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les and oranges

밤이 깊어 창문에 탁탁 몸을 부딪혀 오는 날벌레 소리만이 타이핑음과 함께 우스운 합주처럼 반복되었다.

클로 by 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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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청년이 늙은 청과점 주인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품 안에는 서비스로 한 개의 사과가 더해진 봉투가 들려 있었다.

거리 대부분의 점원은 인심이 좋았다. 정확히는 클리브에게 그랬다. 성격이 명랑하고 말재간이 좋아, 몇십 년째 가게를 지켜 잔뼈가 굵은 상인들조차 어김없이 정이 뚝뚝 묻어나는 웃음으로 그를 맞이하고 또 배웅하곤 했다. 그리고 받아 마땅한 호의는 같은 얼굴을 가진 잭에게도 당연스레 나누어졌다.

 

"그런데 클리브 씨, 늘 이 시간에는 마감이니 뭐니 바쁘지 않았던가?"

 

노인이 과일 봉투 위에 사과를 하나 더 올려두며 말했다. 넘쳐나서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으나 잭은 한 팔로도 솜씨 좋게 균형을 잡았다. 클리브여도 그랬을 것이다. 

 

"들켰나요? 저희 편집장님에겐 비밀입니다."

 

잭이 여상스레 웃으며 농담조의 말과 함께 돌아섰다. 등 뒤에서 기분 좋은 호탕한 웃음소리가 선선한 바람에 실려 왔다.

불그스름한 하늘이 드물게도 맑다. 구름은 희게만 흘러가고, 자그마한 낮달이 고요히 런던 시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클리브는 '어두워지기 전까진 저녁이 아니다'같은 궤변을 펼치며 어떻게든 데드라인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겠지. 그러므로 저녁 장 보기 같은 잡다한 일은 잭의 몫이다.

처음에는 그가 혼자서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가도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던 클리브였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은 부려먹는 데에 도가 터 툭하면 심부름을 시키기 일쑤였다. 특히 지금처럼 본업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에는.

 

타인에게, 특히 클리브와 가까운 이들에겐 잭의 존재를 납득시킬 길이 없기에 아직까진 그렇게만 남들에게 모습을 보였다. 그의 대신으로서. 나쁘진 않았지만 좋지만도 않았다. 아주 떨어져 살면 괜찮겠지만 잭은 그럴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서로에게 좋은 방도를 마련해줄 것이라 믿고, 그는 모호한 비밀로써만 존재했다.

막연한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문간으로 다가가던 잭은 가구가 쓰러지는 소리와 누군가의 고함을 들었다. 그는 한 치의 질겁도, 망설임도 없이 들고 있던 봉투를 벽에 기대어 둔 채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처음 보는 남자와 클리브가 바닥에 얽혀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클리브는 싸움을 잘하는 편이었으나, 남자의 체구가 너무 커 언뜻 불리해 보였다. 잭은 당장 그들에게 다가가 남자의 머리를 사정 없이 구둣발로 걷어찼다. 돼지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발밑에서 새어 나왔다. 듣기에 좋지 않아 굽으로 목젖 부근을 밟았다. 무게를 싣기 일보 직전에, 이번에는 클리브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잭, 안 돼!"

 

잭은 잠깐 멈칫하더니, 위치를 바꿔 아래턱을 가격했다. “아악!” 분명 맞은 것은 정체 모를 남자인데 어째선지 클리브가 또 비명을 질렀다.

 

"걱정 마. 죽지 않았어."

"그, 그래?"

 

한 층 풀어진 표정의 그가 옷을 털어내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잭은 어이가 없어 눈을 홉떴다. ‘방금까지 멱살이 잡혀 있었으면서 무뢰배의 무사에 안도하다니.’

 

"어떻게 된 일이야?"

 

밭은 숨을 내쉬고 이마를 짚은 클리브가 까무룩 기절한 남자를 골치 아픈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심히 그의 모습을 살핀 잭은 크게 다친 곳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운 좋게 돌아온 모양이었다. 뺨에 작은 생채기가 한두 개 생겼을 뿐이다. 잭이 가볍게 혀를 찼다. 얼굴에 구별이 생기면 곤란했다. 당분간 클리브 대신 외출하는 일은 불가능할 테다.

잠시간의 침묵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킨 클리브가 뒤늦게 설명하길, 생전 초면인 이 남자가 돌연 찾아와 지독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능력 사용을 요구했다고 한다.

사이코메트리스트 기자 클리브 스테플의 이름은 꽤나 유명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러한 종류의 곤란을 여러 번 겪어 온 클리브는 정중한 태도로 거절했지만, 상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하니 어제부터 실종된 아내의 행적을 찾아야 한다며, 경찰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더라. “기자가 경찰보다 믿음직할 줄은 몰랐네.” 클리브가 자조적으로 투털댔지만 잭은 진지하게 답했다. “아주 틀린 관점은 아니지.”

하여간 주정뱅이의 주장에 납득하지 못한 클리브는 계속해서 돌아가길 권했고, 결국 흥분한 남자가 다짜고짜 덤벼들어 몸싸움으로 번졌다. 일련의 과정을 들은 잭은 의문이 남은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요구를 듣지 않았지?"

"뭐?"

"넌 오지랖이 넓잖아."

"그렇……그런가? 딱히 그런 편은 아닌데."

잭이 보기엔 충분히 그랬다. 자신의 존재가 가장 큰 근거다.

 

"아무튼 그런 전제를 두고 말하자면, 이 경우에 내가 도운 건 그 이름 모를 부인이야."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운 잭이 클리브를 앉히곤 계속하라는 눈빛으로 팔짱을 꼈다.

 

"말은 실종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도주일걸. 날도 밝은데, 늦은 오후부터 술이나 퍼마시고 쏘다니는 남자가 배우자를 어떻게 대했을진 눈에 선하잖아."

 

“심지어 초면인 나에게 냅다 주먹을 갈긴 걸로 증명됐지.” 클리브가 어깨를 으쓱였다. 잭이 남자를 한 대 더 패려하자 급하게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경찰은 말이 안 통한다'라고 말한 게 결정적이야. 요즘 같은 때에 실종 사건을 가볍게 다룰 리가 없어. 내가 쓴 관련 기사만 해도 몇 건인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지. 신고자 본인이 소문난 개자식일 경우."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클리브가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쭈그려 앉아 눈을 감고 소맷자락을 붙잡더니, 잠시 후 갑자기 남자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그만하라더니, 셜록 씨."

"이 자식은 죽어도 싸, 왓슨."

"어떻게 할 거지? 이 자는 너와 내 얼굴을 모두 봤어."

"음……."

 

이번에는 클리브가 팔짱을 엮었다. 잭은 조용히 기다렸다.

 

"바깥에 대충 내다 버리면 되지 않을까?"

"오래 생각한 것치곤 대책 없군."

"어디서 얻어맞고 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행색이잖아. 술에 꼴아서 시비나 붙었다고 생각할걸. 한 방에 기절시켰으니 네 얼굴은 못 봤을 거야."

 

잭은 쓰러진 남자를 살폈다. 옷은 추레하고 냄새는 고약하다. 외상도 크지 않다. 확실히 경찰이 관심을 둘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음으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저녁이다. 순식간에 어둠이 골목마다 내려앉아 서늘했고, 고장 난 가로등이 천천히 점멸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처리하고 오지."

"그러면 고맙지. 난 청소나 좀 해야겠어."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곳곳에 마치 바닥재처럼 널린 종이 쪼가리와 엎어진 잉크병이 처참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그전에 마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헉. 숨을 들이킴과 동시에 클리브가 바람같이 의자를 끌고 책상 앞으로 이동했다. 이럴 때는 누구보다 민첩하다.

 

"청소는 나한테 맡기고, 넌 네 할 일을 해."

"어어, 그래. 매번 감사!"

 

클리브는 이제 가림막이라도 세워진 듯 이쪽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길어지는 그림자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잭은, 이내 구석에 널브러진 남자를 가뿐히 들쳐매고 집을 나섰다.

원고가 완성된 것은 약 세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밤이 깊어 창문에 탁탁 몸을 부딪혀 오는 날벌레 소리만이 타이핑음과 함께 우스운 합주처럼 반복되었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쳤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한 클리브 스테플은, 마지막으로 상쾌하게 검지를 세워 타자기의 온점을 두드렸다.

 

"끝났나?"

"우와, 깜짝이야!"

 

뒤에서 갑자기 말 거는 것 좀 그만하라니까, 잭! 클리브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닭살이 오소소 돋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대체 언제 왔어?"

"한참 전에. 인사도 했어. 받아줬고."

"어, 그랬나? 정신이 팔려 있었나 봐."

 

마감을 끝낸 기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청소와 정리도 전부 끝마친 상태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바닥에 남은 잉크 자국만이 몇 시간 전 일의 증명이 되어 주었는데, 그나마도 다른 자욱에 섞여 곧 범상해졌다.

 

"배고플 텐데, 식사부터 해."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지. 오늘 메뉴는 뭐야, 신참!"

"애플파이와 치즈."

 

야근에 찌든 노동자의 그늘진 얼굴이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넌 진짜 소질이 있다니까!"

 

그는 신이 난 채 괜시리 부엌으로 달려가 잭이 사온 재료들을 뒤적였다. 빵, 치즈, 햄, 오이, 사과……사과? 

클리브는 봉투 안에 담긴 한 개의 사과를 꺼내 손으로 굴렸다. 어째서 한 개지? 세 개를 사면 다섯 개를 내어주는 동네 과일 가게의 인심은 어제오늘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가 직접 가든 잭이 대신하든 개수는 언제나, 변함 없이 다섯 개였다.

세 개는 파이에 쓰였고, 그렇다면 나머지 한 개는?

 

"잭, 사과는 이게 다야?"

 

접시와 식기를 준비하던 잭이 흘긋 바라보곤 다시 눈길을 돌렸다.

 

"하나는 오는 길에 먹었어."

 

클리브가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너한테도 그런 융통성이 있었다니!"

 

장난스레 웃곤 다시 들고 있던 사과를 봉투 안에 넣어두었다. 

 

"그 남자는 잘 두고 왔어?"

"그래. 그다지 깊지 않은 뒷골목에 두었으니 날이 밝으면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겠지. 술이 깬다면 말이야."

 

잘 되었다. ‘원만하게, 음. 아무튼 크게 번지지 않은 채 해결했어.‘ 게다가 눈앞에는 고소한 단내를 풍기는 파이와 따끈한 체더 치즈가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묘했다. 뭔가 놓친 느낌이 들었다. 단추가 어긋난 셔츠에 몸을 억지로 끼워 넣는 듯한 불편함이 그를 사로잡았다.

잭이 멍하니 서 있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클리브?"

"아무것도 아냐. 먹자."

 

그날의 파이는 평소와 같이 엄청나게 맛있었고, 평소와 달리 자주 목이 메여 몇 번이고 우유를 들이켜야만 했다. 클리브 자신도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알 수가 없어 뜬 눈으로 밤을 지세웠다. 원래부터 잠들지 않는 잭도 함께.

그러나 둘은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그 어떤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이클립스 사는 질식사 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제보를 받았다. 클리브 스테플이 사원증을 한 손으로 둘러매고 부리나케 달려가자, 뜻밖에도 자택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임을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시신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 남자다. 목 안까지 가득 조각난 사과를 욱여넣은 채, 숨을 쉬지 못하고 도리 없이 사망했다고 한다.

 

수사는 일사천리로 끝났다. 남자는 날마다 다른 골목에서 곯아떨어진 채 발견될 정도로 근방에서 유명한 술꾼이었고, 마침 오늘의 그가 누워있던 곳은 음식물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경찰과 구경꾼 모두 '언젠가 저럴 줄 알았다'고 입을 모았다. 술에 취한 채 아무거나 집어먹다 목에 걸린 거겠지. 망나니처럼 살더니 업보가 돌아왔다. 등등. 벌떼처럼 모여 떠들던 군중들은,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흥미가 가셨는지 약속이라도 한 듯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클리브는 그때까지도 어제보다 더 강한, 거의 폭력적인 기시감에 사로잡혀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영 쓰지 못할 사진만 기계처럼 찍어내다 무리에 섞여 등을 돌렸다. 회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아무리 달려도 그림자가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새카만 형체가 점점 몸을 부풀려 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와 같은 실루엣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고, 기다랬다.

 

누구도 쫓아오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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