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一个短梦

마도조사 남망기x위무선

기록 by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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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몽의 여름은 고소보다 많이 덥다고 하더구나. 남희신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남잠은 웃지 않았다.

형장의 말대로 운몽의 햇빛은 남잠이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높은 산 위 구름 속에 숨은 운심부지처의 여름은 계절이 계절인만큼 덥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운몽처럼 소란하게 덥지는 않았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선명한 색의 연잎 사이로 피어난 연꽃들, 고소보다 훨씬 더 발음이 강한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시끄러웠다. 남잠은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이 거리는 분명 그와 닮아있었다.

“남잠!”

반 시진 전부터 거리를 서성이던 위영이 저 멀리서 그들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든다. 환한 웃음이 가득한 얼굴은 한여름의 햇볕에 지지 않을 정도로 눈부시고 소란했다.

강렬한 햇빛 아래,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백의를 입은 남씨 쌍벽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이란 시선은 죄다 끌어모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 하나 없이 정돈된 차림새에 희디흰 얼굴이 뜨거운 열기와 동떨어진 양 시원하고 깨끗하다. 눈부시게 준수한 외향은 쌍둥이처럼 흡사한데 첫눈에 보아도 한 명은 부드럽고 온화한 봄이며 다른 한 명은 차갑고 냉막한 겨울이다. 한여름과 동떨어진 두 계절을 상징하는 것 같은 고소 남씨의 형제는 연화오에 발을 들이자마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두 사람을 연화오의 주인인 강종주의 수제자가 기다려 맞이하니 더욱 이목이 집중되는 게 당연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종주의 천방지축 수제자는 잔뜩 신이 난 채 상기된 얼굴이었다.

“남잠, 나 여기서 한참 기다렸어! 더워 죽는 줄 알았다고! 어때? 운몽은 덥지? 놀랐어? 택무군, 연화오에 잘 오셨습니다.”

그는 한달음에 남잠의 앞으로 달려와 쉴 새 없이 말을 우르르 쏟아내었다. 그 와중에 남희신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남희신은 온화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남잠은 그저 조용히 표정을 굳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위영은 말마따나 한참 기다렸다는 게 과장이 아닌 듯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내 뜨거운 햇볕 아래 서 있었던 모양이다. 남잠의 굳은 얼굴을 힐끗 본 남희신이 나직이 웃으며 위영에게 말을 건넸다.

“위공자, 망기는 운몽이 처음이니 괜찮다면 함께 거리를 구경시켜 주지 않겠습니까? 저는 강종주께 먼저 인사를 드리러 가겠습니다.”

“저야 좋지요!”

위영은 냉큼 대답했다. 그러나 남잠은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형장과 함께 인사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위영이 반박했다.

“뭐? 남잠은 나중에 인사드려도 되잖아! 넌 여기 놀러 온 거라고. 강숙부는 그렇게 깐깐하지 않으셔. 내가 널 데리고 놀러 갔다고 하면 아무 말씀 안 하실 거야.”

“예의가 아니야.”

“에이 남잠, 여기선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다니까.”

남희신이 웃는 얼굴로 거들었다.

“위공자의 말대로다. 금일 우리가 가문을 대표하여 운몽 강씨 가문을 찾은 것이라면 마땅히 그리해야겠지만, 오늘은 친구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냐. 강종주께서도 이해하실 것이다.”

남희신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남잠은 그 말에 멈칫하며 드물게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허나…….”

“위공자가 여기까지 너를 마중해 주었으니 그의 성의를 거절하지 말거라.”

머뭇거리는 남잠의 옆으로 잽싸게 바짝 다가온 위영이 냉큼 그의 한팔을 꿰어찼다. 그는 순간 흠칫 놀라 굳었다. 그 사이 위영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맞아, 내 성의를 거절하면 안 되지! 그럼 택무군, 저녁에 뵙겠습니다. 연화오의 요리는 매우 맛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위공자. 망기도 즐겁게 지내다 오거라.”

남잠은 더 이상 무어라 반박할 틈도 없이 저를 잡아당기는 팔에 이끌려 잠깐 휘청거리다 바로 섰다. 평소라면 그 정도 힘에 흔들릴 리 없었지만 상대가 상대였다.

“위영!”

“그래그래, 내가 위영이지 아니면 누구겠어? 이 뙤약볕 아래서 널 기다린 위영이라구. 그러니까 나랑 가자, 남잠.”

남희신은 웃음 띤 얼굴로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동생이 위영에게 이끌려 멀어지는 것을 배웅했다.

먼길을 왔음에도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흰 소매가 당황한 듯 펄럭이고 길게 늘어진 말액이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낀다. 스스럼없이 남잠의 팔을 감싸 잡은 위영은 앞장서 거리를 가로질렀다. 강종주의 수제자는 항상 소란을 몰고 다니는 이이기는 했으나, 오늘은 그와 동행한 이가 강종주의 외아들이 아닌 그림처럼 수려한 낯선 소년이라는 것이 저잣거리 사람들의 작은 화젯거리가 될 터였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남잠은 저를 잡아끌며 걷고 있는 위영을 저지하였다.

“위영, 멈춰.”

“왜? 너희 형은 이미 갔어. 넌 나랑 가야 해, 순순히 포기하라고, 남잠.”

득의양양한 목소리에 남잠이 대꾸했다.

“팔을 놔야 제대로 걸을 수 있어.”

그 말에 위영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남잠은 그제야 자유로워진 몸을 바로 세우며 조용히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완전히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고 선 위영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남잠, 너 배 안 고파?”

때는 이미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한 시간이다. 중반中飯을 들 때는 이미 조금 지나있었지만, 이제야 운몽에 도착한 남잠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위영은 그의 반응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응.”

“그럴 줄 알았어. 난 고파. 널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어. 우리 일단 뭣 좀 먹자. 너 이런 데서 뭐 먹어본 적 있어?”

상대가 무어라 대답하든지 간에 위영은 처음부터 이렇게 행동할 작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서슴없이 남잠의 손을 잡고 선착장 근처에 줄지어 서 있는 노점으로 향했다. 남잠은 따뜻한 손이 제 손을 잡는 순간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 가만히 그를 따라 걸었다.

운몽 강씨의 종주가 아끼는 수제자에게 이 근방은 모두 제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남잠에게 갓 구워진 전병을 하나 들려주고 제 손에도 하나를 들었다. 물론 돈은 내지 않았다. 전병을 입에 물고 돌아서는 그를 남잠이 붙잡았다.

“위영.”

그는 이미 한입 가득 먹을 것을 베어 문 뒤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그는 입안이 가득 찼음을 기억해내고 남잠을 빤히 바라보며 눈으로 물었다. ‘왜?’ 그 시선에 남잠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돈.”

짧은 단어 하나로 끝난 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열심히 입안의 음식물을 씹어 삼킨 위영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괜찮아, 저거 봐, 저쪽도 신경 안 쓰잖아.”

그의 손가락 끝에 있는 노점상은 돈도 내지 않고 음식만 가져 가버린 이 꼬마 한량이 익숙하다는 듯 이미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린 남잠을 위영이 다시 잡아끌었다.

“난 원래 돈 안 내. 나중에 노점상이 찾아오면 강숙부가 내주시니까 걱정하지 마.”

“내 몫은 치러야 해.”

“아니, 정말 괜찮다니까!”

위영은 당장이라도 돈을 꺼내려는 고소 남씨의 살아있는 표본을 말렸다.

“그냥 먹어도 돼. 상인들도 정말 신경 안 쓴다니까? 정 뭣하면 내가 한턱내는 거라고 생각해.”

그 말에 남잠이 조금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돈을 내는 것은 운몽 강씨의 종주인데 왜 생색은 네가 내느냐는 의미가 명백했으나, 위영은 그 시선을 모른 체하며 그를 끌다시피 하여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한참 동안 몇 개나 되는 노점상을 돌았다. 두 사람의 네 손에 먹거리가 한가득하여 더 이상 무언가를 살 수 없게 되자 그제야 덜 붐비는 곳으로 빠져나왔는데, 이렇게 길거리에서 파는 군음식을 먹어 본 적 없는 데다 한참을 끌려다닌 남잠은 타인이 보면 거의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당혹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위영은 개구지게 웃으며 한 손에 들고 있던 꼬치를 재빨리 먹어치우고 그가 들고 있던 만두 하나를 건네받았다.

“자, 얼른 먹어봐.”

한쪽 손이 자유로워진 남잠은 어색하게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전병을 싼 종이를 벗겼다.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게 작게 한입 베어 물고는 입을 다물고 소리 없이 천천히 씹는다. 마치 노점상에서 산 것을 먹는 게 아니라 잘 차려진 정갈한 상 앞에 앉아 식사를 하는 듯한 모범적인 모습이었다. 위영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다가 물었다.

“어때? 맛있어?”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잠은 천천히 먹던 것을 삼킨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괜찮아.”

“오, 좋아. 그럼 다음은 이거.”

“……아직 다 못 먹었어.”

위영이 꼬치와 전병, 과일 등을 차례대로 해치울 동안 남잠은 첫 번째 전병을 천천히 다 먹었다. 다 먹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음식이 들이 밀어졌다. 북적이는 길거리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게 된 그는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으나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었다.

위영은 한참 동안 그가 먹는 것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물론 남잠은 입안의 음식물을 다 넘길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대화는 매우 느리게 이어졌다. 그럼에도 위영은 별달리 지루한 기색 없이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남잠은 볕 아래 오랫동안 있느라 상기된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거리를 훑어보았다.

“우리 이제 뭐 할까? 남잠 너 뭐 하고 싶어? 연방 따는 거? 꿩 잡기? 말만 해, 내가 다 안내해 줄게……남잠?”

“잠시만.”

찾고 있던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 남잠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전병이며 만두 따위를 쌌던 종이는 곱게 접어 한 손에 말아쥔 채였다. 위영은 영문을 몰라 잽싸게 그의 뒤를 따라붙으며 종알거렸다.

“뭐야, 남잠 너 이런 데엔 관심 없어 보였는데 사실 갖고 싶은 게 따로 있었던 거야? 아니면 먹고 싶은 게 있었어? 에이, 그럼 처음부터 말을 하지!”

남잠은 그 말에 답하는 대신 목적했던 곳 앞에 멈추어 섰다. 그곳은 여느 노점상과 같이 작은 좌판을 벌여놓은 장사치의 앞이었는데, 그가 팔고 있는 것은 먹거리가 아니라 싸구려 장난감이나 장신구, 노리개, 삿갓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었다. 남잠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고 좌판 위를 훑어본 위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잠이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다고?

남잠은 그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난생처음으로 신선처럼 희고 우아한 소년을 손님으로 맞이해 약간 주눅이 든 장사치에게서 한 가지 물건을 샀다.

“남잠, 그건 어디에 쓰려고? 설마 네가 쓸 거야?”

돈을 꺼내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캐묻던 위영은 제 눈앞을 스치고 머리 위에 얹어지는 감촉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써.”

삿갓을 그의 머리에 씌운 남잠이 담담히 말했다. 삿갓의 위치를 바로잡아주던 손이 햇볕에 뜨겁게 데워진 정수리를 스쳤다. 눈처럼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움직였다.

위영은 눈을 크게 뜬 채 그가 손을 뗄 때까지 드물게 얌전히 서 있었다. 뜨겁던 햇볕이 삿갓이 만드는 그늘에 가려진다. 달아오른 얼굴은 그것만으로도 한결 시원해졌다. 삿갓의 끄트머리를 손으로 만져본 그는 이내 활짝 웃었다.

“우리 둘째 형은 배려심이 깊어! 나 감동했어. 헌데 너는 쓰지 않아?”

“나는 괜찮아.”

“남잠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좋아, 그럼 가자.”

안 그래도 고양되어 있던 기분이 숫제 하늘을 찌르고 태양을 떨어뜨릴 기세다. 위영은 힘차게 남잠의 손을 재차 잡아당겼다. 조금 전에도 생각했지만, 남잠의 손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늘하여 매우 좋았다. 가늘고 흰 손가락이 스스럼없는 접촉에 살짝 움찔거리는 것도, 계절을 모르고 서늘하던 손에 자신의 열이 조금씩 옮아가는 것도 썩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남잠의 손을 꽉 쥐고 달음박질 치듯 걸음을 옮겼다. 눈앞의 북적이는 거리는 뜨거운 볕을 받아 열기가 이글거리는 듯한데 맞잡은 손과 삿갓의 그늘은 서늘하였다.

그날, 고소 남씨 둘째 공자의 하늘하늘한 희고 긴 소맷자락은 잠시도 쉴 틈 없이 바람에 나부끼듯 흔들렸다. 저를 끌고 연화오의 모든 곳을 그날 하루 만에 다 보여줄 기세로 돌아다닌 위영 덕분이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사방 곳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그때마다 유난히 색이 옅어 햇볕 아래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눈동자가 그의 손끝을 따라 약간씩 움직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이글거리는 열기가 따갑게 머리 위로 쏟아졌으나 삿갓을 쓴 위영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말하는 중간중간 새로운 먹거리가 보이면 냉큼 하나씩 집어 남잠에게도 나누어주고 저도 먹어치웠는데, 저리 많은 말을 하며 그 와중에 주전부리까지 할 수 있는 게 실로 기이할 지경이었다.

마침내 위영이 사들인 먹거리를 전부 동냈을 때, 남잠은 이미 연화독 안에 있는 어느 한 그루의 나무를 보며 그에 얽힌 웃지 못할 사연을 들었고, 위영이 지금도 밥 먹듯 무릎을 꿇고 벌을 받으러 간다는 운몽 강씨의 사당 안을 들여다 보았며,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교장校场까지 둘러보았다. 교장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구워지고 있던 운몽 강씨의 제자 몇몇은 멀찍이서 이쪽을 보고 있는 위영을 발견하고 반갑다는 건지 살려달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려다, 그의 뒤에 선 눈처럼 하얗고 서리처럼 차가운 남가 둘째 공자의 실물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위영은 몰래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한 번 흔들고 훈련을 감독하고 있는 우부인의 눈에 띄지 않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위영, 어디로 가는 거야?”

교장에서 한참 멀어진 뒤 남잠이 물었다. 그를 데리고 부두로 돌진하던 위영이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방 따러!”

여름의 연화오는 선명한 녹색의 커다란 연잎과 활짝 핀 연꽃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한들한들 흔들리는 녹색 이파리들의 사이로 쪽배가 지나가고, 경쾌한 웃음소리와 소리 높인 외침 등이 이따금 활짝 피어난 연꽃잎을 떨게 한다. 실로 평화로운 한낮의 광경이었다. 삐뚜름해진 삿갓을 바로잡은 위영은 한 손에 쥔 노로 물살을 가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위가 운심부지처의 난실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단정히 앉아 있는 남잠은 그에게 이끌려 긴 시간 운몽의 햇볕 아래를 걸어 다녔음에도 여전히 깨끗하고 단정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 위에 앉아 뱃전 가까이에서 한들한들 흔들리는 커다란 연잎과 활짝 피어난 연꽃을 바라보고, 천천히 시선을 옮겨 제 맞은편에 앉은 위영을 보았다.

긴 머리칼을 묶은 붉은 끈이 더위를 식히는 한 줄기 서늘한 물가의 바람에 흔들리고, 싱그러운 연잎과 연꽃잎도 흔들리고, 겹겹이 드리워진 녹색의 넓은 이파리들 사이로 보이는 수면도 잔잔한 파문을 그리며 흔들린다. 단정하게 무릎 위에 포개진 남잠의 흰 손끝이 아주 살짝 움츠러들었다.

잘게 흔들리는 연꽃잎이 마치 그의 마음인 듯하다.

개구진 웃음을 머금은 소년은 생기 넘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느닷없이 뱃전 밖으로 손을 뻗어 아주 커다란 연잎 하나를 뚝 꺾었다. 남잠이 조용히 지켜보는 사이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고 그것을 불쑥 내밀었다.

“삿갓은 없지만 이건 어때?”

거리를 쏘다닐 때와 달리 끝없이 펼쳐진 호수 위에는 햇볕을 피할 그늘 하나 없다. 남잠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받아들었다. 위영은 백옥처럼 흰 얼굴 위로 살며시 서느런 그늘이 드리우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연잎을 우산 대신 쓰고 있는 남가의 둘째 공자님을 볼 수 있는 기회란 흔치 않다.

“원래는 내가 먼저 연방을 따 주려고 했는데.”

물살을 휘저으며 위영이 말했다. “그런데 네가 먼저 선수를 쳤네. 남잠 네가 이리도 손이 빠른 줄 몰랐어.” 그 말에 남잠이 눈을 깜박였다. 그가 어떤 반응을 더 보이기도 전, 위영은 재빨리 뒤이어 말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지. 아주 잘 알고말고. 남가 둘째 형이 손이 빠르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이미 충분히 겪어봤는걸. 그치?”

은근한 짓궂음이 밴 목소리의 끄트머리에 언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옅은 달짝지근함이 묻어난다. 남잠은 짧게 숨을 들이키며 표정을 굳혔다.

“위영.”

“응? 왜?”

내가 뭘? 하고 묻는 듯한 얼굴에 잠시 말문이 막힌다. 환한 햇볕 아래 감출 수도 없이 연한 분홍색으로 물든 귓불을 본 위영이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들이 탄 작은 배를 흔들고, 수면 위에 작은 파문을 만들어 녹색 이파리와 커다란 꽃잎을 떨게 했다. 삿갓 대신 써도 될 만큼 커다란 잎사귀 위에 맺혀 있던 투명한 물방울이 그 떨림에 놀라 미끄러졌다.

“남잠, 거의 다 왔어. 봐봐, 여기서부턴 조심해야 해. 사실 이 근방을 지키고 있는 영감이 있는데…….”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남잠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노인은 이 일대의 연방을 심은 사람이고, 위영이 연방을 훔치러 올 때마다 쫓아와 가차 없이 대나무 삿대를 휘두르는데, 그건 운심부지처에서 쓰는 계척으로 맞는 것보다 훨씬 아프다.

그를 속여서 대나무 삿대에 두들겨 맞게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던 위영은 그런 야심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의 위풍당당한 경험담을 떠벌였다. 이 일대를 관리하는 영감이 휘두르는 삿대가 얼마나 매서운지, 연방을 먹고 싶어 하는 꼬마 수귀가 그의 배를 밀어주기 때문에 아무리 기를 쓰고 노를 저어도 그를 따돌리기 힘들다든지, 한 번은 멋모르고 그 꼬마 수귀를 잡으려 들었다가 영감에게 두들겨 맞을 뻔했다는 등의 시시하지만 제법 흥미진진한 한담이었다. 남잠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그를 응시했다.

연화오의 여름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덥고 운심부지처보다 몇 배나 더 강렬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목소리가 연꽃 위로 흩어지는 햇볕에 녹아들고, 선명한 푸른 하늘과 맞닿은 연잎의 싱그러운 빛깔도 그 빛에 녹아, 눈을 한 번 깜박이니 이내 모든 것이 부드럽게 흐려져, 마침내 어린 남잠은 꿈에서 깨어났다.

조용히 눈을 뜬 남망기는 곁에서 느껴지는 깊고 완만한 호흡에 귀를 기울였다. 그 언젠가 보았던 것과 흡사한 꿈의 여운이 서서히 걷히고, 창백한 새벽빛이 희미하게 정실 안을 밝혔다.

정실은 드물게 잔잔한 정적에 잠긴 채였다. 본디 이러한 정적은 아련한 단향목 향만큼이나 당연한 것이었으나, 불과 몇 달 전부터 조잘대는 새처럼 끊임없이 떠드는 목소리가 그 정적을 몰아내고 정실은 온전히 차지하였다. 남망기는 살짝 시선을 움직였다.

깨어 있는 동안 언제나 정실을 소란하게 물들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지금 깊은 잠에 빠져있다. 남망기의 팔을 베개 삼은 채 그와 한 몸인 양 바짝 달라붙어 잠든 얼굴은 세상 어떤 근심도 없이 편안하고 천진해 보여, 마치 꿈에서 보았던 어린 위영을 연상케 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얼굴, 전혀 다른 몸이지만 그 안의 혼은 그때와 같다.

그는 꿈속에서처럼 조용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가는 숨을 내쉬며 잠든 이의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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