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on&Ner

안녕히, 건강하시길.

자캐 커플 로그 23.05.10.

365g by 혜윰

BGM: Arcade Fire with Owen Pallett - We're All Leaving

의지란 사람의 뼈대와도 같아 그를 자체로 존재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참 빠듯하게 그려진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결코 꺾이지 않을 선을 지니고 있는 탓인지 멈추는 법마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로지 그만을 위해 숨이 허락된 것처럼 굴었고 오롯이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았다. 의지로서 화하여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이 허락될 몇 되지 않는 선명한 자들마저 처절할 정도로 곧아, 소망하고 갈구하는 자들과도 달리 저를 용서하지조차 않았다.

그러니 당신도 오래지 않아 떠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어디로, 혹은 어떤 형태로 떠나게 될지까진 미처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곳이 어디든 이곳보다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곳이길 바랐다. 저는 본디부터 아주 차갑고 고독할 것처럼 태어나 허락되지 않은 볕이 있다 한들 타인마저 그러길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저는 제 손으로 직접 수의를 걸치는 이처럼 빠르게 모든 모순을 받아들이고 쉽게 의문을 가라앉힐 수 있는 자였으므로. 어쩌면, 정직히 어쩌면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이 어디든 나 또한 머물러도 된다 허락될 장소로 돌아가게 될 결말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몰랐으니.

*

지독하게 긴 계절이 끝을 맺듯 가뭇없이 잃었던 추억이 돌아왔다. 온통 무너지고 불타오르는 것들 사이에서 용케도 어디 한 구석 부서지지도 사그라들지도 않은 낡은 나무 상자는 제 기억에서 그대로 똑 떼어낸 마냥 멀끔했다. 그 탓인지, 혹은 한번 손에서 놓친 것이 돌아오리란 기대부터 하질 않아서인지 도통 실감이 나질 않아 얼이 빠졌다. 얼마간 잃었더라, 잊었더라. 잊힐 수 있던 것들이었나, 그들이. 채 정돈되지 못한 문장이 뇌리를 헤집었다. 말문을 잃고 어설피 칠이 벗겨진 테두리를 쓰다듬고만 있으면 멀지 않은 곳에서 제 손목을 붙들듯 옅은 숨이 느껴졌다. 미처 허물어지지 못한 곧은 손길은 뒤늦게야 시야에 들어왔다.

 그 애는 괜찮아.

 …….

 사실 지금까지 여러 번 전했었는데… 너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더라.

이제는 기억해 줄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말해봤어.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참으로 견고하면서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불안해, 넬은 저도 모르게 상자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바람 같은 숨결이 느껴졌다.

 너에게 고맙대. 네가… 손목을 잡아줘서, 괜찮았다고. 

여느 아이들과 같았다면 쉬이 깨닫지 못했을 종결에 대한 기억은 순간을 거슬러 닿아왔고 그 어떠한 두려움도 당혹도 없이 그저 강압적인 현실을 마주하도록 만들었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독선적이었고 그것은 어린 아이와도 닮았다. 그러므로 언제나와 같은 아침에 넬 아스트라 세라핀은 어떠한 언질도, 가치도 없이 곧바로 뇌리에 파고드는 순수한 정보와 함께 제 존재의 소멸을 향해 남겨진 걸음을 세기로 했다. 그렇게 돌아가기로 했었다.

그렇기에 당신은 어째서 떠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어째서 떠나질 않고 떠나고자 하는 자신을 붙들어 남겨두는지 묻고 싶었다. 입을 다물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렇게 도망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단 변명으로 끝을 맺기엔 우린 이미 너무나 많은 이별을 예비해야 했으며 그러했던 이들이었다. 퍽 달라 보여도 그 누구보다도 같은 이들이 저희인 줄을 당신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결국 되레 찾아오는 도주를 향한 욕구에 마른 입술만 연신 짓씹었다.

네가 달려가기 직전 그 애 손목의 끈 팔찌를 보았단 얘기를 들었어. 뱃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부모가 하루에 한 가닥씩 정성들여 땋는 물건이란 얘기도…. 그래서 자길 구해준 사람에게 주고 싶다더라.

그곳은 언제나 어두워, 본디라면 보이지 않을 별무리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이제야 그것이 저를 보는 당신의 시선이었나 싶었다. 보이지 않을 것을 보려한다면 끝내 자신을 잃게 된다 말했잖아요. 의미모를 말에도 당신은 무던히 웃기만 한다. 분노일까, 혹은 슬픔일까. 저는 끔찍히 화를 내야 할까, 혹은 지독히 침잠해 헤어나오질 못해야 할까. 존재하지 않을 이를 남겨두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고통스럽고 힘든 장소로 걸어가는 당신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할까. 확신은 없었으나 그 가능성을 셈하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어질해졌다.

 엘리언.

 응.

어리숙한 이기심이 기어코 머릿속을 온통 헤집고 있었으나 사고는 그치질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숨이 흐트러진다. 넬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한 온기를 흉내내는 솔직한 손짓을 애써 털어내며 소리 없이 앓았다. 남겨진 팔도, 잃어버린 팔도 도통 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만, 당장이라도 지워질듯 새하얗기만 하던 안색이 떠올랐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던 애원은 무척이나 선명함에도 정작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이곳은 몹시 뜨겁고, 놓쳐버리는 것들은 너무나 많으며, 남겨지는 자들의 울음은 결코 그치질 않는다. 소중한 이를 눈앞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산 채로 온 몸이 쥐어 뜯기는 것보다도 고통스럽다던 고해가 흩어진다. 지나간 시간들이 하얀 눈처럼 쌓여가고, 어설프게 남겨진 온기가 그 무엇보다도 묵직하게 제 몸을 감싸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대답은 없었다. 당신은 여전히 결국 떠나게 될 이의 낯을 하고 있다.

*

잃었던 시간은 흘러간 계절을 되짚듯이 찾아왔다. 넬은 그럴 때마다, 홀로 걷다 외로워져 뒤를 돌아 제 발자국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순례자처럼 가만 숨을 고르고 호흡하는 법을 찬찬이 떠올렸다. 아주 오래 전 배웠던 일들을 뒤늦게 건져내는 작업은 고단했으나 이상하게도 쓸쓸하지는 않았다.

온 몸이 물에 푹 젖은 솜처럼 묵직한 나날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래로 휩쓸려 사라지는 감각이 밀려오면, 이제는 존재하지 않을 팔로 허공에 손톱을 세웠다. 그러면 꼭 약속이라도 한 듯 당신이 곁에 있었다. 그 아이가 저에게 주고 싶었다 말했다는 낡은 끈 팔찌를 한 손에 감고, 제 손목이 있었을 부분의 시트를 꼭 쥔 채로 자신은 늘 여기에 있겠다 대답한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느 상실이 그러하듯 환상처럼 남겨져 전신을 찢어냈을 통증도 그저 머리맡을 가물하니 맴돌고는 사라졌다.

그렇게 막강한 파도가 잔물결처럼 발치를 간질이게 되어서야 넬은 눈을 뜬다. 아주 이른 새벽의 빛이 창틀을 비추기도 했고, 깊은 밤의 어둠이 켜켜이 쌓여 손 끝을 물들이기도 했다. 드물게는 맑고 투명한 오후의 볕이 얇은 커튼을 헤집고 고개를 들이밀기도 했으며 서늘한 오전의 바람이 새로이 피어난 여린 풀꽃의 향기를 몰고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이 있었다. 정말로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우리는 더는 떠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부질없는 기대를 하게 될 만큼 다정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식은땀과 오한으로 차갑게 굳은 목덜미를 돌려 곁을 바라보면, 여전히 곧 떠나버릴 이의 낯이 보여 심장께 어딘가가 쿵쿵 울려대기 시작했다.

 엘리언.

 응.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길은 참으로 다정한데, 어째서 이렇게나 선득히 느껴질까. 넬은 언젠가 건넸던 의문을 다시 물어야만 한다 깨달으면서도 결국 삶의 유예를 택했다. 선을 넘어버린 순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리라는 두려움, 혹은 직시해버린 순간 곧장 떠나게 될 것만 같다는 당혹은 아니었다. 그런 거창한 이유를 들기에 우리는 몹시 다르면서도 결국은 같았으므로.

겁에 질렸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든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었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넬 아스트라 세라핀의 고민은 제 종말이 아닌 남겨질 사람에 대한 걱정이 되었다. 최초의 순간, 제 발로 불사름을 향해 걸어가던 시기에는 결코 하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러니 또한 그렇게 어깨가 무거워졌다. 분명 온전히 부서지지는 않을 이였으나 그것이 곧 꺾이지도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흉터를 자신이 아로새긴다 생각하니 입 안에 솜이 틀어박힌 사람처럼, 이미 죽어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갑갑해졌다.

공연히 혼잣말을 했다. 생이란 본디 이렇게나 뜨겁던 것이었나.

*

어쩌면, 계절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이틀 전에는 폭풍우가 왔다. 물러가고 난 뒤로도 대기에 가득한 수분이 잎새에 맺혀 둥근 바닥으로 떨어졌다. 잃어버린 팔은 여전했으나 목덜미의 흉은 제법 옅어졌단 감각이 들었다. 높은 하늘은 선연했고, 막강하게 부풀어올랐던 어둔 구름은 그 기세를 늦췄다. 조만간 마저 비가 오겠다고 말을 건네자 당신은 눈을 말갛게 뜨곤 그러느냔 대답을 했다.

물어보지 않아야 할 것을 외면하고 대답하지 않아야 할 것을 어설프게 웃어넘기는 나날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삶을 지새도 괜찮을지 몰라. 도망치듯 떠올리고는 문장의 어귀마다 숨을 토해냈다. 이미 찾아온 상실과 이어 찾아올 이별이 사람을 이토록 애달프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런 형태로 알고 싶진 않았는데.

쏟아지는 빗소리는 자장가를 닮았다. 제가 살아내던 곳은 하얀 눈이 나릴 뿐 결코 비가 내리지는 않던 장소임에도 어찌 그리 느끼는지는 여전히 알 도리가 없었다. 기약 없이 다정을 베푸는 손길이 닮아서 그럴까.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가만 창 밖을 바라보고만 있자 창을 열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저보다는 크고, 손가락 사이로 굳은 살과 함께 자잘한 흉터가 자리잡았지만 곧게 뻗어 견고하고 균형 잡힌 손이었다. 넬은 이제서야 제가 엘리언 이스마일 오르피어스란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던 순간, 그는 무너지지 못할 만치 몹시 다정하면서도 결국 상처입지 않을 만큼은 무지하지 못하리라 깨달았다는 사실을 돌이켰다.

  "엘리언."

  "응."

흰 시트 위에서 움칠대던 제 손 끝을 부드럽게 잡고, 손을 펼쳐 잎새를 타고 흐르는 빗줄기에 담그도록 한다. 이전과 달리 가늘고 무딘 물방울은 금세 손아귀에 고였다. 여전한 낯으로 어둔 하늘을 바라보는 남자를 올려다 본다. 손가락을 옅게 펼치자 고인 물이 손목을 타고 옷깃을 적셨다. 당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수건을 들어 제 손과 손목을 걷어내 닦아주었다. 사소한 언어에도 겸손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처음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 기억하나요?"

여느 이였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아주 짧은 틈새로 멈췄던 손길이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넬은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제 심장께 어딘가를 다소 생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당신이 제게 했던 말은 기억하나요."

그곳은 괴로웠다. 모두가 괴로워하며 원망했고 슬퍼하면서도 고통스러워했다. 자신의 고통을 타인을 향해 겨누고 휘두르는 행동은 결코 답이 될 수 없음을 이미 알면서도 도저히 멈추지 못하는 이들만이 서로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는 장소였다. 사랑하기 위해 증오하고 증오하기 위해 사랑했으며 살아가기 위해 죽어가고 죽기 위해 살아야만 하는 이들이 거멓게 바스라져 모든 숨을 메운 것만 같았다.

 매캐한 탄내와 비린 피내음, 살을 태우는 화약의 향과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 오로지 붉고 검은 대지와, 망가진 것들만이 가득한…. 푸르고 선연한 이가 그토록 어울리지 않는 곳도 없겠지.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예요. 이미 여러 번 들은 말이겠지만, 가능한 한시 빨리 떠나는 편이 좋아요.

그 때, 당신은 어떤 낯을 보였던가. 다만 제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단 기억만이 파편처럼 남겨졌다. 

  "기억 나."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들 무언가를 잃지 않았을까. 상실이 없는 삶이란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그러나 그 사실을 언제고 곱씹기에 우리들은 너무나 작고 어렸으며 끝내 연약했다. 넬은 마지막 순간 그들이 자신에게 내밀었던 말이 무엇인지 기억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내고 싶다는, 생을 향한 욕구만이 저를 밝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 오늘은 이만 잠에 들자."

*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난잡하게 깨져 흩어진 유리 조각을 긁어모으는 감각이었다. 기억이 닿는 곳은 형태조차 불분명했고, 군데군데 날카롭게 벼려진 선이 손 끝을 베어냈다. 누군가의 생이 죄 뒤집어지는 꼴을 망연히 지켜보고만 있자니 숨이 가빠오고 속이 뒤엉켰다. 흉터조차 남겨지지 않았을 빈자리가 뒤틀리듯 망가졌다. 분명 저곳에 누군가 있었는데.

한참 고개를 박은 채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이 느껴졌다. 잔잔히, 그러나 다급한 손아귀가 제 상체를 돌려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예전보다 짧아진 탓인지 도통 잡히질 않았다. 부유하는 눈발을 헤치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려 하면, 상대가 먼저 제 이름을 불러왔다.

  "넬."

상처입은 동물을 달래듯 호흡을 부드러이 내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아, 해치지 않아. 긴 세월 동안 숙련된 사고는 긁어내듯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한 근거를 갈구해댔으나 도통, 그러니 전혀, 도무지, 보이는 것이 없었다. 들리는 것이 없었다. 느껴지는 것만이 넘칠듯 가득해 오히려 담지 못하고 쏟아지고만 있어 넬은 그저 그의 호흡에 따라 제 숨을 맞추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무래도 꿈을 꾼 모양이었다. 심장이 엉망으로 날뛰고 시야가 어지럽게 명멸하며 전신이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경련하는 것을 보아하니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이른바 악몽을 꾸었을 것이다. 팔자도 좋지. 부질없는 꿈을 꿀 정도로 미련을 가졌을까, 나는. 짧은 관망과 함께 대답의 언어를 고른다. 당신은 몹시 다정하면서도 영리하니 의미는 없겠으나 스스로에게 그렇다 말해야만 했다. 괜찮아요, 진정했어요.

  "어, 어머니가. 방금."

필사적인 독촉에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하게도 침묵에도 가까운 비명이었다. 자신은 방금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제가 지금 머무르는 장소는 하얀지 혹은 어둑한지. 그 어떤 형용보다도 견고하고 적막한 자기 부정에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경계 사이로 산란하는 별무리가 너무나 가득해 되레 눈 앞이 아득하다.

새하얀 눈보라는 마치 파도처럼 난만이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발치로 밀려오는 물살은 포말로서 알음알음 깨지며 제 숨을 틀어막았다. 밤이라서 그럴까, 당신의 낯은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앳되다. 눈가의 흉터가 언제 생겼는지를 물었어야 했는데.

 어째서 무엇도 말하지 않니?

말을, 말을 했어야 했는데. 울음이 덩어리져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제서야 제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 언제부터.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 전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당신이 돌아왔으면 했다. 그 춥고 외로운 곳에 홀로 남고 싶지 않았다. 붙잡은들 결국 떠나야 한다 해도 나는 당신이 가지 않았으면 했다. 알고있다 한들 죄 모르는 것처럼 굴고 싶었고 알아챘다 한들 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매달리고 싶었다.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

 아니야, 기다리기만 하는 건 무서워.

 떠나지 않고 얌전히 있을 수 있지?

 싫어, 나도 같이 가.

 외로워 하지 않을 수 있지?

 아냐, 나 혼자는 외로워.

들어야…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그들을 모두 들어야 나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아서. 당신이 내가 있음을 알려 주었으므로 더는 곁을 지켜 주려 애쓰지 않아도 저 홀로 영원히, 존재할 줄 알았는데. 당신이 남겨준 기록이 있으므로 더는 외롭지 않게 되리라 여겼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나는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기억하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스스로를 향한 의문과 책망이 마디마다 뭉그러진다. 이곳은 너무나 춥고 외로워서…. 네가 꼭 그저 풍경의 어드메인 줄로만 알았다던 농이 떠오른다. 눈더미가 쌓여있어 봄이라도 찾아오면 곧장 녹아 버리겠구나, 싶었다고. 차라리 그랬었다면 당신은 끝내 나를 걱정하지 않았을까? 마지막까지 당신의 손자가 아닌 딸로서 살았다면 당신은 괜찮았을까? 눈물이 크게 덩어리져 뚝뚝 소리를 내며 침구 위로 떨어졌다. 손 끝이 차갑게 달아올라 벌벌 떨렸다. 우스웠다. 나는 이제 괜찮아야만 하는데. 

 괜찮아요.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아. 

말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 옳은지 무엇인지, 온전히 존재하고는 있는지, 나의 것인지 혹은 타인의 것인지 그저 어딘가에 반사된 상일 뿐인지 알 수가 없는데. 이것을 당신에게 전해도 될지 나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는데.

하지만 이미 모두가 끝난 이야기였다. 그들은 이제 이곳에 없고 저는 상실된 채 홀로 남겨졌다. 본래 남겨진 이는 떠나간 이에게 그 무엇도 전할 수 없는 법이었고, 그러니… 이젠 저 역시 차라리 남겨 두고 가는 이가 되고자 했다. 본디부터 아주 차갑고 고독할 것으로 태어나, 남겨질 것은 있어도 남겨질 이는 없었으므로.

  "넬."

그러니 물어야만 했다. 당신은 어째서 떠나갈 이의 얼굴을 하고서도 제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하는지. 그 말을 그리도 굳건히 지키고자 하면서도 왜 자꾸 끝내 꺾여버릴 낯을 하고 있는지. 어린 아이처럼 흐느껴 울면서도 묻고자 했다. 이제 더는 유예할 수 없다는, 체념에도 가까운 피로가 몰려온다.

  "왜…."

제 목소리는 어디든 뭉그러지고 번져 제대로 들리는 것이 없었다. 어쩌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어 지금껏 그리 되었을지도 모르지. 제 눈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거부하기에는 함께 지내 온 시간이 너무나 길었고, 넬은 기어코 단념해야 함을 깨달았다. 당신은 무너지지 못할 만치 몹시 다정하면서도 결국 상처입지 않을 만큼은 무지하지 못했다.

오열을 참지 못해 제 얼굴을 엉망으로 헤집자 서로의 손이 본디 그러했던 것처럼 엮이며 주변을 어둡게 만들었다. 밤하늘을 닮은 온기는 그곳처럼 새하얀 빛무리로 가득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던 시간들처럼, 켜켜이 쌓인 밤과 그 장막이 시선을 가리고 있었으나 더는, 이렇게… 이렇게, 오로지 갈구하며 살아가기엔, 삶이 너무나 버거운데….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계속,"

그럼에도 살아가고 싶게 하는지.

*

어쩌면, 답을 알고 싶어서가 아닌 그저 답을 바라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는 감상이 하나. 그럼에도 그 숨이 무게를 두고 찾아와 당신에게 나 또한 그저 수많은 시간들 중 하나일 뿐만은 아니어서 다행이란 안도가 더해진다. 그토록 체념하고 단념했듯, 자신은 결국 당신에게 어떠한 남겨질 혹은 남겨둘 이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네가… 그랬었지."

언뜻 빛이 비치는 상과도 닮은 시선으로, 그는 운을 띄웠다. 머리맡에는 여전히 빛무리와 파편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중 어딘가는 우리의 외로움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언은 여느 때의 제가 그러듯 시선을 잘게 내리깔았다. 그러나 저처럼 단어와 의미를 마주해 고르는 것과는 달리, 그리함으로써 어딘가에 가까워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검푸른 파도에라도 잠긴 마냥 온 세상이 고요하고 찬란했다. 넬은 아주 거대하면서도 차마 갈무리하지 못할 만치 깊은, 오랜 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곤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의 예의가 더해진 어조가 아닌, 곁에서 속삭이듯 잘게 가라앉는 말이었기에 더 그럴까.

어둑한 밤 너머로 세계가 서서히 눈을 뜨는 광경을 보는 일은 그곳에서도 드물지 않았다. 그 장소에서 지새는 누구든 어둑함이 아닌 밝음을 동경했고, 삶과 죽음은 어린 아이와도 같아 어느 곳이든 어느 때든 가리지 않고 양껏 제 맘에 드는 이를 찾아갔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이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곳은 언제나 한때 다정했을 공간이다. 어쩌면 모든 곳이 다정했으나 죽음과 상실이 스쳐지나간 까닭에 그 다정을 잃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숨을 고르던 장소 또한 그런 곳 중 하나였고, 끝내 짓밟혀 잃은 곳에 쏟아지는 자연한 볕은 되레 그 상실을 되짚도록 했다. 그것이 영 마음에 차지가 않아, 그렇게 잃어버린 세상을 오히려 가득 채우고 싶어서, 혹은 모든 이들이 침묵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계가 마뜩잖아서. 그래서 말했을 것이다.

  "네가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어딘가에는 그 끝을 헤아리기도 전에 온 세상을 가득 채우듯 자리하는 것들이 있고, 멀지 않은 장소에 닿을 볕은 분명 흐드러지는 갈대밭에 쏟아질 것이라고. 그리 금빛으로 일렁이는 세계를 본다면 꼭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선명하고 아름다울 테니 언젠가는 보고 싶다고. 

  "나도 보고 싶었어."

비록 이곳이 저희를 너무나 외롭게 만든다 하더라도, 분명 어딘가에는 무뎌지지 않아도 될 곳이 있다 믿는 것은 잘못이 아니므로.

  "그러니까 함께 보러 가자."

그래서 네가 가지 않았으면 했어. 심장 어드메를 둔중하게 두드리는 감각을 채 실감하기도 전에, 넬은 아주 뒤늦게야 잠에서 마저 깨어난 사람처럼 연신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당신은 계속해 길을 잃은 아이와도 같은 낯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길을 잃어버린 탓에 어디로든 돌아가고 싶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그렇게 잊어버렸던, 보이지 않아 미처 있는 줄도 몰랐던 애달픈 무언가가 뒤늦게야 손 안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제 눈에서 흐르는 이것은 연민이 아니다. 그따위 감상이 용납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참지 못할 만치 몰려오는 격정에 앓듯이 울기 시작했다. 몸을 얽매어 형체를 유지하도록 만들던 무언가가 탁 풀린 듯 묘한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동시에 육체를 떠나 어딘가 먼곳에 존재하고 있을까 여기던 영혼이 돌연 찾아오기라도 한 양 형용하기 어려운 그리움이 들끓었다.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그저 다정해지고만 싶은 시간들이 밀려온다. 그것이 저를 향해서인지, 당신을 향해서인지 구분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마지막 순간에조차 바라지 않겠다 되뇌이던 얄팍한 고집들이 무너져 내린다. 어린 아이처럼 제 낯을 엉망으로 감싸며 한층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면, 곁으로 다가와 뺨을 감싸는 손길이 참 따스해 계속 그렇게 울어버리게 된다.

  "…이상하게도 난 항상 네가 우는 모습만 보게 되는 것 같아."

항상, 이라는 단어가 묵직하게 심장을 파고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듣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너였다. 당신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당신일 리가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 수밖에 없을 품에 젖은 얼굴을 파묻으면서도 결국 미안하다는 그 한 마디를 차마 내뱉지 못 했다. 다만 제 몸을 감싸오는 팔에 힘이 가득해 저 역시 네 옷깃을 강하게 움켜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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