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이지액슬] 콘택트

1. 닿음 2. 관계 3. 콘택트렌즈의 준말

  이지 스트래들린은 눈을 질끈 찌푸렸다. 현재 그의 손에 들린 고데기가 머리카락을 펼 때마다 느슨한 열기와 함께 본인의 성질 또한 올라오는 듯싶었다. 그의 손은 그와는 별개의 생물처럼 계속 움직였으나, 그의 모든 신경은 전부 방 안의 타인에게 쏠려있었다. 좁아터진 화장대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그 남자에게.

 

  굳이 딴지를 걸자면 화장대라는 단어는 사치였다. 좁아터져 침대와 이름만을 공유하는 수수께끼의 설치물도 높게 설치한 마당에, 어느 누가 여유를 가지겠는가. 그건 그저 헬하우스 한 켠에 놓인 전신거울과 주변에 널린 앰프가 절묘하게 맞물려 만들어 낸 사각의 공간에 불과했다. 옆에는 깊게 파인 창문이 있어 창틀에 화장품을 여럿 늘어놓은 것만 보면 이 지옥 같은 집에서 그나마 구색을 갖춘 곳이었다. 사람 한 명이 왼쪽 오른쪽으로 한 발자국씩만 이동할 수 있는 공간에서, 벌써 두 시간에 이르도록 발만 구르는 그 남자는 정말, 이지의 속을 바득바득 긁어놓는 데 아주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끼지도 못할 거면 뭐 하러 사 온 거야, 한껏 그를 책망하던 순간 자동식으로 돌려놓은 손과의 연결이 끊어진다. 지금까지 완벽하게 머리카락을 세팅하던 고데기는 애석하게도 그의 의지를 떠나 훌륭한 오점을 남겨주었다. 제 뜻과 다르게 그릇된 방향으로 뻗쳐버린 자신의 흑색 머리카락과 함께 그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야."

"... 어?"

"그것도 못하냐?"

"... 뭐? 왜 갑자기 시비야?!"

  그가 어이없는 듯한 눈빛으로-아마 진짜로 없을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았다. 물론 스스로가 하는 것이 단순한 분풀이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원인 제공자의 태평한, 정말 왜 그러느냐는 듯이 쳐다보는 저 눈빛이 죽도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액슬에게 다가갔다. 굳이 성큼성큼 걷지 않았어도 방이 좁아 세 걸음이면 그에게 닿았겠지만, 아무튼 크게 걸었다. 이지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내놔."

 "어?"

 "도와주겠다고. 언제까지 마냥 그 앞에 서 있을 건데?"

 "..."

  조만간 합주가 있었다. 액슬은 몹시 할 말이 많아 보이지만 그 말 중 어떤 것도 내뱉을 수 없음에 몹시 불쾌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콘택트렌즈를 건넸다. 얼마나 오래 쥐고 있었던 것인지, 렌즈와 함께 들어있는 액체가 미지근했다. 이지는 케이스의 왼쪽에 들어있던 렌즈를 조심스레 검지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이쪽 봐."

액슬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너 렌즈 껴봤어?" 이지는 대답했다. 

"아니."

"당당하네?" 

어처구니 없어 하는 그에게 이지는 덧붙였다. 

"걱정 마. 네 눈깔은 안 찔러."

"지랄... 그걸 말이라고,"

  액슬은 그를 향해 눈을 떴다. 창문 옆. 들이치는 느즈막한 오후의 햇살. 이에 상응하여 녹빛에서 시작해 청색, 회색을 지난 후 어둠으로 귀결되는 그의 눈동자. 그의 손가락이 닿았다. 그 사이에 아주 얇은 플라스틱이 있었으나 아무튼 닿았다. 문득 이지는 사람의 눈동자를 이리 생생히 만져본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액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눈이 한 번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드러낸다. 그는 생전 처음 겪는 이물감에 불쾌한 듯 살짝 날 선 표정으로 이지를 올려다본다. 

"불편하진 않아?"

"존나 불편해. 물웅덩이에 대가리 처박고 눈 뜬 느낌이야."

"멋지네."

  말이 끝난 후 이지가 살짝 웃음 짓자 액슬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냉소적인 답안은 항상 듣지만 무어라 말하기엔 사소하고 넘어가기엔 사람의 뒤를 켕기게 했다. 그러나 지금 말해봤자 자신은 절반만 뚜렷이 보이는 인간이 될 뿐이다. 액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손에 들고 있던 렌즈 케이스를 높이 들어 남은 오른쪽 렌즈를 내밀었다. 이지는 군말 없이 집어 들어 그와의 거리를 좁힌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서로를 본 적이 있었나. 공중에서 마주치는 헤이즐과 에메랄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흐르는 침묵. 따스한 햇살. 계속 응시하는 눈동자들. 어쩐지 무안해진다. 가뜩이나 그를 고정하기 위해 현재 액슬의 머리를 잡고 있는 이지의 왼손이 마음을 더욱 산란하게 했다. 이지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 파고드는 붉은빛 머리카락을 느꼈다. 부드럽고 세세한 것이 손가락을 점점 감싸 옭아맬 것만 같았다. 액슬은 처음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각막을 허락했다. 자신도 만지지 못한 것의 처음을 가져간 것이 설마 이지가 될 줄은 몰랐다. 어쩐지 묘한 기류가 흐른다.

  억겁과도 같은 찰나가 끝나고, 그의 손가락이 떨어진다. 모든 행위는 끝났으나 그들 사이의 무언가는 종결되지 않은 듯했다. 이지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액슬을 보았다. 이제는 촉촉해진 눈가. 붉은 기도는 속눈썹.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지금의 그들에게 시간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 창 바깥세상에선 수 천, 수 만, 수 억 년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바라볼 것이다. 아무런 변함이 없는 채. 이전, 아니, 방금까지 화장대라고 불린 곳은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소속된 인간들조차 모르게, 아주 조용히.

"야 너네 뭐해?"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화들짝 놀라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지의 손은 본인도 모르게 액슬의 머리카락을 떠난다. 언제 도착한 것인지 모를 스티븐이 늘상 짓는 해사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양팔에 가득 치토스를 들고 있었는데, 마치 그것들이 세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몹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방 안의 미묘한 기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자신의 기상으로 모든 걸 날려버렸다. 

"점장이 유통기간 다 됐다고 남은 재고 다 줬다!! 너네도 먹어."

  그는 햇살이 부서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넋이 나간 채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붉은색 봉투를 집어 들고는 떠났다. 대부분 그의 눈치 없음에 모두가 골치 아파했으나, 때때로는 안심했고, 아주 가끔 경외감을 지녔다. 그리고 지금은 경외를 느낄 차례였다. 적어도 그 덕분에 그들은 1986년 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이제 곧 합주할 시간이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담배 좀 피고 올게."

  그는 담뱃갑을 들고 헬하우스를 떠났다. 절대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당장 본인도 혼란스럽거니와 돌아봐서 마주한 것이 좋으리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시간이 약이었다.

방금 그 순간은 진짜, 뭐였을까. 

당사자들만이 계속 끌고 갈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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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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