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돌

[천아공/NCP] 레고 조각과 작은 범고래

천재 아이돌의 연예계 공략법 2차 창작, 온라온 중심

길잡이 by R

백업 :: 2021. 05 전력 90분 참가, 주제 [반지] 


멍한 기분이었다. 초점을 놓친 카메라가 찍는 풍경을 눈으로 대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흐린 윤곽 탓에 시선이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분산됐다. 사람과 사물의 경계가 흐렸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도 잊어버리고 관성적으로 눈을 껌뻑거렸다. 안경 같은 걸 썼던가 싶어 눈가를 더듬어보고 싶었지만 손만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뭉개진 풍경의 일부가 험악하게 일렁거렸다. 움직이는 형태를 인지 속에서 떼어내자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사람이 위협적인 목소리를 냈다. 드럼을 기타 피크로 두드리는 것처럼 잘못 만들어내는 별 볼일 없는 소리 같았다. 소리보다도 소음이라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사람의 형상이 아메바의 분열처럼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자꾸만 늘어나며 세상을 뒤덮어갔다.

- 온하제.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온기 없는 부름이 건조하게 공간을 울렸다. 누군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았지만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등을 돌리고 발이 닿는 곳으로 아무렇게나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따라 변화하는 세상은 뭉개지는 찰흙 같았다. 각자에게 곱게 색을 들인 찰흙.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덩어리로 뭉칠 수 있었다. 길게 늘이며 떨어져 나갔던 것들마저도 근처의 또 다른 것들과 덩어리로 뭉쳤다. 엉망인 소음을 만들어내는 흉한 형상들마저도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한데 뭉칠 수 있는 것들 속에서 그만은 섞여들지 않는 이물질이었다. 어릴 때 주무르던 점토 안에 실수로 섞여들어간 작고 날카로운 레고 조각 하나. 그것이 자신임을 그는 알았다. 그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그는 저 듣기 싫은 소음을 향해 무어라 말했을 지도 몰랐다. 제법 후련하게 털어냈던 것 같기는 한데… 억지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그가 느끼고 있는 이 기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

걷다 보니 흔들리는 손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심하게 뭉개진 풍경 위로 툭 떨어진 작은 은색 덩어리가 보였다. 길을 걷다 흔하게 발에 채는 돌멩이 정도의 크기였다. 그것이 떨어져 나가고 텅 비어있는 왼손을 바라봤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은 맞는 것 같았지만 무얼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현듯 주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적휘적 다가가 앞에 쭈그려앉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얌전히 말을 듣는 손이 바닥에 놓인 은색 덩어리를 쥐었다. 반짝이는 은색. 조그만 주제에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온기가 묻어있었다. 엄지손가락이 덩어리를 문질렀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뭉갠 덩어리가 깎여나가듯 투박했던 형태가 점차 매끄러워졌다. 진흙 속에 파묻혀있던 것에서 흙을 털어내듯 그것의 반짝임이 커졌다. 이건……. 평평한 대신 중간이 꼬여 있는 작은 링. 온전히 드러난 형태가 주변으로부터 이질적으로 떨어져 나왔다. 이건… 내 거야. 그의 확신을 중심으로 의미 없던 것들이 무너져내렸다. 더 이상 뭉칠 수도 없이 굳어 부서져내리는 것들이 바닥보다 낮은 곳으로 떨어졌다. 사라졌다.

검은 허공에 서 있던 그가 다시 앞을 향했다. 찰박찰박. 딛고 있는 것은 땅이 아닌 물이었다. 검다고 생각했던 길이 푸르르게 물들었다. 발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때부터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공으로부터 금빛 반짝이는 가루가 푸슬푸슬 떨어졌다. 눈처럼 떨어지는 것들이 바닥에 흐르는 물에 닿을 때마다 서로 다른 청량하고 말간 소리를 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발을 내디뎠다. 내딛는 걸음이 금빛처럼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이건, 그가 익히 알고 있는 풍경이었다. 별가루 같았던 금색 모래가 확연하게 음표의 형태를 갖췄다. 발밑의 바다가 금빛 사막이 되고, 귀를 즐겁게 하는 노래가 그를 춤추게 만들었다. 이다음에 다가와 하늘을 멋들어지게 부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꿈을 알았다.

쥐고 있던 은색을 손가락에 끼웠다.

- 온라온!

그의 이름을 부르며 창공을 가로질러 마중 나오는 범고래를 향해, 온라온은 반지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금빛으로 빛나는 그의 세상 속에서 그는 더 이상 레고 조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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