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에서
계간 망무 2020 여름 앤솔로지 참가 원고
곱게 핀 목련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한낮, 남망기는 서한에 놓인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소란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장서각은 본래의 조용함을 되찾았다. 간혹 불어오는 봄바람에 펼쳐진 책장이 팔락이고,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하던 남망기의 머리칼도 살며시 흔들렸다. 펄럭이는 책장을 덮은 남망기는 힐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장서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창밖의 목련 나무를 지나쳐 그대로 쭉 걷다보면 검은 기와를 얹은 흰 담벽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다.
운심부지처의 담 가까이에 있는 나무가 한둘이 아니니, 그 나무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남망기는 지난 밤 그 나무에 매달려 있었던 위무선을 떠올리고 있었다. 고서를 정돈하며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젯밤의 그 일은 그간 위무선이 일으킨 무례하고 파렴치한 사건들 중 유독 특이했던지라 자꾸만 되새기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젯밤, 남망기는 요란한 개 짖는 소리와 어쩐지 낯익은 비명을 듣고 거처를 나섰다가 개에게 쫓겨 나무 위로 도망친 위무선을 목격했다.
위무선은 언제나 제멋대로에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듯한 자신만만함을 온몸에 두른 소년이었다. 원기를 부추긴다느니 무덤을 파내겠다느니 하는 사도의 방법을 태연하게 입에 담는가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규칙을 열 손가락이 모자라도록 어기고도 조금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더 악질적인 장난을 치는 등, 최근 남계인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어젯밤에도 분명 몰래 담을 넘어 밖에 나갔다 돌아오다가 개와 마주친 것이리라. 어쩌면 그때에도 술 단지를 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소 남씨의 규칙을 어겼으니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남망기는 위무선을 처벌하기는커녕 나무 위로 도망친 그를 못본 척 하고 개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무 위에서 벌벌 떨던 위무선은 몰랐겠지만,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무에서 내려와 떠나는 것을 남망기는 멀찍이서 전부 보고 있었다.
사건의 주범 중 한쪽은 금자헌이 데려온 영견이었다. 운심부지처에 개를 들일 수 없으니 산 밑에 맡겨두었는데, 어젯밤 도망쳐 주인을 찾아 운심부지처까지 올라온 듯했다. 남망기에게서 이 일에 대해 전해 들은 남계인은 금자헌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금자헌은 제 개를 산 밑으로 돌려보냈다. 한밤의 작은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개에게 쫓긴 위무선이 울고불고 소리치며 나무를 타고 올랐다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모든 전말은 남망기만이 알았다.
세상천지에 두려울 것 없어 보이던 이가 개 한 마리에 겁을 집어먹고 어린아이처럼 나무에 매달린 모습이 의외였기 때문일까. 가규를 어긴 자를 눈감아 주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지만, 남망기는 이후로도 그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단지 그 뒤로도 야렵에 나설 때면 눈으로 검은 옷자락과 붉은 머리끈을 좇았고, 누군가 영견을 동반하지는 않았는지 조용히 주변을 한 번 살펴보았을 뿐이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운심부지처의 나무들은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갔다. 태양이 지고 선과 악을 논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치러야 할 업보는 각자의 몫으로 돌아갔으며 새로 지어진 운심부지처의 목련은 여러 번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가규를 밥 먹듯 어기며 담을 타 넘고 다니던 무례한 소년이 다시 운심부지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초여름의 채의진.
그날 위무선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남망기와 함께 채의진에 마실 나온 그는 골목골목을 헤집으며 온갖 군음식을 사들이고 장터를 구경했다. 그는 이곳에 놀러 오기를 매우 좋아해 몇 번이나 걸음 하는 사이 근방 아이들과 안면을 텄다. 아무래도 서로 수준이 아주 잘 맞는 모양이었다.
찹쌀술 한 단지를 사 온 남망기는 잠시 멀찍이서 아이들과 노는 위무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법 더워진 계절의 햇볕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땅바닥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는 중이었다. 위무선이 아이들과 노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여,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코흘리개 아이들을 속여가며 제기를 차기도 했고 역할극을 지도해주거나 함께 연을 날리는 등 매번 다른 놀이를 하느라 바빴다.
곧 남망기가 돌아온 것을 안 위무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짓는 아이들에게 장에서 샀던 군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속이 꽉 찬 만두와 전병 따위가 아이들 모두에게 하나씩 돌아가고 나자, 그는 저만치 먼 담벼락 그늘 속에 혼자 웅크리고 있던 꼬마에게 마지막 만두 하나를 던져주었다. 처음부터 거기에 누군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남루한 차림의 아이는 위무선이 저를 본 순간 흠칫 놀랐으나, 만두가 날아오자 허둥지둥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남망기는 그 광경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손을 탁탁 턴 위무선이 남망기의 곁으로 다가왔다.
“남잠, 찹쌀술을 사러간 거였어?”
“응.”
위무선은 남망기가 찹쌀술을 핑계로 아이들과 잠시 놀 시간을 마련해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이 나 술을 건곤대에 쑤셔 넣고 남망기와 함께 호남음식점으로 향했다. 배를 채우고 난 뒤에는 현란한 입담을 발휘하여 그 자리에서 친해진 어부의 배를 얻어타고 통통하게 살찐 물고기도 여러 마리 낚았다. 잡은 물고기는 저녁에 운심부지처로 가져가 산채어를 만들어 달라고 할 예정이었다. 물론 만드는 사람은 남망기이다.
그러나 이 완벽한 계획은 채의진에서 벗어나기도 전부터 어그러졌다. 이유는 위무선의 앞에 느닷없이 뛰쳐나온 작은 개 한 마리 때문이었다.
아마도 인근 농가에서 키우는 듯한 그 개는 사실 강아지에 가까웠다. 통통하고 짧은 팔다리에 순하고 까만 눈과 촉촉한 코가 귀여웠다. 그러나 주인집 아이가 굴려준 짚으로 된 공을 쫓아온 강아지를 본 위무선은 노끈에 꿰어 달랑달랑 들고 있던 물고기를 털썩 떨어뜨리고는 곁에 있던 남망기에게 덥석 매달려 버렸다.
“남잠, 남잠남잠! 살려줘!”
사실 그 강아지는 딱히 위무선에게 달려들지도, 큰 소리로 짖지도 않았다. 주인과 노느라 신이 나 짖는 소리는 골목을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보다도 작았으나, 공교롭게도 위무선에게는 산을 쩌렁쩌렁하게 흔드는 굉음처럼 들렸다.
남망기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제게 매달린 위무선을 등 뒤로 숨겼다. 공을 찾으러 왔던 강아지는 제 앞을 막아선 크고 하얀 사람을 보고 본능적으로 멈추어 선 채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만약 그 녀석이 선자나 다른 개였다면 남망기의 위엄에 눌려 꼼짝도 못 했겠지만, 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는 그의 전신에 흐르는 고상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 듯 그저 까맣고 순한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뿐이었다.
“…….”
남망기는 침착하게 발치를 굴러다니는 공을 툭 찼다. 제가 찾던 것을 발견한 강아지는 반갑게 왕, 하고 한 번 짖더니 공을 물고 주인에게 달려가 버렸다. 짧은 희극이 끝나고 그 자리에는 이제 남망기와 위무선, 둘만이 남았다.
“남잠, 이제 괜찮아? 갔어?”
“괜찮아. 갔어.”
“정말?”
“정말.”
믿음직한 대답을 들은 위무선은 남망기의 등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과연 조금 전 달려왔던 강아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위무선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이게 웬 난리람.”
그 난리를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놀라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던 위무선은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남망기를 보고 그제야 활짝 웃어 보였다.
“남잠, 네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이 연약한 사내를 이렇게 잘 보호해주다니, 역시 함광군이야.”
남망기는 그저 말없이 흐트러진 위무선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한 치 변함없이 담담하고 서늘했으나, 위무선은 그 유리처럼 투명한 눈동자에 흐르는 빛살 같은 희미한 웃음기를 보았다. 연약한 사내에서 금세 장난기 넘치는 청년이 된 위무선은 실실 웃으며 제 귓가를 맴도는 남망기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남가 둘째 형은 칭찬이 참 좋은가 봐. 그렇게 좋으면 돌아가서 더 많이 칭찬해줘야겠네.”
하얗고 가는 손가락 사이에 살살 깍지를 끼며 속삭이는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남망기는 묵묵히 위무선의 손을 얽어 쥐다가, 그의 어깨너머로 살짝 시선을 옮겼다. 무심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위무선이 아, 하고 안타까운 소리를 질렀다.
“내 산채어!”
바로 조금 전까지 그가 들고 있었던 물고기는 이미 바닥을 나뒹굴며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개미들이 이미 그 주변에 몰려들고 있었다. 이로써 남망기의 손에 먹음직스러운 산채어가 될 운명이었던 통통한 붕어는 개미들의 일용할 식량으로 전락했다.
어릴 적 개미집을 파헤치며 놀았기 때문일까, 오늘날에 이르러 개미들 좋은 일만 하게 되었으니 업보를 받은 셈이다. 아쉬워하는 위무선을 힐끗 본 남망기가 입을 열었다.
“새로 사면 돼.”
“그렇긴 하지만, 내가 잡은 게 제일 통통했는데…… 됐어됐어. 어쩔 수 없지. 대신 이따 천자소도 사갈래. 남잠 너도 같이 한 잔 마셔줘야 해.”
“응.”
이미 찹쌀술을 샀음에도 위무선의 술 욕심은 끝이 없었다. 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답에 그는 금방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이미 못 먹게 된 물고기에 미련을 둬 봤자 어쩌겠는가. 채의진은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고 물고기는 또 낚으면 그만이다. 남망기는 그가 요리해 달라고 하면 언제든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오늘은 남망기가 기꺼이 천자소를 같이 마셔준다고 했으니 무슨 놀이를 해야 할지 생각해두는 쪽이 더 먼저였다. 위무선은 남계인이 알았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만한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의 작은 소동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잊힌 듯했다.
그대로 잊어버릴 듯했던 그 소동이 갑자기 다시 떠오른 것은 고소성에서 천자소를 사 들고 돌아가던 도중이었다. 천자소 세 단지를 안고 가게에서 막 나온 위무선은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순간 빳빳하게 굳었다. 그의 손에서 천자소 두 단지를 받아든 남망기가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아주 멀리 있어.”
안도의 숨을 내쉰 위무선은 남망기를 끌고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해지다 못해 고소성을 나와 운심부지처가 있는 산 아래 길목에 접어들고 나서야 걸음을 멈춘 그는 천자소를 신줏단지처럼 끌어안고 투덜거렸다.
“오늘 운수가 왜 이러지? 내 아까운 산채어도 그렇고, 하마터면 천자소도 떨어뜨릴 뻔했네.”
뭇 사람들이 보았다면 멀리서 개 짖는 소리 가지고 난리라며 웃었겠지만, 위무선은 진지했다. 남망기가 그의 품에 있는 천자소 단지를 마저 받아들며 말했다.
“떨어뜨리면, 새로 사면 돼.”
“하하, 너 아까도 그렇게 말했지. 전에는 내가 사 온 천자소를 엎어버렸으면서 말이야!”
“…….”
놀리고 싶어 신이 난 듯한 말에 남망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잽싸게 곁에 따라붙은 위무선은 백옥을 깎아내어 만든 듯한 남망기의 옆모습을 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때의 작은 남가 둘째 공자가 지금의 널 보면 질색할지도 몰라. 오늘은 대체 가규를 몇 개나 어긴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검은 비단 같은 머리칼 사이로 연한 분홍색이 된 귓불이 위무선의 기분을 다시 들뜨게 만들었다. 아픔을 쉽게 잊어버리는 그는 기분이 좋아지자 조금 전까지 짖는 소리만 들어도 모골이 송연하던 두려움도 희미해졌다. 어쨌든 지금은 눈앞에 개가 없으니, 얼마든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굴 수 있다.
위무선은 어린 시절 거리에서 저를 쫓아와 공격했던 개들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느꼈던 공포만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지금의 그에게는 보잘것없을 정도로 작은 개이거나 저를 향해 짖거나 이를 드러내지 않아도 두려운 건 매한가지다. 개의 몸집이나 생김새는 상관없다. 어떤 개이든 그저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식은땀이 솟구치고 손발이 벌벌 떨리며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선문 세가들은 야렵에 개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은 평범한 맹수가 아니라 요괴와 귀신을 사냥한다. 당연히 보통의 개들은 그러한 대상을 상대할 수 없다. 금릉이 데리고 다니는 선자는 매우 영리하고 엄격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요괴나 악귀와 마주쳐도 겁먹지 않고, 숨겨져 있는 주술이나 사특한 술수도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개다. 하지만 그런 영견을 구해 훈련 시키기는 쉽지 않고, 어검으로 이동하며 개를 동반하기도 어려우니 금릉과 같은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말해도 믿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이 덕분에 위무선은 ‘이릉노조는 개만 보면 공포에 질려 혼비백산한다’는 추태를 사방에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참가한 야렵에 누군가 개를 데려왔다면 다음날 당장 이릉노조가 개 앞에서 꼼짝도 못 한다는 소문이 만천하에 퍼졌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어린 후배들 대부분이 개만 보면 혼이 빠져나가려고 하는 위무선의 모습을 목격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착한 후배들은 선배의 약점을 사방팔방에 퍼뜨리고 다니지 않았다. 금릉 역시 위무선이 남가 소년들과 함께 나올 때면 선자를 연화오나 금린대에 두고 오거나 객잔을 지키게 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을 되새기던 위무선은 이릉노조를 토벌할 때 개를 끌고 왔다면 아무 희생 없이 끝났을 거라는 농담을 하려다, 그것이 적절치 않음을 자각하고 제때 입을 닫았다. 제가 툭 하면 입에 담는 이런 허튼소리를 남망기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린 덕분이다. 대신 그는 남망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딴소리를 했다.
“남잠남잠, 이러다 야렵에서 개 모습을 한 요괴라도 나타나면 어떡하지? 이제까지 그런 요괴를 본 적은 없지만 혹시 모르잖아. 도륙 현무 같은 것도 있었는데 세상에 개 모습의 요괴가 없겠어?”
남망기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가 처리할게.”
“내가 너한테 매달려서 방해하면 어떡하고?”
“그럴 리 없어.”
정말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대답이었다. 즐거워진 위무선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부러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아니, 생각해봤는데…… 내가 전에 애들한테 뭘 좀 가르쳐줬거든. 귀신을 무서워하는 건 당연하지만, 너희는 바로 그런 걸 상대해야 하니까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담력을 키우라고 했어.”
“맞는 말이야.”
“그렇지? 헌데 정작 나는 개만 나타나면 함광군 뒤에 숨기에 바쁘잖아. 남잠 네가 내 귀도 막아주고, 꼭 안아주고, 개도 쫓아주니까 두려움을 극복할 겨를이 없네. 이래서야 애들에게 모범이 안 돼.”
‘모범’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남망기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위무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태어난 이래 타인의 모범이 되어 본 적이 없던 위무선은 자신의 말에 한 치 틀림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남망기의 시선을 마주했다.
“함광군, 어떻게 생각해?”
“……뭘.”
“뭐냐니. 내가 꼬마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개를 무서워하지 않는 수련이라도 쌓아야 하느냐는 얘기지.”
남망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위무선은 저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아주 살짝 옆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마침 곁에 키가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굵은 나뭇가지가 제법 타고 오르기 좋아 보이는 튼튼한 나무였다.
그는 남망기가 왜 갑자기 나무를 바라보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최근 남희신을 본받아 남망기의 얼굴과 눈빛을 읽어내는 연습, 아니 놀이를 시작했는데, 아직 수양이 부족한지 지금 이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잠시 대답을 피해 시선을 돌린 걸 수도 있다. 좌우지간 그는 남망기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흔들리며 그 유리 같은 눈동자가 다시 제게로 돌아온 순간, 그 눈에 시선을 빼앗겨 나무에 대한 작은 의문은 금방 잊어버렸다.
“……그럴 필요 없어.”
색 옅은 눈동자에 홀리다시피 했던 위무선은 한발 늦게 남망기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바쁘게 입을 놀렸다.
“정말? 남잠 너 생각해 봐. 만약 네가 곁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해?”
남망기가 말했다.
“나무에 올라가 있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위무선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박장대소했다. 살랑이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커다란 웃음에 놀란 듯 두 사람의 옷 위에 흔들리는 무늬를 수놓았다. 한참을 웃던 위무선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남잠, 내가 널 타고 오른 적은 있지만 어떻게 나무를 타고 오르기까지 하겠어? 이릉노조의 체면이 있지! 누가 보고 비웃으면 어떡해?”
물론 위무선은 개가 무서워 나무에 오른 적이 몇 번이나 있다. 다만 남망기가 모르는 곳에서 그랬을 뿐이다. 그때의 그는 허겁지겁 나무를 타고 올라가 벌벌 떨며 강징이 와 주기를 기다렸다.
위무선은 몰라볼 만큼 변해버린 연화오에 남아있던 나무 한 그루를 생각해내고 내심 웃었다. 어릴 적 그 위에 올라가 떨고 있던 자신을 찾아주었던 강염리와, 수십 년이 지나 그 나무 밑에서 자신을 받아주었던 남망기의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며 마음속이 간질간질해졌다.
웃음기 가득한 위무선을 본 남망기가 단정한 태도로 답했다.
“타인의 두려움을 조롱하는 건 옳지 않아.”
“역시 함광군! 그럼 나무에 올라가서는? 그다음은 어떡해?”
“내가 갈게.”
반짝이는 햇볕이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와 희디흰 옷자락 위에 흐트러진다. 그 순간 위무선은 마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울창한 고목 아래에 서 있던 아름다운 소년은 전신에 나무 그림자와 햇빛의 무늬를 수놓은 채 차가운 눈으로 저를 응시했었다. 그때 제가 아무리 불러도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떠나버렸던 그 소년이, 저와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세상천지에 오직 자신이 부르면 반드시 대답해주고, 자신이 원하면 반드시 응해주는 사람이 될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위무선은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시시할 정도로 우직하고 간결한 대답인데, 어쩜 이리 늘 즐거울 수가 있을까.
의식하지 못한 사이 걸음이 느려져 나란히 걷고 있던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약간 벌어졌다. 위무선이 뒤처지는 것을 눈치챈 남망기가 금세 그 자리에 멈추려던 순간, 다시 걸음을 재촉한 위무선이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좋아. 그럼 남잠 너만 믿을게.”
“응.”
위무선이 한숨을 쉬었다.
“……큰일났네. 선선이는 정말 둘째 오라버니가 없으면 안 되겠어.”
긴 소맷자락 아래 숨겨진 남망기의 손가락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재빨리 다가온 위무선의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남망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아플 정도로 손을 꽉 잡아 오는 힘이 모든 답을 대신했다.
햇살과 수목의 그림자가 뒤엉켜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흐트러지고, 그들이 떠나고 난 뒤 저물어가는 길목에 내려앉았다.
完
*2020 계간망무 여름 앤솔로지에 수록된 글입니다.
*운심부지처 시절 무선이가 금자헌의 개에게 쫓겨 나무 위에 올라가고, 망기가 개를 쫓아준 이야기는 묵향동후님 웨이보에 있는 tmi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도 오디오드라마(중국판) 외전으로도 나와있는데 진짜 귀여우니까 안 들어보신 분들은 꼭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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