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산천은 결코 움직이지 않아. 눈에 담고 싶다면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클로 by 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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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이제 손목을 가볍게 돌리면 된다.”

“우와, 이렇게 높이 던져보는 건 처음이야!”

“종사님, 저도 알려주세요.”

시장으로 통하는 넓은 거리 한쪽에서 어른 하나와 아이 여럿이 도란대었다. 뛰어난 유리 공예를 취급하는 상인이 어제 막 들어왔다기에 구경할까 싶어 거닐던 협객은 익숙한 음성에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람이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죽방울이 들려 있고, 그는 대나무 막대로 기예라도 펼치듯 돌렸다 던졌다 하며 어린 동지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을 피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자 그가 손장난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뭐 하는 거야?”

“종사님이 공죽을 가르쳐 줬어요.”

“우리 할머니보다 훨씬 잘 해요! 아마 옥문 제일일 거야.”

“누나도 해볼래요?”

협객은 자신이 50년 전쯤으로 시간을 역행했는가 하는 터무니없는 의심을 머리 한구석에서 간신히 밀어내고 말했다.

“총웨, 요즘 애들은 이런 거 안 해.”

볕이 내리쬐는 푸른 하늘 아래 총웨가 눈을 휘며 맑게 웃었다. 조막만 한 아이들과 꼭 같은 면모였다.

“갖고 있길래. 그래도 가르쳐 주니 재밌어하던걸.”

“흐음. 아는 애들이야?”

“예전에 조금.”

예전이라니? 묵은 단어를 수식하기에 아이들은 너무 어렸다. 많이 쳐줘도 대여섯 살을 넘지는 않아 보였다. 그가 작은 의문을 품는 새 총웨는 아이들과 손인사를 나누고 그에게 다가왔다.

“장에 가는 길이라면 함께 걷자. 나도 마침 향하던 참이었어.”

“당신도 공예품을 구경하려고?”

“물론 그래야지. 좋은 술잔이라도 구하면 달이 떴을 때 한 잔 나눌까.”

“좋아.”

두 사람은 거리를 좁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유난히 사이가 좋은 종사와 협객이 붙어 다니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행인도 그들을 익숙한 풍경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협객은 그와 대화를 나누면 굳이 칭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곧잘 ‘총웨’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럴 때면 세상만사 갖은 시름을 떠안은 표정보다는 훨씬 봐줄 만한 낯이 되었기 때문이다. 옥문 백성들 간에 유행하는 이야깃거리와 지인들의 신변잡기를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면 상인의 점포에 금방 도착했다.

주위에는 이미 손님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다리려면 꽤나 서 있어야 할 인파였다. 그때 개중에 종사를 알아본 이들이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 주어 줄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총웨는 한사코 사양했으나 백성들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협객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팔짱을 끼고선 앞으로 쭉쭉 걸어나갔다.

“유명인이랑 있으면 편하다니까.”

“그래서 나랑 같이 다니는 거였어?”

“글쎄, 어떨까.”

장난스런 댓거리가 오가고, 많은 배려 덕에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차례가 돌아왔다.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는 노련한 점주가 박수를 곁들이며 막힘없이 상품 소개를 이어나갔다. 진열된 것들만 보아도 상인의 수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도 한 손으로 굴릴 수 있을 작은 유리구슬부터 고관직의 나리들이 집 한편에 장식해 둘 법한 커다란 동물 조각까지, 폭넓은 가격이나 종류가 남녀노소 모두를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칠색 유리들은 제각기 햇빛을 굴절시켜 보는 사람의 눈동자까지 번쩍거리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천자만홍이라는 말로 손색이 없었다. 당연하게 그들이 찾던 술잔도 있었다. 총웨는 날아오르는 용이 새겨진 무색투명한 잔을 들어 살폈다.

“직접 만든 것인가?”

“아닙니다. 저는 일개 상인일뿐이니까요. 이건 제 딸의 작품입니다.”

“딸의 솜씨가 대단하군. 감탄했네.”

“아츠에 재능이 있어서요. 만드는 걸 보고 있으면 저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경험 많은 상인도 자식 자랑에 빠지니 여념이 없어졌다. 그 틈을 타 협객은 교묘한 화술로 에누리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별 뜻 없이 칭찬하던 총웨는 그 순간부터 뒷전이 되어 곤란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입씨름하던 두 사람은 절세 무공을 겨루는 무인과 같이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기어코 술잔 두 개를 원가의 3할이나 깎아 거래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구경하다 환호성을 터뜨렸다. 총웨는 처음 집었던 투명한 잔을 골랐으며 협객은 짙은 푸른색이 인상적인 잔을 골랐다. 흥정에 성공해 기분이 좋아진 그가 콧노래를 흥얼대며 돌아섰다.

“어쩐지 간밤에 꿈이 좋더라니.”

“악몽을 꿨더라도 네 말솜씨는 화려했겠지만.”

“화려한 예술품을 가지려면 주인 될 자도 마땅히 그래야지.”

그 후로도 돌아갈 때까지 협객은 풍류를 타고 농담을 던졌다. 총웨는 간간이 웃거나 마주 신소리를 했다. 

“두 사람도 부를까?”

맹철의와 좌선료 얘기였다. 총웨가 그렇게 말하자 협객은 의문스레 눈썹을 올리며 부정했다.

“맹철의는 그렇다 쳐도, 좌장군은 요새 이런 갑작스럽고 사적인 자리에 어울리지 않던걸.”

“직책이 그를 너무 억압하지 않아야 할 텐데.”

“글쎄, 그 때문만은 아닐 거야.”

협객은 좌선료가 그들과 천천히 거리를 두는 이유를 알고 있었으나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쩌면 총웨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말하지 않고 이유를 묻지 않으니 무지와 다름이 없다. 그는 늘 그런 식으로 부러 자신을 고립시켰다. 협객은 상념을 털어버리려 툭 내뱉었다.

“됐어, 그냥 우리끼리 마셔. 분위기 있고 좋잖아? 쌍월 아래의 두 전우.”

“시를 짓기 좋은 풍경이 되겠어.”

“구절이 절로 생각날 만큼 맛있는 술을 가져올게.”

“특별한 미주라도 얻은 거야?”

“몇 년 전에 담가둔 과실주가 있거든. 바로 오늘이 개봉할 날인 것 같네.”

“그거 기대되는군.”

둘은 각자의 일과를 위해 헤어졌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다시 만나기로 했다. 만남의 장소는 옥문의 누구나 즐겨 찾는 한 정자였다. 성벽만큼은 아니지만 높은 곳에 지어져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고, 바람이 잘 도는 위치여서 앉아 있기만 해도 작은 근심 정도는 금세 씻겨 내리는 명당이었다.

속설로 술은 사람을 세 번 취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분위기로 한 번, 향기로 한 번, 마셔서 한 번. 단연코 총웨는 첫 번째만으로도 모든 취기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단지 술을 마시는 것만으로는 쉽게 취하지 않았다. 그는 잔을 나눌 친우나 시끌벅적한 소음, 또는 짙게 내려앉은 적요 따위를 핑계 삼아 평소에는 삼가던 언행을 불시에 저지르곤 했다. 마치 ‘인간들은 으레 이렇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협객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자리도 어떠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짙은 선홍색이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잔에 가득 채워졌다. 총웨의 잔은 붉은 액체를 그대로 내보였고, 협객의 잔은 술과 잔의 색이 서로 상충해 기묘한 빛깔을 만들었다. 어느 쪽이고 절경이었다. 달빛 아래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술병 하나가 다 비었다.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던 협객이 상대의 잔을 채우며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나, 요즘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하고 싶은 일?”

“여행을 떠나고 싶어.”

목전의 종사만큼은 아니지만 협객 또한 옥문에 오래 있었다. 그를 여태껏 잡아둔 건 신념이기도, 정이기도, 미련이기도 했다. 언젠가 헤어지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총웨는 잠시 말이 없다가 부드럽게 미소했다.

“좋지. 넌 그게 더 어울려.”

“당신은?”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총웨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협객은 그런 그가 괘씸해서 도망칠 틈을 주고 싶지 않아졌다. 여느 때처럼 이름을 불렀다.

“같이 가자, 총웨.”

“....”

“산천은 결코 움직이지 않아. 눈에 담고 싶다면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나는….”

“상촉에 유명한 삼산십팔봉을 돌아보고, 강남에 가서는 신선한 물밤도 먹어보자.”

언제 세상사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받았냐는 듯 총웨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름을 불러도 예의 그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범주였기에 협객은 신경도 쓰지 않고 회유하려 노력했다.

“중원의 소주가 그렇게 맛있대. 이 모래밭 한가운데서 맛 좋은 술이나 차를 마실 기회가 얼마나 있어?”

느슨한 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어루만지며 휘돌았다. 총웨의 머리칼과 옷자락이 나부끼며 눈빛 또한 함께 흔들렸다. 그는 술이 목에 걸린 사람마냥 잔을 쥔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은 갈 수 없어.”

“아직이라니?”

“은퇴하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무슨 말이야. 당신이 하면 하는 거지. 누구 허락이라도 구하려고?”

“지금 옥문에는 내가 필요해.”

“이럴 때 당신은 꼭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처럼 말해.”

그저 비유로 한 말이었으나 무심코 뱉은 단어가 상대의 중심을 꿰뚫었다. 총웨가 한참 침묵하자 협객 또한 음주를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이럴 때면 그는 절벽의 바위에다 말을 거는 기분이었다. 수십 가지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며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름을 잘못 붙였어.’ 순간 생각했다. 쉐이(水)가 들어간 이름으로 지을걸. 그러면 저 꽉 막힌 사람도 조금은 계절을 따라 산으로 바다로 흐를 수 있게 되었을까.

“됐어, 지금 당장 가겠다는 게 아니니까. 알아만 둬.”

“...생각해 볼게.”

결국 협객이 한발 물러서주었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를 양보였다. 그는 총웨를 움직이게 하고 싶지, 위축 되게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도시의 오리지늄 등불이 멀리서 희미하게 아른댔다. 검은 하늘에 황금 빛무리가 번지자 한 폭의 도화와 같은 풍경이었다. 너머로 드넓은 사막의 밤이 이어졌다.

“문장을 지어 봐. 내 기분을 다시 들뜨게 만들어 보라고.”

“막중한 임무군. 어디….”

그날은 종내 사이좋게 취해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어깨동무를 하고 돌아갔다. 누가 누굴 받쳐주고 있는지 모를 기묘한 균형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남은 쪽은 금방 쓰러질 모양새였다. 그러나 취하지 않아도 늘 같은 상태였다. 어느샌가부터 그렇게 되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동행길이었다. 끝이 닥쳐오리란 사실만이 명확했다. 여인의 짧은 기침 소리가 기다란 그림자 위로 덮였다. 

“그냥 감기야.”

한 노인이 침상에 앉은 채 창밖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제 손주와 또래 친구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를 들으면 그 순간 바야흐로 세월은 거꾸로 흘렀다. 그러던 그는 어제 죽방울을 쥐여준 아이가 오늘 능숙하게 실을 돌리는 광경을 보고 자못 놀랐다. 오래 치우지 않던 창고에서 찾아내어 버리기도 뭣해 아이에게 쥐여준 물건이라, 정말로 가지고 놀리라는 생각도 못 했었다. 소리 내어 손주를 불렀다.

“언제 그렇게 잘 하게 된 게야. 마음에 들었니?”

“연습했거든요. 종사님이 가르쳐 줬어요.”

“종사님이….”

노인이 탄식했다. 약 60년 전 그에게 놀이를 가르쳐 준 사람이 종사였다. 이도 채 다 나지 않은 꼬맹이에게, 전설 속 무인은 다정한 부모처럼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춰 주었다. 그게 참으로 좋았다. 그래서 버리지 못했다. 삶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추억이 불시에 마음의 문을 젖히고 들어와 단숨에 눈가가 젖어들었다. 노인이 울기 시작하자 아이가 당황하며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할머니, 왜 울어요?”

“아니야, 안 운다.”

“울면서.”

“기뻐서 그래.”

“기뻐도 울어요?”

“가끔은 그렇지.”

한백년이 흘러도 종사는 종사였으나 꼬마는 노인이 되었다. 모두 그가 언제까지고 옥문의 수호신으로서 남으리라 믿었고, 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지금 깨달았다. 세상에 아프지 않고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몸이 그대로여도 마음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노인은 의롭고 다감한 그가 걱정이 되어 오래 울었다.

총웨는 자신을 위해 우는 사람이 있음을 끝내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그곳에 존재했다. 회화나무는 뿌리를 내렸으며 협객은 떠돌이 제자에게 ‘총웨’라는 이름을 전했다. 염국이 그를 기억했다.

마침내 총웨는 떠난 이의 발자취를 따라 산천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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