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이지액슬] 연극이 끝난 후

Whiskey a go go, 1986

차오르는 숨. 땀에 쩔은 공기. 뿌연 안개 속 희미하게 빛나는 조명.

무대가 끝났다.

***

모든 것이 끝나면 그는 항상 타올을 목에 두른다. 그리고 나선 목 뒤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타올 양쪽 끝을 두 손으로 들어 귀 뒤를 닦는다. 이후 타올을 뒤집어 땀에 젖은 목덜미를 문지른 다음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빌 베일리가 보이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W. 액슬 로즈가 아니라.

라이브에 올라갈 때의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과 사뭇 다르다. 거의 걸치지 않다시피 하는 옷은 무조건 가죽. 각종 액세서리는 반드시 은제로, 팔목 전체를 뒤덮을 만큼 착용해야 한다. 머리카락은 스프레이로 잔뜩 부풀려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파악할 수조차 없다.

하얀 눈두덩이 위에는 연보랏빛 아이섀도우와 글리터를. 속눈썹에는 칠흑빛 마스카라를. 콧잔등 위 주근깨에는 희끄무레한 파운데이션을. 마지막으로 새빨간 립스틱을 얹어 마무리한다.

가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쩐지 소외감을 느낀다. 내가 알던 그 녀석은 잡아먹힌 걸까. 만일 잡아먹혔다면 범인은 누구인가. 정글인가? 눈앞의 영문 모를 남자인가? 나로서는 도무지 알 방도가 없다.

이제는 텅 빈 관객석을 바라본다. 숨 막히는 정적만이 공간을 지배한다. 아까 보였던 화려함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오늘밖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잔뜩 즐기고서, 모두 내일을 살기 위해 떠나버렸다. 자신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그 여유가, 몹시 부러워 입안이 쓰다. 간만에 만난 친구가 늘어놓는 푸념만 몇 시간 듣다가, 자신이 입을 열려 하니 바로 이별당한 기분이다. 무대 위에서 내려온다.

먼저 내려온 그는 아직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다. 떠나지 않는 흥분감을 삭히고 있다. 오르내리는 그의 맨 가슴에서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다. 그의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몹시 흐리다. 백스테이지에서 빛이란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모양새를 정돈하는 거울 위에 달린 작은 전등이 전부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지 않은 일이 있다면, 그 작은 전등이 눈앞의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이었다. 그는 유독 빛에 민감하다. 소위 말하는 스트론베리 블론드는 더 붉어질 수도, 더 어두워질 수도 있으며 가끔은 브루넷과 다를 바 없다. 이 사실은 눈동자에도 적용된다. 본인이 주장하기로는 녹색이지만 태양 아래에선 대부분 푸른빛을 띤다. 어떨 때는 몹시 어두운 녹색, 아주 가끔은 회색으로도 보인다.

돌아와서 바로 지금, 그의 눈동자는 몹시 검다. 빛이라곤 한 번도 머금어 본 적 없는 듯 삶을 투영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의 껍질 같다. 제 기능을 멈춰버린. 그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나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예비용 앰프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린다. 현재 그의 시간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한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가 나를 바라본다.

번진 립스틱. 반쯤 지워진 화장. 번들거리는 피부. 스프레이가 잔뜩 눌어붙은 머리. 붉은빛 속눈썹 아래로 내려앉은 피로. 땀에 젖어 은은히 빛나는 몸. 더 이상 의복이라 하기 어려운, 이리저리 찢겨 너덜거리는 천쪼가리.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여기에 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힘겨운 듯 텅 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누군가 본다면 뒷걸음질 칠 몰골이지만, 자신은 누군가가 아니다. 그의 겉모습만 취하고 떠나버리지 않는다.

허리를 숙여 거리를 좁힌다. 그가 내쉬는 생명이 느껴진다. 사무치는 공허감을 지우려 필사적으로 소음을 만드는 것 같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발악하는 것 같다.

어쩐지 씁쓸해져 그 삶의 증거에 온점을 찍었다. 나 자신의 숨으로.

비단 흥분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닌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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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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