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토우 소설 모음

밤(夜)

기사황자 아키토우

※ 기사황자 아키토우입니다.

※ 판타지 설정 초반에 아주 조금 들어갔습니다. 당황하지 말아주세요.(...)

※ 미처 확인하지 못한 오타나 맞춤법 오류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댓글이나 트위터로 말씀해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 약 16,800자입니다. (공백 포함)

※ 오랜만에 쓴 소설에, 정말 사심을 가득 담아서 썼습니다. 이 점 유의해주세요.(...)

※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저도 쓰면서 즐거웠던 만큼 읽으시는 분들도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눈부셔······.'

고개를 들자 화려한 샹들리에가 찬란한 빛을 연회장 곳곳에 흩날리고 있었다. 고개를 든 이는 손으로 그늘을 만들었다가 이내 손을 내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곳곳이 반짝거리는 연회장,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 소리, 화려하게 치장하고 시끌거리는 사람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던 이가 눈을 감고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머······, 저기 3황자님이 계셨네요······. 혼자서 눈을 감고 뭐하시고 계셨던 걸까요?"

"글쎄요······. 하지만 이 넓은 연회장에서 혼자라니 불쌍하시기도 하셔라······!"

"당연한 걸요. 황위 계승 순위도 제일 마지막이신데가, 최근엔 황제 폐하께 반항하셔서 노여움을 사셨잖아요!"

다시 눈을 뜨자,입 나불거리기를 좋아하는 귀족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힘든 것 같네······.'

오늘은 버팀목이 되어주던 사람이 옆에 없어서 더 힘든 것 같다고 이 제국의 3황자, 아오야기 토우야는 생각했다.

애써 말소리를 무시하며 토우야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버팀목인 이는 아마 저 중심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무리를 한참 바라보던 토우야는 드디어 그 사이에서 익숙한 색채를 발견했다. 잘 익은 오렌지 같기도, 아름다운 노을 같기도 한 주황빛 색채였다. 주황빛 색채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하얀색 바탕에 파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제복을 깔끔하게 입은 주황 머리의 기사, 바로 이 연회의 주인공인 시노노메 아키토였다.

아키토와 토우야의 첫만남은 토우야가 처음으로 아버지인 황제에게 반항하는 의미로 간 아카데미에서였다. 두 사람은 아카데미에서 빠르게 친해졌고, 아카데미 졸업 후에는 토우야가 직접 아키토를 자신의 호위 기사로 뽑아 지금까지 연을 이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아키토가 아니꼬웠던 것일까. 한 달 전, 황제는 아키토에게 드래곤 토벌을 명했다. 그 소식을 출정 바로 전날에 접한 토우야는 당장 황제에게 달려가 명을 거둬달라고 할 생각이었으나 아키토가 말렸다.

"걱정 마십시오, 황자님. 제 실력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제 걱정은 마시고, 제발 황자님 몸부터 챙기십시오. 어제 또 책 읽느라 늦게까지 안 주무셨죠?"

초조해하는 자신이 이상해 보일 정도로 아키토는 출정 전날까지 너무나 여유로워 보였다. 아무리 아키토가 제국의 손 꼽히는 소드 마스터 중 하나였어도 무려 드래곤이었다. 그냥 몬스터도 아닌 드래곤. 드래곤을 상대로 싸워 살아서 돌아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정말 대단해요, 아키토 경! 드래곤을 잡다니!"

"드래곤 때문에 두려움에 잠 못 이루던 날들이 수두룩 했는데 이제는 경 덕분에 안심하고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일주일 전, 토우야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키토는 멀쩡하게 돌아왔다. 물론 자잘한 상처들은 있었지만 큰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었으나 아키토가 드래곤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왜냐하면 그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드래곤의 심장을 가져와 황제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황제는 멀쩡하게 살아돌아온 아키토가 불쾌한지 눈썹을 일그러뜨렸으나 그래도 드래곤을 쓰러뜨린 것은 대단한 업적, 황제는 그에 대한 공을 치하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연회였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키토가 눈부신 미소를 띠며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키토, 피곤해 보이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흐트러짐 없는 미소였으나 토우야에게만큼은 달랐다. 같이 해온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토우야는 지금 아키토의 미소가 대외용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더불어 이제 아키토가 슬슬 사람들이 성가시다고 느끼는 것까지 눈치챘다.

"······아."

토우야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저 멀리서 고개를 돌리던 아키토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아키토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침 햇살이 떠오르는 온화한 미소가 아키토의 얼굴에 떠올랐다. 오늘 그 누구에게도 비춘 적 없었던 진심 어린 표정이었다.

화아악-!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토우야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귓가가 홧홧했다. 고개를 돌렸음에도 아키토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끄럽게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에 토우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토벌을 떠나기 바로 전날 아키토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자님."

지금이라도 다시 황제에게 가봐야 하나 고민하던 토우야가 아키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키토는 잠깐 아무말 없이 토우야를 빤히 쳐다봤다. 아키토의 출정 사실을 안 이후부터 토우야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이럴 줄 알고 몰래 빨리 다녀오려고 했는데······."

아키토가 곤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곤란하다기보단 애틋해 보이는 표정 같기도 했다. 혼잣말이라기엔 꽤나 또렷하게 들렸기에 토우야가 대답을 해야하나 고민하던 순간 아키토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제가 토벌에 나가있는 동안 황자님께서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 무슨 일인데?"

아키토가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토우야가 바로 물었다. 그러나 아키토가 부탁한 일은 토우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봐 주세요."

"······? 아키토에 대한 건 항상 생각하고 있어."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아키토가 손을 뻗어 토우야의 머리를 천천히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키토의 손이 스치듯 닿아 토우야가 몸을 움찔 떨었다. 아키토의 손과 닿은 곳이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가령, 지금 황자님의 귀가 왜 불이 날 것처럼 빨개지셨는지,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시는 건지 아니면 저한테만 이러시는 건지, 저한테만 그러신 거라면 왜 그러시는지······,"

아키토의 목소리가 나긋하지만 단호하게 울려퍼졌다.

"제가 없는 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봐 주세요."

아키토의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히 들리는 듯 했다. 토우야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화려한 연회장을 눈에 담았다.

그때 아무 말도 못 했던 것치고는 아키토의 부탁을 착실히 들어준 토우야였다. 토우야는 아키토가 없는 시간 동안 자기 나름대로 아키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그때 왜 그랬는가,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것인가. 아니, 다른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왜 아키토한테만 그랬을까?

문제는 어려웠으나 시간은 많았다. 토우야는 찬찬히, 그리고 틈틈이 생각하고 고민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토우야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냥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아키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그것이 습관인 것처럼, 일상인 것처럼 말이다. 정원의 풍경을 볼 때도, 차를 마실 때도, 심지어는 테이블에 그냥 앉아만 있을 때도 정신을 차리면 아키토를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눈치챌 때면 괜스레 얼굴에 열이 퍼지기도 했다.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하자 토우야는 아키토가 주고 간 난제의 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짐작만 할 뿐이지 확답은 내리지 못했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토우야는 이 제국의 황자, 당연히 어렸을 때부터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사람도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연회나 다괴회에서도 막내인 토우야보다 황위 계승 순위가 더 높은 형제들에게만 사람이 모였었기 때문에 토우야의 인간관계는 더더욱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카데미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으나 그마저도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한 상태. 이럴 때만큼 토우야는 자신의 좁은 인간관계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봤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경험해봤다면 아키토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결국 토우야는 답을 미뤄버리기로 결정했다. 아키토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시간은 흐르고 흘러 다시 지금, 아키토의 얼굴을 마주한 토우야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선명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없을 것이라며, 이 감정을 이것보다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토우야는 이 감정의 정의를 내렸다.

'나는······, 나는 아키토를······.'

다시 토우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키토를 바라보려고 한 순간이었다.

"그럼 아키토 경은 이제 3황자님의 호위를 그만 두시겠죠?"

갑자기 선명하게 들려오는 말소리에 토우야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확 차려졌다. 그와 동시에 돌아가던 고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드래곤까지 잡으셨는데 굳이 계속 남아있을 필요는 없지요?"

"뭣하러 굳이 남겠어요! 이미 드래곤을 잡은 영웅에, 가만히만 있어도 인생이 탄탄대로일 텐데! 오히려 3황자님 호위로만 남는 게 더 손해 아니겠어요?"

"그러고보니 아키토 경, 이제 슬슬 혼기가 차지 않았었나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 데려갈까요?"

아까까지만 해도 토우야에게 별 영향도 못 미치던 말들이 이제는 가시처럼 토우야의 가슴에 박혔다.

"3황자님도 양심이 있으시다면 혼사를 위해서라도 이제 아키토 경을 놓아주시겠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토우야는 깊은 심연에 빠져든 기분에 휩싸였다.

'아키토가···, 아키토가 내 곁에 있는 게 불행해지는 길이면······, 나는···, 나는 어떡하지?'

토우야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바닥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등 뒤로는 식은땀이 쭉 흐르고 손이 잘게 떨렸다. 속도 울렁거렸다. 이제 주변은 윙윙거리는 소리로만 가득했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토우야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언제 어디서나 황족의 품위를 잃지 말라고 오랫동안 엄하게 교육 받은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다.

'일단···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되겠어. 빨리······, 빨리 돌아가자.'

황족으로서 바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토우야는 언제 받아들인 건지 모를 이 잔만 다 비우고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

정확히는 비우고 돌아가려고 했다,

'이거······, 도수가 엄청 센 술이잖아······!'

토우야가 마신 것이 도수가 높기로 유명한 술만 아니었다면.

놀란 토우야는 한참 남은 술을 다급히 시종에게 넘기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사실 토우야가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건 몇 년 전, 아카데미 졸업 기념으로 아키토와 둘이서 처음 마셨던 것이었다. 씁쓸한 맛을 좋아하는 토우야에게 술은 퍽 입에 잘 맞았고, 첫 술이라는 설렘에 토우야는 들떠서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결국 어느 순간 토우야의 기억이 뚝 끊겼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 되어있었다. 토우야는 곁에 있던 아키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으나 앞으론 술을 자제하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끝끝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토우야는 자신이 무슨 추태를 부린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아키토가 진지하게 말할 정도면 꽤나 심각했구나 하고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다.

한 번 그런 일이 있고 나니 토우야는 불안해서라도 술을 마실 수 없었다. 황급히 연회장을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뒷말이 나오더라도 연회장에서 술주정을 부려 추태를 보이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한 토우야였다.

연회장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토우야의 뺨을 스쳤다. 다행히 찬바람을 맞으니 머리가 한층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토우야는 점점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며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궁에 토우야가 천천히 발을 들였다. 궁에는 아무도 없어 오로지 적막과 어둠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황제에게 노여움을 산 이후 토우야는 자신의 궁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수를 눈에 띄게 줄였다. 황제의 화가 죄 없는 하인들에게까지 미칠까 염려한 토우야의 배려였다.

"폐하의 화가 저희한테까지 미칠까 봐, 두렵네요······."

"하긴, 높으신 분들의 싸움에 희생되는 건 항상 저희 같은 하인들이었으니까요······. 언제 기회를 봐서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정말 황자님은 잘 지내시다가 갑자기 왜 그런 일을······,"

······ 배려였다.

'그 땐······, 그 땐 그게 최선이었어. 이미 다 지난 간 일이야. 이미 다 지나간······'

또 다시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에 토우야가 가쁘게 숨을 쉬었다. 심해에 빠진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들이마쉬는 숨, 내뱉는 숨 둘 다 토우야에게 너무나 무거웠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리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여도,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가슴 속의 응어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아키토······."

나 무서워.

토우야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토우야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키토를 찾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젠······ 아키토도 내 옆에 계속 있어줄 수 없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려움은 순식간에 커져 토우야를 덮쳤다.

또 다시 너의 소중한 사람들은 너를 떠나갈 거야. 아키토도 다르지 않을 걸? 모든 게 네 잘못이야. 그러게 왜 갑자기 반항을 했어? 계속 착한 아이로만 남아 있을 순 없었어? 불쌍해라. 결국 모든 걸 잃고, 좋아하는 상대까지 잃어서야 정신을 차리다니. 정말 멍청해!

두려움이 계속 해서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토우야는 고개를 휘휘 젓고 애써 그 속삭임들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걸까. 토우야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마저도 너무 무거워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결국 얼마 못 가 토우야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토우야는 침실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이대로는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술을 더 마시면 처음에 마셨을 때처럼 어느 순간 잠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아니 실은 잠들지 않더라도 지금 이 답답함과 두려움을 잊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주방에 도착한 토우야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술을 찾았다.

'분명 예전에 아키토랑 왔을 때 여기로는 절대로 못 가게 했었던 것 같은데······.'

아 찾았다.

아키토는 그 날 이후로 토우야가 술 가까이에도 못 가게 했는데 그런 과보호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술 창고에서 대강 눈에 보이는 술 병 몇 개를 품에 안고 창고를 나왔다. 이제 잔을 챙길 차례였다. 다행히 잔은 술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쨍그랑-!

······· 꺼내는 과정에서 잔 한 개를 깨뜨리긴 했지만 말이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에 토우야는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 함부로 깨진 유리를 집으려 해서일까. 스윽-하는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함께 손가락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놀란 토우야는 집었던 유리를 던지며 재빠르게 손을 거뒀다. 손끝에서 홧홧한 통증이 느껴졌다. 토우야는 손수건을 꺼내 통증이 느껴지는 손가락을 감쌌다.

'오늘은······ 정말 뭘 해도 안 되는 날인가보다.'

괜스레 더 우울해진 토우야는 지혈을 끝낸 뒤, 눈 앞에 보이는 바구니에 술과 잔을 넣었다. 토우야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주방을 빠져나와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라는 게 마지막 기억. 어느새 토우야는 술 한 병을 다 비우고 두 번째 병도 벌써 반이나 비운 상태였다. 그래도 토우야는 그만 먹을 생각은 커녕, 취한 상태로 계속 술을 홀짝였다. 눈은 이미 초점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멍한 눈으로 토우야가 창 밖을 보았다. 커다란 창으로 은은하지만 존재감이 확실한 달빛이 내리비췄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밤이 긴 것 같았다. 순간 토우야는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지금도 아키토는 그 연회장에 있을까?'

토우야가 멍하니 달빛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분명 다른 생각을 하려고 기분 전환 겸 술을 마신 거였는데 이러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생각이 마음대로 됐다면 토우야가 술을 마셨을까.

"3황자님도 양심이 있으시다면 혼사를 위해서라도 이제 아키토 경을 놓아주시겠죠!"

연회장에서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떠 다녔다.

정말 자신이 아키토의 발목을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모르겠어······. 그냥··· 그냥 지금은 아키토가 보고 싶어······.'

남은 술을 쭉 들이키고 다시 술을 잔에 따랐을 때였다.

"황자님?"

불현듯 문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우야가 설마하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키토······?"

목소리의 주인은 토우야의 호위 기사이자 오늘 연회의 주역이었던 아키토였다. 토우야가 방금까지 보고 싶어했던 아키토가 지금 이 순간, 토우야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아까 연회장에서의 눈부신 모습 그대로.

자신이 술에 취해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 토우야는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부릅 떴다. 하지만 토우야가 눈을 몇 번을 감았다 떠도, 심지어는 비비고 봐도 아키토는 사라지지 않았다.

'진짜··· 아키토다······.'

결론을 내린 토우야의 뇌가 팽팽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취기 때문에 마음만큼 빠르게 돌아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키토가···, 왜 여기에 있지······? 분명···, 아직 연회는 끝나지 않았을 텐데······?'

토우야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계속 머리가 빙빙 돌았다. 토우야가 뜨문뜨문 드는 생각을 어떻게든 이어놓는 사이 아키토는 방 문을 닫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늘 연회에서 평소보다 일찍 자리를 피하셨길래 몸이 안 좋으신가 해서 와봤습니다. 그런데 노크를 했는데도 답이 없으셔서 무례를 무릅쓰고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키토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머리를 숙였다. 토우야의 손이 움찔 떨렸다. 토우야는 뭐라 얘기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한참동안 말을 고르다가 결국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괜찮아."

꽤나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아키토는 단번에 알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아.'

토우야와 아키토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러나 토우야가 또 고개를 바로 돌려버리는 바람에 짧은 찰나에 그쳤다.

토우야는 심장이 술렁거리는 듯한 감각에 가슴께를 꾸욱 눌렀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건지, 왠지 울컥하고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키토의 표정이, 항상 저에게 보여주던 다정한 표정이 토우야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저벅저벅-

토우야가 아무말도 없자 아키토가 테이블 쪽으로 더 다가갔다.

"······황자님, 혹시 술 드셨습니까?"

테이블 위에 있던 빈 술병과 잔을 그제서야 발견한 아키토가 미간을 미미하게 좁히며 물었다.

"······."

토우야는 여전히 아키토의 눈을 피하면서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홀짝였다.

"술도 약하신 분이 왜 이렇게 많이 드셨습니까?"

"······."

이어지는 아키토의 말에도 토우야는 침묵을 유지했다. 보고 싶었던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난 건 기뻤지만 지금은 아키토와 얘기하고 싶지 않은 토우야였다.

"······."

자신과 눈도 안 마주치는 토우야가 불만스러운 듯 아키토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키토는 토우야에게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키토의 발소리가 가까워질 수록 토우야의 심장도 점점 빨리 뛰었다. 이대로 있으면 곧 심장이 터지지 않을까 싶을 때, 아키토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휙-!

꿀꺽꿀꺽-

아키토가 토우야의 손에 있던 잔을 낚아채더니 남아있던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순식간에 술을 빼앗긴 토우야는 너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술이 썼는지 아키토가 인상을 찌푸렸다. 돌처럼 굳어있던 토우야가 정신을 차리고는 소리쳤다.

"자···잠깐, 아키토! 이게 지금 무슨······!"

"토우야."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토우야가 멈칫했다. 아카데미 졸업 이후로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부른 적 없던 아키토였다. 토우야는 오랜만에 불리는 이름에 또 다시 심장이 덜컥였다.

아키토가 손을 뻗어 토우야를 의자에 가뒀다. 그리고 몸을 숙여 의자에 앉은 토우야와 깊게 눈을 맞췄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토우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저를 바라보는 아키토의 눈빛이 너무 깊어서, 지금까지 이런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토우야는 몸이 얼어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 아까부터 계속 눈을 안 마주쳐?"

"······."

입을 달싹였으나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아키토가 말하는 '아까'가 '연회장에 있었던 순간'에서부터라는 걸 알고 있다.

"토우야."

다시 한 번 아키토의 목소리가 내려 앉았다.

"내가 가기 전에 부탁했던 거, 제대로 생각해봤어?"

토우야의 눈이 일순 커졌다.

'생각해 봤어. 생각해 봤는데······ 나 실은 아키토를 좋아하고 있었나 봐.'

입 안에 굴려지는 말들을 뱉지 못한 채로,

"······ 아키토도 이제 날 떠날 거야?"

전혀 다른 말이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갔다. 순간 코 끝이 찡해지면서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토우, 황자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키토가 다급히 물러나며 물었다. 토우야는 황급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꼴사나워······.'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질 않나, 술 취하고 울음을 터뜨리질 않나. 이보다 더 꼴불견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토우야는 생각했다.

"자, 잠시만요! 그렇게 닦으시면 나중에 아프십니다!"

아키토가 토우야의 손을 덥썩 잡았다. 토우야는 엉망인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 어떻게든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애초에 새벽부터 훈련하는 아키토를 토우야가 이길 리는 만무했다.

"읏······. 이거 놔 줘······!"

"싫습니다. 놓으면 또······ 잠깐, 황자님. 이 상처는 또 뭡니까?"

둘이 아웅다웅 다투는 사이 아키토 시야에 토우야의 상처가 들어왔다. 아까 유리를 집었을 때 생긴 그 상처였다.

"벼, 별 거 아니야······."

나쁜 짓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토우야는 제 손을 뒤로 숨기며 아키토의 시선을 피했다. 또 유리 하나도 제대로 못 치우는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토우야는 부끄러움에 홧홧해지는 귓가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으니ㄲ······."

"뭐가 괜찮습니까!!"

아키토가 아까보다 더 센 힘으로 토우야의 손목을 낚아챘다. 다시 손을 빼내려던 토우야는 힐끗 보이는 아키토의 얼굴에 일순 모든 동작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토우야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에게 진심으로 화가 난 아키토를 마주했다.

"얼른 손 보여주세요. 아까 언뜻 봐도 꽤 깊게 베이신 것 같던데 뭐가 별 거 아닙니까!"

아니, 정확히는 토우야를 향한 분노라기보단 아키토 본인에게 향한 분노인 것 같았다. 아키토가 이리저리 토우야의 상처를 살펴볼 때까지도 토우야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어째서······?'

그저 막연하게 드는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째서······? 어째서 아키토가 그렇게 화내는 거야? 어째서 나보다 더 세심하게 상처를 살피는 거야? 다친 건 나인데 어째서······, 어째서 아키토가 더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거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따라가질 못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소독하고, 치료를······."

혼란스러워 하는 토우야를 제쳐두고 아키토는 어느새 혼자 결론을 내린 듯 어디론가 가려고 토우야에게서 멀어졌다.

순간, 토우야는 멀어지는 아키토를 잡아야겠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평소라면 그 충동을 애써 내리 눌렀겠지만 지금 토우야는 술에 취한 상태, 충동을 눌러야 한다는 이성보다 본능이 더 빠르게 앞섰다. 토우야는 아키토의 옷 소매를 덥썩 잡았다.

"······? 황자님?"

"······."

아키토의 목소리에 토우야가 놀란 듯 몸을 파드득 떨었다.

"그, 그게······, 지금 어디가려는······."

"황자님의 상처 치료하게 잠깐 소독약과 약을 가지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까의 화가 난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걱정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키토도 이제 아무리 술을 마셨더라도 평소와 다른 토우야를 눈치 챘을 것이다.

"아······. 그, 약 꼭 가지러 가야해······?"

토우야가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

아키토의 침묵이 길어지자 다급해진 듯 토우야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아까 내가 지혈도 했고, 이제 피도 거의 다 굳어서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안 가면 안 돼, 아키토······?"

마지막에 아키토를 부르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 황자님."

아키토가 토우야의 손을 잡고 토우야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토우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키토와 눈을 맞췄다. 오늘 처음으로, 토우야는 제 의지로 아키토와 마주했다. 분명 연회장에서도, 심지어는 몇 분 전에도 봤던 얼굴인데 왜 이렇게 반갑고 오랜만에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키토가 천천히 손을 뻗어서 흘러내리는 토우야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마치 토벌을 떠나기 전의 그때처럼.

"역시 아까 연회장에서 무슨 일 있으셨죠?"

움찔-

토우야가 정곡을 찔려 몸을 크게 떨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키토가 잡았던 손에 힘을 주었다. 묘하게 화난 듯 아키토의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도 아까보다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토우야는 순간 저 분노가 누구를 향한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저 분노가 자신을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해주세요, 황자님. 전 황자님의 기사이지 않습니까. "

"······."

"저는 황자님이 상처 하나 입지 않도록 황자님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요. 그러니···, 저에게 말해주세요. "

저에게 이렇게까지 다정하게 말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부디 제가······, 황자님을 지킬 수 있게 해주세요."

"······ 왜?"

토우야가 멍하니 아키토를 쳐다보며 물었다. 왠지 지금 이 질문을 꼭 해야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야?"

토우야의 질문에 아키토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이내 한숨 쉬 듯 웃었으며 말했다.

"······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키토가 잡고 있던 토우야의 손을 제 쪽으로 천천히 끌었다. 토우야의 손은 아키토의 얼굴 가까이에서 멈췄다. 아키토는 잠시간 토우야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두 눈을 감고 토우야의 손등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짧은 접촉이었지만 그때 손등에서 느껴진 온기는 순식간에 퍼져 토우야의 온몸을 휘감았다.

입술을 뗀 아키토가 눈을 뜨고 토우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감히, 황자님을 사랑하고 있으니깐요."

아까 방의 한구석만 비추던 달빛이 어느새 온 곳에 내려앉아서일까, 토우야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자님을 지켜야 하는 호위 기사가, 결코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아키토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에 대한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더는 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

"사랑하고 있습니다, 황자님."

아키토가 말을 맺은 순간 토우야는 왈칵하고 눈물이 터져나왔다. 토우야의 눈물을 보자마자 아키토가 벌떡 일어나 토우야에게 다가갔다. 토우야가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있자 아키토가 먼저 토우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지독할 정도로 조심스럽고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 왜 또 우십니까. 계속 우시면 나중에 머리 아프십니다. 제발 그만 우세요, 황자님."

"흐윽······."

아키토의 말에 토우야의 입에서 조금씩 울음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윽, 사람들이···, 끅, 이제, 이제···, 흑, 아키토도 떠날 거라고······, 흑······."

토우야가 울음에 헐떡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아키토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끅, 내가···, 아키토를 잡,고 있다고····, 흐윽, 그래서······, 흑, 내가, 내가 진짜···, 아키,토의 발목을, 잡고 있, 흐윽···,있을까 봐, 무서워서······."

"······."

"아키토마저도, 진짜···, 흑, 날 떠날까 봐······, 흐윽."

"······ 이 바보가."

아키토가 강한 힘으로 토우야를 제 품으로 훅 당겼다. 순식간에 토우야는 아키토의 품 속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숨을 들이 마쉬자 아키토의 향이 훅 느껴졌다. 맡기만 해도 진정이 되는 것 같은 향이었다. 토우야가 손을 뻗어 두 손으로 아키토의 옷을 잡고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아키토도 토우야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제가 어떻게 황자님을 떠납니까. 지금도 황자님 눈물에 좌지우지되는 제가 어떻게······. 못 떠납니다, 아니 안 떠납니다, 절대로 황자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아키토의 말에 토우야는 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토우야는 울음을 꾹 참고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 좋아해, 아키토······."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토우야는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까 깨달았어. 나, 아키토를 좋아해. 좋아해, 아키토. 정말 좋아해."

"······."

"아키토가 돌아오면 이 말을 가장 먼저 해주고 싶었어."

토우야가 오늘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아키토가 잠시 멈칫 했다가 다시 토우야를 세게 끌어안았다. 이 때문에 토우야는 아키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버둥거렸지만 금방 멈추고 말았다.

"······ 황자님은 제가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토우야의 머리 위에서 아키토의 낮지만 감격한 듯한 목소리가 내려 앉았다.

'······ 치사해, 아키토. 이러면······, 나도 얼굴을 못 들겠잖아.'

토우야는 아까처럼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엔 술 기운 탓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토우야도 팔을 뻗어 아키토를 껴안았다. 아키토가 떠난 이후 계속 텅 비어있던 마음이 이제서야 가득 채워지는 걸 느꼈다, 아니 가득 차다 못해 넘쳐 흘렀다.

"고마워, 아키토. 정말 좋아해."

넘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토우야가 말했다.

"황자님."

아키토가 토우야의 말에 안고 있던 팔을 풀더니 두 손으로 토우야의 얼굴을 잡았다. 토우야를 바라보는 아키토의 표정이 진지했다.

방금 서로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 둘만 있는 어둡고 조용한 방,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자신의 얼굴을 잡고 있는 아키토의 손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 토우야는 괜히 이 모든 것이 인식되며 긴장되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심장이 다시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토우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아키토가 토우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서······, 설마······?'

토우야가 어쩔 줄 몰라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아키토가 말했다.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이지만, 황자님. 이번 일도 술김에 이러시는 건 아니시죠?"

"······ 어?"

이번 일도?

토우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을 뜨니 아키토는 어느새 멀어지고 난 뒤였다.

화아악-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깨달은 토우야의 얼굴이 빠르게 익기 시작했다.

"수, 술김에 그런 거 아니야······! 진심,이야······!"

"그런가요."

당황한 토우야가 횡설수설 하는 사이 아키토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힐끔 토우야의 얼굴을 본 아키토가 씨익 웃으며 토우야에게 물었다.

"그런데 황자님,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지셨습니까?"

"······ 딸꾹."

토우야가 황급히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계속 나오는 딸꾹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딸꾹, 딸꾹."

"왜 그러십니까, 황자님?"

아키토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누가 봐도 다 알고 있는데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이었다.

"읏······, 아키토······!"

토우야의 눈에 원망이 서렸다.

"하하, 죄송합니다. 황자님 반응이 너무 귀여우셔서 그만."

아키토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키토는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생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토우야의 볼을 쓰다듬었다. 토우야를 바라보는 눈빛에 깊은 애정이 어려있었다.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아키토가 힘 없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치만 정말 걱정 되긴 하네요. 그때도 잊어버리셨는데 이번에 안 잊어버리신다는 보장은 없으니깐요."

"아······."

전적이 있었던 탓에 토우야가 할 말을 잃었다.

이번에 잊어버리지 않을 텐데, 아니 잊어버릴 수가 없을 텐데.

그렇게 말하듯 토우야의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그러니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저도 불안해서 안 되겠습니다."

"······? 그게 무슨 뜻······"

토우야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무언가가 토우야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키토의 체향 토우야를 훅 덮쳐왔다. 곧이어 아키토의 뜨겁고 말캉한 혀가 토우야의 입을 벌리고 토우야의 입안에 침범하기 시작했다.

덜컹-

토우야가 앉아있던 의자가 크게 움직였다. 놀란 토우야가 아키토의 팔을 잡았지만 아키토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토우야의 뒷목을 잡고 끌어당기며 토우야의 혀와 입안을 탐했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감각에 토우야의 솜털이 쭈뼛쭈뼛 섰다. 아키토의 혀가 자신의 혀를 휘감을 때마다 턱이 부들거렸고, 아키토의 혀가 자신의 입천장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저절로 흠칫흠칫 떨렸다. 결국 토우야는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고 두 팔로 아키토의 목을 끌어 안았다. 그게 신호라도 된 양 아키토가 더 집요하고 진득하게 토우야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아키토에 토우야는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갔다. 토우야가 점점 달아오르는 몸과 차오르는 숨을 견디지 못할 때 즈음, 드디어 두 사람의 입이 떨어졌다.

"하아······, 하아······."

토우야가 힘겹게 숨을 고르는 사이 아키토가 제 이마를 콩 기댔다. 아키토는 몰랐겠지만 아직 갈무리 되지 않은 열기가 얼굴에 드러났다. 그러나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뜨자 평소처럼 다정한 낯으로 돌아온 아키토였다.

"후······. 이것마저 잊어버리시면 저 정말로 화낼 겁니다."

빙긋 웃은 아키토가 아쉬움을 뒤로 하며 다시 토우야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아키토가 멀어지기 전에 토우야가 다시 아키토를 잡았다.

"······? 황자님?"

아키토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기, 그···, ······ 해도 괜찮은데······."

"네? 죄송한데 잘 못 들었습니다, 황자님."

"그, 그러니까······. 화,확실히 하려면···, 한 번 더······, 해도 괜찮은데······."

부끄러움에 토우야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 정말 한 번 더 해도 괜찮습니까?"

순간 벙쪄 있던 아키토가 한 박자 늦게 재차 물었다. 토우야는 빨개진 얼굴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우야의 대답에 곧바로 두 사람의 입이 다시 겹쳐졌다.

남은 이 밤이 두 사람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았다, 앞으로 두 사람이 함께 보낼 시간은 충분히 많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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