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KI 2. 제목지어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천사들과 달리 악마는 무리 짓지 않는다. 악마는 철저하게 개인으로서 살아간다. 예외가 있다면 갓 태어난 악마다. 갓 태어나 미숙한 악마는 저를 낳은 자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마저 성체가 될 때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개 생후 10년이 되기 전에 독립이 이루어졌고, 데미안이 독립한 것은 생후 8년째였다.  

독립한 악마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굴종이다. 악마란 너나 할 것 없이 눈에 거슬리는 존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저보다 강한 성체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을 수그리고 굴종해야만 했다. 어린 데미안은 약해 보이는 얼굴로 비굴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에 금세 익숙해졌다. 그러나 흘끔 상대의 얼굴을 곁눈질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어엿한 성체가 되어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을 기약하며…….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상대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켜 줘도, 그저 데미안이 그 자리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눈엣가시로 여기는 부류도 존재했다. 렘을 만난 것도 그저 눈빛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남성체 악마의 발에 머리를 짓밟히고 있던 때였다. 

‘어린애한테 뭘 하는 거죠?’

들은 적 없던 음성이 끼어들었으나 데미안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 머리를 짓밟는 힘 때문에 얼굴이 바닥에 처박힌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오, 이게 누구야. 천사 나으리 아니야?’

남성체 악마가 반가워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어조로 말했다. 천사 나으리라고? 데미안은 고통으로 찌푸린 얼굴을 한 채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물론 끼어든 존재가 정말 천사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 머리를 짓밟고 있는 악마의 발화는 빈정거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발화일 것이다. 악마끼리의 다툼-이런 일방적인 행위가 다툼이라고 할 수 있다면-에 끼어드는 행위에 대한 빈정거림에서. 그리고 데미안이 의아해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싸움을 말린다는 무용한 행위의 기저에 있을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곧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정확히 말해야죠? 타천사라고. 그리고 전 어린애한테 뭘 하고 있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악마가 헤, 하고 웃었다.  

’뭘 하고 있냐고? 눈빛이 건방지길래 훈육 중- 억.’

악마의 말은 비명으로 끝맺어졌다. 쿠당탕,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데미안의 머리 위를 짓누르던 힘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데미안은 섣불리 고개를 들지 못하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채로 있었다. 상황 파악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데미안의 앞에, 누군가 다가서는 기척이 났다. 이윽고 산뜻한 목소리가 데미안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이제 괜찮으니까 고개를 들렴.’

그 어떤 악마도 그토록 유혹적인 목소리로 인간을 꾀어내진 못했으리라. 데미안은 홀린 듯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상대는 눈을 접어 다정히 미소 지었다. 녹을 듯이 부드러운 금빛을 띤 머리칼은 어둑한 지옥 속에서도 선명히 빛났다. 데미안은 침을 삼켰다. 눈앞의 존재가 천사가 아닐 리 없었다. 타천사 따위가 아니었다. 천사였다. 

*

“악! 내가 잘못했어! 다 말할게, 다 말할 테니까 용서해 줘!”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두툼한 몸뚱이를 기계적으로 걷어차던 발길질이 멎었다.

“다 말하겠다고?”

루크가 서늘한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바닥을 짚고 낑낑대며 상체를 일으킨 남자가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마, 말할게. 전부 다.”

남자가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더듬더듬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분명 내가 한 짓이 맞아. 부정하지 않겠어.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서 한 짓이었어! 협박을 받았다고! 나도 정말 살인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자를 죽이지 않으면 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어. 누구나 자기 목숨이 제일 소중하잖아? 내 목숨을 우선시했을 뿐이야, 나는!”

거짓말이군. 데미안은 루크의 뒤에 가만히 선 채 빙긋 웃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제 살길을 어떻게든 모색해 보려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어설퍼서야. 그러나 아직까지 루크의 독무대였다.

“협박을 받았다고? 누구에게 말이지.”

루크가 물었다. 말을 할수록 격양되어 간 남자의 목소리와 달리 루크의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그러나 별달리 의심하는 기색이 섞여 들어 있지도 않았다. 데미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창천의 조각을 회수하기 위해 해결사 노릇을 하는 것도 이번이 세 번째. 이제는 알 때도 됐건만 루크는 여전히 무른 구석이 있었다. 상대가 무조건 진실만 말할 것이라 믿는 구석이 그랬다. 습관처럼 거짓말을 주워섬기는 악마와 달리 천사란 진실만을 말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인간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데미안은 조용히 무대 위로 발을 내디뎠다.

“루크,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한 가지 조건을 거는 것은 어떨까요?”

“조건? 무슨 조건.”

루크가 흘깃 데미안을 바라봤다. 데미안은 루크와 눈을 맞추곤 웃은 뒤, 입을 다문 채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거짓을 고변한 게 밝혀졌을 때 어떻게 할지 정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한 마디당 손가락 하나를 자른다거나.”

“자르면 재생하지 않잖아. 부러트리는 걸로 해.”

루크는 늘 그렇듯 통 천사답지 않은 말을 했다. 저를 두고 이루어지는 음산한 대화 속에서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재생하지는 않지만, 잘린 부분을 들고 바로 병원에 가면 봉합해 준대요. 다행히 지금 이 시공간은 그 정도 의료 기술을 갖추고 있고요. 자르고 금방 병원으로 데려다주면 되지 않을까요?”

“흠.”

“거짓을 고하는 건 중죄잖아요.”

“뭐, 다시 붙일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

루크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데미안은 재킷 안쪽으로 손을 넣어 잭나이프를 꺼냈다. 히익. 남자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데미안은 천천히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너른 폐공장 안에 이번에는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데미안.”

데미안에게 제동을 걸듯 루크가 데미안의 이름을 불렀다. 데미안은 멈춰 서서 루크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였다.

“일곱 번째군요, 루크가 제 이름을 불러준 건.”

“그걸 세고 있는 건가.”

“그럼요.”

“왜 그런 불필요한 짓을 하는 거지?”

루크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데미안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앞으로도 셀 거예요. 그래서, 왜 부른 거예요?”

대화를 하는 틈을 타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뒤에서 남자가 바르작대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데미안은 개의치 않았다. 남자에게는 이 공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주술이 걸려 있었다. 폐공장 밖으로 나가는 순간 육신이 악취를 풍기며 타들어 가기 시작할 것이다. 

“거짓말을 하면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는 데는 동의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저자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루크 또한 남자를 내버려둔 채 물었다. 남자가 도망가려고 하고 있다는 걸 알 텐데도.

“음, 저 같은 경우엔 그냥 들으면 알겠던데요? 악마라서 그런가.”

“수없이 들은 끝에 거짓을 간파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건가?”

“그런 셈이죠. 듣기만 한 건 아니지만요. 음, 이제 슬슬 다시 일을 재개할까요? 싱클레어의 몸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향긋할 것 같지는 않으니.”

데미안은 빙긋 웃으며 뒤로 몸을 틀었다. 데미안의 눈길을 받은 싱클레어, 아니, 남자가 힉,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전속력으로 뒷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뒷문에 채 닿기도 전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크게 고꾸라졌다. 데미안이 던진 잭나이프가 경쾌하게 바람을 가르며 남자의 등에 명중한 까닭이었다.

*

“인간과 악마는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 거지?”

제 몫의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루크가 물었다. 맞은편에 앉아 라테를 휘젓고 있던 데미안이 눈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진실을 말하는 게 득이 되지 않으니까요.”

협박을 받아서 살인을 저질렀을 뿐이라는 싱클레어의 말은 모조리 거짓이었음이 밝혀진 뒤였으니 루크가 의문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득실을 따져서 행동할 부분이 아니라고 보는데. 거짓말은 죄업이야. 정말로 천국에 편입되고 싶다면 더 이상의 죄업은 쌓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죄업이라.”

데미안은 균일한 색깔을 띠는 라테를 한 모금 홀짝이곤 웃었다.

천국에 편입되고 싶어서. 데미안은 제가 루크와 계약을 맺고자 한 이유를 그렇게 밝혔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데미안은 오랫동안 천국에 발을 디디길 원했다. 타천사인 루크는 지상에 흩어진 창천의 조각을 모두 모아야만 다시 천사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데미안은 그런 루크의 파트너로서 루크가 창천의 조각을 줍는 것을 도와 천국행 마일리지를 쌓아 볼 생각이었다. 

잘게 깨어져 지상에 떨어진 창천의 조각들은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의 품에 안착했다. 그것도 시공간을 초월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깊게 박힌 창천의 조각을 꺼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그들의 원을 들어주는 방법이었다. 창천의 조각은 원하는 바를 이룬 자에게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고 했다.

‘즉, 저희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군요.’

처음 루크에게서 설명을 들었을 때 데미안은 루크의 설명을 그렇게 요약했다. 해결사 페어라, 나쁘지 않네요. 웃으며 덧붙이기도 했다.

‘퍽 즐거워 보이는군.’

저는 전혀 즐겁지 않다는 얼굴로 루크는 말했다. 

그 뒤 두 사람은 오늘까지 세 개의 조각을 확보했다. 이번에 조각을 가진 사람의 원은 남편이 살해당한 이유를 명확히 알고 싶다는 것이었고-남편이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원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데미안은 생각했다- 루크와 데미안은 도망가려는 남자를 잡아 앉혀 부드럽게 어른 끝에 진실을 얻어낼 수 있었다. 허망할 정도로 별것 아닌 진실 앞에서 여자는 서럽게 울었으나, 창천의 조각은 여자의 몸에서 순순히 빠져나왔다.

“나한테 거짓을 말할 건가? 아니면 진작 말했다거나.”

루크가 문득 물었다. 데미안은 루크의 분홍색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글쎄요, 아직은 말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말할지도 모르죠. 저는 악마니까요.”

“당당하게도 말하는군.”

데미안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테이블 위 가지런히 올려져 있는 루크의 곧은 손가락 위를, 데미안의 하얀 손가락이 느릿하게 기었다. 

“제가 거짓을 고하는 게 싫으면, 당신의 일이라면 득실을 따질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들어 주는 건 어때요?”

거짓을 고할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해 달라고 데미안이 속살거렸다. 루크는 제 손을 매만지는 데미안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눈을 들어 올렸다. 명징한 눈이 데미안을 직시했다.

“나를 꾀어서 뭐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너를 천국에 꽂아줄 힘이 없는데 말이야. 득실을 따진다면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이미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데미안이 저를 꾀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치고 내뱉는 말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데미안은 피식 웃으며 손을 거둬들였다. 눈앞의 천사는 참으로 흥미로운 존재였다. 때로 이름을 속으로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뛸 만큼. 물론 그가 읊조리는 이름은 천사의 진짜 이름은 아닐 것이다. 렘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창천의 조각을 모두 되찾는 날, 그리하여 루크가 이름을 되찾는 날에도 자신은 루크의 옆에 있을 터였으니까. 

카테고리
#오리지널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