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平安果

마도조사 남망기x위무선

기록 by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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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요란한 당나귀 울음과 함께 들려온 고함에 밤새 소복이 쌓인 눈으로 인해 평소보다 더더욱 고요하던 운심부지처의 평온이 깨졌다.

난실과 장서각에서 자율적으로 학업에 힘쓰고 있던 고소 남씨의 자제와 문하생들은 사찰처럼 숙연한 운심부지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음에 어깨를 움찔거리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잠시 놀라기는 했으나 누구도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다들 이런 때아닌 소란에 익숙한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몇 개의 발걸음이 장서각 앞을 급히 지나가고 머지않아 꽥꽥거리는 당나귀의 울음과 시끌벅적한 소음이 잦아들었다. 다시 돌아온 고요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들은 소란 금지와 질주 금지라는 규훈을 어긴 이들을 눈감아주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남계인이 알면 파르르 떨며 분노할 일이지만, 어차피 이 소란의 주역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게다가 사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지 않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 누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다행이야. 그 말에 모두가 내심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낮부터 운심부지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이제는 일상이 된 사소한 소란의 중심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선배와 동문의 묵인하에 아정집을 베껴 써야 하는 벌을 피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소란스레 떠드는 중이었는데, 다행히 규훈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기에 목소리를 한층 낮춘 채였다.

“위 선배, 한참을 안 보이더니 풋사과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정적을 깬 풋사과의 요란한 울음에 헐레벌떡 달려온 남경의가 씩씩거리고 있는 당나귀를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물론 그 물음의 대상은 위무선이었다. 건곤대 하나를 손에 달랑 쥔 채 풋사과의 발길질을 피해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그는 남사추가 당나귀의 고삐를 잡아챈 틈을 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흰 솜뭉치 같은 토끼 무리 너머로 피신했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이내 뻔뻔하게 대답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사과를 줬을 뿐이라고.”

“그것만일 리가 없잖아요. 풋사과의 반응을 보라고요!”

남경의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자 당나귀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던 남사추가 재빨리 주의를 주었다.

“경의, 운심부지처에서는 소란 금지야.”

“알았어……하지만 위 선배랑 풋사과가 더 시끄러운걸!”

위무선은 남경의의 볼멘 투덜거림을 들으며 싱글싱글 웃었다. 오늘 드물게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홀로 운심부지처 밖에 다녀온 그는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열심히 돌아다녔기 때문인지 두 뺨에 유독 혈색이 생생했다. 불만스러워하는 풋사과의 목덜미를 두드리던 남사추는 위무선이 두터운 솜옷과 피풍의를 제대로 챙겨 입고 있음을 확인하고 자그맣게 웃었다. 그가 마실 나가며 추위에 떨지 않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챙겼을 사람이 누구인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 선배, 어딜 다녀오셨어요?”

남사추의 물음에 흰 눈밭 위를 뛰어다니는 토끼들을 보고 눈과 구분이 안 된다며 웃던 위무선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건곤대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휙 던졌다. 반사적으로 제게 날아오는 빨간 물체를 잡아낸 남사추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옆에서 연달아 날아온 똑같은 물체를 낚아챈 남경의가 어, 하고 의아한 소리를 냈다.

“이거……사과네요?”

“맛있겠지?”

그의 말마따나 사과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반들반들하니 윤이 나는 표면이 빨갛게 잘 익은 것이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였다. 마침 해가 중천에 가까워진 참이라 슬슬 배가 고팠던 남경의는 위무선을 향해 감사의 말을 던지고 냅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코끝을 스치는 사과향과 함께 와삭 하고 씹힌 과육이 달고 싱그러운 맛으로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남사추는 즐겁게 사과를 씹는 그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위 선배……혹시 이걸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어쩐지 약간 조심스러운 기색이 느껴지는 그 말에 이미 시원스럽게 사과를 반쯤 먹어가던 남경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는 재빨리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당연히 장에서 사 오셨겠지. 왜 그래?”

“음……그게, 혹시나 싶어서…….”

“혹시나?”

남경의의 얼굴에 희미한 의혹과 불안감이 어리기 시작할 때, 위무선이 웃으며 되물었다.

“왜, 혹시 저번처럼 흉시가 가져온 과일이라도 주워왔을까봐?”

그 말에 남경의가 컥, 하고 목이 막힌 듯한 소리를 냈다. 위무선은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졌다파래졌다 하는 것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운심부지처에서 소란 금지라는 말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맛있게 먹은 것을 토해내야 할지 아니면 들고 있던 반 남은 것을 버려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남경의가 벌개진 얼굴로 항의했다.

“위 선배!”

그 억울한 목소리에 위무선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 그건 돈 주고 사 온 멀쩡한 과일이야. 그리고 흉시가 가져온 과일이라도 독 같은 건 안 들었었잖아? 풋사과에게 먼저 먹여보기도 했고, 내가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제 이름이 거론되자 풋사과가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그 영리한 당나귀는 무엇이 문제인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남사추는 혹여나 풋사과가 위무선을 들이받을까 고삐를 고쳐 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이 없어도 그렇지, 흉시가 가져온 과일을 어떻게 먹어요?”

마찬가지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린 남경의가 잠시나마 버려야 하나 고민했던 사과를 보며 투덜거렸다. 사과는 여전히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만약 이것이 시변한 시체가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면……너무나 끔찍했다. 크나 작으나 대체로 결벽증이 있는 고소 남씨의 사람들로서는 절대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위무선의 말을 들은 남사추는 예의 바르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풋사과의 기세가 한풀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뒤, 안심하고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데 사과라면 운심부지처에도 있잖아요. 풋사과가 워낙 좋아하고……혹시 다 떨어지더라도 바로 들여올 텐데요.”

금방 사과 한 알을 다 먹어치운 남경의가 말했다. 어느새 웅크리고 앉아 눈밭에 흩어진 토끼들에게도 조그만 사과를 꺼내주던 위무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의미가 없잖아. 그런데 이 녀석들뿐 아니라 너희도 너무 하얗다. 눈이랑 구분이 잘 안 되네. 고소 남씨의 위장술이라고 해도 되겠어.”

“무슨 헛소리에요! 토끼 밟지 않게 조심하세요.”

“무슨 의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런 게 있어. 애들은 아직 몰라도 돼.”

“그게 뭐예요!”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흘려보낸 위무선은 남사추를 향해 손짓했다. 선선히 다가온 소년의 풍성한 소맷자락을 붙든 그는 한 손에 쥐고 있던 건곤대를 뒤집어 그 흰 옷자락 안에 여러 개의 사과를 탈탈 쏟아부었다. 갑자기 제 옷소매 위로 쏟아진 동글동글한 붉은 과일에 당황한 남사추는 사과가 떨어지지 않도록 팔을 추슬렀다. 다가온 남경의가 그를 도왔다.

“몇 개나 사오신 거예요? 엄청 많네.”

“다른 애들에게도 나눠 줘. 남잠은?”

“함광군께선 아직 한실에 계실 겁니다. 택무군과 논의할 게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그럼 조금 기다려야겠네. 위무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치의 토끼 한 마리를 잡아 귀를 살짝 당기고 코를 톡톡 찌르며 장난치다 무리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그의 손안에서 버둥거리며 분홍색 코를 발름거리던 토끼는 이내 자유를 찾아 친구들 사이에 폭 파묻혔다. 그 하얗고 동글동글한 것들은 정말 밤새 곱게 쌓인 눈과 구분하기 힘들다. 위무선은 제가 손을 뻗자 폴짝 뛰어 옆으로 물러나는 토끼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내가 사과도 줬는데 이러기야? 이 녀석들 설마 풋사과를 닮아가나?”

영리한 풋사과가 저를 헐뜯는 말을 용케 알아들었는지 다시 콧김을 뿜기 시작했으나, 다행히 남사추가 재빨리 커다란 사과 하나를 물려주어 큰 소란은 피할 수 있었다. 토끼들을 귀찮게 하는 위무선을 보며 남경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사추가 물었다.

“위 선배, 정말 풋사과에게 사과만 주셨어요?”

위무선이 자신은 결백하다는 듯 태연스레 말했다.

“그렇다니까. 내가 사과를 이렇게 많이 사니까 주인장이 너무 못나서 팔지도 못하고 따로 빼놓은 걸 덤으로 얹어주더라고. 보니까 정말 울퉁불퉁하니 못생긴 거야. 그래서 풋사과에게 줬지.”

“…….”

역시나 이 소동의 원인은 위무선이었다. 분명히 얌전히 사과만 준 게 아니라 지금처럼 한 마디 더 얹어서 이 영리한 짐승을 화나게 한 것임이 틀림없다. 하고픈 말이 많은 듯한 남경의를 말리며 남사추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세 사람과 당나귀 한 마리와 셀 수 없이 많은 토끼 무리는 겨우 되찾은 평화로움에 젖어 한동안 사과를 와삭와삭 씹었다. 사과를 다 먹은 뒤에는 남경의가 흉시의 사과라는 게 대체 뭔지 듣고 싶어 했기 때문에 위무선과 남사추가 번갈아 가며 진씨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얘기해주었다.

사실 함광군과 위 선배를 따라 야렵을 떠났던 남사추가 운심부지처로 돌아왔을 때, 남가의 소년들은 야렵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남사추는 느긋하게 쉬며 이야기를 풀어놓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야렵 일지를 써야 했고, 그 뒤에는 함광군에게 직접 검법 지도를 받아야 했다. 아직 고소 남씨의 검법도 미숙한데 거기에 운몽 강씨의 검법을 기억해버렸으니 이는 부적절하다는 남망기의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숙함은 이후 경험을 쌓으며 해결할 수 있으나, 수련 도중 다른 가문의 검법이 섞이면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 이후 벽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덕분에 남사추는 다시 한번 가문의 검법을 기초부터 되짚어보며 엄격한 지도를 받아야 했다. 말은 검법 지도였지만 사실 벌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는 내심 온녕에게 기산 온씨의 검법을 배운 것도 혼이 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남망기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후 기진맥진한 그에게 다가온 위무선이 다른 가문의 검법을 사용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건 고소 남씨의 검에 매진하여 일정 경지에 오른 뒤가 좋겠다는 충고를 지나가듯 남겼다.

이후 남사추는 무언가를 말할 기력도 없이 지쳐 쓰러졌고, 위무선은 사추가 왜 저렇게 호되게 수련을 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웃으며 헛소리를 할 뿐 속 시원한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그 뒤 소년들은 수장인 사추가 솔선수범했으니 너희도 분발해야 하지 않겠냐는 영문 모를 말과 함께 때마침 약속되어 있던 금릉과의 야렵에 나가 백가의 ‘하얀 집’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러고 나니 자연스레 그때의 일에 대한 호기심은 뒤로 밀려나 잠시 잊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 사과를 두 바구니나 사오셨군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드디어 당시의 일에 대해 들으며 때로는 분개하고 때로는 기겁하고 때로는 웃던 남경의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 말했다.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위무선은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이제 토끼 무리와 풋사과를 풀밭에 두고 소년들에게 사과를 나눠주러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하얀 눈에 뒤덮인 운심부지처는 본래의 고요한 신비로움에 한낮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설광雪光이 더해져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운치를 자랑했다. 세 사람은 그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마주친 소년들은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보고 반가운 얼굴로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받아갔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위무선이 흉시의 사과를 운운하며 그들을 골려주고 싶어했으나, 가는 길마다 소란을 일으킬 셈이냐는 남경의의 항의와 남사추의 점잖은 제지에 아쉽게도 그 뜻을 접어야 했다.

“이제 다 나누어준 것 같습니다. 사과도 몇 개 안 남았어요.”

남사추가 서너 개밖에 남지 않은 사과를 보며 말했다. 위무선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뒤를 휙 돌아보았다. 반나절을 돌아다니느라 붉어진 뺨에 반짝이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

“남잠!”

“함광군.”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본 소년들이 덩달아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망기에게 인사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남망기는 유리처럼 연한 눈동자로 위무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추워서 뺨이 붉어졌고 하나로 묶은 머리가 좀 흐트러지긴 했지만 나가기 전 껴입힌 차림새 그대로다. 위무선에게 다가간 그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만히 정돈해주었다. 그 손길에 위무선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한결 짙어졌다.

“음,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위 선배, 오늘 사과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눈치 빠른 남사추는 남경의를 데리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제 저 정도쯤은 익숙해져서 부끄럽지 않지만, 지금 이 자리에 계속 있어야 할지 비켜야 할지는 그와 별개의 문제다. 연화오로 향하는 배 안에서는 왜 자신들이 자리를 피했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아주 잘 안다.

남경의 역시 분위기를 알아채고는 순순히 남사추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는 남망기와 위무선, 단둘이 남았다.

“남잠, 택무군과 무슨 얘길 하느라 이리 오래 걸렸어? 네가 안 와서 애들이랑 운심부지처를 한 바퀴 다 돌았잖아.”

“사과 때문에?”

“맞아! 내가 사과를 잔뜩 사왔거든. 꼬마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줬어. 풋사과한테는 덤으로 받은 제일 못생긴 걸 줬다가 걷어차일 뻔했다니까.”

남망기는 바로 일의 전말을 파악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를 힐끔 보았다. 방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본바 어디도 아파 보이거나 더러워진 데가 없다는 걸 확인했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물었다.

“다쳤어?”

“그럴 리가. 아, 토끼들에게도 사과를 줬어. 그 녀석들 내가 종종 먹이도 주는데 아직도 서먹하게 굴어. 이제 그만 너를 좋아하는 거의 반만이라도 날 좋아하면 좀 좋아…….”

토끼들이 위무선에게 서먹하게 구는 이유는 그가 얌전히 먹이만 주는 게 아니라 짓궂게 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망기는 쉴새 없이 이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위무선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등 뒤로 흰 눈밭에 찍히기 시작한 두 개의 발자국은 신기할 정도로 보폭이 꼭 같았다.

위무선은 정실로 돌아가는 내내 고소성에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했는지를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가 운심부지처를 나가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두 시진이 채 안 되었건만 할 말은 그 곱절로 많은 듯했다. 남망기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으며 가끔 한 마디씩 짧은 대답을 했다. 대답이라고 해도 ‘응’과 ‘좋아’ 정도가 전부였지만 위무선은 그 말을 듣고 더욱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정실에 도착해 막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즈음, 한참을 떠들던 위무선이 뒤늦게 생각난 듯 품 안에서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맞아, 함광군. 이거 줄게.”

남망기는 제게 내밀어진 사과를 받아들었다. 빨갛고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것이 매우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어디 하나 울퉁불퉁하거나 거뭇하게 멍이 들지도 않았고 동글동글한 것이 제법 어여쁘기까지 했다.

위무선은 뒤로 한발 물러서 사과를 들고 있는 남망기를 감상했다. 조금 전 저를 향해 다가오는 그를 보았을 때에도 생각했지만,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고소 남씨의 옷은 역시 남망기에게 제일 잘 어울린다. 윤기 나는 긴 흑발과 흰 말액, 넓은 소맷자락이 눈 내린 운심부지처를 배경으로 하늘하늘 흔들리는 것이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이제보니 위장술이 아니라 가장 돋보이는 모양새다. 눈처럼 흰 손에 들린 유독 붉은 사과가 꽃이었으면 더 좋았으려나. 아니, 꽃 대신 남잠이 있으니 됐지 뭐. 위무선은 속으로 감탄하며 그를 재촉했다.

“우리 남가 둘째 공자님 몫으로 제일 예쁜 걸 골라놨지. 맛은 내가 보장해. 어서 먹어봐.”

남망기는 잠시 그를 보다가 잠자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즐거운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그 모습을 주시하던 위무선은 그가 베어 문 사과를 채 삼키기도 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맛있지?”

당연하지만 대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연 남망기가 대답했다. “응.”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은 위무선이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남잠, 내가 왜 갑자기 사과를 사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어떤 대답을 바라고 있는지는 뻔했다. 남망기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해.”

“좋아. 함광군이 궁금하시다는데 당연히 알려드려야지.”

위무선이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간밤에 꿈을 하나 꿨어. 남잠 너도 알지? 우리가 초야에 은거하는 그 꿈 말이야. 꿈속에서 내가 아주 열심히 밭을 갈고 과일도 따서 집에 돌아갔더니 우리 남가 둘째 형이 내게 고생했다고 손수 연근갈비탕을 끓여주는 거야. 몇 번이나 그 꿈을 꿨지만 네가 연근갈비탕을 만들어 준 건 처음이라 신이 나서 부엌에 따라가 네가 요리하는 걸 구경했지. 네가 요리를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드는 걸 보니 얼마나 놀랍던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니까. 게다가 맛도 정말 좋았어. 연근은 포실포실하고 간이 잘 밴 데다 갈비도 아낌없이 들어갔는데 잡내 하나 없고! 얼마나 맛있었는지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니까. 남잠 넌 정말 대단해! 물론 요리 말고 다른 것도 참 잘하고 말이야. 아무튼 그 연근갈비탕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일찍 눈을 떴는데 꿈에서 먹은 그 맛이 너무 생생한 거야. 그래서 먹고 싶어졌어.”

“…….”

위무선의 장황한 말이 끝난 뒤, 남망기는 꿈속의 자신을 향해 줄줄이 이어진 찬사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눌러야 할지 요점을 알 수 없는 꿈 이야기에 어이없어해야 할지 잠시 갈등하는 듯했다. 게다가 위무선이 한 이야기 중 절반 정도는 실제 있었던 일이라, 정말 꿈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연근갈비탕이 먹고 싶어 긴 헛소리를 늘어놓는 건지도 애매했다.

운몽에서 거리를 쏘다니고 배를 타고 놀다 물에 빠지고, 못생긴 나귀 인형과 자기로 된 거북이를 가지고 돌아온 뒤 남망기는 위무선에게 그가 좋아하는 매운 음식뿐만 아니라 연근갈비탕도 만들어주었다. 남망기가 만든 음식을 먹게 되어 온 얼굴에 화색이 돌고 신이 났던 위무선은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주방에 따라 들어왔다.

그리하여 함광군이 주방에 서서 요리를 하고 이릉노조가 그 주변을 맴돌며 구경을 한다는, 돈 주고도 볼 수 없으며 뭇사람들이 들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면박을 줄 풍경이 펼쳐졌다. 아마 남계인이 보았다면 그 자리에서 뒷목을 잡으며 실신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조카이자 애제자가 주방에 서서 요리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운심부지처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남잠 너 피진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이런 칼도 잘 쓰네. 어디서 배웠어? 설마 만드는 과정을 보고 익힌 거야?’

‘응.’

‘역시 넌 대단해!’

위무선은 정갈한 손놀림 아래 토막토막 썰리는 생강과 연근 등을 구경했다. 갈비의 핏기와 잡내를 없애고 채소를 썰고, 불을 피우고 물을 붓는 움직임은 전혀 초심자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광경이다. 위무선은 마음껏 그 모습을 감상하며 중간중간 끊임없이 추임새를 넣었다. ‘난 연근을 조금 두껍게 썬 게 좋더라.’ ‘둘째 오라버니, 네가 이러니까 내가 매일매일 널 좋아하지 않을 수 없잖아.’ 가끔은 썰어놓은 채소를 정리하는 남망기의 손가락이 살짝 움찔할 만한 말들이 지나가고, 탕이 오래도록 끓는 동안 주방에 어울리지 않는 손짓과 발짓이 오가고 난 뒤, 위무선은 드디어 남망기가 끓인 연근갈비탕을 맛볼 수 있었다. 먹고 난 뒤의 감상은 그가 주절주절 늘어놓은 꿈속의 이야기와 같다.

남망기는 유리처럼 옅은 눈동자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위무선을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먹고 싶다면, 왜 일어났을 때 말하지 않았어.”

그 말에 위무선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야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남잠 넌 당연히 만들어주겠지. 그렇지만 꿈에서 나는 열심히 밭일하고 과일도 따서 네게 갖다 주고 나서야 국을 먹을 수 있었단 말이야. 이를테면 제 몫을 하고 노동의 대가로 맛있는 음식을 먹은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내가 꿈속의 나보다 못해서야 되겠어? 아, 이렇게 말하면 네 꿈속에서 그 일을 했을 때보다 더 힘내야 할 것 같은데……둘째 형, 이건 좀 봐줘.”

남망기의 표정이 약간 미묘하게 변했다. 위무선은 그 아주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과를 사 온 거야?”

“맞아.”

위무선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운심부지처에서 밭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냥을 해오면 아마 십중팔구 큰 소란이 날 테고, 야렵은 좀 더 멀리 나가야 하고 시간도 걸린다. 해서 비파를 사갈까 했는데 지금은 철이 아니었다. 그때 마침 아주 빨갛게 잘 익은 반들반들한 사과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좌판에 쌓인 사과를 전부 다 달라고 하니 상인의 입이 귀에 걸렸다.

거기까지 들은 남망기는 잠시 침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점잖게 그것을 참은 그는 제 손에 들린 사과를 바라보았다.

한 입 베어먹은 사과는 함광군이 들고 있기에 약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동시에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위무선은 문득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으나 꾹 참고 짐짓 아주 진지하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그는 대체로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뿐이었다. 연근갈비탕이 먹고 싶어진 건 사실이지만, 운심부지처에도 사과가 있는데 하필 그걸 가득 사다 생색을 내서 무얼 하겠는가? 위무선은 본디 사람들을, 특히 남망기를 상대로 헛소리하기를 즐겼고 그로 인해 미세하게 변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즐거워하곤 했다.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남잠, 사과 맛있지?”

남망기의 곁에 바짝 붙어선 위무선이 은근하게 물었다.

“응.”

“그럼 나 연근갈비탕이 먹고 싶은데, 해 줄 수 있어?”

“응.”

“좋아! 역시 둘째 형이야.”

위무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실에 들어섰다. 이로써 오늘 저녁에는 연근갈비탕을 먹게 될 것이다. 문득 서늘하고 차가운 바람 속에 섞인 향긋한 사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은은하게 깔린 단향목 향에 어렴풋이 스치는 사과향이 썩 좋아 연신 웃음이 나왔다.

그때 등 뒤에서 남망기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냥 말해.”

“응?”

“연근갈비탕.”

고개를 돌린 위무선은 남망기를 빤히 보다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었다.

“함광군, 혹시 내가 일어나자마자 혼자 나가버려서 심심했어?”

남망기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사과를 서안 위 작은 그릇에 내려놓고 위무선이 입고 있던 피풍의를 벗겨주었다. 정실 안이기는 하지만 따뜻하게 몸을 감싸고 있던 겉옷이 사라지자 서느런 공기가 밀려온다. 무심코 어깨를 약간 움츠리자 따뜻하고 단단한 팔이 몸을 감싸왔다. 단향목 향이 나는 품에 안긴 위무선이 남망기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남잠. 네가 이렇게 외로움을 탈 줄 몰랐어. 넌 정말 내가 없으면 안 되겠다.”

“응.”

그를 감싸 안은 남망기가 대답했다.

 


*중국에서는 사과를 뜻하는 한자 핑궈苹果의 핑苹이 평안을 의미하는 핑平과 음이 같아서 사과를 '평안'으로 해석한대요. 성탄 전야제를 평안야平安夜라고 하고 사과를 주고받는데 이 사과를 平安果라고 한답니다.('과일과 한시 이야기'라는 책 설명입니다)

이 平安果 얘기는 현대 중국의 습관이므로 당연히 마도조사의 시대에는 없겠죠! 그냥 제목을 그렇게 쓰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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