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미암아 감정은 산화되어

사먕

bgm: The Weeknd, Ariana Grande- Die For You(Remix)

https://youtu.be/YQ-qToZUybM?si=Js5HwL1CkAEbQ3AB

센티넬인 동시에 가이드인 지영은 멀티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센터에 말 그대로 개처럼 굴려지고 있었다. 애초에 웬만한 임무가 아닌 이상, 휴식을 취하면 어느 정도 자가 가이딩이 돼서 가이드가 주는 가이딩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가이딩이 차오르는 체질 덕분인지 다른 이들보다 더더욱 굴려질 수 밖에 없었다.

어느새 일상처럼 자리잡아 빡세게 굴려진 임무를 다녀온 지영은 본인 숙소까지 가긴 힘든 나머지, 발걸음을 돌려 의무실로 향했다. 당장은 움직이는 내내 숨이 절로 턱턱 막히고 걷는 것 또한 위태롭기 그지 없었지만 의무실에서 링거 꽂고 하루 반나절정도 있다 보면 몸 상태가 그래도 정상 부근까지는 돌아왔던 터였으니, 이번에도 불안정한 수치를 핑계삼고 휴식을 취할 작정이었다.

가이딩 부족으로 인해 발걸음이 갈대처럼 연신 휘청이고 까무룩 정신을 놓을 것처럼 시야가 점차 흐려졌으나 지영은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최대한 꽉 붙들었다. 천천히 의무실로 향하던 와중에 누군가 지영의 손목을 탁 붙잡고 제 쪽으로 돌렸다. 보통 때 같으면 꿈쩍도 안 하고 누군가 절 제멋대로 굴게 할 정도로 가만히 있는 성정이 아니었으나, 이번엔 말 그대로 꼴이 말이 아니라서 그런지 지영의 몸이 단번에 돌아갔다. 그렇게 흐릿한 지영의 시야에 들어오는 이는 익숙한 인영이었다.

“여기서 뭐 해요.”

지영의 가이드인 승준이었다.

또, 또 너다. 또 다시 날 붙잡은 사람이 너였네. 흐린 시야 너머에도 확연히 인상을 팍 찌푸리고 쳐다보는 승준이 한눈에 들어오자 자연스레 지영이 한숨을 내리 쉬었다. 그 와중에 손목을 틀어쥐었던 승준의 손은 지영이 제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부터 놓은지 오래였다.

지영이 무거운 숨을 내뱉자 승준은 빠르게 지영을 전체적으로 훑어내리며 스캔했다. 어디 돌산에 임무 배정이라도 받은 건지 온통 성한 구석투성인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자 승준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분명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없었던 붉은 흔적들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가이딩을 받지 않은 채 임무에 다녀온 직후인 듯보였다. 그에 날카롭게 지영을 바라보던 승준이 쏘아붙이듯이 말을 툭 내던졌다.

“누나는 본인 상태 체크 안 해요?”

“…할 말 다 끝난 거지?”

승준의 날카로운 말을 영 받아칠 기운도 없을 뿐더러 오늘따라 더 기분을 퍽 상하게 만드는 탓에 지영은 한숨 섞인 숨을 뱉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다가도 또 다시 손목을 붙잡는 승준에 의해 의무실로 향하려던 지영의 걸음이 다시 뚝 멈추었다.

“어디 가세요.”

“의무실.”

“…누나 진짜 미치셨어요?”

평소였다면 아쉽게도 안 미쳤어,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승준의 어투였으나 지금은 이상하리 만큼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결국 거칠게 날뛰는 감정들을 제어하지 못한 지영은 인상을 와락 구기곤 정돈되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야?”

“뭐라고요?”

“너한테는 지금 내 모습이 안 보여?”

“…….”

“환자가 치료 받으러 의무실에 간다는데, 그게 뭐 잘못된 거야?”

거친 지영의 감정을 마주한 승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제껏 지영은 승준의 말을 받아치기만 했지, 이런 식으로 감정을 토해낸 적은 거의 난생처음이라 퍽 당황스러웠다.

삐빅, 삐비빅-. 노랗게 물들은 지영의 워치가 제멋대로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소음을 유발했다. 폭주라곤 초반에 발현될 때쯤 단 한 번 이후로 멀티가 된 이후로 없던 전적이 오늘 다시 새로 쓰이게 생긴 것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한승준과 마주했을 때.

더더욱 증폭되는 것만 같은 수치계를 띄운 워치에 시선을 잠시 두던 지영이 이내 승준을 모른 척하며 지나치려던 찰나였다.

“잘못 되어도 한참이나 잘못 됐죠.”

승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로 인해 지영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지영의 무감한 시선이 승준에게 맞닿자, 승준은 지금껏 속에서 꾹 눌러왔던 걸 터트리듯 말을 이어나갔다.

“가이드가 코앞에 있는데도 의무실에 가신다뇨.”

“…….”

“그거 자존심 상하는 말인 거, 누난 알아요?”

“…….”

“어떻게 누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으세요?”

…뭐라는 거야 진짜. 점점 바닥을 치닿는 가이딩은 이제 어느덧 귀를 먹먹하게 만들어 지영의 귀에는 승준의 말이 귀에 채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흩어진 일방적인 말들이 웅얼거릴 뿐이었다. 입을 움직여 말을 한다는 건 알아먹어도 정작 들리는 건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언어들이 서로 뒤섞여서 멀어졌다가 또 순간적으로 가까워졌고, 이내 종국에는 소리가 서로 맞물려 웅얼거리며 사라지기 일쑤였다. 점차 최악으로 향하는 증상에 눈썹을 작게 들썩인 지영은 결국 승준의 말허리를 중간에 끊어냈다.

“그래서, 지금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여전한 지영의 태도에 미간을 살짝 구기던 승준이 시야에 들어오던 지영의 워치를 슬쩍 곁눈질하며 힐끔거렸다. 가이딩 수치 19%. 깜빡깜빡, 주홍색 섬광으로 물든 지영의 워치가 금방이라도 붉게 타오를 것처럼 연신 깜빡였다. 폭주의 스타트 지점은 15%부터 시작이었다. 승준은 신중하면서도 최대한 다급하게 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그나마 둥근 말을 고르고 또 골라내었다. 그러니까, 제가 누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입술을 짓씹은 승준이 크게 보폭을 넓히며 가까이 다가갔다.

“누나,”

저도 누나 별로 안 좋아해요.

“제발 좀,”

근데.

“이럴 때는 좀,”

왜일까요.

“저한테 져 주시면 안 돼요?”

전 누나가 죽는 게 더 끔찍해요.

승준의 말을 끝으로 입술이 빠르게 맞물렸다.

종국에 승준이 터트린 말은 진심이었다. 이전부터 쭉 지영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자, 누나에게 처음 내비치는 승준의 삐죽거리는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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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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