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죽기 때문에,

비비애영

C by 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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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건 빨리 죽기 때문에, 마음을 주면 안 돼요. 나만 다치니까.

박무현은 그날 백애영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백애영이 과거에 묻고 온 살아있던 것을 알아챘으면 박무현은, 입을 열었을까? 알지 못한다. 아니, 알 수 없었다. 그 일을 언급하지 않는 건 오래된 불문율이니까. 비석 따위에 8 금법 새기지 않아도 이미 심장에 새겨진 금법이니까.

그러니까 그 일은 백애영이 유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미리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만약 백애영이 —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백애영은 —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얼굴조차 흐릿했다. 신해량은 그것이 정신적인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뇌가 그렇게나 회피를 잘한다는 걸 백애영은 그때야 알았다.

용병이 가는 곳에 안온함이란 말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게 맞다. 이미 세계는 잔뜩 더러워져서 걸레질을 해도 더 더러워지기만 할 뿐이었고, 깨끗해질 수는 없었다. 그런 세상에서 백애영은 —를 만났었다.

와, 이거 진짜 총이에요?

구해주었더니만 왜 안 떠나지.라는 생각이 백애영의 머릿속에 스쳤다. 머리가 띵하게 어지러웠다. 야, 여기가 뭐 좋다고 있어. 빨리 좀 안전한 곳으로 가야지.라는 말을 해도 떠나지 않고 기웃거리는 행동이 제법 웃겼다. 그래서 백애영도, 안 가냐.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앨 정말 내다 버리지는 못했다. 키도 작고 근력도 뒤쳐지고, 그래. 비주류 인종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백애영은 —에게 마음을 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알았어야 했는데. 자신이 가는 곳에는 웃음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저격수란 건 원래 가장 대접이 안 좋은 직종이었다. 몰래 숨어서 안전하게 총만 갈기면 된다는 비겁자, 정도의 인식이 저격수에게 있는 탓이다. 저격수의 시신이 온전할 수 없는 이유도 그것에 있었다. 저격수는 원래 인질로 잡히면 고문부터 시작이거든. 괜히 위장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백애영은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던 그 새끼들이 어떻게 했을까?

아무리 —가 체력이 좋고 날고 기어도 그 애는 어렸다. 실전 경험도 뒤지게 없었다. 그러니 그 새끼들은 가장 쉬운 방안인 납치를 선택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맞는 행동이었다. 아직까지도 백애영은 그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기 바빴으니까. 낫지 않는 병이 되고 말았으니까. 백애영의 죽음으로 끝날 후회였으므로...

배, 백애영 씨... 사, 살려줘요. 네?

리코딩된 영상 하나가, 그 애가 머물렀던 방 안에 있었다. 4평도 채 되지 않는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USB. 백애영은 그때도 희망을 감히 품었다더라. 그러나 찾아간 곳에서는 끔살 된 시체가 있었다.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그 시체, 백애영은 그날 배우고 만 것이다.

나만 다치니까, 마음을 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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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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