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전선
2022 구구 합작
그럴 수도 있다는 말과 확실히 그렇게 된다는 말은 무게부터 다르다. 예를 들어서 세상이 망할 수도 있다고 하면 대부분은 정신 나간 소리인 줄 알지만, 어떻게 망한다고까지 말해주면 꼭 믿는 사람이 있으니까. 정신을 차려 보니 온갖 사이트에서부터 뉴스에서까지 세상의 멸망에 대해 태평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의 이름이 붙어있는 종말론이 아닌 정해진 미래였다.
몇 달 후 기록적인 장마가 시작된다고 했다. 구름 한 점 없는데 어떻게 비가 내린다는 건지? 굳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전문가들이 앞다투어 이야기를 전해왔다.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물이 쏟아질 거라고. 우리는 바다 밑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늘은 점점 파랗게 변해갔다. 제일 먼저 망가진 건 통신이었다. 그 뒤로도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 시스템은 천천히 무너졌다. 아주 조용히, 느릿하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온 세상이 멈춘 것처럼 작동하지 않았고, 아무런 위기감 없이 사람들이 사라져갔다. 어디론가 떠나는 건지 아니면 불시에 증발해 사라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미래를 엿본 전문가들처럼 이른 죽음을 택한 걸지도. 그런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는 했다. 하여간 시간을 무용하게 흘려보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먼저 우리는 이 상황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우리도 멀리서 보면 결국 어느 순간 사라질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거.
*
"야, 어떻게 된 게 아직도 덥냐."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 구찬형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털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구승호는 잠시 멀찍한 하늘을 바라본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 몇 점이 평화롭게 떠 있다. 그러니까 저 구름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비가 내린다는 거지. 직접 보지 않는 한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다.
"너 안 더워?"
"난 뭐… 참을 만 한데."
찬형은 사나운 눈을 뜨고 승호를 내려다보다 불쑥 손을 뻗었다. 그가 땀에 젖은 목덜미에서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동안 승호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요즘 들어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익히 알고 있는 감정이라 승호는 그것을 구태여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딱 3년 전 구찬형의 체고 진학이 결정되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불만을 어떻게든 쏟아내고 싶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어컨 좀 덜 트는 건데. 뭐 오존층? 오존층이 쏟아진다고?"
"아니, 그거랑 아무 상관 없다고. 그냥 별 이유 없이 망한 거야. 망할 때가 됐나보지."
승호는 작게 아마도, 하고 덧붙였다. 이유가 있으나 없으나 종말이 도장 찍힌 이상 더는 의미가 없기도 했다. 나름 머리는 좋다고 생각했는데 뉴스에서 쏟아져나오는 브리핑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아마 그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도무지 받아들일 의지가 생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승호는 끈적끈적한 뒷덜미를 마지막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 등을 곧게 폈다.
"버스 끊기기 전에 집에 갈 걸 그랬네."
"전화가 안 될 줄은 몰랐지. 됐어, 다 끝난 마당에 뭘."
구찬형이 손을 휘휘 저었고, 승호도 실상 진짜로 기가 죽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한탄은 관뒀다. 당장 내려가자고 한 건 구찬형이고 남자고 한 건 구승호였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내려가는 표가 전부 끊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당시에는 머리가 좋은 구승호 때문에 집에 남게 되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뉴스가 보도되자마자 교통망은 아비규환이 된데다 대중교통이 의무를 내버리는 그 순간까지도 도로는 완전히 꽉 막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출발했으면 한 중간 정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내려야 했을 것이다. 면허를 딸 수 있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았겠다.
"집까지 걸어가볼까? 시간도 많겠다."
"말이 돼? 목말라 죽을걸. 길 잃거나."
"구걸하면 되지. 아니면 빈 집도 많을 텐데."
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키득거렸다. 농담이지만 언젠가 진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다른 집이 다 빌 때까지 우리가 남아 있거나 긴 장마가 시작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목적을 잃은 학교는 유달리 무겁게 느껴지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 무성의한 잠금장치나 제 때 보수하지 않은 교실 문짝들은 구찬형의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고, 그마저도 되어 있지 않아 맥없이 열리는 교실이 많았다. 가끔 반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때가 탄 옥색 커튼이 느리게 나부꼈다. 남의 학교 구경하는 건 이 상황이 돼서도 왜 이렇게 재밌냐, 찬형이 중얼거리며 교탁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유인물을 뒤적거렸다. 학교에는 많은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인기척이나 사람 숨소리만큼은 어디에도 없다.
폐쇄되었던 학교가 다시 문을 연 지는 오래되었다. 비단 형제가 다니던 학교만이 아니라 여러 학교들이 그랬다. 그건 출입을 허용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학교를 걸어 잠글 이들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찬형과 승호가 나란히 손 잡고 이 학교에 온 건 사람들이 얼마나 돌아다니는지 확인할 셈이기도 했다.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면 세상에 둘이 버려졌다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물론 원하던 걸 찾지는 못했지만. 구승호는 내심 초조해졌다. 둘만 남는 게 나쁜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나 하나둘씩 사라지다 끝내 둘이 남는 건 무섭다. 동시에 사라질 수는 없을 테니까.
"저기요."
찬형이 교실을 둘러보는 동안 승호는 복도로 고개를 내밀고 길게 소리를 질러봤다.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출처 모를 공허한 울림과 차츰 연약해지는 메아리 뿐이다. 단념하고 뒷걸음질치던 그의 등이 찬형에게 턱 막혔다. 흘끗 고개를 틀자 구찬형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아. 왜?"
"네가 3층 가볼래? 내가 2층 가게."
찬형과 승호가 있는 곳은 1층 복도 끝 교실이었다.
승호는 잠시 눈을 굴려 문 밖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즉답했다.
"싫어."
"그럼 바꿔?"
"그냥 같이 다녀, 왜 찢어지는데."
"빨리 둘러보고 나가는 게 낫잖아. 별 것도 없는데."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굳이 빨리 둘러볼 필요가 있냐. 그리고 교실에 뭐 있는지 알고 별 것도 없대, 알고나 말하지."
그리고 잠시 침묵하던 찬형이 한 걸음 물러섰다. 구승호는 그제야 뒤돌아 그와 마주보고 섰다. 찬형은 희한하다는 듯 승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말 예쁘게 한다?"
그 때에야 불현듯 깨닫는다. 아, 또 말 좆같이 했네. 오는 길에도 분명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온 것 같은데, 구찬형이 고작 한 마디 더 했다고 그게 짜증이 났나 보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굳이 분위기를 망친 것에 대한 후회다. 그러나 구승호한테는 이상하게도 한 번 물꼬를 트면 굳이 한 소리 더 해서 일을 최악으로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심지어 수습하기 늦지 않았는데도.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다. 승호는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데.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고."
"개헛소리를 하는데 그걸 듣고만 있냐? 학교 빈 지가 언젠데 있기는 뭐가 있어. 지금도 먼지밖에 없구만……."
그러면서 찬형이 옆에 있는 책상을 발로 툭 찼다. 그리 약하지 않은 힘에 텅 빈 책상은 넘어질 것처럼 까딱거리다 겨우 중심을 찾았다. 묘하게 빈정이 상한 게 티가 나는 태도였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번에는 찬형이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냥 부탁 한 번 하면 들어줄걸 꼭 꼬치꼬치 트집을 잡지. 너 그러면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다고."
"……."
작정하고 트집을 잡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대화 방식이 잘 안 맞는 건 사실이다. 당장 지금도 구승호는 대답 한 마디 안 하고 참아야 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그래도 싸우기는 싫다. 꼭 대판 싸우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따박따박 대들 때도 정말로 싸우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뭐, 아니면 무서워? 체고 다닌 새끼가 뭐 이래 겁이 많아."
그 끝에 버릇처럼 상스러운 욕이 덧붙는다. 승호에게는 웃는 모습이 더 익숙한 입매다. 그 입꼬리가 한쪽만 비틀리면 꼭 둘 중 한 명은 기분이 상하게 되어 있다. 구부정하게 책상을 짚은 채 줄곧 시선을 맞추던 찬형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옆에서 본 입매가 비뚤게 틀어 올라갔다.
"이새끼 진짜 몸만 컸네……."
그게 꼭 비꼬려고 한 이야기는 아닐 텐데,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야. 1절만 해, 새끼야."
버릇없이 씹어뱉으며 눈을 부릅뜨자 찬형의 웃음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떤 상황에든 자신을 향한 욕설을 들으면 힘부터 들어가는 나이다. 승호는 찬형이 주는 신호를 잘 알고 있다. 찬형은 늘 승호에게 기회를 꽤 많이 주는 편이었는데, 대체로 저런 표정을 지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내가 못할 말 했냐? 세상이 이 꼬라진데 걱정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복싱하면 뭐 무적이냐? 그럼 니 얼굴은 길가다 넘어져서 그래?"
개의치 않고 구승호는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남의 학교에서 뜬금없이 주먹다짐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말로 싸우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이러다 보면 대체로 결말은 비슷했다. 승호는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질 때의 패턴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넌 내가 지금 뭐, 집에 못 가서… 아니면 엄마한테 혼날까봐, 뭐 그딴 기분으로 이러고 있는 것 같아? 겁이 많네 몸만 컸네 이지랄이야. 너도 경각심이란 걸 좀 가지라고."
"이 새끼가 봐줘도 지랄을 하네."
구찬형이 굽히고 있던 몸을 기어이 일으켰다. 승호는 질세라 주먹을 말아쥔 채 한 걸음 다가섰다.
"너는 이 지경에까지 와서 처맞고 싶지? 그래서 지금 살살 싸가지 부리는 거고?"
"네가 패고 싶은 거겠지. 니 꼽다고 화내지 말고 걍 내가 싫어하는 것 같으면 고집을 안 부리면 되잖아."
"고집은 니가 부린 거고. 내가 뭐 했는데."
"좀… 따로 다니자니, 빨리 좀 하자니 그런 소리나,"
승호는 잠깐 말을 더듬었다.
"틀린 말 했냐? 그것도 한 마디 했는데 말꼬리 잡고 늘어진 건 너지."
"그니까, 그거 뭐 오래 걸린다고 따로 가냐고."
억지였다.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너 귀찮냐?"
그래서 그런가 감정이 앞섰다. 성급하게 내뱉자 예상치 못하게 구찬형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뭐가." 그늘지도록 구겨져 있던 미간이 차츰 펴지는 것을 보던 승호는 문득 눈을 몇 번 비비적거렸다. 되도 않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안다. 다만 원래 억지를 부릴 때는 끝까지 우겨야 하기 때문에, 갑자기 목이 턱 막혀도 쥐어짜내서 덧붙였다.
"…너 내가, 귀찮아서 그러지?"
"……."
"아니면 씨발, 니 말대로 이지경까지 됐으면, 그냥 같이 좀 다니지, 씨발… 진짜……."
차츰 말꼬리를 뭉개며 중얼거리던 승호에게 찬형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위협적인 손이 머리 위까지 올라와도 구승호는 겁을 먹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승호는 찬형이 하루가 다르게 훌쩍 자라도 겁먹어본 적이 없었고, 찬형은 그걸 으레 싸가지라고 불렀다. 그가 뒷덜미를 콱 쥐고 잡아당긴다. 우악스런 힘에 버티던 것도 잠시 승호는 그대로 어깨에 얼굴을 쿡 박았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손이 등을 턱턱 두드려왔다. 머리 위에서 확신을 잃은 목소리가 떨떠름하게 웅얼거린다.
"…이게 그동안 관심을 덜 받았나. 울면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꼭 그렇지도 않았다. 자기도 갑자기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악이라도 쓰고 싶은데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승호는 애써 소리를 억눌러 훌쩍거리다 입을 불퉁하게 내민 채 찬형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 지금 꼴사납게 이러지 말고 그 때나 좀 그럴걸. 고작 몇십 분 떨어지는 게 싫다고 짜증을 내는 게 아니었다. 구찬형이 기어이 짐을 싸서 나가버린 날부터 줄곧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난 지금 세상이 망해가니까, 그게 억울해서 고백하기엔 이르다 생각했던 이야기를 자꾸만 하고 있는 거다.
입 발린 말로라도 보고 싶다고 좀 해보지. 가끔 볼 때 혼자는 외롭다고 울기라도 하든가. 하물며 주말에 꼬박꼬박 내려오기라도 하지. 혼자 있게 하지 말고…….
*
"사과 안 하냐?"
"몰라."
"넌 뭐 18살 먹고 질질 짜냐."
"좀 닥쳐."
안 그래도 쪽팔려 죽겠다. 근데 여기까지 와서 가오를 세울 바에야 그냥 얌전히 있는 게 나은 것 같다. 승호가 메인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찬형은 입을 다물고 힐끔거리며 표정을 살피기만 했다. 원래 늘 이런 식이었다. 승호가 잘만 하면 찬형은 승호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근데 그러지 못하니까 문제지. 흥분하면 손이 나간다고 찬형한테 자주 뭐라 그랬는데, 승호의 경우는 손보다 입이 말썽이었다.
아까 전의 험악한 분위기는 꼭 거짓말이었다는 듯, 찬형은 제법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눈물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발을 슬슬 까딱거리던 그가 팔을 뒤로 하고 느슨히 몸을 기울였다. 책상이 낮아서 그 위에 걸터앉아도 승호나 찬형이나 다리가 한참 남았다.
"그래도 너 없었으면 아쉬울 뻔했다. 나 혼자 서울 있었으면 솔직히 좀 외로웠을 것 같기도 하고."
"형들 있잖아."
"야, 걔네는 가족이 다 이 근처에 살잖아. 나는 아니고."
즉슨 나눠질 바에야 둘이 더 낫다는 것이다.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모르겠다.
"…그럼 그런가보지."
그치만 적어도 승호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색하게 입꼬리만 한 번 올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 이후로 승호가 별 말이 없자 찬형이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내밀었다.
"이거 봐."
승호는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내밀어진 찬형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최소한의 기능만 들어있는 작은 아이팟이었다. 긴 줄이어폰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승호는 눈으로 쫓았다.
"방금 전에 찾았는데 네가 갑자기 시비 걸어서 못 보여줬어."
"이거 단종된 거 아냐?"
"그니까. 이걸 아직도 들고 다니는 애가 있더라고. 작동이 되나?"
찬형이 중얼거리며 한 쪽을 귀에 꽂고 아무 버튼이나 연타하는 동안 승호는 잠시 고개를 들어 교실을 살펴보았다. 구찬형이 아무렇게나 돌아다닌 탓에 나란히 정렬되어 있던 책상은 그가 다닌 길마다 각기 다른 각도로 비뚤어져있다. 어느 분단에서 어느 분단까지 다녔는지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교실이 형 교실이랑 비슷하네."
"고3 교실이 다 거기서 거기지. 야, 영어 듣기 파일도 있다. 인문계는 다 이러나."
자기 손에 한참은 작은 MP3 버튼을 꾹꾹 누르던 구찬형이 곧 이어폰 한 쪽을 내밀었다. 구승호는 그것을 받아 귀에 끼워보았다. 들어본 적 없는 밴드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가 아프도록 볼륨을 올려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찬형은 소리를 최소한으로 낮추고 기기를 구승호의 손에 쥐여주었다. 승호는 작은 스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는 노래야?" "몰라." 그 말을 끝으로 형제는 나란히 입을 다물었고, 금세 조용해졌다.
한쪽밖에 안 꽂아서 그런지, 아니면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건지. 가끔 같이 하교할 때면 이런 식으로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어오기도 했는데. 오늘은 숨소리가 노랫소리에 채 묻히지 않을 정도로 노래가 작다. 고요한 가운데 한참 숨을 고르고 있으면 찬형이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승호야, 그러면."
"어."
"넌 무섭냐?"
어느 것부터 정말로 무서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엄마한테 혼나는 거? 아니면 형이나 내가 다치는 거? 잠시간 가늠하던 승호는 결국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모르겠어."
"니 내 손가락 잡고 다니던 애새낀 거 내가 까먹었다. 다시 안 그럴게."
"…알겠어."
몸만 컸다는 말이나 애새끼라는 말이나 거기서 거기긴 했다. 근데 왜 이번에는 뭐라 할 마음도 들지 않는지. 찬형이 승호의 어깨를 바짝 당겨 안았다. 덥고 끈적거렸다. 그렇다고 밀쳐내지는 않았다. 괜찮을 거야, 진짜로. 낮고 거친 목소리가 속삭여주면 거짓말처럼 긴장이 풀렸다. 그러니까, 이럴 때 구찬형은 구승호에게 특별히 가까운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들은 본 적 없는 표정과 목소리를 하고 구승호를 달래는 데에 여념이 없어졌다. 구승호는 그게 좋았다. 구찬형은 유난히 정이 많은 사람이다. 어릴 때는 그의 말마따나 하루종일 손을 잡고 형을 따라다녔다.
그만하라고 짜증을 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새삼스럽게 정말 몸만 큰 것이나 다름없다. 승호는 늘 찬형이 헤쳐놓은 길을 따라 걷고 있으니까. 구찬형이 그걸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 입으로는 영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승호는 조금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다 불현듯 중얼거렸다.
"형. 만약에… 우리……."
진짜로 사라지면 어떡하지? 그건 사실 죽음과도 같은 의미였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려던 그 한 마디가 혀끝에서 돌연 무게를 갖기 시작했다. 정말로 죽을까봐.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면 정신나간 소리 같지만, 언젠가 필연적으로 죽는다고 하면 그건 명명백백한 사실이니까.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가까운 일이고. 뭐라 물을 것처럼 운을 떼어놓곤 정작 그 뒤로 말을 잇지 못하자 돌연 찬형의 손아귀가 어깨를 조여왔다.
"만약에 비가 그치면."
물백묵 자국이 남은 칠판을 바라보며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학교 째고 놀러갈까?"
"뭔 소리야, 갑자기."
"째본 적 없어서 모르냐? 원래 한참 놀다가 다시 학교 가면 수업 듣기 뒤지게 싫거든."
그렇게 말하는 구찬형은 여전히 승호를 보고 있지 않다. 다만 팔을 단단하게 쥐고 있는 손끝이 꼭 어깨를 두드리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까딱거렸다. 승호는 고개를 들어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보다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제야 찬형이 시선을 승호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
구찬형의 어깨에 기대 끝까지 들어본 그 노래는 신나지도 우울하지도 않았지만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길게 여운을 남기던 기타의 잔향이 완전히 멎으면 노래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머물러 본 적 없는 곳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목소리를 들으며 구승호는 눈을 굴렸다. 드물게 커튼이 젖혀질 때마다 그 너머에 있는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뉴스 사이에서 유일하게 승호의 기억에 남았던 건, 저 파랑은 이미 하늘의 파랑이 아니게 됐다는 거다. 저건 곧 지상으로 밀려들어올 파도의 푸른색이다. 저것마저 쏟아지고 나면 이윽고 온 세상이 파랗게 물이 들 테고…….
바꿀 수 없는 결말과 다시 한 번 맞닥뜨렸을 때 승호는 세상이 꼭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사람은 죽으면 어느 곳이든 간다고 하지 않던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살아서 도착한 것뿐이지. 그래도 구승호는 여전히 더 가라앉지 않으려고 애쓰고, 남몰래 남은 날을 세어보기도 했다. 끝이 다가올수록 망가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세상의 끝에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한결 위안이 됐다.
그리고 나면 가끔은 더없이 우울한 마음에 한 가닥 희망이 생길 때도 있었다.
딱 태연히 살아볼 정도의 희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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