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이지액슬] 열차의 도착

L.A.에서 밴드 하기 이전

 때는 11월 말, 오후 4시. 선선했던 가을 바람이 제법 쌀쌀해진다. 벌써 해가 지려는 듯 하늘이 흐릿하다. 미약하게 빛을 머금은 하늘이 해가 떠 있음을 애써 증명해보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양은 보이지 않는다. 텅 빈 하늘과 다르게 지상의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라파예트 역은 항상 떠나는 사람과 돌아온 사람으로 북적북적하다. 사실 규모 자체로만 따지자면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번화가와 비교하면 쥐구멍만 한 크기의 기차 역은 스무 명만 있어도 금방 들어찼다. 이른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군가는 협소한 공간의 크기에 욕설을 지껄이며 텅 빈 깡통을 걷어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곳은 라파예트다. 뉴욕이 아니라.

 위로를 하나 건네자면, 사람의 인생이란 별반 다르지 않다. 대개 비슷한 용도의 장소에서 비슷한 감상을 드러내고, 비슷한 말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뉴욕, 라파예트, 19세기 파리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기다란 고철 덩어리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애써 웃기도 했다. 여느 누구와 다를 것 없이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들. 그 안, 이제 막 떠날 기차의 탑승문 앞에서 하나의 서먹한 이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프리 이즈벨은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일단 배웅한답시고 나와주긴 했지만, 오히려 안 나와주는 편이 더 나았을 거란 생각조차 들었다. 지금의 어색한 분위기 속에 질식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아슬아슬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제프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의 친밀한 범죄 파트너-물론 LSD를 피우고 술을 뽀려 마시는 정도의 일이다- 빌에게 제안했다. 이곳을 떠나자고.

 그 또한 이곳에서의 일상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돌아온 거절의 답변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지금에야 분위기가 누그러진 편이지만 당시 그들은 서로를 죽일 작정으로 싸웠었다. 뭐, 돌이켜 생각해보면 단순한 이야기다. 제프리는 빌의 가정사를 긁고 빌은 괜히 화가 나서 그의 꿈을 부정하고.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지만 싸움의 승패를 가리자면 패자는 빌이었다. 제프리의 꿈이 곧 그의 꿈이었으니까. 허황되었다고 매도해봤자 제 낯에 침을 뱉는 꼴이었고 실제로 그는 지나간 저의 언행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던 빌을 생각하면 제프리는 괜히 수그러들게 되는 것이었다.

 현재, 빌 또한 이 상황이 불편한지 그는 낡은 운동화의 앞코로 포장된 벽돌 사이의 틈을 긁고 있었다. 제프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행동에 빌이 살짝 움찔한 건 감추고 싶은 비밀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제프리는 그를 데리고 가고 싶었다. 빌도 일단 라파예트에 완전히 처박혀 있을 심산은 아닌 듯했다. 단지 떠나는 게 지금이 아니었을 뿐.

 제프리는 생각한다. 너랑 있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복잡하고 어려워진다고. 

하지만 제프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길은 적어도 지루하지 않다. 더럽게 길고 울퉁불퉁하고 모질고 고되어도, 그와 함께 있단 사실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빌은 그에게 있어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다. 그렇게 느끼는 건 저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정식적인 절차를 걸치지 않았어도 인정받는 사실혼 관계가 존재하듯, 그들은 친구와 연인을 초월한 어딘가에 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함께 해야 했다. 착한 일이건 나쁜 일이건.

 제프리는 한 발자국 빌에게 다가갔다. 따뜻한 생명의 온도가 느껴진다. 가까워진 거리에 그는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도망가진 않았다. 서로의 호흡을 느껴본 건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제프리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와 눈을 맞추었다.

"...너 정말 안 갈 거야?" 제프리가 물었다. 어쩐지 애절함과 안쓰러움이 묻어나오는 듯한 목소리에, 빌의 기분이 한풀 꺾인다. 그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자신을 내려다 보는 제프리와 눈을 맞추다 괜히 퉁명스레 고개를 꺾었다. 여기서 물렁한 태도를 보이면 지는 기분이 들어버리니까. 빌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돈 좀 더 모으고 따라갈 거야. 빨리 가. 나간다 해놓고 계속 여기 서 있게?"

 발차를 예고하는 경적이 울렸다. 깡촌에서 도시로 나가는 기차는 제법 귀하다. 접할 기회는 하루에 단 두 번 정도. 오늘 중으로 나가려면 무조건 타야 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제프리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어깨에 둘러매곤 말했다.

"기다릴게."

 그래도 마지막까지 이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

빌은 눈동자를 굴려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목소리의 떨림을 최대한 죽이려고. 그는 말했다.

"잘 가."

 제프리는 그가 건넨 짧은 인사에서 떨어지는 미련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한다면 누가 그의 장미를 이해하겠는가. 안타깝지만 빌의 시도는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젠장-,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 이번에는 그가 제프리에게 다가갔다. 결국 숨기지 못한 감정을 눈에 뵈지 않게 치우기 위해서였다. 나도 네 옆에 있고 싶어.  

 그는 아직까지도 솔직하지 못했다. 변함 없는 모습에 마음 속으로 웃음 지은 것도 찰나, 그의 발꿈치가 살짝 들렸다. 이후 뺨에 다가온 부드러운 감촉에 제프리는 놀란다.

 순간 그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보통 대판 싸우고 나서 다가가는 건 늘 자신의 몫이었다. 물론 지금 그가 선사한 입맞춤이 무조건적으로 화해와 사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마 이 상황에 하리라곤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뇌내에서 엔도르핀이 도는 걸 느꼈다. -인류 사상 최고의 마약이라더니, 진짜구나.- 그와 태운 LSD는 물론 즐거웠지만, 그게 빌이 있어서 좋았던 것인지 그 자체로 좋았던 것인지 명확한 판정을 내릴 수 없었기에 감히 비교를 할 수는 없었다. 시시콜콜한 생각을 굴리며 제프리는 자신의 파트너를 뒤로 했다. 어쩐지 응원 받은 것 같아 가득 채워진 가슴과 함께.

 그가 향한 문이 닫히고, 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또 한 번의 경적과 함께 기차는 움직였다. 매연을 내뿜으며 돌진하듯 달리기 시작한 쇳덩어리는 점차 작아졌다. 그 쇳덩어리가 수평선 너머의 점이 될 때까지, 아예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빌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선로가 가리키는 방향을 계속 바라보았다. 마치 저 너머에 그가 바라는 해답이라도 있을 듯.

  1980년 11월 X일.

누군가의 소망을 실은 채 기차는 떠났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