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돌

[천아공/견온] 낭떠러지

천재 아이돌의 연예계 공략법 2차 창작, 견성하X온라온 (성하라온)

길잡이 by R

백업 :: 2021. 08


“견성하! 너 찾는 사람 왔는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견성하는 고개를 돌렸다. 일어서려다 받은 방해로 어정쩡하게 짚은 책상다리가 작게 덜컹거렸다. 매점에 간다며 교실을 빠져나가던 녀석들 가운데 하나가 앞문에서 고개만 내밀어 소리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사라졌다. 견성하는 대답 대신 작게 눈을 찌푸렸다. 설명도 없이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쌩하고 사라진 녀석을 향한 서운함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교실에 잠깐의 정적을 선물할 정도로 우렁찼던 목소리 탓에 앞문을 향해 몰린 시선이 못마땅할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 분단에서부터 이어지는 들뜬 게 분명한 웅성거림을 통해 견성하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예상과 같음을 미리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의자를 밀어 넣고 일어선 견성하는 긴 다리를 뻗어 성큼 걸어갔다. 문을 붙잡으며 복도를 살피자, 문 옆으로 비켜서 벽에 등을 대고 서있는 이가 보였다.

머리 하나는 나는 키 차이 탓에 부드럽게 흐드러져 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색 명찰이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반 녀석들과, 그리고 견성하의 가슴께에 매달린 노란색과도 같지 않은 색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같은 복도를 공유하는 몇 개의 반에 걸쳐 술렁임을 만들어내고 있는 얼굴을 보며 견성하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뭐 하러 왔어, 온라온.”

복도의 창 너머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던 온라온의 고개가 돌아갔다. 얼굴 위로 가볍게 그려져 있던 미소가 짙어지고, 장난기를 가득 머금고 휘어 있는 부드러운 갈색 눈이 그와 마주했다.

“체육복 빌리러.”

“그거 빌리려 우리 학년 건물까지 와? 옆반 있잖아.”

“결이 형한테 빌리면 화낼 거잖아.”

온라온이 들먹이는 다른 이의 이름에 견성하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지나치게 짧고 단호한 자신의 대답에 아차 싶었는지 견성하는 덧붙여 말했다.

“결이 형 말고도 있을 거 아냐. 너 친구 많잖아.”

그때까지도 온라온은 여유라도 부리는 것처럼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리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이어진 것은 미묘한 정적이었다. 다물린 입꼬리는 화려한 호선을 그리며 굳어있을 뿐이었다. 열린 창을 타고 휘도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고 지나가도록 대답을 유예한 온라온이 뒤늦게 눈을 깜빡였다.

“없는데.”

대답 사이에 견성하의 표정을 살핀 온라온은, 견성하가 그랬듯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농담이지.”

“너…….”

“근데 너는 세탁해서 가져왔을 테니까. 걔넨 사물함에 넣고 기억날 때나 꺼낸단 말이야.”

남들이라면 험한 말을 골백번은 했을 것 같은 상황에도 견성하는 그저 굳은 얼굴을 했다. 입을 다물 때면 날카로운 눈매가 만들어내는 차가운 인상 탓에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온라온의 웃는 낯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또.

웃는 얼굴에선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장난기 가득한 말도 자동응답기에서 흘러나오는 말처럼 느껴졌다. 순식간에 자신 앞에 그려지는 선을 헤아리며 견성하는 하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서글한 태도로 타인의 영역에는 멋대로 발자국을 찍고 풍랑이 일게 만들고 다니는 주제에, 온라온은 자신의 영역에는 누구도 허락하지 않을듯이 굴었다. 순하고 둥그런 갈색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견성하를 바라보는 눈길은 견고하기만 했다. 곱게 휘어진 눈꼬리와 어우러지는 화사한 미모도 결국에는 그려내듯 보기 좋을 뿐이었다.

하. 숨을 토해낸 견성하는 짜증내는 사람처럼 툭 말을 꺼냈다.

“기다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끄덕이는 고개를 따라 사락사락 흔들렸다. 사물함으로 향하는 그의 등 뒤로 달라붙는 시선이 끈질겼다.

아직 섬유유연제 향기를 풍기며 곱게 개켜진 체육복을 건네어받고도 온라온은 제자리였다. “안 가?” “가야지.” 할 말도 없으면서 온라온은 견성하를 방긋 웃는 얼굴로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반복되던 대화는 수업 예비종이 치고서야 끝이 났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매점에 갔던 녀석들이 엇갈리듯 교실로 돌아왔다. 아까 견성하를 불러내었던 녀석이 빨대를 이로 잘근대며 물었다.

“너 왜 불렀냐?”

복도 너머에 두고 있던 시선을 거두지 않고 견성하가 대꾸했다.

“체육복 빌려달라고.”

밑바닥에 깔려있는 음료를 마저 마시기 위해 쪽쪽거리는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컸다. 슬쩍 눈을 찌푸리며 쳐다보는 데도 녀석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사이에 녀석이 다시 물었다.

“근데 3학년이 왜 체육복을 빌리러 와?”

“안 가져왔나 보지. 원래 자주 그래.”

견성하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기울인 녀석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3학년들 요즘 체육 수업 안 하잖아.”

다시 한 번 울리는 종소리에 각자의 반으로 흩어지는 소란들과는 다르게, 구름 가득한 잿빛 하늘 아래에서 유난히도 조용한 텅 빈 운동장이 복도의 창을 통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복도 끝을 바라본 견성하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것도 깜빡했나 보지.”


*

 

하교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었다.

짧은 종례를 위해 조용해졌던 교실들 밖으로 기다린 듯이 아이들이 쏟아졌다. 사방으로 흩뿌려져 와글거리는 쉬는 시간과는 다른 덩어리진 소란이 깨진 그릇을 빠져나가는 물줄기처럼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쿵쿵대는 거친 발걸음은 건물을 흔들었고, 서로를 부르는 고함소리는 복도를 울렸다. 바닥에 끌린 의자가 내는 소음이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전해졌다.

점심나절부터 퍼붓기 시작해서 아직까지도 비가 떨어지는 하늘은 어둑한 잿빛이었다. 복도 청소를 위해 열어둔 창문을 타고 추적거리는 빗소리가 넘어왔다. 소란스럽고 바쁘게 구는 녀석들이 몰려 나간 뒤의 교실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정적이 바닥에 고였다. 비가 남은 소리들을 잡아먹으며 낮게 깔렸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에 느리게 하늘을 올려본 견성하는 가방 안에서 단색 우산을 꺼냈다. 가방의 빈자리에 필통을 집어넣고 책상 서랍을 마저 비우고 있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성하야. 아직 학교니?]

“네, 형.”

닫기만 하면 되는 가방의 지퍼를 만지작거리며 견성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산은 챙겨갔어?]

“챙겨왔어요. 제대로 펴지는 것도 확인했고요.”

[잘했네. 형이 지금 왔는데 현관에 라온이 우산이 그대로 있어. 가서 확인 해줄래? 결이는 방송국이래고, 막내는 전화가 꺼져있네.]

수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차분한 목소리를 덮으며 빗소리가 조금 거세어졌다. 부슬거리는 비가 창을 타고 방울로 흘러내렸다. 잿빛이 얼룩졌다. 가라앉아 웅웅거리는 소음들과 배수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어설프게 신경을 건드렸다.

손안에 있는 가방 지퍼에서 비릿한 쇠냄새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네, 그럴게요.”

[수고 좀 해줘. 비가 많이 와서 오기 힘들 것 같으면 상현이 형 불러줄까?]

툭. 커다란 빗방울 하나가 창틀을 두드렸다. 부서지는 방울을 바라보던 견성하가 우물거리던 대답을 뱉었다.

“…괜찮아요, 거의 그쳤어요. 온라온이랑 우산 쓰고 갈게요.”

[그래. 조심해서 와.]

“네.”

신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고 수화기에는 더 이상 소리가 넘어오지 않았다. 지퍼를 당겨 닫은 견성하는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쭉쭉 뻗는 다리가 건물과 건물을 잇는 통로를 향했다. 건물을 옮겨가자 드문드문 보이던 명찰의 색이 노란색에서 하늘색으로 변했다. 제 가슴께에 박힌 노란 명찰을 향하는 시선들을 모른척하며 계속 걸었다. 익숙하게 반을 찾아온 견성하는 교실 표찰을 일별하고는 문을 열었다.

온라온은 교실 한 구석, 책상 자리에 앉아있었다.

어깨 위로 걸치고 있는 것은 견성하의 이름이 박힌 체육복이었다. 닫지 않은 창에서 빗소리가 넘어왔다. 물냄새를 품은 바람에 축 쳐진 머리카락이 무겁게 흐트러졌다. 비 내리는 하늘을 구경하는지 보이는 것은 얼굴의 윤곽을 그리는 옆모습이었다. 걷혀가는 먹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빛이 드리우는 음영이 선연했다.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반복하는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길게 늘어지는 모습이 소리 없이 눈에 틀어박혔다. 압도되는 모습에 머릿속에선 절로 소리가 지워졌다. 흑백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도 울림을 가지고 새겨지는 풍경이 가슴을 두드렸다. 티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얼굴이 흑백 속에 유난히도 고아하게 자리잡아 아름다웠다. 그 얼굴 앞에선 모든 문제가 덧없이 여겨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얼굴 위에 드리우는, 아주 먼 곳에 홀로 떨어진 미아의 표정같은 균열을 발견할 때면 견성하는 낭떠러지 끝을 바라보는 듯한 현기증이 일었다.

“……야.”

힘겹게 뱉어진 목소리는 작고 가늘었다. 그가 열고 들어온 문에서 나는 소음보다도 작았으나, 소리 없는 영화를 방해할 정도는 되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받아온 발성연습이 덧없이 처참하게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스스로 뱉고도 흠칫할 정도로 볼품없었다. 얼굴과 귀로 열이 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견성하는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그런 목소리에도 턱을 괴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느리게 고개가 돌아갔다.

음영을 드리우던 빛이 그곳에만 쏟아지는 것 같았다. 신이 불어넣은 호흡으로 따스하게 숨을 쉬는 갈라테아처럼, 무심하던 얼굴 위로 간지럽게 웃음이 번져나갔다.

“댕댕!”

“이상하게 부르지 마.”

엉망으로 기운 현실처럼 엉터리 같은 온라온의 부름을 들으며 견성하는 얼굴을 구겼다. 표정을 감추듯 시답잖게 농담을 뱉으며 일어날 생각을 않는 온라온을 향해 다가갔다. 온라온은 그저 방긋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가간 견성하는 온라온의 앞자리 의자를 발로 툭 건드려 뽑아 앉았다. 싸구려 책걸상이 듣기 흉한 소리를 내었다.

창틀에 부딪쳐 손등으로 튀는 빗방울이 차가웠다.

일어나 창문을 닫는 대신, 견성하는 온라온이 하고 있던 대로 창 밖을 바라봤다.

“너 전화 꺼져있대.”

“응.”

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이어지는 정적 끝에 견성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물끄러미 시선이 달라붙었다. 닿을 듯 말 듯 애매하게 유지되는 거리감이 마치 손톱에 생기는 거스러미 같았다. 무시하기엔 계속 거슬리고, 쉬이 건드리기엔 피를 보고 곪아버릴지도 모르는. 짓씹던 입 안쪽에선 비릿한 맛이 났다. 손에 든 우산이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빛이 스미어도 하늘을 덮는 것은 여전한 먹구름이었다.

스스로도 혼자 바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 자신만만하게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지도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위를 바라보며 외면치 못하는 것은 견성하의 천성이었다. 이 계절과 이 시절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믿고 싶었다. 비는 여전히 거세었다. 온라온은 만난 이래 줄곧 햇살이 아닌 부서지는 빗방울처럼 웃고 있었다. 그렇기에 견성하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낭떠러지 위였다.

“…형들 기다리겠다. 가자.”

그것이, 견성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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