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中心)

나를 구해줄 사람. 날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사람. 그러나. ‘나만의 것이 아닌 거야….’

클로 by 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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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암야. 줄 선 가로등이 희끗희끗 두 사람을 내려다보지만 관리가 신통치 않아 어느 것은 깜빡거리고, 어느 것은 아예 눈꺼풀을 닫고 있다. 세나는 드물게 기분이 좋아 갈지자로 휘청대며 콧노래를 흥얼댄다. 특별히 길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단순히 알코올의 화학 작용이다. 도파민은 현대인의 가장 가깝고도 익숙한 친구니까. 마츠노스케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를 일별하고 때로는 부축하며 따라 걷고 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그의 팔을 잡아끌며 그가 한숨 쉰다.

 

“그러게 자제하라니까.”

“무슨 상관이야? 내 돈으로 내가 마시겠다는데.”

“바래다주는 건 내 몫이라고. 집사 씨에겐 연락했어?”

“했어, 했어. 잔소리.”

 

레온의 이름이 거론되자 진절머리 치듯 손을 휘저은 세나가 문득 고개를 든다. 그러고는 짧은 치마에도 아랑곳 않고 훌쩍 다리를 올려 도로 펜스 위로 두 발을 딛는다. 그러나 중심을 잡지 못한 건 당연지사여서, 마츠노스케가 기겁하며 다리를 붙잡는다.

 

“높다~”

“세나, 내려와!”

“싫어. 이 위에서 걸을래.”

“넘어지면 어쩌려고?”

“아가타 씨가 잡아주면 되잖아.”

 

세나가 샐쭉 웃으며 손을 내밀자, 마츠노스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손을 틀어쥔다. 골치 아픈 주정뱅이가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웃곤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긴다.

억지를 부리면 마츠노스케는 거절하지 못한다. 세나는 언제든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고, 그는 목전에서 무너지는 이를 도저히 외면하지 못할 만큼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관계는 늘상 불균형하며 애를 태우는 쪽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도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한 사람은 위로, 한 사람은 아래로. 마치 지금처럼.

 

문득 세나는 마츠노스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게 처음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평균보다 훤칠한 신장이기에 스스로 자세를 낮추지 않는 이상은 제대로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머리를 헤집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손이 붙잡혀 있었고, 반대쪽 손을 쓰자니 무게중심을 잃고 넘어질 게 뻔했다. ‘실은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어쨌든 지금은 체온으로 전해지는 그의 긴장을 더 맛보고 싶었다.

 

그가 고개를 올리더니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세나는 어느새 펜스의 끝자락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나 뛴다?”

“응?”

 

경고는 한 번뿐이다. 세나가 손을 놓고 뛰어올랐다. 짧은 순간 마츠노스케의 눈빛이 말한다. ‘계속 이럴 거야?’ 답신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물론 그가 취할 행동도 정해져 있으니 결국 끝없이 돌고 도는 제로섬 게임이다.

 

모두가 예상했듯 세나는 마츠노스케의 너른 가슴으로 안겼다. 서로의 술 냄새와 체향이 단번에 뒤섞여 코를 찌른다. 마른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마츠노스케의 뇌리로, 믿음직한 포즈에 반하는 고뇌가 스친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본심을 털어놓은 게 잘못이었을까. 이렇게 작은 아이가 내 일까지 감당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러나 번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세나가 발버둥 쳐 그의 품 안을 벗어나더니, 그대로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도로로 달려나간다. 진회색 콘크리트를 두 발로 밟고 선 그가 의기양양하게 마츠노스케를 돌아본다. 양쪽으로 질끈 묶어 올린 머리칼이 밤바람에 흩날리며 시야를 흐린다.

 

“세나!”

“그러게 누가 딴 생각 하래?”

 

그러나 마츠노스케의 표정은 돌발 상황에 당황했다기엔 과했다. 그보다는, 조금 더… 경악에 가까운.

 

쨍한 헤드라이트가 전신을 비추고 고막을 흔드는 경적 소리가 울린다. 멍하게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브레이크를 제때 밟지 못한 차량이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채 달려들고 있다. 세나는 그대로 전신이 굳어졌다.

 

찰나 세상에는 오로지 자신만이 남는다. 이번에는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내리쬔다. 사람의 삶이 하나의 극이라면 무대 위의 그는 오롯이 혼자다. 주마등에 떠올릴 그럴듯한 추억조차 없어 이어지는 것은 스스로의 비극적인 독백뿐이다.

 

‘정말 죽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아니, 애초에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죽을 리가 없다고.’

 

순간 무대 위로 캐스팅 리스트에 적어두지 않았던 배우가 들이닥친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가면을 쓰고, 히어로의 배역을 자처한 채.

 

‘왜냐면….’

 

왜냐하면, 도무지 나를 내버려두지 못하는 당신이 있으니까.

 

눈을 떴을 때엔 건너편 인도 위. 또다시 누군가의 품 안에 안겨 있다. 가면라이더 아가타는 구출한 에이전트를 조심스레 내려둔 후 변신을 해제하나, 가면이 벗겨진 그의 낯에 떠오르는 건 안도가 아닌 차가운 분노다.

 

“너 제정신이야?”

 

그 눈빛을 마주한 세나는 금세 깨닫는다. 외나무다리 위의 극적인 시간이 지나면 뒤따르는 지루한 현실. 도로 위에 서 있던 게 누구든 그는 뛰어들어 구해냈을 테다.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하지만 그 순간 세나는 오로지 아가타 마츠노스케만을 떠올렸다. 나를 구해줄 사람. 날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사람. 그러나. ‘나만의 것이 아닌 거야….’

 

“네가….”

 

분노는 곧 실망으로, 실망은 슬픔으로 변한다.

 

“나한테 원하는 게 이런 거냐고.”

 

아가타 마츠노스케는 착각하고 있다. 세나는 한 번도 이런 걸 원한 적이 없다. 그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유일한 사람. 나만을 알아주고 나만을 바라봐 줄 사랑. 그러니 당신은 절대 아니야. 당신만은 되어줄 수 없어. 모두를 구하는 히어로 같은 건 필요 없어.

 

초조, 갈구, 원망. 중구난방한 감정들은 추가 되어 굳건히 기울어져 있던 저울에 차례로 쌓인다. 무게중심이 뒤집혀 위아래가 반전한다. 세나는 끝없이 추락한다.

 

“모텔 가자, 아가타 씨.”

“…뭐?”

“그런 기분이야.”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싫은 척하지 마. 막상 박을 때는 즐기면서.”

“너…!”

 

결국은 원점이다. 언제까지고 서로를 만족시켜줄 수 없어 상처 입히길 반복한다. 북돋워 주며 향상시키는 영웅과 조력자의 인연은 꿈과 같이 멀다. 마츠노스케가 화를 참지 않고 버럭 언성을 높이자 타이밍 좋게 세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2인 극의 엔딩을 알리는 제3자의 유난스런 음성이다. “주인님! 이 시간까지 연락도 없이 어딜 가신 건가요!” 평소라면 레온의 전화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을 테지만, 지금 세나에겐 마츠노스케의 진솔한 대화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연락했다며?” 세나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마츠노스케가 미간을 좁히고 세나의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세나가 팔을 뻗어 내놓으라 윽박질렀지만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약 30cm의 신장 차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레온 씨, 나야. 세나가 술을 많이 마셔서…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아가타 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위치를 알려주시면 제가 금방 모시러 가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마츠노스케가 현재 위치를 레온에게 전송한 후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리곤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선다. 세나는 그의 온기가 남은 물건을 손에 꾹 쥔다.

 

“여자애를 이런 도로에 내버려두고 가는 거야?!”

 

단 5분이면 레온이 도착할 걸 알면서도 그렇게 소리친다. 그래도 마츠노스케는 돌아보지 않는다. 희미한 가로등 조명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세나는 검은 인영을 짓밟아 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어 제자리에서 거세게 발을 구른다. 두꺼운 굽이 아스팔트와 부딪혀 큰 소리로 울리지만 여전히 그가 고개를 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로수에 살포시 내려앉은 새만이 누군가를 부르듯 밤에 운다.

 

다음 날에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마주할 테다. 서로를 보며 웃고, 동료들과 함께 농담을 나누고, 함께 싸워 나가겠지. 세나는 이 모든 일들이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만둘 수 없다. 무엇도. 왜냐하면.

 

당신을 도무지 내버려두지 못하는 나도 여기에 있으니까.


 

작가의 말

 

중심이라는 말은 가운데 중, 마음 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글자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마음의 기둥, 혹은 진정한 속내라고 읽히기도 합니다. 두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죠.

아가타와 세나는 아직 서로의 관계에 대한 중심을 가늠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이 무거워졌다가 또 가벼워지는 불균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슬아슬하게 펜스 위를 걸어가듯 세나는 아가타에게 의지하면서도 자신의 소유권을 내어주지는 않고, 도리어 그를 빼앗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무엇도 내어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마음을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세나에게 향하는 아가타의 감정은 대체로 호의, 조금은 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두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관계의 키는 아가타가 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그가 휘둘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마저 그가 세나에게 기꺼이 져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구도라는 겁니다. 다면적인 모습이 있어 해석하는 재미가 있네요.

앞으로 이 영웅과 조력자의 중심이 어떤 식으로 자리 잡힐지, 그때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을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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