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이지액슬] 크리스마스 이브, 약속 없는 사람들

merry christmas!

1986년에 12월이 도래한 지도 3주 정도 흘렀다. 간밤 사이 내린 눈이 도로에 새하얀 포장을 깔아놓았다. 창 밖을 걷는 작은 점들은 저마다 다른 빛의 외투를 입고 목덜미 사이 파고드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누구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콧잔등과 눈 밑이 불그레하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이를 입증하듯 그들은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몸은 춥지만 마음은 가장 뜨거운 시기라는 등의 온갖 역겨운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겨울을 난다. 세상에서 가장 엿같은 시기. 크리스마스까지 앞으로 1일이다.

그는 펍에서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를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자신을 어디서 본 것 같아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본인의 기억 속을 뒤지는 바텐더의 표정은 볼 만했다. 한편으로는 L.A.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아무도 모르는 일반인이 되는 처지가 씁쓸하다. 그는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잔으로 시선을 향했다. 크랜베리 주스, 좀 더 고급지게 말한다면 카민의 빛깔을 지닌 액체가 눈에 비친다.

20세기 말, 락스타라는 허황된 별을 쫓는 남자. W. 액슬 로즈는 잔 안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며 배회하는 얼음 조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마 자신도 이 얼음과 같은 결말을 맞을 것이다. 가로막힌 핏빛 세상에서 그저 헤매다 끝내 녹아 사라지는. 그 피는 자신의 것일까. 이전에 무릎 꿇은 자의 혈흔일까. 불안한 생각이 그를 잠식한다.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고 싶어졌다. 뇌에 떠오른 결단은 곧 보잘 것 없는 질문으로 바뀌어 출력되었다. 그는 눈 앞의 남자를 떠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유리잔을 닦는 행위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은듯한 바텐더에게 물었다.

"이 칵테일 이름이 뭐랬지?"

바텐더는 대답했다.

"OLD PAL."

오래된 친구라.

몽롱해진 이성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벌써 그 녀석과 알게 된 지도 10년하고도 세 달. 질기다면 질긴 인연이다.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의붓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폭행당하며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던 소심한 소년이, 여자들과 방탕하게 놀며 마약이나 빨고 있을 줄. 새삼스레 그 없이 현재의 자신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본인 앞에서는 절대 말 안 할 거지만. 만일 알게 된다면 얼마나 으스대겠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를 끊듯 펍의 출입문에 달려있는 작은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린다. 액슬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굴렸다. 그였다. 방금까지 자신의 마음에 살고 있던 남자. 이지 스트래들린. 펍 내부를 둘러보던 시선은 자신에게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옆 자리에 다가와 앉았다. 그는 바텐더에게 맥주를 부탁했을 뿐, 둘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액슬은 칵테일을 마시는 척 옆을 흘끔거렸다. 이지의 어깨에는 눈이 얕게 쌓여있었다. 헬 하우스에서 여기까지 주욱 걸어온 듯했다. 붉게 물든 그의 귀 끝은 그의 여정이 얼마나 고되었는지를 간접적이게나마 호소한다. 액슬은 괜히 바 스툴을 내려다보았다. 적갈색의 나무는 또 다시 크리스마스 시즌을 상기시킨다. 시발, 이놈이고 저놈이고 여기서나 저기서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어쩌면 이지도 그걸 피하여 여기로 떠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젊은이로 북적이는 L.A.는 클럽에서만 난잡하게 노는 게 아니다. 벌써 서쪽 광장에는 거대한 트리가 우뚝 서있고, 눈 내리는 밤에도 꼭대기의 별은 쉴 새 없이 빛난다. 사방에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불빛들이,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와 개가 짖는 소리가 설탕 밀가루 반죽 냄새와 함께 퍼져있다. 그리고 이건 L.A.에서만 이름 깨나 날린 록스타에겐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딱히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그런 류의 문제는 아니다. 할로윈에는 죄다 괴기스럽거나 다소 유치하기까지 한 분장을 하고 마약파티를 벌이니까. 아무리 따뜻한 집을 박차고 나온 그들이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그들은 유년기의 추억을 사랑하고 아낀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결핍을 자신이 고른 사람들과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입이 찢어지도록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잔혹한 세상의 법칙이 따른다. 돈, 자본, 다른 이름으로는 시간 당 책정되는 인간의 가치. 매우 단순한 사실이다. 그들은 돈이 없다. 그래. 그들은 돈이 없다. 또한 가족도 없다.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과 아예 할 수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 집에서 나온 자와 쫓겨나온 자는 고작 몇 글자 차이지만 그 간극을 계산하자면 하늘과 땅 끝이다. 할리우드의 패자, 건즈 앤 로지스를 앞의 기준으로 나누자면 전자 그룹은 더프 맥케이건과 슬래쉬, 이지 스트래들린이었고 후자는 스티븐 애들러와 액슬 로즈였다.

액슬은 분명 자신도 다섯 살 즈음에는 크리스마스에 설레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부모는 미친 광신도들이었지만 학교에서 주는 선물을 빼앗지는 않았다.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나선 교회에 나가 성가대로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번거로운 날이었지만 분명히 기억나지도 않는 한참 전의 자신은 여타 또래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는 생각, 아니 기도한다. 남들이 당연히 누린 나날들이 결코 부러워서, 배 아파서라고는 그의 자존심이 절대 허락 못하지만 그것마저 소망하지 않기에는 그의 삶이 스스로도 너무 기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액슬은 다시 한 번 이지를 쳐다보았다. 이전과는 달리 물끄럼히. 어느새 그의 맥주 잔은 반절이 비워져 있었다. 그의 눈 밑이 아까에 비해 약간 불콰하다. 그는 내일 약속이라도 있냐 묻는 듯한 태평한 어투로 이지에게 물었다.

"너는 크리스마스에 어디 안 가?"

그는 소꿉친구의 질문이 마치 지구는 평평한데 왜 반대편 사람들은 안 떨어지는 거야- 라는 식의 터무니 없는 소리라도 되는 듯 살짝 얼굴을 찌푸린다. 이윽고 액슬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며 이지는 말한다.

"갑자기 뭐야? 새삼스레. 작년에도 별 일 없었잖아."

"아니... 더프는 시애틀로 가족 보러 간댔고, 슬래쉬는 영국에 몇 통을 전화 걸고, 스티븐은 여자친구랑 놀러 간다 그러니. 너도 집에서 쫓겨난 건 아니니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을 거 아냐?"

나와는 다르게.

그는 이어지지 못한 말을 칵테일과 함께 삼켰다. 이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의심 쩍은 눈길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액슬 쪽으로 틀어져 있던 그의 몸을 바로 하였다. 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몰라?

"아 그래. 문화의 중심지 L.A.에서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사람이 소꿉친구 놈 뿐이라니. 옆구리가 시려 죽을 것 같네. 성을 역시 스트래들린이라 고치는 게 아니었어."

이지는 딱히 라파예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장 그의 아버지와 사이가 빌만큼 나쁜 건 아니었지만 이즈벨- 그 양반은 음악을 그저 어린애의 유흥으로만 보았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모욕당한 이상 빈털터리인 체 돌아갈 순 없다. 그는 치기어린 열 여덟, 집을 박차고 떠나오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다음에 이 땅을 밟을 때는 수중에 백만 달러를 가지고 있는 때라고.

"절대 돌아갈 리가 없잖아. 좋은 꼴은 빈말로라도 못 보고."

"그러냐..."

"오히려 너야말로. 위대한 프론트맨 W. 액슬 로즈 씨랑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여자가 줄을 서지는 않는 모양이지?"

"걔들은 그냥... 아무 상관 없어. 알잖아, 너도. 넌 그루피랑 연애하냐?"

"전혀. 연애는 동등한 인간이랑 하는 건데."

"그렇지?"

그들은 각자의 잔에 담긴 내용물을 홀짝였다. 시선은 자신들의 앞, 바텐더의 뒤에 눕혀 세워진 포도주병에 고정한 채. 대화하면서 계속 눈을 마주쳐야 할 사이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액슬의 고개가 가파른 기울기로 꺾인다. 그는 얼음 밑에 깔린 남은 술을 마시려 칵테일 잔을 흔들며 말을 꺼냈다.

"이번 년도에는 나름 그래도 소득이 있었어."

"뭐, LP?"

"그거말곤 우리가 한 게 뭐가 있냐?"

쥐구멍에도 볕이 든다고 했던가. 만으로 일 년 반. 그들에겐 있어 십 오년과도 같은 오랜 시간이었다. 게펜은 그들을 생지옥에서 구원하고 고통으로 가득한 그들의 삶을 종결시켰다. 칠 만 오천 달러와 함께.

인정받은 것은 기쁘지만 한편으로 액슬은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었다. LP의 판매량은 물론 중요하긴 했지만- 동시에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니까. 앨범이 단 두 장 팔리더라도 결과물이 만족스럽다면 별다른 말을 얹지 않을 터였다.

"생각을 좀 해 봤어." 평소에는 그 자신이 먼저 기피할 진중한 태도로 액슬은 말을 꺼냈다. 그런 그를 이지는 무심히 응수한다.

"네가 생각이란 것도 해?" 액슬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를 찍 소리도 못하게 만들 무기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는 화난 척 본래 의도를 감춘 채 대화를 이었다.

"씨발, 일일히 시비나 털고... 난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다, 스트래들린."

"뭐? 뭔 소리야?" 그의 동공이 흔들린다. 액슬은 애써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어제 헤로인 빨다 무슨 망언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의 말을 한창 씹어삼키던 이지는 이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 ... 씨발, 설마 전 여친 이름이라도 불렀냐?" 그의 얼굴에는 이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액슬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생각도 않는다.

"안 말할 거야." 그는 잔에 남아있는 액체를, 승리감과 함께 만끽했다.

"아 씨발,"

이지 또한 본인의 잔을 비웠다. 신경질적으로 남아있는 모든 맥주를 마심으로써. 현재 그의 얼굴은 매우 붉다. 그것이 취기 때문인지 혹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쪽팔림 때문인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지만 액슬은 고작 맥주 한 잔으로 이지가 취할 인간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라파예트에서 심심할 때마다 하던 짓이 맥주 뽀려다 마시는 거였는데, 모를리가.

"야. 아무튼 내가 생각을 좀 해 봤어."

"아, 그 잘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셨는데." 아직 회복하지 못한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다. 괜히 신경질적으로 돌아오는 대답에 액슬은 다만 미소지을 뿐이다. 하지만 최대한 화제를 돌리고 싶어할 그의 심성을 생각하면 이지는 반드시 대화에 참여해 줄 것이다. 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LP를 내잖아 우리가."

"어."

"잘 팔렸으면 좋겠고, 실제로 잘 팔릴 거야. 우린 적어도 유행 뒷꽁무니만 쫓진 않으니까."

"어."

"물론 안 팔리더라도 계속 음악을 하긴 할 거지만."

"당연한 소리를."

"이 짓도 서른 넘어서까지 하겠다 호기롭게 외쳤잖아? 실제로 그렇게 되면 좀 슬플 것 같아."

"... ..."

"아니, 아주 많이. 많이, 많이, 많이."

"... 너 취했어, 액스."

액슬은 아무 말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양 손 안에 있는 칵테일 잔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생긴 틈에 의해 가장 위에 있던 얼음 조각이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바닥에 맺히기 시작한 선홍빛 물은 마음을 안정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가 그러기를 원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액슬은 부러 이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오른손으로 둥근 유리잔 표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손가락 끝에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이 남았다.

"... 시끄러. 내가 취할 리가 없잖아. 네 면상이나 보고 말하시지."

"허, ... 걱정해줘도 지랄이야."

내심 이지는 안심했다. 당장 거진 10년이 넘도록 액슬을 지켜봐온 바, 그의 기분은 하늘에 있다가도 금새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몹시 번거롭고도 좆같은 그의 특성이지만 일단 그걸 전부 안고 갈 정도의 감정은 존재한다. 또한 그런 그를 살짝 염려할 여유까지도. 이건 단순히 그의 감정 기복이 미치는 여파 때문은 아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 친구고 이런 감정 기복이 결국 상처 입히는 것은 액슬 자신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정신병을 앓느라 다 죽어가는 생선처럼 침대에 바싹 누워 있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건 아주 단순하고도 복잡한 감정에서 비롯된다. 지금은 어느 쪽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그나저나 스티븐은 대체 몇 명이랑 사귀는 거야? 너 저번에 만난 애 이름이나 기억하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지금 잘 대처하면 이 상황을 충분히 넘길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므로 그는 익숙히 대답한다. 약간의 미소와 함께.

"글쎄. 크리스탈?"

"그것보단 좀 덜 화려한 이름이었는데. 또 짧았어."

"흠... 셰리? 아, 어느쪽이건 스트리퍼 이름 같네."

"실제로 그랬잖아? 아닌가?"

"스트리퍼까지는 아니었을 걸. 넌 나중에 사과해라. 쓰레기 같은 녀석."

"뭐야 씨발? 먼저 말해놓고."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액슬에 이지는 웃음을 터뜨린다. 보이는 반응은 항상 똑같았지만 매번 새롭게 재밌었다. 그는 항상 그랬다. 항상. 사람을 질리게 만들지언정 지루하게 두지는 않는 인간. 추운 겨울, 거지 같은 연말. 이지에게 있어 액슬은, 말하자면 불씨다. 액슬에게 있어 이지는 나뭇가지일 것이다.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저가 타오를 수 있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비참히 죽을 운명이어도 서로라는 성냥이 주어진 이상 최소한의 위안은 이미 확보한 셈이다.

액슬은 칵테일을 두 잔 더 주문했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것을 달라는 애매한 주문에도 바텐더는 훌륭한 키스 오브 파이어를 선사하였다. 그는 잔을 하나 집어들고 건배를 재촉한다. 이지는 그런 그에게 이번에도 어울려주자 마음먹는다. 공기를 가로지르는 맑은 음이 그들 사이에 울려퍼지고, 목구멍이 화염으로 휩싸인다. 잔에서 입을 땐 붉은 머리의 남자는 경박함과 명랑함 사이에서 질문한다.

"내년에는 뭐 할거야? 미리 새해 다짐이라도 정해 놓지?"

"다짐은 개나 줘. 소원이나 빌란다. 내년에는, 내 가수가 여자한테 그만 눈 돌아가길."

"지랄, 약이나 끊어라 약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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