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원(恩怨)
원한과 의혹을 달아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아래에서 성벽 위를 올려다보려면 구름의 모양을 헤아리듯 고개를 한참 들어야 했다. 마침 모래바람이 몰려와 손차양을 하니 그제야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삭막한 황무지를 굽어봄에도 붉은 강변에 섰을 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멀거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서 있는 이 황야도 언젠가는 피보라가 흩날리는 전장이었으며, 당장에라도 그렇게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찰나 이름도 모르는 그를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얼른 고개를 내리고 옥문을 향해 마저 걸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같다. 당신의 도리로 당신을 다스리리라.
기회가 두 번 있지 않음을 알았기에 신중에 신중을 가했다. 오는 도중에 도적을 손봐주고 얻은 약간의 자금과 검 한 자루로 거사를 도모하기엔 준비가 몹시 부족했으나, 시간을 오래 끌어봐야 나 같은 어린아이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질 테다. 옥문의 병사와 강호인들은 길거리 왈패 따위와 같지 않아 충분히 조심해야 했다.
그 사람은 ‘종사’라고 불렸다. 염국 병사들의 우두머리 격이었으니 높은 지위에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듯 온 백성의 선망을 받는 건 의외였다. 그를 흠 잡는 이는 아무도 없고 칭송하는 이들뿐이었다. 나는 그게 퍽 기이하게 여겨졌다. 살아있는 사람이 생애 오로지 덕이 되는 일만을 골라 쌓을 수는 없다. 마치 현세의 인물이 아닌 과거의 영웅을 노래하는 듯했다.
어쨌거나 그 종사는 사람들의 말처럼 전설의 생물이 아니라 실존하는 장수이니 언젠가는 병영 바깥으로 걸음할 테다. 나는 그저 때를 기다리면 되었다.
결과만 두고 말하자면 실패했다. 사실 성공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설마 칼끝조차 닿지 못할 줄은 몰랐다. 어릴 적부터 수채의 주인인 아버지에게 검을 배워 재능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고, 또래와는 수준이 맞지 않아 어른들과 투닥대기 일쑤였으나 자만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종사는 내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분명 급습에 유리한 지형에서 적기를 노려 덤벼들었는데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꼬리에 달린 검 같은 것이 목전에 박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화가 난 기색도, 놀란 기색도 아니었다.
“너는…… 그때 본 그 아이로군.”
강변에서의 이야기일까, 황야에서의 이야기일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검을 내려놓지도 않았다.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내게 볼 일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갚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초지종을 따져 묻지도 않으며 꼬리를 거두었다.
“허나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고 있군. 스스로 믿지 못하는 일을 어찌 행하겠는가.”
“…….”
“어디서 지내고 있지?”
그가 질책하듯 서두를 열더니 갑작스레 거처를 물었다. 나는 어떤 경계도 보이지 않는 태도에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물가를 떠나 사막으로 왔으니 집이라 부를 만한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디든.”
“나와 함께 가자.”
“뭐라고요?”
“네가 원한다면 무공을 가르쳐 주마.”
“왜…….”
“그러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니.”
나는 단박에 허를 찔려 답할 말을 잊었다.
결국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제 목숨을 노리는 살수를 지붕 아래로 들이는 별난 취미가 있건 말건, 그는 천하제일의 고수였으니 나도 강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자금도 떨어져가던 참이라 당장 길거리에 나앉으면 복수는커녕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그가 나를 고발해 정체가 탄로 나면 아예 옥문에서 쫓겨날 테였다.
또, 모든 실질적인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알고 싶은 게 있었다. 원망은 어디에서 시작되며 언제 거두어지는지.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옳고 그르다 여기며 서로 싸우고 돕는지. 그처럼 강인한 무도가가 어찌하여 결코 승자의 웃음은 보이지 않는지를.
그렇게 나는 그의 자식도, 제자도 아니면서 그를 밤낮으로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이름이 ‘총웨’임을 알게 된 건 꽤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처소에는 이미 나 말고도 다른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그 애는 무척 얌전하고 말수가 적어, 우리는 종사가 처음 서로를 소개해 줄 때 빼고는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었다. 내가 그 애에 대해 아는 건 운청평이라는 이름 석 자와 열 살 때 종사에게 거두어져 그를 따르고 있다는 것, 글쓰기를 즐긴다는 사실뿐이었다. 이내 그는 평범한 관군 서기가 아닌 종사의 녹무관이 되기를 자처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하늘이 높아 산뜻한 볕이 내리던 날. 나는 무심코 그에게 물었다. 평소라면 서로에게 호기심을 표하는 일은 없을 테였다. 단지 그날따라 유난히 그의 붓질에 막힘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는 길을 망설임이 가로막지 않는 자의 손놀림이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 사람의 무술을 기록하고 있는 거죠?”
“이것이 제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러길 선택했느냐 묻는 겁니다.”
대답하면서도 바지런히 손을 움직이던 녹무관은 그제야 붓을 내려두고 고개를 들었다.
“사저에게 질문을 받다니 감회가 새롭네요.”
“저도 그렇게 정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건 사저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죠.”
그러고는 녹무관이 잠시 고민했다. 답을 떠올리기보다는 표현할 말을 고르는 듯했다.
“선생님께서 옥문을 백 년간 수호하고 계시는 건 사저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 도시에 없겠죠.”
“그런데도 저는 사람들이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구태여 반문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종사의 업적과 인품을 익히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이곳을 태산처럼 지키고 서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곁에 머무는 녹무관이나 나조차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황학은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으니, 그처럼 세월에 잊혀 아무도 모르는 그분의 역사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살짝 열어둔 창으로 서서한 동풍이 불어와 상 위의 종이들을 가볍게 헤집었다. 그의 낡은 문진이 단단히 잡아주어 방이 어지러워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제가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재주로 선생님의 족적을 세상에 남기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지가 아니라 무예를 써내리는군요.”
“선생님께서는 말 못 할 사정이 많은 분이시지만, 무술을 단련할 때만큼은 무엇도 감추지 않으시죠.”
그는 눈꺼풀을 부드럽게 내리깔고 막힘없이 대답했다. 이미 수많은 번뇌와 고찰을 거듭해 거리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 ‘무공전’에는 무술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못다 한 말들이 담길 겁니다. 그분께서 보고 들은 것, 마음가짐과 깨달음, 천하와 계절의 변화까지.”
“…….”
“탈고가 끝나면, 사저도 꼭 읽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못해도 수 년은 걸릴 겁니다. 선생님의 경험은 도저히 한 사람에게 담길 만한 깊이가 아니니까요.”
“그때쯤이면 저도 그 사람을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저의 은인이자 은사를 해치겠다 말해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또한 내게 물었다. 나긋한 어조가 흡사 선문답이라도 하는 듯이 들렸다.
“사저는 어째서 원수를 갚는 데에 수단을 가리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걸 궁금해할 줄은 몰랐네요.”
“저도 그렇게 속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가 방금 전의 내 말을 따라 하며 가만 웃었다. 참 보기보다 완고한 이다.
“그 사람이 행한 방식으로 값을 치르는 것이 정당한 복수입니다.”
“분명 선생님께서는 암기나 독극물 같은 술수를 쓰지 않으시죠.”
“그러니 천리를 내다보기 위해 한 걸음 더 높이 오르려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나의 도리였다. 그는 황무지를 떠돌게 될 처지에 놓인 어린 나를 거두어주었고 가르침을 시사했다. 원(怨)을 말하며 은(恩)을 모르는 체할 수는 없다.
내가 작은 배 하나를 붙들고 혼란 속의 수채를 떠날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각오를 정했다면 돌아올 생각일랑 말고 계속 걸어라. 네 아비가 이른 것보다 넓은 세상을 둘러보며 하나에 사로잡히지 말아라. 아직 어머니의 전언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지만, 마음을 급히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말을 잇지 않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더 물을 말은 없었기에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훈련장으로 향하자 그 사람이 한창 병사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인이자 원수인 자. 돌려받을 빚이 있어 찾아왔으나, 도리어 갚아야 할 빚이 생겨버렸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원한과 의혹을 달아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확실한 건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사람은 마침 잘 왔다며, 한 신입 병사와 검술을 겨루어 보라고 일렀다. 당사자는 아무리 그래도 어린 소저에게 질까보냐 하듯 긴장한 표정이었고 다른 병사들은 재밌는 구경이 났다며 좋아라했다.
“그러죠.”
역시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 복수를 위해, 답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나와 당신의 도리를 따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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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창작
방랑
산천은 결코 움직이지 않아. 눈에 담고 싶다면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중심(中心)
나를 구해줄 사람. 날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사람. 그러나. ‘나만의 것이 아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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