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소설 샘플4
2차 GL 1.3만자 오마카세
“…그러니까 언니가 내 아내 될 사람인 거네?”
열두 살. B는 저와 결혼하게 될 열 살의 여자아이와 그때 처음 만났다. 날카로운 눈매가 북부인 특유의 서늘함을 돋보이게 해서 B는 어른들이 저들끼리 대화하는 동안 기가 죽어 있었다. 제 혼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도 여자애는 제 일이 아니라는 듯이 줄곧 무표정해서, B는 저 애가 자신과 결혼하게 될 ‘R’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혹은 아직 열 살밖에 안 되어서 혼사에 대한 무게감을 느끼고 있지 못하고 있거나. 속이 타는 것은 저뿐만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쉬자며 어른들이 저들끼리 나가자 R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아직 소파 밑에 발이 닿지도 않은 작은 아이. 그러면서도 제복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그고 허리에는 칼까지 차고 있는 아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B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네. 소공작.”
“에이. 딱딱하게 그러지 말고 서로 말 편하게 하면 안 돼요?”
알파는 살기 편해서 좋겠다. 아직 어린 B의 마음에는 순수한 적의가 떠올랐다. 오빠들을 보면 알파여도 사는 게 편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오메가인 자신과 그 처지를 비교해봤을 때는 훨씬 자유로웠다.
트로피, 전리품. 세상에서 오메가의 취급은 그 정도였다. 어리다고 해서 세상 물정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어른보다 쉽게 미묘한 차이를 짚어내는 것이 아이들이었다. 제가 포착한 이상함을 바로 입에 담아낼 수 있는 것도 그들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 검을 배우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후계 자리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오빠들은 황실 부기사단장에게 검술 훈련을 받는데, 저는 둘째 오빠가 훈련을 시작한 나이가 되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B는 큰 오빠의 바짓단을 잡으며 응석 부렸다.
나도 할래요! 왜 오빠들만 하는데요?
B. 너는 오메가잖아.
항상 저에게 무릎을 굽혀 눈을 마주쳐주는 다정한 오빠들은 그 점에서만큼은 단호했다.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어깨를 토닥이던 손길. 그것으로 제가 가진 의문이 해소되기라도 한 양 무릎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어내고 일어나던 몸짓. 별거 아닌 그때가 지금 와서 왜 이리도 자세하게 생각나는지. B는 여전히 제 말을 기다리는 아이를 보았다. 기본적으로 미소 띈 얼굴이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눈빛이 얼굴을 뚫어버릴 것처럼 날아왔다. 저 애는 왜 저리 부담스럽게 쳐다본담. 북부의 문화가 중앙과는 많이 다르다고 해도, 괜히 얼굴에 열이 홧홧 올랐다. 이글거리면서도 서늘한 시선. 하지만 그에 불쾌함보단 청량함을 느꼈다. 사계절 내내 따뜻하기만 한 중앙에서 한 자락의 시원함을 느낀 기분이라고나 할까.
“소공작께서 원하신다면… 그리 할게요.”
“그건 그리 하는 게 아닌데.”
“네?”
“소공작 말고, R라고 불러줘요.”
생글생글 웃는 낯은 꼭 사냥감을 노리는 것 같다. 저도 어리긴 하지만 저보다도 더 어린 애가 어디서 저런 여우 같은 표정을 배워왔나 싶었다. R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걸까. 어른들에 의해서 미래가 결정되는 이 상황이 말이다. 혹은 갑의 입장이라 저리 여유롭고 오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국의 중앙 귀족으로서 황제 폐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신지도 벌써 몇 대째였다. 제국은 더할 나위 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조심스러웠고,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북부 세력은 힘이 닿기에 가장 멀리 있으면서 자유분방하고 강해서 중앙 귀족과 결혼시켜 그들이 제 아래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그리고 결혼시킬 그 중앙 귀족이란, 바로 자신이었다. 귀족의 혼인은 원래 정치적인 이유로 그 혼사가 결정되고, 이는 알파든 오메가든 상관 없이 적용되는 내용이라고는 하나… B는 지속적인 묘한 불쾌함을 느꼈다. 정치적인 요소를 감안해서 제 혼사를 정하는 가문의 후계자와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제 약혼자라며 나타난 사람과 만나야 했다.
R는 저에 대한 걸 아는 상태로 이 자리에 나온 걸까. 애초에 ‘저에 대한 것’이라는 게 있을까? 알파에게 오메가란 권력 상징이나 다름없어서, 여러 명의 오메가를 거느리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것을. 중앙 귀족이라는 체면이 있으니 공공연하게 하지는 않겠지만 차기 북부 대공이라면 응당 여러 명의 오메가를 거느리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뭐가 되는 거지? 혼인 전까지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오메가 공녀로, 혼인 후에는 버려질 인형이 되는 걸까.
그간 쌓아 올린 불만이 R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에도 B는 R가 알파라는 이유로 모든 화살을 그에게 돌렸다. 거슬렸다. 예쁜 와인색 머리에 한 자락 연한 부분이 있는 것도, 북부인에겐 더운 날씨인지 약간 발그레한 볼도, 생글거리는 낯도, 웃을 때 보이는 한쪽 송곳니도, 무엇보다 저 올곧은 눈이. B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자 R가 물었다.
“공녀님은 이 결혼이 싫으신가요?”
그는 여전히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거짓을 말할 수 없게 하는 눈빛에 B는 긴 한숨을 내쉬고 답했다.
“그럼 소공작께선 좋으신지요.”
“멋대로 혼처가 정해지는 건 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지만….”
R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B의 가문에서 황실이나 이웃 나라 왕을 맞이할 때, 그리고 가문끼리 중요한 관계를 맺을 때 정도에만 내어놓는 귀한 차였다.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가문 사이 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황제 폐하의 명이니 따르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든 거기에 저들의 관계나 B에 대한 것이 들어있기는 할까. 이 꼬맹이도 오메가는 그저 알파의 물건이란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 B가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R는 찻잔 안에 떠 있는 작은 꽃을 보며 미소 지었다.
“꽃 향이 좋네요. 북부에서 차라곤 나무뿌리를 달여내는 정도거든요. 온실을 세워 중앙이나 남부의 식물을 키워보려 해도… 쉽지 않더라고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B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중앙은 따뜻해서 좋아요.”
“결혼 후엔 대공저에서 지내게 될 텐데요….”
“아. 그렇다면 평소 지낼 때보다 난방을 더 해야겠군요.”
음음. R는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머리로 뭘 생각을 골똘하게 하는 걸까. 중앙이 따뜻해서 좋다길래 결혼은 뒷전이고 이곳에 와서 살 생각에 즐겁기만 한 줄 알았다. 열 살짜리 애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B는 제 분노를 R에게 쏟아낸 것이 약간 미안해졌다. 그런 풍습을 얘가 만든 것도 아닌데. R는 벌써 상황을 받아들이고 저와 북부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북부의 소공작은 저보다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애였지만 사실 저보다 어른스러울지도 몰랐다. 찌푸린 미간이 점점 펴지는 모습을 보며 R가 작게 웃었다.
“무엇보다 내 아내 될 사람이 아름다워서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순간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항상 겨울인 북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가진 향기는 봄에서 가을 정도에 중앙에서 나는 과일을 닮아있었다. 어려서 페로몬 조절하는 법에 익숙하지 않은 알파는, 제 감정을 향으로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둘만 있을 때만 R라고 불러도 되겠죠?”
“원하시는 대로.”
응접실이 이리도 좁았던가? 널찍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B는 R와 무릎이 닿을 것처럼 다리를 움찔거렸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눈빛을 가지게 되었을지. 저런 분위기는 북부인들이 공유하는 특성인지. 중앙에서 살면서 타지에는 관심 가지지 않았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머지 않아 들어온 어른들에 R의 시선이 아쉬운 듯 떨어졌다. 어른들 앞에선 왜 그를 숨기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은 B였으나 여전히 코끝에 아른거리는 과일 향 페로몬만큼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
북부에 사는 R가 중앙에 올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북부에는 항상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다. B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지역구 소식을 읽으려 신문 몇 개를 들춰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혹시라도 R가 있을 북부에 피해 갈 내용이 있을까 봐. 최전방을 수호하는 사람이 혹여 다치지는 않을까. 필요에 의해 맺어진 인연이었으나 떠올릴 때마다 애틋했다. 그가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서신을 보낼 때마다 B는 한참 답장을 고민하다 펜을 들곤 했다.
오랜만에 만날 때는 또 어땠는지, 피곤한 기색을 완벽히 숨기고 온전히 저한테 시간을 할애했다. B는 R와 단둘이 정원을 거닐었을 때를 떠올렸다. 계속 쪼그마할 줄만 알았던 R는 어느새 저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었으니 어릴 때의 호기심 같은 건 이미 다 사라지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R를 만나고 제 생각이 얼마나 쓸모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공녀님.”
“오랜만이에요. 소공작.”
R의 눈빛은 여전히 불같았다. 심지가 곧게 타오르는 촛불. 반가웠던 건 B도 마찬가지라 서둘러 하녀들을 무르고 산책을 제안했다.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있으면 얼굴에 열이 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아서 차라리 탁 트인 공간이면 괜찮겠지 싶었다. 내가 보고 싶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날 생각했을까? …여전히 날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물어볼 용기는 없어 B는 괜히 정원에 핀 꽃들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흥미롭게 들어주던 R는 잠시 쉬어가기 위해 벤치에 앉았을 때 불쑥 제가 궁금했던 것을 물어왔다.
“저 보고 싶었습니까?”
“네?”
“난 언니 보고 싶었는데. 엄청.”
B의 손등 위에 R의 손이 올라왔다. 둘 다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B는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러니까 쟤도 나를 보고 싶어 했다는 거지? 내리깔았던 시선을 힐끔 그쪽으로 옮기면 R가 저를 보고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이가 달라지고 키가 같아져도 여전한 시선이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R.”
이게 뭐라고 입이 간질거리는지. 고백을 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귓가에서 쿵쿵거렸다. R는 이런 말을 어떻게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걸까. 눈을 마주칠 용기는 없어 손을 뒤집어 R의 손을 마주 잡았다. 중앙은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파란 하늘, 적당한 구름에 적당하게 따스한 햇빛. 솔솔 부는 바람에 B가 열심히 설명한 꽃의 향기와 익숙하고도 낯선 향이 코를 스쳤다.
기뻐하고 있어. 오메가는 그 향만으로도 알파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그를 알아챈 순간부터 맨손 사이를 막고 있는 얇은 장갑이 거슬렸다. 언젠가 이런 것 없이도 스스럼 없이 손잡을 날이 올까. 결혼할 사이니까, 어쩌면 그보다도 더한 것들도 해야 할 텐데. R가 가만히 엄지로 손을 문질러왔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마주 잡은 손을 보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이리도 좋은 거였나. 이 장갑 아래는 어떨까?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례하게 요구하는 것보다 직접 탐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R가 잡은 손을 들어 입술로 가져가자 B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피곤할 텐데! 어서 쉬어야지.”
“나 마차 안에 며칠 동안이나 구겨져 있었는데.”
R가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B는 당장 그를 손님방 안으로 몰아낼 기세였다.
“그러니까 더 쉬어야겠네. 곧 저녁 만찬도 있으니까 그때까지 좀 자.”
“지금 자면, 밤에 놀아줄 거야?”
그리 묻는 R의 어떤 의도가 다분해 보여서 B가 빨개진 얼굴을 감싼 채 소리를 빽 질렀다.
“소공작!”
“공녀님께서 이상한 거라도 상상했나 봅니다? 밤에는 잠이 안 와서 심심할 거란 뜻이었는데.”
아…. 그때 일을 생각하자니 B는 다시 열이 오를 것 같았다. 당황한 저를 두고 R가 어찌나 웃던지. 이제는 곧 성인이 될 그였다. 성인이 되자마자 작위 승계가 이루어질 테고, 그다음에는 결혼이 있었다. 결혼. 가까우면서도 여전히 먼 개념이었다. 그때쯤엔 작위까지 물려받은 R가 오메가 첩을 여럿 들인다고 해도 B가 말릴 방법이 없었다. 거의 저택에서만 살아온 저와 달리 R는 전투든 외교든 많은 곳을 가보고 오메가도 많이 봤을 텐데. 날이 갈수록 올라가는 북부의 위상에 제국의 유력가라면 누구든지 B와의 약혼을 알면서도 떠보듯 제 집안의 오메가들을 밀어 넣을 게 뻔했다. 그 모든 청을 거절하면서 R가 저만 바라볼 확률은?
“하….”
머리가 복잡해지니 생각나는 건 R의 페로몬이었다. 성년에 가까워졌으니 더 달콤하고 매력적일 향기를 맡고 싶었다.
“미쳤구나. B.”
B는 괜히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억지에 의해 결혼하는 입장에서 왜 이런 것을 신경 쓰게 되는 걸까. 마찬가지로 억지로 교류하는 귀족가 자제들과 티타임을 가질 때는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빌면서, 왜 R와 만나는 날엔 이토록 기분이 들뜨는 것일까.
어릴 때는 오메가로 태어난 것에 대한 환멸과 우울감으로 살아갔다. 하지만 R의 올곧은 시선이 생각을 바꾸게 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얌전히 따르는 것보단 요란스럽게 해내겠다. 오메가라서 알파에게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메가로서 주체적으로 선택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R는 제가 선택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B는 생긋 미소 지으며 R가 좋아했던 차를 홀짝였다. 결혼 준비로 바쁜 나날에 얻는 간만의 휴식을 깨놓은 것은 오라비의 쿵쿵대는 발소리였다.
“B! B 안에 있나?”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는 숨을 할딱거리다 B의 찻잔을 비웠다. 이게 뭔 추태인가 싶어 B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시정잡배처럼 굴어요?”
“대공가에서 파혼을 요구했어! 어처구니가 없어선.”
“…뭐라고?”
“최근 다른 나라를 복속시키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큰 광산을 발견했을 때도 불안불안 했다만 아무 말 않길래 괜찮은 줄 알았더니… 역시 북부 놈들은 간사해. 무뚝뚝해 보여선 누구보다 야비한 여우 같은 놈들이라니까. 감히 황제 폐하가 맺어주신 인연을 거절하고 황실의 핏줄을 요구해? 오라비가 그 후로도 무어라 천박한 욕들을 쏟아냈지만 B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대공가에서의 파혼 요구. 안 그래도 이번 전쟁에서 R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들었다. 나이가 차지 않아 승계식을 못 치렀을 뿐이지 이젠 R가 북부의 실권자나 다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약혼을 깼다는 것은…….
“역시… 너도 똑같은 알파였어.”
“아버지께선 지금 폐하를 알현하러 가셨어. 북부로는 동생이 가는 중이고. 하… 이번에 대공이 정말 황실과 혼인한다고 하면 너는 근처 왕국의 왕자랑 결혼해야 하는데….”
그래. 오메가의 취급이란 공작의 자식이라 해도 고작 이 정도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영광스러운 가문. 이는 가문의 알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오메가인 저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일이었다. 왜 여태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오메가는 결혼으로 다른 가문에 종속될 뿐인데. 고작 그 정도인데. 왜 R만은 다르다고 생각해서, 저 또한 달라지고자 했나? 왜 R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자고 노력했는가?
“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물어봐?”
“뭐?”
“내 인생이잖아! 내가 결혼하는 거고, 파혼당한 거라고! 왜 자기들끼리 멋대로 정하는 건데!!”
그날 B는 도망쳤다. 저택에서 도망친다고 해봤자 제가 입고 있는 옷이나 마차를 탈 때 쓴 돈, 그리고 도망쳐서 도착한 별장마저 가문의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아가씨의 방문에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의 표정은 혼란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B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널찍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제 결혼은 다 끝이야.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거야….”
편지에 적힌 말들도, 장신구를 보낸 것도, 손등에 키스했던 것도 다 거짓말이었던 거지. R. 너도 결국 권력이 우선인 알파일 뿐이잖아. 패배자가 된 걸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 울지 않으려 했는데 그간 주고받았던 것들을 떠올리니 울컥 눈물이 솟는 B였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제 가족들에게 소식이 들어갔을 게 뻔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왕국으로 보낼 때까지 몸 상한 곳 없어야 하니까 괜히 자극하지 말자는 심산이겠지. 그걸 깨닫고는 B는 자신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반항했다. 식사도 거른 채 계속 잠만 자다가, 일어나 과일 몇 조각 집어먹는 것이 다였다. 그마저도 과일 향에서 R의 페로몬을 떠올리고 나서는 입에 대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살면 멀고 먼 북부에 있는 그에게도 제 원망이 닿을 수 있을까. 보고 싶을 때도 닿지 못하는 사람인데 가당키나 할까. 미운데, 좋고. 정말 미운데, 그래도 한 번 보고 싶고. 권력을 탐하겠다든지, 다른 오메가를 품겠다 하든지, 마음이 찢기는 한이 있어도 면전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훌쩍이다 다시 잠이 들 무렵에 하녀의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 아가씨. 손님이 왔는데요.”
슬슬 돌아갈 때인가 보다. 저택에 돌아가면 저는 선물처럼 곱게 포장되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국으로 보내질 것이다. 모든 것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B는 손님 맞이할 채비를 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때 창밖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공녀님!”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문 앞에 있는 하녀의 목소리보다도 또렷하게 박혔다. B는 방문을 벌컥 열고 현관을 향해 달렸다. 얇은 잠옷만 걸친 B를 보고 하인들은 급히 눈을 돌리고 하녀들은 이거라도 걸치라며 옷을 들고 따라왔지만 그는 기어이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말 한 필 앞에 서 있는 R는 답지 않게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땀에 절어있었고 제복엔 구김이 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조소가 흘러나왔다. 가족인 오라비보다 저를 먼저 찾는 것이 R라니. 며칠간 저를 그토록 괴롭히던 사람. 하지만 직접 보니 안심되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것보다 턱선이 날렵해져 있었고 원래도 날카로웠던 눈매는 더 짙어져 있었다. 키는 또 커서 이젠 제가 올려다봐야 했다. R가 B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B는 하녀들에게 물러가라 명하고 가만히 있었다. 저를 보고 있지는 않지만 찌릿찌릿한 시선 앞에서 R가 겨우 말을 내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파혼은 가문에서 억지로 밀어붙인 말입니다. 제 의사와는 전혀 달라요. 작위 계승식을 치르면 대대적으로 결혼을 공표할 예정이었습니다.”
멀리 있을 줄만 알았던 R가 바로 앞에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디디면 몸끼리 맞물릴 위치에서 R가 장갑을 벗고 B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러니까 나 좀 봐주라 B. 응?”
B는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보이는 모습이었다. 눈 밑에 눈물 자국이 보여서 R는 그를 따라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슬프게 해서 미안해.”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한 일들이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 알았더라면 조금만 덜 유능할걸. R는 B가 저를 봐줄 때까지 정성스레 뺨에 입 맞췄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몸은 벌벌 떨리고 입술은 말라 있었지만 장갑을 벗은 손은 이토록 따뜻했다. 영겁 같았던 시간이 흐르고 B가 입을 뗐다.
“내가…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석류알 같은 눈을 마주하고 R는 순간 공기가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북부에서도 특히 추운 곳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기라도 한 것처럼 몸 안으로 스민 한기가 모든 동작을 멈추게 했다. 항상 속내를 감추기만 했던 B가 직접 감정을 전해왔다. 맡은 공기는 차가운데 몸은 뜨거웠다. 금방이라도 숨을 뱉어내면 심장까지 뱉어버릴 것만 같았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가 답답해 보여서, B는 R의 단추를 두어개 풀었다. 동시에 R가 점점 가까워졌다.
“닿아도, 돼?”
입술을 달싹이는 것만으로도 닿을 거리에서 그가 물었다. B는 대답하는 대신 까치발을 들며 R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보드라운 입술이 맞물리고 R의 손이 B의 허리를 감쌌다. 저런 여린 손으로 검은 어떻게 잡는 걸까. 예전에 찻잔을 잡은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끔 R가 단단하게 붙들어왔다. 입술을 겹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숨소리가 선명해졌다. R는 B의 입술을 깊게 빨아들였다가 혀를 집어넣었다. 자극받는 곳은 입술과 입안일 뿐인데 귀가 뜨거워지는 이유는 무얼까. 왜 아랫배가 간질거리고 발가락을 가만 둘 수 없어지는 걸까. 가까이 붙은 몸 위로 느껴지는 봉긋한 가슴이, 자꾸 배에 닿는 단단한 그것이 저를 그리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혀가 부딪칠 때마다 아찔할 만큼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그리운 향기. R의 페로몬이었다. 장성하여 더 짙어진 페로몬은 어릴 때는 가벼운 느낌이 있었다면 이제는 저를 기분 좋은 압력으로 눌러오고 있었다. 심장은 분명 가슴께에 있을 텐데 온몸에서 숨겨진 맥이 팔딱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아….”
잠시 떨어진 사이 짙은 한숨이 새어 나오자 R는 눈을 내리깔고 B의 안색을 살폈다. 싫어하는 걸까? B는 처음 봤을 때부터 예측 불가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어려서 예쁜 언니를 앞에 두고 있자니 처음 보는 사이에도 말을 놓자거나 하면서 달려드느라 추태만 보였다면, 지금은 성인인데도 여전히 허리에 작은 칼을 차고 다니던 꼬맹이인 것만 같았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이웃 나라를 정복하고 정치 문제를 해결해왔는데, 다 쓸모 없어지는 것 같았다.
“R야.”
“응?”
“나… 뜨거워.”
갑자기 왜 이렇게 덥지. B가 중얼거리자 R는 근처에 무겁게 가라앉은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물을 닮은 시원한 냄새가 제 페로몬 위를 덮고 있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붉은 눈이 기분 좋게 풀어졌다. 순간 주춤거리며 뒷걸음친 R에게 B가 몸을 붙여왔다. 한여름이 생각나는 향을 가지고서 북부에 사는 사람. 자꾸만, 자꾸만 그 향이 생각나서 그런지 제 체온도 여름처럼 열 오른 것만 같았다. 점점 짙어지는 페로몬에 R가 몸을 떨었다. 히트 사이클인가? 그간 제가 알파란 이유로 어릴 때부터 침상에 몰래 들여보내진 오메가가 몇이었는지. 그래서 이제 페로몬이라면 질색이었는데, 이상하게도 B의 것은 자꾸 맡고 싶어졌다. 꽉 끌어안은 채로 다시금 입을 겹쳤다. 혀 사이에서 물소리가 부서졌다. R는 B의 옷 위를 거칠게 더듬었다. 얇은 잠옷은 몸의 곡선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R의 손이 닿을 때마다 B는 불에 덴 것처럼 움찔거렸다. 하으, 으음. 응…. 같은 온도가 된 살덩이끼리 문질러지는 느낌이 부드러웠다. 팽팽해진 아랫도리가 자꾸 이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왜 그래 R….”
B의 손가락이 제 미간을 살살 문지르자 그제야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너무 좋아서. 처음 본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어지게 좋아서. 종종 주고받은 서신에서 보이는 B는 자존감이 낮았다. 공작가에서만 지내서 할 줄 아는 게 없다, 같은 집안에 같은 신분으로 살면서 오빠들은 저에게 가문과 관련된 일들은 말해주지 않는다. 처음엔 낯가리느라 상투적인 문구로 절반을 채운 편지 한 장을 보내왔다면 나중엔 편지 봉투가 용케 찢어지지 않았다 싶을 정도로 두꺼워져 왔었지. R는 그를 글자가 바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이 사람이 곧 제 사람이 된다. B와 함께 살아가게 될 북부를 그간 얼마나 열심히 청소했던가? 주위의 위협은 없애버렸고, 가문에서는 제 위치를 공고히 했다. R 자신이 이뤄낸 것을 가문이 이룬 것이라 착각한 멍청이 하나가 황실과의 혼인을 입에 올려버렸다만. 아무튼 겨우 억누르고 있는 욕구를 B는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페로몬의 농간으로 잔뜩 달아오른 몸으로, 숨을 몰아쉬면서 제 표정을 면밀히 살피기나 하다니. 적국을 정복하면서도 느낀 적 없던 욕망이 꿈틀거렸다. 나의 오메가.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되리라.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맺어진 당신을 감히 연인이라 생각해도 되는 걸까?
“읏….”
R의 입술이 B의 목덜미에 닿았다. 급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차림으로 밖에 나오다니… 새하얀 살결을 입술을 덮어 가렸다. 이대로 깨물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혼인 전에 멋대로 각인을 남기는 것은 배우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지만, 그래서 뭐? 이젠 황제조차도 제 눈치를 봤다. B의 가문에서 안 좋은 말이 나올 수는 있었으나 황실과의 혼인 얘기는 없어지는 것이니 내색하지 않고 좋아할 게 뻔했다. 그럼에도 R가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이유는… B가 싫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아.”
입술이 어깨선을 더듬을 때마다 끓어올랐던 열이 시원하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묘한 쾌락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이대로 물어줬으면 좋겠다. 제 것이라는 확신을 줬으면 좋겠다. 그런 제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 R는 감질나도록 부드럽게 입술을 떨어뜨리고 살을 빨아들였다.
“R야.”
간지러워진 말투에 R가 이례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B를 바라보았다. B는 제 목덜미를 덮고 있는 금색 머리칼을 모아 반대쪽으로 치웠다. 올려다보는 눈은 여전히 열락에 잠겨 있었다. R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물어줘.”
어차피 혼인 후에 하게 될 거였다. 하지만 B는 지금 당장 R의 마음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었다. 어차피 할 거라면 미리 해도 되는 거잖아. 이 나라에서 혼전 각인을 했다고 R에게 뭐라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B는 지금 히트 사이클이 터진 상태였다. 본능대로 행동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중에 B가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결혼식 때 하는 게….”
“어차피 할 거잖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B가 덧붙였다.
“난 불안하단 말이야.”
알파는 언제든 오메가를 버릴 수 있으니까. 설령 그게 어릴 적부터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해도. 대공이 바로 며칠 전에 혼인을 파하려 했듯이, 제 오라비와 아버지가 의사도 묻지 않고 혼인 시키려 했듯이. 스스로 잡을 수 없는 미래가 불안했다. B가 왈칵 눈물을 흘리자 R가 크게 당황했다.
“우, 울어?”
“몰라….”
“왜 그래. 울지마 언니. 내가 잘못했어.”
R가 조심스레 B의 뺨을 잡고 눈가에 입을 맞췄다. 흘러나오는 모든 물방울을 입술로 덮어버릴 것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자상하게. 촉촉해진 입술이 잘게 소리 내며 떨어졌다가 다시 붙기를 반복했다. R의 품에서 흐느낌을 가라앉힌 B가 R를 올려다보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럼 해줄 거야?”
“여기는 너무 춥다.”
R는 그 시선을 피하려 재킷을 B에게 둘렀다. 하나도 안 추운데. 너 때문에 더워 죽겠는데. 그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B는 스치듯이 보았다. 약간 달아올라 있는 R의 귀 끝을.
“얼른 들어가자.”
B는 다행히 순순히 저를 따라왔다. 따라오다 못해 저를 앞질러 걸어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B가 재킷 앞을 잡은 채로 저를 돌아보았다. 중앙에 왔을 때 먹은 과일 중에 B의 눈을 닮은 것이 있었다. 그를 보며 하염없이 그리워했던 B의 눈빛이 이제는 똑바로 저를 향하고 있었다. R는 그 안에서 타오르는 소유욕을 보았다.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은 말이 있었다. 알파는 오메가를 다스리는 게 능력이고, 오메가는 알파의 소유물이라고.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B를 보면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 같다. B같은 오메가에게 감기지 않을 알파가 과연 존재할까? 일단 자신은 이미 빠져들었다.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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