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OUT
해량수빈
세계보건기구에서 지정한 마약성 물질을 아는가? 해외에서는 알코올 중독 치료와 마약 중독 치료를 같은 선에서 두고, 대마초나 엑스터시, LSD보다 의존성과 독성이 강한 물질이 있다. 베타-엔도르핀은 심혈관을 옥죄고 기어이 매저키스트성인 쾌락마저 끌어오게 된다. 자, 정체를 소개하자. 이 모든 소개의 주인인-
술.
그러나 기어코 인간은 술을 사랑하고 말았다. 광기와 쾌락, 유흥과 황홀경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안쓰런 비극. 원래 모든 비극은 사랑하면 안 될 것에 욕망해버리는 인간성의 시작이었고 곧 인생의 말로라고 하지 않던가. 해저 기지라고 다를 바가 없다. 차갑게 드리내린 검고 푸른 장막이라고 사람의 본성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항상 말로는 안 된다, 라고 하면서 결국 역설적이게 행동하지 않던가.
해량 씨. 주량이 소주 열두 병이란 말이 진짜예요?
신해량의 미간이 가볍게 구겨진다. 기분 나쁨보다는 고민의 흔적이다. 오늘은 영화 말구요, 라면서 손목을 잡아내는 손을 볼 때부터 무언가 있구나 눈치는 챘지만 들리는 물음은 어째 제법 귀여운 것이라. 한참 아래로 내려야 맞닿는 시선, 쳐든 고개에서 보이는 어이없음. 그 모습을 셔터처럼 담아낸 신해량은 입을 느리게 열었다. 마른 입술이 잠깐 붙었다 떨어지는 공백, 강수빈은 신해량이 바로 대답하지 않는 모습에 뭐가 더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만다.
... 아뇨, 열네 병입니다.
소주, 한국 서민의 눈물, 애환, 한, 그런 이름 따위로 불리는 증류주의 이름. 녹색병에 들어간 무색의 술은 안타깝게도 희석식이다. 혹자에게는 알코올램프와 다를 바 없다는 이 소주의 평균 도수는 대체로 16.5도이고 용량은 360ml. 그렇다. 신해량은 자그만치 소주만 5L를 마셔야 취한다는 뜻이 된다. 성인 남성의 평균 최대 위 용적이 약 4~5L라는 것을 감안하면 위에 술만 채워도 된다는 말이다. 허,
세상에.
강수빈의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열네 병이라니, 그거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 맞아요? 외려 강수빈의 이마에 내 천 자가 새겨진다. 내가 술 먹일 수 있는 거 맞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톡톡 두드린다. 이러면 계획이랑 다른데, 해저 기지에 있는 술을 모두 털어와도 해량 씨가 못 취하는 거 아닌가? 좁게 찌푸린 미간은 고민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그 낯을 파고들고 만다.
왜 그러십니까?
신해량의 낮은 목소리, 그 조용한 공명. 해저에서 울리는 캐비테이션보다도 어쩌면 해저에 더 잘 어울릴 목소리를 하고 늘 다정하다. 테스토스테론으로만 이루어진 사람인 것만 같은 널찍한 어깨며 올려 붙은 근육, 매끈한 이마 아래로 얼핏 우수적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분명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필요 없을 것이다. 이미 남성 호르몬이 과다한데 뭘 도핑을 해서 더 남성 호르몬을 증가시키겠는가? 강수빈의 머릿속이 하얘진 이후 잔뜩 휘갈겨지는 온갖 종류의 사랑 고백은 신해량의 물음을 순간 어떤 대사처럼 들리게 했다. 다시금 머릿속에서 되새긴 이후에야, 강수빈은 눈을 동글게 말았다. 스을쩍 탁자 아래에서 꺼내올린 것은 시바스 리갈.
두 개의 검이 겹쳐진 문양 위, 붉은 띠지 위에 적힌 하얀 색의 CHIVAS. 신해량의 시선에 봐달라는 듯 실없이 웃고마는 강수빈. 신해량은 머리가 아파왔다. 어디서 들고 온 것이냐는 말은 구태여 할 필요가 없었다. 해저 기지에 있는 많은 술주정꾼들은 이미 익숙했고, 이 아래로 술을 들여오는 방법에는 50가지보다도 더 많은 방법이 있을 것이 자명했으니까. 금지라고 말을 해야 하나.
둘이서만 마실래요?
신해량은 애인에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남자였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감사를 올리도록 하자. 심증이 있어도 안 들키면 그만이지 않은가?
온더락이나 스트레이트, 강수빈은 조금 후회하고 말았다. 이거 달다고 하던데 왜 하나도 안 달지? 그래도 캬라멜 맛이 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위스키 아닌가? 미뢰가 감지해내지 못하는 맛이 있는게 분명했다. 홀짝이면서 술을 마셔가다보면 어째 벌써 반 병.
투명한 글라스 안에 들어간 투명한 얼음, 그리고 갈색빛의 액체에서는 알코올의 향이 났다. 유리와 얼음이 부딪혀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홀짝이는 소리…. 점점 머리가 아파지는 걸 보면 이거 취하는 것 맞는 것 같은데. 이미 얼굴도 뜨끈하고 눈가도 따끈해져 온다.
아…. 취기 도는 것 같은데.
그만 드시겠습니까?
아뇨, 더 먹을 수 있어요….
술이 얼마나 들어갔을까? 강수빈은 이제 슬 바닥을 보여가는 병을 바라보고 신해량을 다시 바라보았다. 신해량의 멀끔한 낯짝은 영 변함이 없다. 상아를 녹여낸 듯한 희멀건 얼굴은 붉은 기 하나 돌지 않고 연이어 스트레이트를 목으로 넘기고 있었다. 이거 괜찮군요, 라는 말을 하는 애인이 그렇게 미울 수 없는 강수빈은 이미 뜨끈해진 손을 뻗어 신해량의 젖살 하나 없는 얼굴을 쿡하고 찌른다. 옴폭 파이는 살이 재미있어서 한 번 웃고, 자기를 바라보는 신해량이 좋아서 한 번 웃고. 술이 들어가는게 또 좋아서 웃었다.
사랑해요오.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스러워서 또 웃었다. 신해량은 강수빈의 술버릇이 고백이라는 사실을 방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랑해요, 잘생겼다아.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사랑해요. 같은 숨처럼 담아냈다가 내뱉는 강수빈의 낯은 이미 다 취한 사람의 것이었다. 도수 40도를 견디기엔 강수빈의 몸이 너무 작은 걸지도 몰랐다.
... 다른 사람들 앞에선 술을 자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손을 뻗어 강수빈의 뺨을 느리게 쓸면 강수빈은 저에 비해 낮은 체온이 시원하기라도 한 건지 그 손에 기대 흐, 하고 웃었다. 굳은 살로 단단해진 손에 물렁한 뺨이 닿고, 코가 닿고 속눈썹이 닿는다.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닿는다. 어쩐지 심장 박동이 들려오는 것만 같은데 강수빈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접어올린 눈을 맞춘다. 웃음이 평소보다도 샌다.
왜애요. 응? 사랑하는 해량 씨이. 나는 금이 씨랑 애용 씨랑도 마실 건데에….
여자들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해량은 강수빈하고 사귄 이후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블라디미르나 사토의 낯짝이 떠올랐다는 것. 스스로의 얼굴을 내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한 나머지 그 사람의 행동을 멋대로 생각하고야 마는 제 행태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느리게 새나오는 한숨에서 알코올 향이 훅 느껴진다.
어지러워요…. 으응.
가까이 오시죠.
강수빈은 신해량의 널찍한 어깨에 툭, 하고 기댔다. 술이 올라 따끈해진 몸이며 귓가에서 고동치는 심장 박동, 머리가 어지러워져 오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강수빈은 멍한 정신으로 손을 펴 천장으로 올렸다. 해저에는 태양 빛이 닿을 수 없으니 그들은 이카루스가 될 수 없다. 밀랍이 녹아 바다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강수빈은 그 손으로 약 75와트의 LED등을 가렸다. 손이 어째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져 손가락 끝을 펴면 드러나는 희멀건 손바닥. 신해량은 그 손을 볼 때마다 기이한 감정을 느낀다.
이있잖아요, 해량 씨이.
예, 말씀하십시오.
으응, 해량아….
강수빈이 께꾹께꾹 넘어가는 고개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기어이 턱마저 신해량에게 기대고 만다. 몽롱한 정신에 새는 고백을 차마 멈추지 못한다. 강수빈은 어쩌면 후회할지도 모르는 말들을 걸어잠구지 못한다. 그 모든 것은 결국 디오니소스의 탓일 것이다. 다시 태어난 자는 깊이 묻어둔 말조차 파묘하게 했다. 허벅지가 아닌 심장에서 게워내는 말. 위액이 아닌 진심을 게워낸다.
나는 생명선이, 길거든요…. 응, 혼자 안 남겨둘 거니까….
강수빈은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숨소리가 새액 색 나고, 그 사이로 뛰는 심장 박동. 신해량은 술기운이 채 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혈류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툭 내려 떨어진 손을 쥐면, 제 한 손에 전부 가려지는 그 손의 생명선을 바라보면, 이건 그저 체온이 옮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귀에서 고동치는 심장 박동이며 벌게지는 낯짝. 당신의 심장 박동과 올라온 열에는 사랑이 괴여있었을지 신해량은 확신하지 못했다. 술은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랑의 동의어이기에 이다지도 사람을 틀어쥐는지. 다만,
신해량은 그날 밤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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