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異海)
파랑이 일었다. 바다는 늘 그렇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또 흘려보낸다.
“항법의 원칙을 잊지 마, 요한.”
선상은 결코 고요할 수 없다. 뱃머리에 부딪혀 흩어지는 파도 소리, 물길과 기후의 변화에 관하여 나누는 항해사들의 회담, 바다 한가운데서 헤매는 이들의 고독을 달래기 위한 노랫말. 시끌벅적한 소란은 곧 그들 삶의 증명이다. 그러나 지금 요한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는 건 소리가 아닌 냄새였다. 결코 바다 위에서 맡아서는 안 될 쇳내. 낯선 적막은 더욱 감각을 팽창시키고, 끝내 그는 도망칠 곳 따윈 없음을 깨닫는다. 현실을 부정할 권리조차 무정한 해신에게 거두어지고 만다. 한 가지의 사실만이 남았다. 동료들이 살해당했다. 모조리.
“요한, 내 말이 들려?”
“리오.”
아니, 그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또 한 명. 리오는 신입 항해사이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료였다. 그는 온화하고 친절할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재주가 있어 향수병에 들기 쉬운 선원들의 마음을 매일같이 달래주었다. 어떤 때에는 술통을 북삼아 두드리고, 어떤 때에는 듣기에 그럴듯하지만 결말은 허술한 가사를 즉석으로 지어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배 위에서 쓰레기를 처리하기란 돛대를 올리는 일보다 쉽다. 그저 바닷물에 던져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기에 목제 갑판이 온통 붉게 물든 끔찍스런 광경에도 사체의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아 되려 괴기스레 느껴졌다. 그 난장에도 불구하고 리오가 짐짓 의연히 요한의 어깨를 담요로 감싸주었다. 닿은 손이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은 똑바르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아까 뭐라고 물었지?”
“항법의 원칙을….”
“그래, 말해 봐.”
“내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가야 하는가.”
“좋아.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당연하게도 고향의 항구야. 그것만 생각하면 돼.”
“하지만….”
“어젯밤에는 그저 새벽에 해적의 습격을 받은 것뿐이야. 물길이 변한 데다 재보는 빼앗겼으니, 그들이 다시 우릴 찾을 일은 없을 거야.”
리오는 확신하듯 말했다. 요한은 혼란스러웠다. ‘왜 저렇게 말하는 거지?’ 해적이 이 배를 습격했다면 요한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목숨의 위기조차 코를 골며 방관하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리오 또한 요한이 자신의 말을 순순히 믿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를 붙잡아야 했다. 돌아가기 위해.
하지만, 그렇다면, 이 끔찍한 살인은 도대체 누가 저지른 짓이란 말인가?
망망대해 위의 선박. 범택이라는 이름의 밀실. 두 명의 생존자와 용의자. 그러나 서로를 의심하여 불화를 일으키면 결코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수라장. 북서풍이 침묵을 흉내 내어 두 사람의 주위를 한동안 휘돌았다.
마침내 요한은 날씨를 읽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리오는 키를 붙잡았다. 살아남은 자들의 발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돌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리엇은 얼른 필기구와 노트를 짚더미 안쪽에 쑤셔 박고 자세를 바로 했다. 무심코 뒤로 등을 기대자, 관리되지 않아 축축하고 곰팡이가 핀 돌벽이 얇은 옷 너머의 살갗까지 침범하는 기분에 얼른 허리를 세웠다.
이윽고 두 손 가득 쟁반을 든 얀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동시에 반가운 냄새도 함께 찾아왔다.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방문자를 맞았다.
“저 왔어요.”
“얀. 안색이 좋아 보이네.”
“낚시가 잘 됐거든요. 통발에도 수확이 많았구요.”
“가져온 건 뭐야?”
“저녁 식사에요. 많이 잡힌 김에.”
얀이 엘리엇에게 마주 웃으며 바닥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갓 만든 바닷가재 찜과 게살 케이크, 석류 주스가 놓여 있었다.
그 말들은 모르는 이가 들으면 영락없는 다정한 연인들의 담화였다. 한 사람은 일을 끝마친 후 돌아오는 이를 마중하고, 한 사람은 기다리던 이를 위해 신선한 수확물을 직접 조리한다. 어떤 면에서는 엘리엇이 얀을 보며 꿈꾸었던 생활과 밀접했다. 다만 이곳은 차갑고 딱딱한 지하실이었고, 음식은 돌바닥에 놓였으며 얀은 그와 함께 식사를 들긴커녕 먹는 모습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지하실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몰래 숨겨둔 물건은 없는지, 모르는 새 변한 점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얀은 매사에 섬세한 사람은 아니어서, 언제까지고 가장 구석에 쌓인 짚단 사이에 펜과 잉크, 그리고 노트 한 권이 숨겨져 있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엘리엇 또한 괜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포크를 들었다.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기뻐함과 동시에 회의감 또한 찾아왔다. 땅 밑, 한 칸의 어둠에 천천히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얀을 위해서도.
간단한 수색을 마친 얀이 다시 엘리엇에게로 다가왔다.
“맛은 어때요?”
“맛있어. 솜씨가 전혀 녹슬지 않았구나.”
가장 훌륭한 점은 얇고 기다란 다리 여섯 개가 담겨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환경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정말이지 칭찬할 만한 정찬이었다. 엘리엇은 게살 케이크를 나이프로 잘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나 봐.”
“햇살은 너무 뜨겁지 않고, 바람은 너무 차갑지 않았죠.”
“해변의 오후를 생각하니 절로 풍경이 떠오르네. 조금은 얼기설기 이어지는 너의 발자국, 지침을 따라가듯 주위를 노니는 갈매기들….”
허기진 탓에 급히 먹으며 말하느라 발음이 조금 부정확하고, 매일 아침 멋드러지게 단장하던 머리는 푸석해진지 오래였지만 엘리엇은 여전히 엘리엇이었다. 그는 시커먼 돌 감옥에 갇혀서도 눈앞에 푸르른 물가를 싹둑 잘라다 둔 듯 말로 자연을 그렸다. 얀은 마음 한구석이 돌부리에 걸린 듯 달그락대는 걸 느꼈지만 애써 무시한 채 언제나처럼 웃었다.
“갈매기는 없었어요.”
“오, 이런. 오늘은 새들이 휴가를 즐기는 날인가 보네.”
“그래서 잡을 물고기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걸까요.”
그 뒤로도 막힘없이 이어진 댓거리는 엘리엇에게 등대의 빛과도 같았다. 목적을 향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얀이 따뜻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신중하게 화제를 골랐다.
“해변에서 함께 고둥을 주운 날, 기억나?”
“고둥이요….”
얀은 잠시 기억을 더듬듯 말을 흐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난히 컸던 무지개 껍데기 말이죠.”
어떤 여름. 얀과 엘리엇은 언제나처럼 함께 해변을 걸었다. 바다는 고독한 작가에게 변함없는 위로를 전해주는 친구이자 안식처였다.
그러던 중 엘리엇의 발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백사장에 반쯤 박혀 끄트머리만 삐죽 나와있던 것을 무심코 주워 살펴보자, 초록색 같기도 푸른색 같기도 해 오묘한 빛깔의 텅 빈 고둥이었다. 얀이 보고는 의문을 표했다.
“그게 뭔가요?”
“처음 보는 거야? 우리는 무지개 껍데기라고 불러.”
“직설적이네요. 당신이 좋아하는 건가요?”
“흠, 그렇지는 않지만… 가치는 있지.“
엘리엇이 얀에게 건네듯 고둥을 내밀었다. 얀이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으니 그 고둥은 자신의 관자놀이께로 다가왔다.
“들어 봐.”
무엇을? 얀이 되물으려던 때 어떤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물이 흐르는 소리.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이건….”
“신기하지?”
작디작은 몸에 널따란 바다를 품고 있는 것 같아. 이게 있으면 어디에서라도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엘리엇이 얀에게 고둥을 내밀었다. “한여름 밤, 뜻밖의 행운을 기념하며.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선물할게.” 얀은 거절하지 않았다. 일단 팔면 값어치가 있을 것 같았고, 방금 들었던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내려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얀은 그 후로 무지갯빛 껍질을 말끔히 잊어버렸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이제는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 해프닝을 과거의 심해에서 간신히 건져낸 얀이 되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아직 가지고 있어?”
“아마도. 버린 기억이 없네요.”
“네가 괜찮다면, 다시 한번 그 소리를 듣고 싶어. 지금은 바다에 나갈 수 없으니까….”
고둥 하나를 건네주는 일이야 어렵지 않았다. 위협적인 모양새도 아니고, 본래 엘리엇이 발견한 물건이니. 문제는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새까맣게 잊어버렸단 점이다.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 나요.”
“으음, 저번에 여기 놀러 왔을 때 얼핏 봤었는데.”
“어디에 있었죠?”
“영 흐릿하네. 직접 보면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얀이 짧게 고민하다, 한쪽에 쌓아둔 나무 상자 안에서 목줄을 꺼내왔다. 커다란 개에게나 어울릴 둥그런 가죽 띠가 엘리엇의 목에 걸렸다. 이 끈을 차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운 좋게 얀이 관대해지는 날에는 그의 비위를 맞추어 1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고, 더 운이 좋으면 창가에서 내리쬐는 햇볕으로 온몸을 적실 수도 있었다. 해도 달도 볼 수 없는 지하실에서는 날이 지날수록 시간 감각이 흐려졌기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밖으로 걸음해야만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지금이 몇 시인가 물어본 후에 낮이라는 답을 듣고 간신히 부탁해 계단을 올랐으나, 달조차 뜨지 않은 새벽이었던 적이 있다. 사방이 컴컴했다. 저 아래와 다름없이. 그때 엘리엇은 처음으로 개죽 같은 식사를 목격했을 때보다, 얀에게 이유 없이 구타당했을 때보다 처절한 표정을 지었다. 얀은 무정히도 그 얼굴을 오래 지켜보았다. 말없이….
찰칵, 버클이 채워졌다. 얀이 무어라 이르기 전에 엘리엇이 먼저 직고했다.
“그것만 찾을게. 다른 짓은 안 할 거야.”
“거짓말이 아니길 바랄게요.”
얀이 먼저 계단을 올랐다. 그가 쥔 줄 끝에는 엘리엇이 묶여 있기에 당겨지지 않으려면 신중히 발을 맞춰야 했다. 얀이 그런 걸 신경 쓸 리는 없으므로 엘리엇은 쇠약해진 몸으로 애써 걸음을 옮겼다. 원래도 자랑스러운 체력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다리 두 개가 천근이어서 다섯 살짜리 꼬마와 비교해도 한참 뒤처질 듯했다.
전과 달리, 엘리엇은 내심 바깥이 심야이길 바랐다. 아까 얀이 ‘저녁 식사’라고 했지만 그는 엘리엇을 속이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시간에 둔해서 지금은 오후 5시일 수도, 밤 9시일 수도 있었다. 후자라면 엘리엇의 계획이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으레 절도는 밤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니까. 지금의 그는 얀보다도 암흑과 친숙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1층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머리 위로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극적인 장면은 펼쳐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얀은 집 안에 조명을 켜두지 않았고, 네모난 창은… 검었다. 밤이었다. 문턱을 넘는 순간, 그는 기묘하게도 이 집에 갇힌 후 처음으로 환영받은 기분이 들었다. 구름 뒤로 숨은 초승달이, 희미한 별빛이 엘리엇을 위해 한 발짝 물러나 은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도둑고양이처럼 숨죽이지 않으려 애썼다. 자연스레 행동해야 한다. 얀의 감은 맹수처럼 날카로워, 조금만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면 바로 땅굴 밑으로 차 넣어버릴 테니.
엘리엇이 기억을 되짚어 나가듯 느릿하게 말했다.
“창고에 있었던 것 같아.”
“그런가요.”
얀이 방향을 틀어 창고 쪽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평범한 가정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였다. 창고로 향하기 위해선 거실을 통과하고, 그 옆에 달린 부엌 또한 지나야 했다. 적요 한가운데 네 개의 발이 박자를 맞추어 바닥을 두드렸다. 엘리엇이 뒤를 따르며 부엌을 눈짓하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싱크대가 보였다. 식칼은 안 된다. 너무 커서 숨기기 어려운 데다 사라지면 바로 티가 날 테다. 빠르게 뛰는 심음이 얀에게 들릴까 침도 삼키지 못한 채 재빨리 시선을 움직였다. 속으로는 믿지도 않는 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짖으며. 얄팍한 기도가 그중 하나에게 기적적으로 닿았는지, 식기 통 옆 구석에 떨어져 있는 과도가 눈에 띄었다. 그 자리를 구른지 꽤 오래된 듯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마 얀은 이런 게 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엇은 순식간에 과도를 잡아 채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 낭만적인 도둑은 일련의 동작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이미 펜과 잉크를 가져온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칼보다 펜이 더 급했으나 이제는 버티기 어려웠다. 아침을 깨워주는 햇살의 온도와 갈매기 울음, 몸을 단장하며 하루의 일정을 정리하는 여유, 관객 없는 피아노 연주… 그리고 답이 나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한탄조차도 그리웠다. 얀의 지배는 천성이 섬세한 그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의 폭력이었다.
창고의 문이 열렸다. 녹슨 경첩이 길게 울며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얀이 조명을 켜고 그를 들여보내며 말했다.
“찾아봐요.”
“응, 고마워.”
얀은 방심하고 있었다. 이제 물건을 찾는 척하다, 제멋대로 쌓인 짐들을 얀 쪽에 무너뜨린 후 칼로 줄을 끊고서 달려 나가면 되었다. 신체 능력의 차이가 현저하니 오래 도망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사람의 집 근처까지만 가면 성공이다. 소리를 지르면 누구라도 알아채 줄 테다. 엘리엇은 뒤로 돌아 선반을 훑어보는 척했다. ‘셋을 세고 나면 움직이는 거야.’ 그렇게 다짐했다. 하나, 둘, 마지막으로 얀의 동태를 확인하고….
엘리엇의 숨이 멈추었다.
팔짱을 낀 얀의 네 번째 손가락이 백열등 아래에서 금색으로 빛났다. 반지였다. 다름 아닌 엘리엇이 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건네주었던 것이다.
“왜요?”
“아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얀이 다가왔다. “어디 아파요?” 엘리엇은 꼼짝도 못 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 어지럽네. 오랜만에 움직여서 그런가 봐.” 한 번뿐인 기회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들어갈까요?” 말하던 얀이 어느 한쪽을 일별하곤 미소 지었다.
“여기 있었네요. 음… 손이 안 닿을 것 같은데.”
엘리엇이 얀의 눈길을 따라가자 확실히 고둥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칼을 숨겨 두지 않은 손을 길게 뻗어 고둥을 손에 쥐고 내려다보았다. 고둥은 여전히 무지갯빛이었다. 그날의 환상에 휩싸인 기분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푸른 바다가 아닌, 퀴퀴하고 음산한 창고 안에서도. 단지 그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 각오를 한때가 언제였냐는 듯 발이 땅에 단단히 붙들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엘리엇은 과도를 완전히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단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입 맞추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을. 그가 신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사제와도 같이 온순히 고개를 숙였다.
찾던 것을 내려다 보기만 하는 엘리엇의 모습에 얀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듣지 않을 거예요?”
엘리엇은 전과 같이 행동했다. “들어 봐.” 무지개 껍데기가 내밀어졌다.
곧 뭍이었다.
경력은 적지만 침착한 항해사와 묵묵하고 부지런한 일꾼이 힘을 합친 결과였다. 적은 식량을 공평히 나누어 먹고, 한 사람이 아프면 다른 한 사람이 돌보았다. 둘은 그때까지 어떠한 불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누구나 본받을 만한 조난 상황 속 모범적인 선원의 행동이어서, 지켜보는 상사가 있었다면 승진 가능성을 높이 점쳤을 테였다. 그러나 여전히, 당연하게도 둘이었다.
“육포는 다 떨어졌어. 비스킷과 건빵이 조금 남았는데, 전에 맞닥뜨린 태풍 때문에 다 젖어서 상태가 안 좋아.”
요한이 남은 식량의 재고를 셈하며 말했다. 리오는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남은 거리를 계측하고 있었다. 바삐 머리를 쓰던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괜찮아.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또 태풍을 맞닥뜨리지만 않는다면.”
“암초는? 지도에 나와 있어?”
“예정했던 항로와 틀어져서 애매해. 운에 맡겨야지.”
결국은 모든 과정이 신의 뜻대로였다. 뱃사람은 자연의 변덕에 익숙해져 이 부분에서만큼은 초연한 구석이 있었다. 리오도,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공연히 화를 내 기력을 낭비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배에 술통이 썩어날 만큼 많다는 사실이었다. 빗물을 받아 마시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수분 보충은 아주 중요했다. 다만 자칫 취하면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없으니 양을 조절하는 게 중요했다. 술은 아무리 마셔도 탄 목을 채워주기는커녕 갈증을 호소하게 할 때가 있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리오는 춤과 노래만큼 술을 좋아해 때때로 요한의 감시 하에 놓였다.
측량을 마친 리오가 숨을 길게 내쉬더니 술통으로 다가갔다. 요한 또한 정리를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마주치자 리오가 빙긋 웃었다.
“같이 할래?”
“난 됐어. 너도 조금만 마셔.”
“한 잔만 할 거야.”
이내 리오의 컵에 포도주가 가득 담겼다. 진한 붉은빛이 몇 번이나 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요한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
“이대로 도착하면 우리가 범인으로 몰릴 거야.”
술잔을 쥔 리오의 손이 멈췄다.
“어쩔 수 없잖아, 그런 건.”
“범인을 찾으면 돼.”
“범인이 어디 있어? 여긴 우리 둘뿐인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요한, 갑자기 왜 그래.”
요한은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왜 저렇게 말하는 거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또다시 그의 뇌리를 헤집었다.
“사람이 이만큼 죽었는데 그냥 넘어가려는 네가 더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그건, 지금은 돌아가는 게 더 급하니까….”
“변명하지 마!”
요한이 버럭 소리치자 리오가 놀라 잔에서 술 몇 방울이 뛰쳐나갔다. 포도주가 그의 셔츠를 검붉게 물들였다. 그 광경을 본 요한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거센 파도가 쳤다. 리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하자 요한은 저도 모르게 달려가 그의 몸을 받쳐주었다. 흔들리는 시야를 겨우 붙든 리오가 고개를 드니, 자신을 내려다보는 요한의 얼굴이 사정 없이 일그러져 있는 게 보였다.
“기만자.”
웃는 것 같기도, 화내는 것 같기도,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해서 순간 리오는 그를 위로해야 할지 안심시켜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요한이 단어를 수차례 짓씹고는 토하듯 뱉어냈다.
“너도 죽여버릴 거야.”
또다시 파도가 들이쳤다.
얀의 귓가에 파도가 들이쳤다. 푸른 물결이 철썩이며 희게 부서진다. 그 안에는 짠 내가 스민 여름날의 밤바람과 엘리엇의 상쾌했던 웃음마저 담겨 있다. 그 순간 얀은 떠올렸다. 어째서 이것을 지금껏 창고 구석에 박아 놓은 채 다시는 꺼내지 않았는지. 이런 기분이 들어서였다. 심장을 주먹으로 쥐어짜는 듯한 기분. 전신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기분. 한 발 뒤가 절벽 끝일지라도 뛰어내려 도망가고 싶은 기분. 목전에서 엘리엇이 눈을 휜 채 웃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런 시선을 본 적이 있다.
삶은 천편일률적인 것이다. 적어도 얀에게는 그랬다.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내일을 빼앗아야 했다. 필요하다면 그게 누구든 겁박하고, 모함하고, 때려서 쟁취한다. 살인은 증거가 크게 남고 어물쩍 넘어갈 수 없는 중죄이기 때문에 피한 것이지 결코 양심이나 도덕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윤리가 그어둔 선을 넘는 데에 큰 노력이 필요치는 않았다. 얀은 그저 천성이 잔혹했다. 이건 슬럼에서 살아가는 이에겐 굉장한 행운이었다. 동정에 사로잡힐 새가 없다는 건 남들보다 한발 앞서 행동한다는 뜻이니까. 그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사람을 죽이고도 무사히 도망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농부들이 사는 마을까지 몸을 피했다.
얀은 자신이 살해한 이의 이름도 나이도 몰랐다. 이제는 얼굴마저 흐릿했다. 그러나 그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살해당하기 직전 연인의 사진을 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어. 사랑해.” 그게 그의 유언이 되었다.
엘리엇과 죽은 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는 그대로 왼팔을 내질러 엘리엇의 목을 움켜쥐었다. 엘리엇의 눈꺼풀이 열리며 동공이 확장되었다. 고둥이 손아귀에서 튕겨나가 짐더미 어딘가로 모습을 감췄다.
“내가 살인자인 걸 알고 있었으면서.”
“요한, 숨 막혀!”
“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속여서, 날 경찰에게 넘기려고 한 거지?”
“아니야, 난….”
엘리엇의 숨이 한계에 달해 컥컥대며 밭은 기침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살짝만 힘을 주면 이 가느다란 목은 그대로 부러져버릴 테다. 얀은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엘리엇이 조르고 있는 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 텐데. 얀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예상이 빗나갔다. 그는 손을 풀어내려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어루만졌다. 약지에 감긴 반지를 손끝으로 더듬고는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려 똑바로 주시했다. 그 눈을 마주한 얀이 불에 손을 덴 듯 단박에 손을 놓아 버렸다.
“너와 함께 돌아가고 싶었어.”
손아귀를 벗어난 엘리엇은 그대로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뱉었다. 목줄에 강하게 쓸렸는지 피부에 피가 송글히 맺혀 있었다. 곧 얀도 주저앉았다. 그는 무척 피로해 보였다. 엘리엇을 감시할 의욕도 잃어버린 채 쭈그려 앉아 머리를 부여잡고선 자그맣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엘리엇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얀, 어디 아파?” 아파야 할 건 방금까지 목숨을 위협받았던 엘리엇이다. 얀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이만 들어갈까?” “네.” 그는 어느 때보다 순순히 답했다. 마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엘리엇인 것만 같았다.
“우린 이국으로 도망치지 않을 거야. 돌아가자, 요한. 전부 솔직히 말하자. 내가 곁에 있을게.”
“어째서?”
엘리엇이 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약해진 데다 방금까지 위협받았던 몸은 말을 듣지 않아 끙끙댈 뿐이었다. 얀은 작게 한숨 쉬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엘리엇을 에스코트하듯 손을 잡고 부축했다. 엘리엇은 그 손을 강하게 마주 잡았다.
“왜 네가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리오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왜겠어.”
다시 엘리엇을 지하실로 내려보내고 돌아 나와 잠자리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얀은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귀에 물이 들어차 파도가 끊이지 않는다. 아무리 고개를 털어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엘리엇이 보고 싶었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물소리를 멈출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그가 있어야 하는지 없어야 하는지도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시 지하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릇을 치워주지 않았어.’ 계단 하나를 밟을 때마다 누군지도 모를 이에게 변명했다. 당연하게도 듣는 이는 자신뿐이었다.
파랑이 일었다. 바다는 늘 그렇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또 흘려보낸다. 바야흐로 육지가 보였다.
배 위에 두 사람이 있다. 여전히 같은 곳을 향한다.
작가의 말
삽입된 글들은 엘리엇이 작성하고 있는 추리 소설이라는 설정으로 적어내렸습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작가의 경험을 투영해, 엘리엇과 얀의 처지를 거울처럼 비유하고 있습니다. 떠오른 내용을 전부 작성할 순 없기에 이곳에 줄거리이자 배경 설정을 설명해 봅니다.
요한은 항구 도시의 이방인입니다. 이국의 고향에서 사람들과 섞이지 못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찾아왔으나, 이곳에서조차 외면당하고 고배를 마시기 일쑤입니다. 외지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전보다 더 험한 대우를 받습니다. 뱃사람이 되고 싶지만 토착민의 텃세가 강해 갈팡질팡하던 와중 신참 선원인 리오를 만납니다.
리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온화하고 친절합니다. 요한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고, 선원으로서 항해사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며 곁에서 돕습니다.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요한의 꿈은 이루어지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리오가 모르는 새에도 몇 사람들의 요한에 대한 괴롭힘은 끊이지 않고, 요한의 마음속 어둠은 커져만 갑니다. 결국 그는 결심합니다. 그들의 배를 탈취하고 또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계획은 순조롭게 흘러갑니다. 리오의 도움으로 견습으로서 소형 배에 탑승하는 데에 성공하고, 새벽을 틈 타 몇 명의 선원을 습격해 살해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리오를 죽이려 할 때 어째서인지 그는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 포기합니다. 자신이 어째서 멈추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그리고 날은 밝아옵니다. 처참한 살인의 현장은 씻어낼 수 없고, 해적에게 습격당했다 위장하기 위해 재물 대부분을 바다로 흘려보냈지만 상황은 명확합니다. 충동에 몸을 맡겨 살인을 저지르고, 또 충동에 칼을 버린 그는 아침이 되어서야 후회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리오가 범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요한을 추궁하지도 않는 겁니다. 아무리 귀환이 급박하다지만 무언가 이상합니다. 요한은 살인자인 자신의 사정보다 리오의 마음을 파헤치는 데에 몰두하고, 그렇게 두 사람의 기묘한 항해가 시작됩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글로 쓰인다면 본문과 같이 화자는 요한이고, 마치 리오가 범인인 것처럼 진행됩니다. 진실을 파헤치다 보면 범인의 윤곽은 쉽게 그려지나, 요한이 살인을 저지른 동기 그리고 리오가 그것을 알고도 숨겨준 동기를 추리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장르를 말하자면 추리/서스펜스, 그리고 로맨스가 되겠습니다.
만약 엘리엇이 이 책을 완성하고 베스트셀러로 거듭난다면, 치밀한 범죄 소설보다는 개개인의 인간성을 잘 녹여낸 심리 소설로 유명해질 거라 생각하고 작성했습니다. 이 편이 싸늘한 추리보다는 낭만적인, 그리고 사랑을 하고 있는 엘리엇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네요.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의도가 있습니다. 얀은 요한이라는 이름의 애칭 중 하나이고, 엘리엇이라는 이름의 애칭 중 하나가 리오입니다. 각 인물을 대입해 보면 굉장히 자전적인 이야기로 그려집니다.
바다를 글의 주 배경으로 지정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엘리엇은 바닷가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두 사람이 고백을 나누는 장소 또한 바다의 배 위입니다. 필시 서로에게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는 장소겠지요.
엘리엇과 얀은 마치 이해(異海), 즉 서로 다른 바다처럼 상반되는 인물들입니다. 결코 맞닿을 수 없고 뒤섞일 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넓은 시야로 보았을 때 모든 바다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평행선을 달리는 두 사람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어지고 말리라는 마음을 담아 제목을 붙였습니다.
두 바다가 서로를 이해(理解) 하는 날을 위하여. 모든 것의 끝에 사랑이 있길 바랍니다.
- 카테고리
- #오리지널
중심(中心)
나를 구해줄 사람. 날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사람. 그러나. ‘나만의 것이 아닌 거야….’
검은 고양이
"우리는 서로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공유하던 때가 있었는데."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