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아공/결온] 좋아해? 좋아해!
천재 아이돌의 연예계 공략법 2차 창작, 서문결X온라온 (결라온)
백업 :: 2021. 04
“먼저 두 개는 이 맛으로 주세요!”
진열창에 손가락을 콕 찍은 온라온이 해사하게 웃었다. 포장 용기를 정리하는 척 곁눈질로 훔쳐보던 아르바이트생의 손에서 플라스틱 뚜껑이 후두둑 떨어졌다. 정면에는 아이스크림 컵과 스쿱을 들고 풀린 얼굴로 대기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입을 벌린 채로 굳어있었다. 둘 모두 이게 현실인가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작 웃음 한 번으로 일반인 두 사람을 격침시킨 온라온은 싱글벙글 천진한 얼굴이었다. 멍한 얼굴의 아르바이트생이 아이스크림을 컵에 담았다. 작고 납작한 컵이라 스쿱으로 몇 덩이 올리자 금방 볼록하게 쌓였다. 눈대중으로 양을 맞췄으니 저울에 올려 미세한 정량을 채워야 했다. 가득 찬 컵을 들고 허리를 들자 황홀한 미모와 눈이 마주쳤다. 노란 조명 아래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 그 아래 설렘으로 발갛게 상기된 뺨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순간 나라를 통째로 애첩에게 바치는 암군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능력이 부족해 나라를 안겨 줄 수 없음에 통탄하며 아르바이트생은 다시 아이스크림 통에 스쿱을 내밀었다. 일하는 사람의 위치에서만 보이도록 작업대에 붙여둔 ‘정량 준수!’의 메모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비장한 마음으로 덤을 얹으려던 아르바이트생은 스쿱이 통의 바닥을 긁고서야 제정신을 찾았다. 자신이 담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어떤 맛인지 뒤늦게 알아차린 얼굴이 미묘해졌다.
“저어…….”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의 모습에 온라온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수상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쭉 편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일련의 행동에 아르바이트생은 무언가 깨달은 듯 비장해진 얼굴로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컵에 내용물을 꾹꾹 눌러 담는 동작이 기운찼다. 그 모습을 흘긋 바라본 온라온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SNS에서 유행하고 아이스크림 통의 바닥이 보일 만큼 잘나간다지만 온라온은 결코 맛이 궁금하지 않았다.
‘만든 사람은 그렇다 치고… 출시될 때까지 말린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사실, 보기만 해도 불쾌해지기에 충분해 할로윈이 떠오르는 시즌메뉴였다. 형용할 수도 없이 께름칙한 색깔에다 어떻게 봐도 아이스크림이 가질 수 있는 텍스쳐가 아닌 형태를 지닌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했다. 라테월드에서 시킨 것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걸 만들 생각을 한 사람은 물론, 끝내주는 후기를 올려 유행까지 만들어낸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온라온은 이미 사용이 완료된 모바일 쿠폰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내가 안 먹으면 그만이지. 자신이 유행을 만들어낸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온라온은 뻔뻔하게 모른 체했다.
“아까 요한이 형이 내 츄X춥스 뺏어갔다고 지우 형한테 일렀거든?”
“응.”
“그랬더니 방금 나오는데 지우 형이 요한이 형 거는 꼭 이걸로 하래. 엄청 거지같은 맛이라고.”
요한이 형은 두 개나 먹어야 하는데! 두 개라는 말에 악센트를 넣어 강조함과 동시에 엄지와 중지를 브이자로 펼치며 온라온이 악동처럼 짓궂게 웃었다. 심부름 내기에서 꼴등을 했지만, 덕분에 종류 선택권으로 횡포를 부릴 수 있게 된 온라온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키득거렸다. 승자라고 으스댄 반요한이 주문했던 맛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한껏 들떠있는 온라온의 모습을 본 서문결은 주문을 막지 않았다. 대신 서문결은 온라온의 작은 머리통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한 가지를 주의시켰다.
“라온아, 말조심.”
“합…!”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는 동작에는 애교와 장난기가 묻어있었다. 둥글게 휘어 웃고 있는 얼굴이 말갛기만 했다. 가만히 바라보던 서문결의 얼굴이 저만 알아볼 수 있게 부드럽게 풀리자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서문결이 쓰다듬던 손을 내렸다. 머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손을 온라온은 다급하게 붙잡았다. 물끄러미 닿아오는 시선을 온라온은 애교스러운 얼굴로 혀를 깨물며 어물쩍 넘겨버렸다. 모른 척 붙잡은 손에 깍지를 끼자 손바닥에서 심장이라도 뛰는 것 같았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온라온은 어린아이처럼 꼭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다른 맛은 뭘 고르겠냐며 부르는 직원의 말에 다시 쪼르르 진열창에 달라붙었다. 손을 놓아주지 않아 서문결이 뒤따라왔다. 온라온은 방금 전에 골랐던 메뉴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여러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 통을 살폈다. 가능하다면 통 속에 퐁당 빠지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서문결을 끌고 좌우로 왔다 갔다 거리며 아이스크림을 살피더니 뭔가 세는지 붙잡은 손안에서 손가락이 꼼질댔다. 잠시 후엔 열 가지도 넘게 늘었던 후보가 다시 두 개로 줄어들었다. 그쯤 해서 선택지를 더 줄이는 것에 실패한 온라온이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서문결에게 물었다.
“형은 뭐 먹을 거야?”
질문을 던져놓은 채로 이것도 저것도 전부 먹고 싶다며 온라온이 중얼거렸다.
“나는 이거.”
“형도 이 맛 좋아해?”
“응.”
서문결은 고민도 않고 온라온이 내내 고민하고 있던 맛 중에 하나를 가리켰다. 나름 진지한 얼굴로 온라온이 남은 다른 맛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그것도 좋아.”
서문결이 대꾸하자 온라온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바라는 것이 있어 눈치보며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온라온이 가늘게 휘어진 눈으로 배실배실 웃었다. 계속 붙잡고 있는 손이 살살 흔들렸다.
“그럼 나랑 나눠먹자.”
“그래.”
온라온이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서문결이 고른 맛과 나머지 하나, 그리고 심부름 벌칙을 피한 나머지 두 사람이 부탁했던 맛을 직원에게 전달했다. 아르바이트생이 아이스크림을 퍼올릴 때마다 바깥 구경하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쭉 빼고 까딱거리는 온라온의 모습에 서문결이 미소를 지었다.
서문결의 손을 잡고 매장을 나서는 온라온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쿠폰을 쓸 수 있는 매장을 찾아오느라 멀리 나왔지만 날씨가 좋아 산책길 같았다. 구름 떠가는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걸친 겉옷에 딱 맞게 서늘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많지 않아 깊게 눌러쓰고 있는 모자나 마스크를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온라온은 지난 앨범의 수록곡을 낮게 흥얼거렸다. 사람은 없고 마음은 여유로우니 할 만한 것은 길거리 구경이었다.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 봉투를 흔들며 건물들을 찬찬히 구경했다. 망가진 간판, 문 앞에 걸린 클로즈 팻말, 사람이 두엇 돌아다니는 편의점, 지나가는 사람들. 음료컵을 들고 건너편 길을 지나가는 사람도 보였다. 아이스크림 말고 셰이크를 살 걸 그랬나. 무용해진 선택지를 떠올리던 온라온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손을 붙잡고 있던 탓에 얼결에 손이 당겨진 서문결이 뒤돌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온라온을 봤다. 놓은 손이 밑으로 떨어졌다. 서문결과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보던 눈이 가늘어졌다.
아, 그래. 선택지.
넓디넓은 선택지 중에 두 개를 골랐는데 운 좋게 두 가지 전부가 일치할 확률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제 마음을 감추려다가 서문결이 어떤 사람인지조차도 깜빡해버렸다. 바보같은 실수를 깨닫기가 무섭게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남아있던 보잘 것 없는 자존심이 흉하게 고개를 들었다. 입이 삐쭉 내밀어지는가 싶더니 서문결이 이유를 묻기도 전에 투덜거림이 먼저 튀어나왔다.
“형, 또 나한테 맞춰준 거지.”
다이어트 중의 일탈이라고 들뜬 나머지 생각 없이 즐거워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했다. 아무리 간식이 고프고 단 둘이 움직이는 벌칙수행이 데이트같다고 생각했어도 염치마저 잊어버렸다니. 손바닥에 맞닿은 온기에 마냥 헤벌쭉 늘어져있을 일이 아니었는데! 부끄럽고 민망하니 나오는 것은 투정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문결이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조용하고 다정한 시선이 온라온을 향했다. 이윽고 차분하게 상황을 읽은 서문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온이 네가 좋아하는 건 나도 다 좋아.”
익숙하다면 익숙할지 모르는 말을 들으면서도 온라온은 크게 움찔했다. 몇 번씩 강조했는데 여전히 서문결은 심장을 철렁하게 하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뱉곤 했다. 정말 별 것 아닌, 의미없는 다정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마다 온라온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 별일 아닌 것처럼 일상으로 덕지덕지 꿰어놓았던 마음들이 툭툭 튀어나와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미 찰랑찰랑 고여있던 것을 넘치게 하는 것은 이처럼 별 것 아니라 여기던 한 방울이었다. 흔들리는 시선이 서문결을 향했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벌어졌던 입이 다시 일자로 다물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 밑으로 눈동자가 어쩔 줄 모르고 방황했다.
그만 파고 들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라면 태연하게 감출 수 있는 진심일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술렁거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리쬐는 햇빛에 잠깐 갑작스러운 일사병이라도 걸린 것만 같았다.
…정말 너무하다, 서문결.
울컥 감정이 출렁였다. 서문결이 팔을 당기며 “라온아?” 하며 부르자 숨을 탁 토해내듯 긴장하고 있던 어깨가 늘어졌다. 그제야 온라온은 흐물흐물 녹아내려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남의 심장은 마음대로 들었다 놨다하면서, 이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 정말 너무하지 않나. 그런 자신의 맘은 알지도 못한 채로 그저 한없이 다정하고 또 반듯하기만 한 무정한 시선을 외면하며 온라온이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짜증나, 서문 결. 아니, 사실은 아니야. 또 엉터리같이 널뛰는 감정이었다. 놀란 서문결이 다가오자 온라온은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아 진짜, 형.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말랬지.”
“머리 아파?”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표정이 일그러지고 작은 얼굴이 무릎 사이로 숨어버렸다. 진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옷을 붙잡고 있던 손은 꿋꿋하게 놓지 않은 채라, 마치 버티고 앉아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은 모양새였다. 들키면 놀림 당할 것을 알아도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일으키려는 듯 서문결이 손을 뻗자 온라온도 고집스럽게 힘을 줘 버텼다. 그것을 느낀 서문결은 팔을 붙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조용한 시선이 웅크리고 앉은 작은 등 위에 떨어졌다. 숨어버린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온라온은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투덜거림은 어느 순간부터 끊어져있었다.
“…형도?”
들려온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문결이 가만히 내려보자 온라온이 겁 많은 동물처럼 무릎 사이에 파묻었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눈물의 흔적은 없었지만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짓씹은 듯 입술이 평소보다 붉었다. 벙긋 벌어졌던 입이 다시 다물렸다. 숨겨지지 못한 불안이 웃으려 애쓰는 얼굴 위에 머물렀다.
“내가 좋아하는 거면 형도 다 좋다며.”
“……?”
“그럼 서문결도 좋아해?”
일어날 생각 없이 계속 쭈그린 채로 온라온이 그의 올려봤다. 이제는 서문결에게도 핏기가 가신 듯 창백해진 얼굴과 떨리는 눈이 확실히 보였다. 분명 다리도 저릴 텐데. 잔잔한 시선에 흐릿하게 걱정이 스쳐지나갔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온라온은 자신의 상태는 물론, 서문결의 시선도 알아차리지 못한 기색이었다.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고 있는 상황인데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안좋은 버릇인걸 알아도 결국 아무도 고치지 못한 버릇이었다. 뒤늦게 온라온의 말을 이해한 서문결이 눈을 껌뻑거렸다.
다만 말하는 바를 전부 이해하고도 서문결은 평온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놀랍지 않았다. 서문결이 온라온의 곁에 함께 쪼그려앉았다.
“날 좋아해?”
“……응.”
서문결이 물었고 온라온이 답했다.
“나도 좋아해.”
그래서 서문결도 온라온에게 답했다.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아는 거지?”
“응.”
“그래도?”
“그래도.”
이유를 묻는 대신 울 것 같은 목소리에게 잔잔한 목소리가 대답했을 뿐이었다. 많은 말이 생략되어 암호처럼 들리는 대화가 오갔다. 제대로 이어지고는 있는지도 의아한 대화였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조금 기뻐하는가 싶더니 금방 다시 창백해졌다. 떨림이 잦아들고 어울리지 않게 차분해지기 시작하는 표정이 위화감을 불러들였다. 여전히 때때로 자리하는 불안이었다.
“…내가 좋아해서?”
얼굴은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다른 이들이 구분하지 못하는 그의 기분을 알아보던 온라온처럼, 지금 서문결은 알아보기 어려운 복잡한 온라온의 표정을 이해했다. 이 아이는 처음 겪는 일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마냥 겁에 질린 어린 동물처럼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게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거리를 두고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럴 때에 해야 하는 요령 좋은 말을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 서문결은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문결은 옷을 잡고 있는 손을 당겨 온라온을 일으켜 세웠다. 가벼운 몸이 이번에는 손쉽게 따라 일어났다. 먼저 걸음을 옮기자 온라온이 마지못한 듯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옷깃을 붙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떨어져 나가려는 손을 서문결이 도로 붙잡았다. 실수가 아니라는 듯이 손가락을 얽으며 단단히 깍지를 꼈다. 오해 받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오해 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문결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손 안에서 움찔,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해서.”
숨을 죽여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개의 걸음이 나란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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