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아공/래리라온] 자각몽
천재 아이돌의 연예계 공략법 2차 창작, 래리X온라온
백업 :: 2021. 05 전력 90분 참가, 주제 [꿈]
“안녕하십니까.”
익숙한 인사말이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너 뭐냐.”
먼저 떠올린 형태가 있었지만 앞에 있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분명 성별은커녕 사람인지조차도 확인이 어려워 어렴풋한 형태를 겨우 인지하는 게 고작이어야 할 텐데…. 면담 요청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를 받지 못한 채로 왔기 때문에 오류라도 난 모양이었다. 명색에 관리국이라는 명칭까지 달고 있으면서 어지간히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었다. 게임도 이정도면 섭종이 눈앞에 아른댔을 거다. 어디 변명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눈으로 노려보자, ‘저것’이 태연자약한 태도로 차를 마셨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온라온’이었다. 내가 아니라, ‘온라온’. 이런 식으로 애써 구분하려는 노력조차도 기분이 나빴다.
‘관리자에게는 외모가 필요 없는 거 아닌가?’
흐리멍텅한 얼굴을 하고 있던 녀석이 욕심을 내는 게 이상하지 않은 얼굴이긴 하지만, 단둘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저 소중하고 완벽한 보물을 이런 식으로 마주하자니 급격하게 책상을 뒤엎고 싶어졌다.
“14227호입니다.”
“그거 말고.”
“아니면 개새끼라고 할까요?”
갸우뚱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머리카락이 하얀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만족스러움에 감탄이 나왔다. 역시 세상에 평화를 이룩할 미모다. 나라를 망하게 할 얼굴이기도 하고. 후속 활동을 시작하며 색을 바꾼 나와는 다르게 아직 실시간 패치가 덜 된 듯 하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나를 봤다. 쟤는 렌즈 낄 때 고생 안 해도 됐겠지. 그건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무슨 애교를 부려도 완벽하게 어울릴 얼굴을 보고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불쾌했다.
‘하여간 불법 복제는 이래서 문제야.’
시답잖은 생각을 하자 그나마 속이 조금 풀렸다. 다시 침착하게 생각을….
“언제는 저를 고객님 마음대로 부르지 않으신 것처럼 구십니다?”
생각을….
“왈왈.”
“이 새끼가.”
늘 그랬듯 몇 마디로 나를 빡치게 하는 놈은 많지 않았다. 덕분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환장할 것 같은 기분도, 속에서 나는 열불도. 하나같이 익숙해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갑자기 데려온 걸로 모자라 물어본 것도 아닌 말을 대답처럼 뱉으며 얄밉게 구는 관리자의 멱살을 붙잡아 탈탈 털어주고 싶었다. 개스템이고 래리고, 역시 그때 한 대로는 모자랐던 게 분명했다. 생각할수록 저기서 웃고 있는 관리자의 면상이 밉상으로 보였다. 희대의 미모로 저렇게 밉상인 것도 재주였다. 자세히 보니 매력을 전부 복구하기 전의 얼굴 같기도 하고…. 역시 헷갈릴 바에야 확실한 차별화가 필요하니 손수 주물러 조금 다르게 만들어주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쳐맞기 전에 얼굴 당장 안치우냐.”
“또 치셔도 못합니다. 여긴 고객님의 꿈이니까요.”
호롭, 차를 마시는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들고 있는 찻잔 탓인지 평소에도 기묘하기 짝이 없던 특유의 목소리가 동굴에서 내는 소리처럼 웅웅 울렸다. 작은 찻잔으로 저런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재주였다. 들리는 게 그것 뿐이라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속이 빈 것 같기도 하고, 종류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차향이 좋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기분이 널뛰며 딴죽을 거는 행동이 괜한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이게 다, 자꾸 꿈이니 어쩌니 헛소리를 하는 래리 때문이겠지.
“나도 줘.”
“알아서 드세요.”
14227호에게는 기껏 풀어졌던 사람의 기분을 다시 진창에 처박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이에 주먹으로 상냥히 화답해야 할 것 같았다. 일어나려던 찰나에 책상 앞에 어느샌가 세팅되어 있는 찻잔이 보였다.
‘자기가 무슨 츤데레야?’
의자를 끌어당기며 앉았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방금 전에 코끝을 스친 좋은 향기가 입안에 가득 퍼져나갔다. 꽃이나 과일은 아닌 것 같았는데 달달하고 특이한게 맛이 좋았다. 굳어있던 아주 작은 긴장마저도 완전히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몸이 늘어지자 저절로 너그러워졌다. 빈 찻잔을 앞에 있는 래리의 찻잔과 대놓고 바꿔치기 하고는 다시 잔을 기울였다.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른 건데.”
“안 불렀습니다. 고객님이 오셨지.”
내 얼굴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놈을 보는 것은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상황을 두고 자각몽이라고 표현하기에 코웃음을 쳐주었다. 본인이 꿈을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각몽이 어딨다고. 그러자 14227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설명을 덧붙였다. 시스템이 꼬여 꿈과 현실이 연결됐다던가, 덕분에 야근이라느니,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걸 보니 꿈이랑 현실이 대체 무슨 차이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정말로 별다른 일이 없는 것 같아서 차 마시기에 집중했다. 간간히 대화를 나눴지만 하나같이 시시껄렁한 것이었다.
“요즘 지내는 건 어떠십니까?”
어디선가 나타난 티스푼으로 14227호가 말간 찻물을 휘저었다. 찻잎 부스러기도 떨어진 것 없이 말갛기만 하던데 쟤도 참 유난이다.
“어차피 내 꿈이면 알고 있을 거 아냐. 아니면 읽던가.”
“저도 진짜가 아니라서 파업 중입니다.”
꿈이라면서 따지는 것도 참 많았다. 아, 꿈이라는 꿋꿋한 주장은 그간의 의리로 반만 믿어주기로 했다. 일못하는 관리국에서 사고를 치고 핑계를 붙인 것일지 누가 안다고. 오히려 전적이 있다보니 그쪽 가설에 더 신뢰가 갔다.
‘저 새끼, 맞기 싫어서 내 얼굴을 하고 나온 걸 거야.’
나름 합리적인 추론 같았다.
홀짝이다 보니 또다시 찻잔이 비어 있었다. 세 잔이었나? 네 잔? 물리지도 않을 정도로 맛이 좋길래 몇 번인가 잔을 바꿔치기해 갔더니 아예 옆에 주전자를 마련해준게 그쯤이었다. 돌아가면 다이어트 중이니 이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불러들인 14227호가 조금, 매력 10만큼을 복구한 나처럼 예쁘게 보였다.
여유롭게 구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슬슬 돌아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꿈이라고 우길 거면 볼거리라도 좀 가져다 놓던가. 책상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인 공간이 참 멋이 없었다.
“래리야, 일어나는 방법이나 읊어봐.”
“눈을 감고 숫자를 셋까지 거꾸로 세세요. 꿈이라는 건 결국 믿어주지 않으실 모양이지만 그래도 엄연한 자각몽이니 개운하게 일어나실 겁니다.”
다시 차오른 찻잔을 한 번에 원샷을 때리곤 눈을 감았다.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3,
2,
1.
숫자를 다 세자마자 롤러코스터를 타고 높은 곳에서 훅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몸속 장기가 바닥으로 단번에 쏠리는 느낌이 났다. 무서운 건 아닌데, 그냥 기분이 조금 나빴을 뿐이었다.
눈을 뜨려는데 눈꺼풀이 올라가지 않았다. 주변이 어두운 것 같기도 했지만 뜬 눈과 감은 눈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체력 근력 힘 할 것 없이 전부 초기화되면 딱 지금같은 기분일 것 같아 지나치게 불쾌했다. 방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몸상태에 꿈이긴 했구나, 싶어졌다. 다만 늦은 깨달음과는 별개로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래리를 때리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힘을 꾹 주어 눈을 뜨자 시야가 가물가물하게 잡혔다.
순식간에 자리잡는 현실에, 몸이 축축 늘어졌다. 땀이라도 흘린 건지 온몸이 끈적거렸다. 온라온이 된 후부터 정말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잊고 지냈는데.
…이 사기꾼이.
“형, 온라온 일어났어요.”
“그래? ……하게 ……줘.”
먹먹했던 귀가 트이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뭉개지는 시야 속에서 이마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떨어졌다.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근처를 오갔다.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야, 귀환자 대 관리자로 면담 한 번 때리자.’
[덕분에 바쁘니까 가까운 시일 내로는 제발 면담하지 맙시다. 체력 +1]
‘다음에 보면 일단 한 대 치고 시작해야지.’
[……. 체력 +1]
뇌물처럼 찔끔찔끔 더해주는 체력에도 기분을 좋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최근에는 체력이 많이 올랐던 터라 더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이 시점에서 또 몸살이라니 말이 안 됐다. 그러니, 죽은 듯이 잠들어서 체력을 회복해도 모자란 종잇작같은 몸으로 기분 나쁜 꿈마저 꾸게 만든 래리가 잘못했다. 일단 내 얼굴을 하고 있는 래리는 개꿈이 맞는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 봐도 래리가 잘못했다.
입안에 아직 차향이 감도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 잘생긴 내 얼굴과 내용도 없는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신 감상이랄 건 하나였다.
아.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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