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on&Ner

이름 없는 별들과,

자캐 커플 로그 23.07.15.

365g by 혜윰

BGM: Arcade Fire with Owen Pallett - Some Other Place

어떤 다정은 당신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든다. 희생이 끝내 이기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 까닭을 우리가 모를 리도 없어, 서로의 웃는 낯은 꿈결처럼 온전하다. 본디부터 그리 태어나기라도 한 양 엮인 손 끝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문득 춥지는 않은지를 물어와 여상한 목소리로 이제는 따스하다 대답했다. 그러나 볕이 비치는 시선 아래에는 변함 없이 유리된 이들이 숨을 쉬고 있어 우리는 여전히 절박하다. 찰나의 숨결을 두고 그렇다면 여즉 외로운지를 물어와 언제나 그러했듯 계속해 알고 있었다 대답한다. 그러자 당신은 약속처럼 맞닿을 곳에 입을 맞췄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다만 무너진 언어로서 살아간다. 그렇게 함께 이곳에 남겨지자 기약한다. 까닭을 되짚기에는 너무나 자연한 일이라 나는 묻지 않고 그저 걷자고만 했다.

*

눈이 나리지 않는 경치를 저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은 부끄럽게도 여즉 생소했다. 볕이란 것이 비쳐 녹아내리지도 않으며 재차 얼어붙지도 않는 대지를 지금껏 아주 모르던 것도 아니었는데. 되레 세찬 잔불이 거스름처럼 남아 악착스레 파고 들던 대지마저 알다마다 도리어 제 터인 마냥 머물기도 했으니. 그렇기에 그 사실이 영 와닿지 않는다 답지 않게 어물대며 고백하자, 당신은 그리운 이를 맞이할 날을 전해 들은 아이처럼 희게 웃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으니까. 그들과는 또 다르잖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귓바퀴 너머로 넘겨주는 손길은 쭉 보아왔던 대로 다정하며 그 다정만큼 생소하다. 넬은 오랜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이,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발간 입술로 귓가에 속살대는 푸른 목소리를 품에 담고는 되새기듯 대답했다. 그런가요. 몸에 가득한 낯설은 온기에 열이 잔뜩 오르기라도 했을까. 오랜 꿈에라도 잠긴 마냥 단어의 마디 끝자락이 다소 뭉그러졌다. 그럼에도 엘리언은 무엇이 그리 기쁜지 제 뺨에 닿은 목울대를 잘게 흔들며 웃음을 전해왔다. 이어 눈꺼풀 위에 닿는 입술은 쭉 기억하듯 퍽 부드럽고 따스해, 넬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의 당신은 제법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아니, 이 장소로 돌아온 근래에는 항상 이러했던 것도 같다. 어쩌면 본디부터 이러함이 자연했고 그저 지금껏 몹시 지쳐 호흡하는 방법을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악몽을 꾸질 않아 그러는지 물으려던 호흡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다만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귀를 기울였다. 계절의 바람을 타고 흐드러지는 난만한 흐름을 따르고 있으면 달은 손등이 제 등을 부드러이 어루만져와 저도 모르게 노곤한 숨을 들이마신다. 그런가요…. 그렇게 가벼이 토닥이는 손길에 따라 퍼지는 울림은 멀지 않은 과거 들어본 적이 있다. 

 엘리언.

 응?

 저는 아기도 아니고 트림을 할 필요도 없어요.

 알아. 그냥 하고 싶어서 그래.

그의 손길은 참으로 안온해 오로지 받아들이기를 종용하듯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종종 두려워지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도망치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 약속했지만, 혹여라도 그 순간이 진정 찾아왔다 한다면.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자 했을까.

 엘리언.

 응.

 엘리언은 종종 이상해요.

그러자 이전보다 훨 즐거운 얘기라도 들었는지 기댄 어깨가 몹시 요란히 들썩였다. 화들짝 놀란 넬이 고개를 파득 치켜들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곁을 지키는 이를 멍하니 바라본다. 가득 찬 시선이 기울듯 휘어, 담은 것들이 죄 쏟아내릴 것만 같아 가슴께 어딘가가 웅성거렸다.

…왜요? 그냥. 거짓말. 거짓말은 아니야. 그럼요? 미안, 설명하기 어렵네. 그럼 언제가 되면 설명해 줄 수 있나요?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뭐든 대답이 되어주겠다 말한 사람은 엘리언이잖아요. 응, 그랬지. 그럼 해 주세요. 그런데 꼭 말로 설명해야 돼? 엘리언,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아요. 아니, 아주 안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어.

서로의 문장과 마디가 맞물려 꼬박 쌓이는 동안에도 웃음기는 영 가시질 않는다. 웃음은 시냇물 속 자갈처럼 일렁이다, 끝내는 침대 위로 쏟아지는 볕을 닮아 보이기까지 해 넬은 재잘대며 캐묻던 입술을 결국 꾹 다물고야 만다. 이내 머리를 감싸고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손길이 닿아와, 거부하지 않고 재차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울까. 붙든 채 의뭉스러워 하고 있으면 문득 살내음이 났다. 넬은 불현듯 스쳐지나간 형상에 어설프게나마 이름을 적어넣으며 남겨진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쌌다. 그랬지.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는 이런 향이 난다. 손길은 다시 메마른 등을 어루만지고 버석하게 흉이 진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그렇게 하얀 시트 위로 가득해진 볕을 따라 가만 눈을 감고 기다리면, 어째서인지 그 어떤 상념으로도 차마 가려지지 않을 순간이 돌아온다. 또한 근래 그러했듯 남겨진 팔을 들어 이미 흐트러진 머리칼을 잔뜩 헤집는다. 엘리언이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사이로 푸른빛이 가득하다. 볕을 가득 담은 머리칼은 언제나보다도 훨씬 따스하고 밝아 자칫하면 아주 흩어져 버릴 것만 같다.

뺨과 어깨를 간질이는 숨결은 언제나와 같으면서도 역시 어딘가 많이 다르다. 흉이 남겨진 제 장소는 따스하기엔 너무 멀 텐데. 넬은 괜찮으냐 묻는 대신 저 역시 당신을 안듯 품에 묻고 볕이 너무 뜨겁지는 않은지 물었다. 대답은 조금 늦게 찾아왔다.

 괜찮아. 여기 있기로 했잖아.

창가를 어지럽히듯 스며들어오는 풍경은 여전히 그리우면서도 낯설다. 언젠가 저에게도 이 다정을 퍽 자연한 것처럼 여길 날이 올까. 그렇다면 저는 아주 많이 두렵다. 가지지 못할 것을 뒤늦게 건네받는 시절은 서러웠다. 잃어버릴 리 없으며 쭉 곁을 지켜 줄 이가 되는 일도 그럴까. 근래에는 새로이 보이고 들리는 것이 많다. 너무나 많은 탓에 우리의 몸을 감싼 하얀 시트는 마치 발치를 부드러이 어루만지는 포말을 닮았고 겹치며 사박이는 소리는 꼭 눈을 딛고 걸어가는 발자국을 떠올리게 한다.

네. 그렇지요.

우리는 여전히 외롭고, 끝내 잊혀진 삶을 끌어안고 있다. 당신도 나와 함께 이곳에 돌아왔을까.

짐을 지는 이들은 으레 그렇다. 잃어 떠나가는 자들과도 달리 차라리 영영 묶여 떠나지 못하길 바랐다. 그러니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갈망하는 자는 존재치 않는다. 몹시 거칠고 막강하여 온갖 것이 서로를 침범하고 헤집는 세계에서 마주한, 몇 안 될 불변의 진리였다. 어떤 이는 관성이라 하였으며 어떤 이는 족쇄라 하였다. 넬은 가지지 않았으며 가지지 못할 이였기에, 오로지 지켜본 자들만이 남기는 누군가를 향한 회고의 기록은 때때로 견디지 못할 만치 얄팍했다.

담아야 할 것이 많아 쏟아진 것을 미처 돌이키지 못하던 세월에겐 어떠한 사죄가 전해질 수 있을까. 흘러간 이들과 다시 마주할 날이 찾아오기는 할까. 저 홀로 세상의 전부를 관망하겠단 오만은 애초부터 지니질 않았으나, 뒤늦게 남겨진 이로서 남겨둘 이를 마주하자니 그 또한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엘리언, 나는 당신의 세계를 모른다. 당신이 그 검고 붉은 대지에 머무름으로써 대답해야 했던 빵은 아이의 주먹만 하고, 벽돌만큼 단단하며, 톱밥이 너무 많아 혓바닥의 피를 삼키는, 누군가에겐 질 나쁜 농담처럼 여겨졌을 호의였다고 전해 들었다. 다정이란 이름 아래 부서질 듯 얄팍하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답게 정련되어, 끝내 타인의 언어로만 정의될 수많은 이기는 지나치게 광막하듯. 그렇게 온 시야를 뒤덮어 도통 보이고 들리는 것이 없다. 그러니 나는 결국 완전한 당신은 되지 못하리라.

다만 당신의 그리움이란 저와 같으면서도 또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

바다를 보러 갈까요. 부름인지 대답인지 모를 언어에도 당신은 늘 그러했듯 아주 끌어안길 택했다. 제 앞머리를 걷어내 눈동자를 마주한다. 볕을 닮은 시선은 능숙하게 제 안색을 살폈고 감싸는 손길은 뺨을 한 번 어루만지고 떨어졌다. 대답은 자연하다.

 그럴까. 언제나와는 조금 다른 공기를 쐬는 것도 나쁘진 않겠고.

넬은 문득 붉고 검은 대지 위에 서 있던 푸르고 선연한 이를 기억한다. 다정이 끝내 저를 해치는 칼날이 될 공간을 생각했다. 그곳의 저는 분명 당신에게 무언가를 전하고자 했는데. 격정에도 가까웠던 감정은 여전히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저는 그 순간의 당신을 옳지 않다 여겼을까, 바라지 않았다 여겼을까, 혹은 거짓을 말한다 여겼을까. 마뜩잖은… 안타까운, 다만 붙들고 싶은, 차라리 더는 다정하지 않기만을 바랐을. 요즈음은 새로이 알게 되는 것이 너무나 많아, 제가 앞서 알고 있던 것들은 되레 흐려지곤 한다. 마치 제가 돌아봐 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당신이 저를 이곳에 남긴 것처럼, 그곳에도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까?

 엘리언.

 응.

바다에 갈까요. 함께 바다를 보러 갈까요. 손과 발을 담궈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그곳은 이곳보다 뜨거울까요. 그렇지 않다면 반대로 차가울까요. 당신의 머리칼은 바다를 닮았을까요. 혹은 이내 겹쳐질 밤하늘을 닮았을까요. 당신의 시선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을까요. 나는 이제 이곳에 존재하고 나를 붙들어 남겨둔 사람은 당신인데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외롭고 홀로일까요.

 "입을 맞춰도 될까요?"

당신의 낯은 제법 앳되다. 견고하고 다부진 신체는 매달리고 끌어안기고 싶으면서도 때때로 품어주고 싶어진다. 그렇기에 당신이 머리맡에 이고 감싸안아야만 하는 별들이 많았구나, 싶었다. 어두웠던 시야 아래 저를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이 그리도 찬란했듯, 오로지 불타오르며 헤메이던 저의 시선은 그 화마 속에서도 끝내 사람으로서 남고자 하던 당신을 향했다.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그저 자연한 흐름으로만 여기기엔, 우린 수없이 무너지며 스스로 걷는 방법을 깨우칠 수밖에 없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당신은 대답없이 걸음한다. 남겨진 팔이 하나 뿐이기에 마주잡는 손도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뒤늦게야 헛헛했다. 시선은 언제나 그러했듯 하얀 자락에 닿았다. 굳이 멀쩡한 천을 잘라내며 남겨진 자리를 메꾸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나풀거리는 경계는 햇살이 비쳐도 그림자가 없다. 가만 코를 맞대고 숨을 고른다. 비고 나서야 존재하게 된 장소를 바라보는 당신이 무엇을 추억할지 저는 마지막까지 알 도리가 없을 것이라, 그저 겹치는 온기만을 갈음했다.

*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잘 만든 거짓처럼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이들이 저희였다. 엘리언은 무엇이든 제 손으로 만져 형태와 질량을 가늠함으로써 현재를 실감하길 즐겼으나, 또한 마법이 부여하는 섭리의 유희를 부정하는 이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여행은 자연히 떠나고자 다짐하길 시작으로 떠남을 받아들이길 끝으로 했다.

 그곳에는 고래가 있대요.

 이전에 만난 적 있어?

 아니요.

 조만간 내가 알고 있는 아이들을 소개해 줄게.

잠자코 옷깃을 여며주는 손길에 넬은 여상히 네, 라고 대답했다. 다소 쌀쌀한 곳이니 몹시 추위를 타는 너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붉은 담요가 걸쳐진다. 매번, 담요 정도라면 제가 직접 챙길 수 있으니 괜찮다 대꾸하지만 당신은 영 들은 체를 안 한다. 그러니 이것은 알량한 복수심이라 해도 좋았다.

  "작별 인사를 했어요."

더없이 희미한 말에 샛별을 담은 시선이 마주한다. 파도는 잔잔했고 아주 멀지만은 않은 곳에서 어린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얼마간 걷다 온기가 그리워져 신발을 벗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넬은 걸음을 옮겨 몇 발자국 앞서 걸어갔다. 그리 언질도 없이 토해낸 숨이었으나, 엘리언은 두 사람 몫의 신발을 챙겨 든 팔을 늘어뜨린 채 여상스레 대답했다.

  "마지막까지 다하고 왔어?"

  "네."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젠 걱정하지 않으시겠어. 엘리언의 말에 다시 네, 대답한다. 한쪽 팔을 수평으로 펼쳐 균형을 잡는다. 제가 바닷가와 가까운 곳을 걷고 싶다 고집을 부렸기에, 우리는 비어 버린 손길이 허물처럼 자리 잡은 만큼 떨어져 걸었다.

  "사실 오래 전 떠나셨어요. 그런데 이제야 인사를 드렸네요. 너무 외로워요."

  "여전하실 거야."

  "저만 남겨져 버렸어요."

  "괜찮을 것 같아?"

  "괜찮을까요?"

  "그러도록 하자."

넬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발자국이 여전히 두 사람의 몫이므로 괜찮다 여겨서는 아니었다. 우리는 끝내 무게 없이 살아갈 이들이었기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만 셈할 수 없다. 결국 고집이라도 부리듯 보폭을 크게 내딛으며 성큼성큼 나아간다. 흰 파도가 발목을 적시려 가득 넘쳐든다.

  "발목 적시면 안돼."

엘리언의 목소리는 언제나보다 조금 가늘다. 그렇게 전해도 본인은 도통 모르겠다며 얼떨떨한 낯으로 목덜미만 쓸고 끝낼 것이 뻔해, 넬은 일부러 입을 꾹 다물었다. 비추어 보자면 성급히 봄을 떠나보내는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미련 가득히 꽃망울을 떨어트리고 그만큼 비어버릴 가지를 펼치길 주저하는.

뒤늦은 감상이 몰려왔다. 어쩌면 복수심 따위의 그럴 듯한 것보다 더욱 하찮은 감정일지도 모른다.

  "안 적셔요."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애써 펼쳐보았자 균형이 잡힐 리가 없지. 애초부터 저를 두고 멀리 앞서갈 심산이었는지 계속해 등을 보이는 넬을 뒤따르며, 엘리언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넘어지지 말고."

  "안 넘어져요."

반 뼘의 거리는 이제 보폭만큼 멀다. 젖기 전에 옷깃을 걷어주겠다 외쳐도 넬에게 전해질까, 엘리언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그저 우리는 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므로 오만할 자격마저 잃었다는 넬의 마디가 왜 이 순간에야 떠오르는지. 너는 항상 답을 알고 있었다 대답하니 묻는다면 까닭을 알려 줄까.

제가 되찾은 숨이 건네는 언어들은 하나같이 겹겹이 쌓이고 쌓인 탓에 아주 단단히 잠겨, 의미를 재기 힘들다. 하얀 눈이 수없이 반복되며 견고해지듯 푸른 그림자 틈새로 가만 비쳐 보이기만 한다. 그래서 네가 춥다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이 추운 줄을 모르던 이였으니 되레 제 숨이 되어주길 택하였을까.

이상하지, 이곳은 숲이 아니고 바다일 텐데. 발치를 간질이는 잎사귀가 가득하다. 이제는 맨발로 땅을 짚어도 다치지 않을 곳이어야만 할 텐데.

 넬?

뒤늦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함께 보러 가자 해야했다 되짚는다. 금빛으로 일렁이는 파도를 보았다면 푸르게 물결치는 장막을 보러 가자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푸르게 물결치는 장막을 본다면 그제서야 안온한 무언가의 형체라도 어루만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어루만지고서야 저에게 담긴 무게를 잴 수 있지 않았을까.

손에 들린 신발을 가만 내려보며 소리를 내어 이름을 불러도 될지 순간 주저한다. 한 쌍의 신발은 본래 쥐던 것보다도 조금 작다. 거품이라도 쥔 듯이 가벼워 비어버린 경계에는 빛이 차오르지 않는다.

 "엘리언?"

넬은 발목을 파도에 담근 채 가만 소리내어 이름을 불렀다. 덤덤한 목소리로 파도의 온기를 모르겠다, 덧붙이자 짧게 어긋난 시선이 뒤늦게 찾아온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는 옷자락을 온전히 걷을 수가 없어, 물결에 희게 젖어든 장소는 예전보다도 짙고 무거워 떠나가길 주저하도록 만든다.

*

넬은 예전처럼 항상 웃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예전보다 웃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되레 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 사람처럼, 꼭 아주 다른 곳에서 온 사람처럼. 외로움이고 그리움이고 죄 모르던 이가 뒤늦게야 자신이 가진 것을 알게 된 사람처럼 굴게 됐다. 몇 번의 계절이 넘도록 곁에 매어두어도 쉬이 머무르질 못하던 인영이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늘지는 하늘 아래에서 전쟁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흰 얼굴이 말갛게 웃었다.

  "엘리언."

부름인지 대답인지 모를 숨결이 물기 어린 바람에 휩쓸려 사그라들었다. 멀리서 아이가 웃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말하자 너는 그런가요, 하고 대답했다. 이상스럽게도 그 짧은 목소리 하나에 스스로에게 끝없이 묻고, 끝없이 답하던 의문 중 하나가 참 쉽게도 달칵 열려드는 감각이 들었다. 

아직 남아있는 것들이 많아요. 닿아오는 목소리는 다음의 답을 알려주지는 않으나 수풀 사이에 잠들어 있을 새를 보러 가자던 마디처럼 그 끝이 뭉툭했다. 마치 다치지 않도록 조심히 마주하려 하듯. 우리는 오만하지 않고 오만할 수 없는 이들이라는 문장이 무슨 뜻이었는지, 뒤늦게야 손에 닿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어째서 저를 채근하듯 들렸는지도.

  "춥지는 않아?"

  "잡은 만큼은 따스하니 괜찮아요."

  "감기에 걸리면 안 될 텐데."

  "하지만 나은 후로는 조금 더 따스해 지겠죠."

파도는 점점 깊어져 허리를 감싸왔다. 뒤늦게 걷은 만큼의 손길이 무색하게 옷자락이 가득히 젖어들어 본래의 색마저 깊어진다.

 예전에는 미안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는다고 약속해 줄 수 있어?

 엘리언이 저에게 무언가를 바라다니 드문 일이군요.

 지금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네가 등불을 덮지 못하던 나날의 시선이 떠올랐다. 지금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등불을 덮어 가려져 버리면 정말 영영 뒤를 돌아보지 못할 것만 같아서. 

 약속할게요.

나는 네 남겨진 손을 잡지 않은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눈시울에 소금기가 차올라, 열감이 가득하다.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여전히 샛별처럼 붉으리란 사실은 보이지 않아도 당연하다. 엘리언, 여기는 바다예요. 포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얇은 파도를 건너 다가오는 발걸음은 짧다. 그러니 아주 젖는 것도 어찌보면 자연한 일이겠죠. 보폭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신발은 이미 오래 전에 떠내려가 버렸다. 또한 우리는 떠나듯 여행하는 이들이니 굳이 발을 감쌀 필요도 없겠군요.

머리 맡에 이고 있는 별들이 너무나 많아서…. 네 언어는 여전히 멀고 희미하며 종종 시선 안에서마저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은데도.

 "저도 그래요."

눈시울이 당겨왔다. 나에게는 이제 팔이 하나밖에 남지 않아 눈가를 가린 당신의 손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그곳에서 공유했고 이곳에서 되짚고자 한 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닌 절박한 삶이었으므로, 당신은 눈가에서 팔을 떼어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넬은 본디부터 그리 태어난 듯이 자연히 엮인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짚었다. 파도의 온기에 물들어 따스하지도 차갑지도 않고 오로지 미지근하기만 한 손길이었다. 제 얼굴을 더듬듯 당신의 낯을 어루만지듯 눈 주변을 문지르다 가만 손을 내린다. 사라진 손 끝이 저릿하지도 않은지, 넬은 여상한 낯으로 언제나처럼 의미 모를 말을 했다.

  "이곳에는 고래가 없으니 다음에는 더 깊은 곳으로 가야겠어요."

엘리언은 얕은 곳에서 숨을 쉴 수 있어 그것만은 다행이네요. 그 말에 당신은 외로움이고 그리움이고 죄 모르던 사람 마냥, 숨을 토해내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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