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으로 펼쳐진 삶의 이야기, 윤나리라는 ‘여정’
가상의 ‘배우론’ -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나 영화에 대한 평론/에세이를 씁니다.
“연예인이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언젠가 실수라는 걸 깨닫고 시골로 내려가지 않을까요?”
인터뷰에서 윤나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다소의 겸양과 감사에 대한 비유적인 문장이 아니라, 그에 대해 기록한 인터뷰에 번번이 적혀 있는 더 없이 진심에 가까운 문장이다. 극적인 마스크도 대단한 연기론도 없이 로맨스 코미디 한 작품으로 일약 청춘 스타가 되었던 이 배우는, 이제는 어느 정도의 경력에 접어드는 7년차의 인터뷰에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니 배우 윤나리의 진심을 짐작할 방법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매번 비슷한 구절로 이어지지만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우리에게 있어 배우로서의 그 얼굴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무언가로 자리매김해서가 아닐까. 문득, 이 배우의 ‘명랑소녀’에 가까운 필모그래피를 뜯어보아야겠다는 기획이 떠오른 건 그 쯤이었다.
근처의 사랑
듣지 않을 독백
배우로서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청순파 아이돌로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던 이력을 훑지 않을 수 없다. 윤나리의 걸그룹으로서의 활동 이력이 실패에 가까웠다고는 말할 수 없다. 국내에서 아이돌이 3세대에서 4세대로 갈리기 시작한다는 평이 나오기 이전, 대형 기획사를 등에 업고 7인조로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룹은 인기를 끌었고, 여전히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연예계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윤나리라는 개인을 ‘아이돌’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때의 그는 예능에 나와 재미 있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거나(그러나 어디까지나 아이돌로서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만), 무대에서 거의 몸이 부서져라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서서 열창하는 이른 바 ‘고음 셔틀’을 담당하는 이미지로 굳어져 있었으니까. 본격적인 존재감의 시작은 어디까지나 TV와 극장에서였다.
처음으로 윤나리라는 배우가 대중의 눈에 띈 것은 미니 시리즈 〈얼마든지 웰컴〉에서부터였다. 작은 방송사에서 시작한 만큼 처음부터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았고, 각본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정확하게 맞물려 떨어졌다. 윤나리는 그 극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잔잔한 화제를 모았다. 특이한 것은, 그가 연기한 작품의 클립이나 소위 ‘짤방’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꽤나 화제가 되는 아이돌의 입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가 조각난 영상으로서 화제를 모을 때는 언젠가 상대 배우에게 이목이 쏠려 있는 순간의 장면이었다. 찬사는 일방적이었고, 한 순간도 그의 명패를 눈에 띄게 빛내준 적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윤나리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자질을 정확하게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고정된 ‘나’가
없을 때의 체험
〈다음 시간에〉의 정여름은 얼핏 보았을 때 〈얼마든지 웰컴〉에서 만들어진 안전하고도 따뜻한 이미지를 답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나만 속아 넘어간 함정이 아니라, 모두가 한 번쯤 발이 빠진 적 있는 간극이리라.
극 중에서의 여름은 소탈하고 언제나 긴장하며, 한숨을 자주 쉬는 만큼 웃기도 자주 웃는 캐릭터다. 다만 기존의 윤나리가 출연한 배역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드라마가 받는 혹평에 있다. 멜로 드라마 〈다음 시간에〉는 사람에 따라 ‘역대급 용두사미’ 혹은 ‘삶을 현실적으로 담아낸 드라마’라는 극단적으로 양분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인공인 정여름이 있다. 여름은 잘 웃고 잘 운다. 으레 다른 드라마에서 모범적인 여성 주인공들이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으면서도 성공적으로 삼켜낼 때, 기꺼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주저앉고 상대한테 매달리고 나쁜 연애를 시작한다. 좋은 사람으로서 편을 들어줄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한테 막무가내로 위로를 요청하다가도 속이 상하면 그대로 되돌아나오고, 속을 문드러지게 하다가도 나중에 조용히 되돌아와 반성과 애정의 말들을 뚝뚝 떨어뜨리고 간다. 시청자들은 전부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리거나, 앓으면서도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평하는 사람도, 혹평하는 사람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하나 있다. 그것은 ‘나도 저런 친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윤나리라는 배우는 좀처럼 단독자로서 스크린에 호명되는 일이 없다. 그가 스크린에 있을 때는 거의 대부분 상대 배우가 있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혹은 군중 속에 섞여있든 그렇다. 드물게 혼자 있는 순간은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그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공간과 물건들이 그와 상호작용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장실의 비누나 세면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잉크 같은 것들이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오는 듯이 보이는 그는 좀처럼 홀로 되지 않는다.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친숙한 표정으로 곁에 머무른다. 관객들은 그 순간에 그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 또한 보고 있지 않다. 그는 셀로판지처럼 기꺼이 투명해져, 그 너머로 관객들의 기억에 접속한다. 손바닥을 맞댄 채 온기를 나누고, 조금의 편집을 가한다. 그 감상은 삶과 아주 가까이 접붙은 채로 남는다. 그는 그 순간 배우이지만, 누구보다도 수동적이고 조용해진다. 작가주의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가장 가까운 것은 ‘필름 그 자체’가 되는 배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믿는 연기, 그리고
믿게 하는 연기
고정된 이미지에 대한 극복은 많은 배우들이 빠지는 딜레마라고 하지만, 윤나리의 경우 그런 걱정이 거의 엿보이지 않았다. 배우로 활동하는 5년째까지도 익숙하게 헤실헤실 힘 빠진 웃는 표정으로 화면 안을 돌아다니던 그를 보고 어떤 평론가는 “받아들여지기 쉬운 단 껍데기에 몸을 맡기는 구태함이 저녁나절의 드라마에는 자주 드나들게 하나, 스크린에는 보이지 않는 이유”라고 평했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자신의 코멘트와 별점을 ‘과하게 못되게 말한 부분이 있었다’며 정정했다)
그런 일이 있었을 만큼, 배우 윤나리에 대한 대중들의 중간 평가는 과연 ‘모험하지 않는 여배우’였다. 여기에서 쓰인 ‘여배우’라는 단어는 본디의 의미와는 조금 동떨어진 채, 여성혐오적인 언사에 가까운, 희미하고 경솔한 멸시와 적대감을 담고 있었다. 무게감이 덜한 로맨틱 코미디와 어쩐지 본 구석이 있는 캐릭터들의 구성 반복은 대중들에게 ‘알 만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자주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망가지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아이돌 시절과 겹쳐보는 것에 한 몫을 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그 중 무엇도 대단하다, 압도적이다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커리어였다. 귀엽거나 사랑스러운 면은 있었으나 감탄하게 하지는 못하는 연기는 평가절하되었고, 그렇게 윤나리라는 배우는 30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대중들이 기대 없이 들렀던 순간, 모두는 영화 〈한밤 중의 주민〉과 마주했다.
놀랍도록 작가주의적인 감독의 차기작에 조연으로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 윤나리의 이름에, 모두가 회의감을 내비쳤다. 그로테스크와 고독감, 온도감이 떨어진 부박하고 흔들리는 밤의 풍경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상상했고, 러브 코미디를 주로 담당해온 배우가 그 영화의 한 켠에 낀다는 것을 다들 어색하게 보았다. 이 영화가 제목 그대로 ‘한밤’이라면, 윤나리라는 배우는 너무나도 ‘한낮’의 주민이 아닌가. 믿는 사람은 손에 꼽았고, 그 적은 사람들도 윤나리라는 배우를 믿기보다는 작가주의적 감독의 안목을 믿고 걸어보는 쪽에 더 가까웠으리라. 그러나 모두의 회의감을 보란 듯이 배신하고 그는 ‘셰리’로서 극적인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다.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날카로운 눈꼬리를 드러내더니, 높은 굽으로 또각또각 걸어나가는 고독의 뱀파이어. 씨니컬하고 당당하지만 결국에는 외로움과 미련에 무너지는 여자를, 윤나리는 조용한 침묵과 낮은 음성으로 그려내었다. (사람들이 과거의 이력 탓에 자주 잊는 사실이지만, 윤나리의 음역대는 부드러운 알토에 가깝다.)
쿠토 레오가 극에서 어디론가 떠날 듯이 있을 때, 그리고 프란츠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릴 때. 셰리는 언제나 주인공 세오 코우타와 함께 ‘남는 사람’의 역할을 연기한다. 레오와 코우타가 양지의 세계에서 작별 인사와 마지막 의식을 나눌 때, 셰리는 프란츠에게 원망과 독백을 쏟아낸다. 그가 떠나고 나서도 셰리는 화면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야 하고, 눈물도 표정도 아무것도 담지 않는다. 카메라는 발목 근처를 서성이다가,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는 여자의 발목을 한참 비추고는 사라진다. 언제나 버려지고 홀대당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배역으로서의 ‘셰리’를 완성했고, 이 강렬한 배역은 윤나리가 맡은 캐릭터 중 처음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에 있다”고.
어긋나지 않는 기대,
그러나 놀라운 미래
그 모든 여정을 전부 되짚고 나서 다시 돌아본다면, 윤나리의 필모그래피는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여자애’로 시작한 연기는 어느 샌가부터 ‘가장 보통의 존재’로 낙착했고, 이제는 어디에서든 믿음을 충분히 내걸 수 있을 법한 배우가 되었다. 뾰족하지도 않고, 카리스마도 없으며, 어디로든 섞여들 수 있을 법한 인상의 배우가 되었고, 그것은 이제 윤나리에게 ‘어디에서든 누구든 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여배우라는 단상으로 보았을 때 대단히 압도적인 미인도 아니고, 정갈하고 단단한 인상도 주지 못하지만, 모서리가 삐져나오고 차마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하는 그 인상이 배우로서의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이리라. 웃음이 환하고 눈에 띄지만, 어째선지 서슴없이 ‘보통 사람’이라고 해도 당연하게 믿어지는 그 인상이.
한창 나름대로의 격변을 겪던 필모그래피들을 뚫고 지나더니, 이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SF 판타지 8부작 드라마 〈언젠가 별이 될 이야기〉에 출연한다고 한다. 작은 우주선의 소박한 선장이 어머니의 유품을 찾기 위해, 위험 지대로 기꺼이 뛰어드는 내용이라고 한다. 사흘 뒤 드라마 시사회가 열린다. 내용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건만, 어쩐지 몇몇 장면들은 예상이 벌써 간다. 미래적으로 생긴 디자인의 난해한 우주선 조종간을 잡고 액션감 있게 조종하는 모습, 착륙이 아니라 ‘추락’이나 ‘사고’에 가깝게 펼쳐지는 기행에 가까운 운전, 그 모든 모험이 결국 ‘사람의 이야기’로 접어들 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려줄 사려 깊고 다정한 낯. 그 기대들은 분명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예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감독과 각본가의 힘도 있으나, 여전히 나는 윤나리라는 배우의 평범함이 큰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 평범함은 결코 우리를 압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 주인공은 먼저 앞서 달려나가는 따라잡아야 할 기수나 선봉장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나란히 뛰어나가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발견해내는 놀라움은 인물의 업적이나 그 궤적의 경이가 아님을 안다. 언제나 그가 발견해내는 것은 우리의 안에 모두 어느 정도는 들어 있는 ‘사람’과 ‘보편’의 좋은 점일 것이다. 특별해지려 들지 않고 기꺼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멋쩍게 웃을 때 발견해낼 수 있는, 그라는 배우의 ‘의미’에 나는 기꺼이 놀라고 싶다. 그저 사흘 뿐만 아니라, 온 삶을 다해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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