇄폭파사건>, 힐데와소피

우선 나의 일본 거주 경험에 대해서부터 말하고 싶다.

나는 일본에서 그럭저럭 살다가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도쿄 23구와 가까운 어느 현 소도시에 내 집이 있었고, 쉬는날이면 이따금 도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기에 책 속에서 언급되는 지명에 퍽 익숙한 편이다. 나는 우에노 공원을 아주 사랑했다. 온종일 고민 있는 비둘기처럼 걷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고즈넉한 곳일 뿐더러, 내부에는 국립/도립 박물관과 미술관도 있는 데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역사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도쿄 국립박물관에 갈 때면(기실 일본의 어느 역사 유적지를 가더라도)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홋카이도와 오키나와, 즉 아이누모시리와 류큐가 몹시 자연스럽게 ‘일본’의 역사로 소개되어 있었다. 야마토의 침략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전쟁사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전쟁으로 입은 피해 위주로 전시하는 게 대부분이고 일본 측의 전쟁범죄 사실, 제국주의, 이를테면 역사적 치부들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역사의 기억과 보존을 위해 쓰여야 할 박물관이 역사의 망각과 프로파간다 역할을 하고 있었다. 너희가 벨기에냐? 위대한 망각이라도 하려고? 일본에서 온갖 박물관을 다 돌아다녔지만,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외에는 전시물을 보는 내내 어딘가 가시방석이었던 것 같다. 서울 여행 중 가장 최악의 경험이었던 전쟁기념관에서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었는데 어쩌면 국립박물관이라는 시설 자체가 자국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 쉬운 걸지도 모르겠다. (남한인들아 제발!)

내가 불안하고 불편한 기분을 느꼈던 건 비단 박물관에서만은 아니었다. 구직 활동하면서, 면접관이 “외국인인 것 같은데…”라며 말을 흐리길래 “한국인입니다”라고 답하자 몇십 초 가량 침묵만 흘렀을 때라든가… 홋카이도산 값싼 채소들이라든가, 백인 앞에서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일본인들 볼 때라든가… 정치를 혐오한다기보다는 아예 관심 자체를 두지 않으며 “투표해 봤자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 “선거는 귀찮아서 가지 않는다”라고 대놓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일본인 20대들이라든가… (하지만 틀이나마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에서 선거조차 안 하면 뭐 어떡하려고) 60년 넘게 정권을 틀어쥐고 있던 자민당이라든가… 아니 이게 제정신인가? 58년부터 현재까지 일본 정치판의 굳건한 오오테이자 주요 집권당이 자민당이라는 이… 현실이? 93년과 09년 선거 외에는 자민당이 제1당인 게 왜 실화인 거냐고 왜너희는사회에어떠한불만을가지고있음에도계속자민당뽑는거냐고!!!!!! 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던 적이 정말 많았다. 한국 정치판도 드러운 XXX들의 모임이지만 일본 정치판은 보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져서 숨쉬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비유 아니고 진짜로.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여러 번 중도 포기하고 싶었다. 일본민주청년동맹이, 전학공투회의가, 일본적군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일본 고도경제성장기의 이면에서 언제나 외치고 있던 좌파들의 말로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독자를 고문하는 논픽션…

일본의 좌파들은 자문한다. “일본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한국의 좌파들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지만, 일본은… 일본의 경우는 진짜… 참 힘든 질문이다. 하… 술 땡긴다. 일본이 ‘이 지경’이 된 것이 일본 좌파들의 잘못이라고만 하기는 힘듦에도, 우리 좌파 여러분은 자기들이 현 상황을 책임질 유일한 존재임을 알다 보니(아래에 첨부된 희대의 명문 “울어라!”, 통칭 <눈물의 좌파론>을 참고 바란다) 서브컬처에서는 토에이 동화 노동조합의 서기장이었던 미야자키 하야오부터 학생운동하다가 대학에서 퇴학당한 전공투 출신 야스히코 요시카즈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가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거지? 이거 다 우리 잘못이고 과오인 거 같다 조뺑이친다 우리는 좌파도 아니다” st 작품을 그려냈고(지브리 애니메이션과 기동전사 건담), 일본 여론에서는 전공투 세대로 대표되는 학생운동 시기를 암흑으로 여긴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헬멧 쓰고 빨갱이처럼 데모나 하러 다니는 철없는 대학생들이라고. 이념을 주장하며 살인과 테러를 서슴지 않는 괴물들이라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철없는 대학생들’의 연장선이자 ‘괴물’들의 투쟁과 계기, 또 그 결과에 관해 다룬 논픽션이다. 그들이 자국인들로부터 철없는 괴물이라고만 여겨지고 있으므로 저자 마쓰시타 류이치는 “그들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말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동의한다. 내가 미시적 고통에 민감한 인간이더라도 그랬다. 나는 일본 좌익 운동의 가장 거대한 계기이자 동력인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깊이 이해한다. 그것은 나 자신이 제1세계에 속한 한국인이며, 민주화 이후에 태어났고, 일상에서 누리는 것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기’ 때문에 자연히 느끼는 감정이다. 혹자는 안 느낄 수도 있다. 죄책감 없이 살 수 있다 하여 그게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나의 일본인 심리상담사도 지나친 죄책감이 네 정신병의 원인이다 뭐 이런 말을 했으니…

하지만… 죄책감 없이 살고자 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겐 가장 큰 고통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일본 좌익 운동의 역사와 거기에 필연적으로 맺혀 있는 ‘폭력성’을 이해할 수 없다.

신문에 “뭐가 불만이어서 이런 일을 했는가?”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중략) 저는 섬뜩함을 느낍니다. 베트남 인민의 생혈과 조선 인민의 생혈로 뒤룩뒤룩 살찐 기업과 그 위에서 사는 일본.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젊은이가 이것에 의심이나 고통,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요? “뭐가 불만이어서…”라고 열을 올려 말하는 것이 만약 일본 민중의 압도적 다수라면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의 민중도 피로 살찐 기업과 함께 멸망하게 되는 것은 틀림없겠지요. 폭탄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로 말입니다. (중략) 저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그들이 더할 나위 없이 성실했기에 그렇게까지 가버렸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안전한 일본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를 1000번 외쳐도 아무런 힘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베트남의 미군을 돕는 활동을 하는 국내 기업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연대라는 생각을 저는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244~245p]

일본은 변화를 꺼린다. 그건 섬나라 특유의 보수성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잦은 자연재해를 겪어오며 체념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면서도 전체주의적이다. 남들이 하면 싫어도 같이 해야만 한다. 눈치 챙겨야 되고 튀는 행동을 하면 안 되고 민폐 끼치면 안 되고 자기가 속한 집단을 반드시 사랑해야 된다. 이 견고하고 숨 막히는 분위기 한가운데에서 “이거 좀 아닌 거 같은데”라고 말하는 ‘사회부적응자’들은, 기어코 그리 말할 수밖에 없는 정신을 타고난 사람들은 히키코모리가 되거나(이게 그나마 나은 거고 절망편은 사이비종교 가입이다. 옴진리교, 통일교 같은 거…) 좌파 활동가가 되거나 반드시 둘 중 하나다.

후자는 실패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가장 혹독하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실패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이미 지나가버린 구시대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가 전후 질서로 성립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계속해서 반복될 이야기일 것이다. 사회에 불만을 지닌 이들이란 으레 무력감도 동시에 떠안고 있지 않은가. 대통령을 잘 뽑아야 나라가 바뀐다는데 후보라는 놈들이 미친놈 vs 더 미친놈이거나 파시스트 vs 덜 파시스트 이 지경이면 실존적 우울이 몰려오는 법이다. 애초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투표 한 번으로 결정된다니… (미국 대선 진짜 어떡하지?) 심지어는 투표를 하고 나서도 뭘 바꾸는 데에는 오래 걸리며 아예 안 바뀔 수도 있다. 문재인 씨는 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못했을까? 뭐 제정하지 않았거나… 하여튼.

세상이 이렇다면 무엇을 해서라도 바꾸고 싶다, 하다못해 사회에 경종이라도 울리고 싶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런 부류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더라도 그들처럼은 되지 못할 것 같았기에(애초에 이 책은 실패의 이야기다) 책을 덮자마자 무력감과 죄책감부터 들었다. 진짜…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임? <무엇을 할 것인가?> 결국 독서모임 1회차에서 읽은 책으로 다시 돌아왔다. 레닌 지금 뭐 하냐? 모스크바에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라고!!! 울어라!!! 울어라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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