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편을 기꺼이 들어주는 여자

가상의 ‘배우론’ -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나 영화에 대한 평론/에세이를 씁니다.

유리 수조 by 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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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배우를 마주하게 되었던 것은 드라마 〈1미터, 그 너머〉에서의 한 장면이다. 새벽 시간대, 관성처럼 TV 채널을 타고 넘어가다 발견한 한 장면에서였다. 불도 켜놓지 않은 식탁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보통 케이블 TV 쪽으로 채널을 돌리고 있다보면 화려한 액션 장면이나 두 사람의 맹렬한 대화 같은 것에 붙잡혀 멈추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나, 그 날은 이상한 인력 같은 것이 작동하는 인상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여자는 한숨도 쉬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거실에서 누워 있는 초등학생 정도 되는 나이의 여자 아이를 바라본다. 세상 모르고 자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의 표정은 밝지 않다. 죄책감, 불안, 초조함, 약간의 짜증. 여러 가지 감정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고, 또 그 중 아무것도 대놓고 적힌 것은 없었다. 이윽고 완전히 불이 꺼지고 장면이 전환되는 순간, 나는 간단한 검색으로 이 배우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아무 맥락 없이 외딴 섬처럼 툭 던져진 장면이란 ‘이내’라는 독특한 두 자가 뇌리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나에게도 그랬듯이, 필히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했으리라. 그 이상한 인력을 도대체 무엇이라 이름 붙여야 좋을까?

무대를 배반할 만큼의,

카메라의 파트너

그 날, 그의 이름을 알아내고 나서 오랜만에 신이 나서 한 사람의 커리어를 탐독했다. 이미 충실한 팬들이 그의 이력을 인터넷 문서로 만들어 관리하고 있었고, 꼼꼼하게 적힌 궤적 하나하나는 이내라는 배우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독립 단편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 음, 그럴 만한 이력이지. 최근 장편작 중 하나가 작품상을 수상. 배역의 각본이나 캐릭터 메이킹에 일부 참여. 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력이다. 그렇게 응당 그러리라고 흔쾌하게 고개 끄덕여지는 글들 가운데, 연극 배우 출신이라는 정보만큼은 내게 있어서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이내라는 배우의 매혹을 설명할 때 개입하는 것 중 무대 예술에 어울리는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멀리까지 확실하게 뻗는 목소리, 무심하지 않고 또렷한 몸짓, 명쾌하게 떨어지는 감정 표현. 그 모든 특징 중 맞아 떨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봐도 좋다. 목소리는 조용히 잦아들고, 오히려 미묘한 표현을 할 때 가장 맛이 산다. 발음은 또렷하지만, 몸짓은 행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까지는 무엇을 하려는지 잘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반경이 작다. 감정 표현은 그야말로, 영화 연기의 정수라고나 할까. 눈썹을 구부려서 화난 인상을 짓는 것이 아니라, 속눈썹을 살짝 떨어 불편해하는 기미를 보이는 것이 차라리 더 어울리는 인상이다. 물론 둘을 칼로 자르듯이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연기의 층위를 ‘액팅’과 ‘퍼포밍’의 차원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이내는 완전히 전자의 영역에 속한 배우처럼 내게는 보였다.

잘 웃지 않는 여자에게만

깃드는 이야기

기껏 메인 스트림의 영역을 밟게 되긴 하였으나, 그럼에도 이내가 맡은 배역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가 맡은 작품의 이야기가 무조건 어둡고 진지하기만 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맡은 인물들이 가벼워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가 가장 자주 출연하는 것은 차분한 드라마 장르가 제일 많지만,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 출연해서도 그가 맡은 인물들은 그다지 발랄해지지 않는다. 〈맨발의 리라〉에서 여주인공인 주리라가 옥탑방에서 술에 취해 몸을 흔들어제끼고 있을 때에도, 이내가 맡은 배역의 이정연은 옆에서 맥주를 간혹 홀짝이거나 농담을 하기는 해도 같이 일어서는 법이 없다. 그는 춤추지 않고 노래하지 않는다. 배우 본인은 제법 춤도 노래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의 인물들은 도통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그런 인물들을 그가 맡아서 연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내라는 배우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뇌는 서사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한다. 빈 곳의 알 수 없는 맥락이 있으면 채워야만 하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어야만 타인과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 특수한 기질이 만들어낸 것이 미스터리에 감응하는 것인데, 보여주지 않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때 우리의 뇌는 그것을 알고 싶어 안달을 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곳곳에 단서를 흘려두고 중요한 부분을 적지 않은 채 공백으로 두었을 때, 빵 부스러기처럼 흩어진 단서들을 그러모아 대답을 내놓고는 하는 것이다. 정교하게 설계되어 맞물리는 이야기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홀린다. 미스터리의 매혹이라는 건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것을 전제로 생각했을 때, 이내라는 배우가 가지는 무기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그저 은근히 눈을 내리까는 그 순간, 혹은 입술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이다가 곧 다시 그 문을 잠그는 순간, 그리고 대사가 없이 미묘하게 이어지던 장면에 시선을 들어 너머를 보는 그 순간. 그 모든 때에 사람들은 응답하게 된다. 그가 무언가를 단념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가 말하지 못한 대사는 무엇인지, 시선을 들어서 바라본 저 너머에 있던 것은 무엇인지. 그저 희미한 신호만으로 관객들은 이내라는 배우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고, 모든 것을 해석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미스터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순간과 순간을 이을 개연성이나 정교함이 부족하다고 생각이 될 때, 설득으로 필요한 것은 이 배우의 ‘시선’이면 충분하다. 일차적인 이야기는 각본가와 감독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배우가 스스로를 사용하는 방식이 작가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모든 맥락을 전부 받아들여 생각했을 때, 이내가 〈Fate/Grand Order〉의 주인공인 ‘마스터’로 출연하는 것은 놀라운 행보일 수는 있어도 기존의 이야기와 모순되지는 않는다. 이른 바 ‘서브컬처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화려한 외연의 드라마인 〈Fate/Grand Order〉는, ‘서번트’로서 나타나는 여러 역사적 혹은 환상적 인물들의 연속으로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의 연결점이 특정 서사의 구간을 넘어가기 전까지는 그저 랜덤한 이야기 파편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볼거리는 이미 충분하고, 이야기의 뒷심은 이미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후반부에 확고하게 마련이 되어있다. 그렇다면 초중반부의 이 느슨한 연결을 무엇으로 규합해둘까? 드라마 각본과 각색을 맡은 A는 방대한 텍스트의 윤문, 혹은 전반적인 이야기 구조의 보강보다는 이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힘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드라마의 2시즌이 마무리된 지금, 우리는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반의 이야기는 다소 가볍다. 인류사라는 것 자체가 아예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는데도 이야기는 뻔뻔하고 도달점을 굳이 정해두지 않은 채 표류한다. 메시지도 상징도 부족한 채로 스토리는 답보하나, 거기에는 고뇌하는 주인공이 남는다. 마스터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도,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도 거의 책임이 없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진지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은 실재하며 조금씩 몸피를 부풀려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게 된다. 기이하고 불쾌한 유머 코드와 진지한 종말이 한 데 뒤섞인 공간에서, 마스터는 고독해지고야 만다. 혹은 고통스러워지고야 말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일본의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종말론자들과, 그들의 욕망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것은 이런 이야기다. ‘나는 어차피 죽는다. 그러나 나만 죽는 것은 싫다. 세계 전체를 끌어들여 다 함께 죽고 싶다.’ 그것은 세계의 죽음과 자기 자신의 죽음을 일치시키려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은 너무나도 흔하고 치졸한 것이라, 자주 일어나고 또 금방 무너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그 흐름이 반대로 작용한다. 마스터가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마스터를 향해서 역할을 요구하고 있고, 주인공이 주인공으로서 남지 않으면 세상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보인다.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니라 세상이 거대한 계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세계와 함께 죽고 싶지 않다면 이 종말을 끌어올려 해결해야 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야기로부터의 부름인데, 마스터는 자신에게 깃든 마술의 원리를 비롯하여, 그런 ‘이야기’의 논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기 시선의 주인이나, 그와 동시에 다른 면모에서는 자신이 전혀 주인 될 수 없음을 안다. 마스터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에서 그는 대상이 되고 피험체가 되고 시선의 교차로가 되나 누군가의 주인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럴 것이다. 역할과 자아가 어긋났다는 것을 아는 그 영민한 자의식 아래에서, 의무는 이행될 것이나 세계에 대한 애착은 자라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야기에서는 오베론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이야기와 역할’의 피해자라는 데에 있다. 실재하는 위기 또한 그들을 괴롭게 했겠지만, 둘을 괴롭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평온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범상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 더 어울릴 것이다. 세계가 요구한 역할 또한 그들이지만, 그 역할 밑에도 그들은 존재한다. 무자비한 등치식이 삶을 묵살할 때, 두 사람은 적대감으로서 마주했어야 할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서 서로의 고독에 조응한다. 그 때의 서로를 들여다보는 시선은 긴장과 경계심이 있되, 폭력적이지는 않다. 진실이 아닌 그저 이야기에도 진실된 감정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겹을 복잡하게 얽어놓은 허구성 속에서 둘은 서로를 발견해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 끝이 그저 칼데아에 그가 합류하는 정도로 끝난다는 안전하고도 보수적인 엔딩이라는 점은 아쉽지만, 도약이 가능한 그 얇은 틈에서 사람들은 많은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에 잇따르는 열광은 반가운 것이 된다.

마음을

설득한다는 것

허구적인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인물의 ‘인간성’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나는 이제 그가 말한다면 무엇이든 속아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보험을 팔아도 살 법한 관상’이라고 말하듯, 그의 연기는 그가 ‘콩 심은 데 팥 난다’고 이야기를 해도 어떻게든 믿어질 지경이니.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을 진실로 규정할 때, 그 간극 사이에는 언젠가 절망에 가까운 마음이 존재한다. 생각을 해보면 그 마음이라는 것도 무형의 무언가가 아닌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배우들이 웃고 눈물 흘리고 격앙할 때 그것을 순순히 믿는 것은 거의 관습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이미 경이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을, 지금에 와서야 다시금 깨닫는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만들 수 있는 그의 힘에 기대어, 다음을 기대해본다. 마침 〈Fate/Grand Order〉 시즌 3의 크랭크업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가 받아들이게 될 다음 이야기는 무엇을 몰고 돌아올까? 이야기 안의 어떤 딜레마가 그에게 대답을 요청할 것이다. 고민은 배우와 인물의 몫. 그의 고뇌가 깊어질 수록, 관객은 즐거워진다. 이내 고민을 끝마친 배우는 문을 열고 화면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청컨대, 영원히 대답을 완수하지 못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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