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고양이
"우리는 서로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공유하던 때가 있었는데."
눈을 뜨기도 전에 속절없이 쏟아지는 우성이 귓전을 때렸다.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지만 짜증스레 느껴지진 않았다. 외출할 필요가 없는 날의 장대비는 마냥 감성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흐린 눈가를 부비며 거실로 나오자, 전등도 켜지 않아 컴컴한 가운데 그의 실루엣이 뚜렷이 보였다. 그나마 흰빛이 뿌옇게 스며드는 창가 테이블에 자릴 잡고 앉아 있었다. 한 손에 책을 쥔 채 읽지는 않고 있다.
여느 휴일과 다름없이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누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고요한 풍경을 보아하니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는 늘 정해진 시각에 시키지도 않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아직 오전 6시도 되지 않았다.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슬쩍 눈으로 훑었다. '검은 고양이'.
최근 그는 독서에 취미를 붙였다. 활자 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늘상 글자가 적힌 것을 주변에 두었는데, 책이 없다면 심지어 빈 통조림 표지에 적힌 길어야 다섯 줄의 문구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다.
"다 읽었어?"
아침 인사 겸 버릇처럼 물었다. 갑자기 말을 걸어도 놀라지 않았다. 아마 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나와 책을 한 번씩 번갈아보곤 '검은 고양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래."
"어땠어?"
잭은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잠시가 아니라 꽤 오래였다. 나는 서 있는 것에 지루함을 느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선의 높이가 균등해지자 잭이 기다렸단 듯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럴 때마다 기묘한 의문을 느껴."
"의문?"
"왜 네가 나에게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지."
모호한 문장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해 눈만 꿈뻑였다. 잭은 또다시 오랫동안 내 눈을 직시했다.
"우리는 서로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공유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말뜻을 이해해도 그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아니."
"내가 널 알고 싶어 하는 게 부담스러워?"
"아니야."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아니."
내가 웃었다. 그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꼭 사춘기를 겪고 있는 십 대 소년 같았다.
"그렇다면 말해 봐, 친구. 책 이야기 정돈 소일거리도 안 되잖아."
표지에 인쇄된 애꾸눈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장난감처럼 유흥을 위해 주워진 고양이지."
"가엾게도. 눈까지 도려내지잖아."
"산 채로 시체와 함께 가둬지고."
"배가 많이 고팠을 거야. 죽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지."
"다행인가?"
"…응?"
"은폐된 범죄의 산 증거가 됐는데도?"
"그 점이 더 다행인 거 아냐?"
잭이 자신의 왼쪽 눈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다행인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단번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잭."
때마침 천둥이 천지를 울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닿지 않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뇌성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네 개의 유리로 이루어진 창문이 여러 번 번쩍였다. 음영이 그의 얼굴을 짙게 드리웠다가 환하게 밝히길 되풀이했다.
시커먼 어둠일 때도 눈빛만은 형형했다. 아마 내 눈동자는 저렇게까지 빛나지 못할 것이다.
침묵이 길었다.
천둥이 잠시 멎었다.
"넌 검은 고양이가 아니야. 난 널 찾아낸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클리브. 결론을 내기에는 아직 일러."
"너에겐 너만의 인생이 있다고."
"그만."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도 알아."
다시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잭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지척에 있는데도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한 음성이 무겁게 늘어졌다.
"하지만 … … … 나만의 몫이 아니야."
도중에 몇 단어가 낮게 가라앉아 나에게로 닿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만으로도 무엇을 전하려는지 이해가 되었다. 어떤 말들은 그렇다. 결락된 채로도 이미 단락에 온점이 찍힌 소설같이 명료했다.
"넌 후회하게 될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들리네."
잠깐의 간격을 두고 잭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 고심 끝에 바야흐로 해답을 찾아낸 학자처럼. 때마침 창문에 빛이 가득 찼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어?"
"비가 와서."
"웃기시네."
"식사나 들지."
"갑자기?"
"아침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야."
언젠가 잠에 취했던 때에 아무렇게나 뱉었던 말을 쌩뚱맞게 인용했다.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다.
잭이 일어서 부엌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검은 고양이'를 집었다. 습기 때문인지 종이가 눅눅했다.
더 눅진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책장 가장 구석진 자리에 쑤셔 박아두는 게 좋겠다. 그 김에 범죄 소설 같은 것도 싹 정리해버려야지.
가장 밑 칸에 책을 꽂으려다, 어쩐지 엄지에 걸리는 표지가 거칠한 느낌을 받았다. 도로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니 검은 고양이의 애꾸눈에 가느다란 흠집이 여럿 새겨져 있었다.
손톱자국 같았다.
- 카테고리
- #2차창작
이해(異海)
파랑이 일었다. 바다는 늘 그렇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또 흘려보낸다.
Apples and oranges
밤이 깊어 창문에 탁탁 몸을 부딪혀 오는 날벌레 소리만이 타이핑음과 함께 우스운 합주처럼 반복되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