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on&Ner

밤의 아이들

자캐 커플 로그 23.12.30.

365g by 혜윰

BGM: C418 - Wet Hand (Cover)

그리고 모든 것이 아주 고요했다. 푸르고 하얀 빛은 나뭇잎 사이로 알알이 박혀 잔물결처럼 넘실댔다. 쏟아지는 숨결이 아득해 먼 꿈이 아니었음에도 머리가 멍하다. 새벽의 검푸른 장막, 오래된 노래, 속삭이는 생명의 온기, 잘게 엎질러진 희미한 그림자…. 창틀에 손을 짚어 경계를 더듬는다. 여린 기원들, 잠을 청하는 연인들, 국경선과 바다, 수천의 도시와 덜컹거리는 기차, 그들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빗방울에 담겨 손 끝에 맺혔고 나는 이제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차고 깨끗한 존재들을 바라본다. 그렇게 눈을 뜬다.

드러난 이마가 차가웠다. 다만 춥지는 않았다. 넬은 양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뺨을 감싼 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한참을 숨을 고른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어둠은 여전히 아득하고,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마침내 당신이 떠오를 때까지. 그리고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로 내려선다. 바닥에 발을 딛으면 주변은 아주 넓고 먹먹하고 얌전했다. 비가 고이지 않은 창문 너머에는 새하얀 눈을 닮은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목적 없이 정적 속을 서성인다. 움직일 때마다 몸을 감싼 커다란 담요가 땅에 끌리며 사각이는 소리가 났다. 무한한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는 서서히 형체들을 짚어낸다. 창문을 반쯤 가린 하얀 커튼, 두 사람 몫의 베개, 어중간하게 무너진 침대보, 손길이 닿은 만큼 민둥하게 닳은 탁자, 직접 깎아 만들었을 나무 잔, 그리고….

"내 상자."

책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진 낡은 나무 상자. 숨을 살풋 삼킨다. 살그머니 책장 앞으로 다가가 담요를 뒤집어 쓴 채 까치발을 한다. 상자는 아슬하게 손 끝이 닿을 위치에 놓여 있다. 책장에 몸을 기대고 팔을 깊이 뻗는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 너머에 칠이 벗겨진 테두리가 비쳐보였다. 그제야 조심스레 손등에 닿는 온기가 있어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어느새 문을 열고 돌아온 당신은 한 손에 머그잔을 든 채 나무 상자를 제 손 안에 감싸이는 곳으로 밀어주었다. 상자를 손에 들고 당신을 올려다 본다. 푸른 눈매 사이로 켜켜이 쌓인 빛망울은 꼭 별빛 같다.

"안녕, 좋은 밤이네."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에요."

당신은 그리운 사람을 보듯이 나를 바라본다. 낡은 나무 상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품에 꼭 끌어안는다. 상자는 제가 알던 것보다 무겁다. 많이 무거워요. 다소 생경한 목소리에 당신은 차오르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젠 떠나지 못하겠어.

"이곳의 저는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나요?"

당신이 손을 뻗어와 나도 손을 뻗어 잡는다. 그 행동이 몹시나 자연했다는 것을, 당신의 품에 안기고서야 깨닫는다. 넬은 저를 안아올린 엘리언의 어깨에 한 팔을 감고 목덜미에 뺨을 대었다. 피가 흐르는 만큼 살아있음을 말하는 온기가 차갑게 식은 뺨을 데워왔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만 눈을 감으면 당신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귓바퀴 너머로 넘겨주면서 속삭였다.

"글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떠나지 않았으면 했어. 그렇게 그림처럼 웃는다. 나는 그렇군요, 대답하려다가도 결국 까닭 없이 입을 다물게 된다. 이상하지. 이곳의 고요함은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포근하다. 따뜻해요. 되짚듯 말하자 당신은 여전한 미소를 짓는다.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목소리가 참으로 먹먹하다는 것을 말해야 할까. 머그잔이 탁자 위에 놓이는 소리는 아주 희미하다. 희끗한 인영에 손을 뻗으면 당신은 다시 손을 잡아왔다. 매미 날개처럼 작고 얇은 손톱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다.

"이곳의 저도 당신이 떠나지 않았으면 했나요?"

지금의 저는 너무 어려서 잘 모르겠어요. 속삭이는 목소리는 숨기지 못할 만큼만 가늘다. 광막한 공간을 울리고 울려, 마침내 커다란 무게로 되찾아와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다. 당신은 대답이 없다. 목덜미에 묻은 고개를 들어 낯을 살펴보기에는 당신의 품이 너무나 따스해 벗어나고 싶지 않다. 지나간 시간들이 되찾아오면 자연히 깨닫게 될까요. 어쩌면, 이미 깨닫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상이 하나. 두 번째는 그럼에도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다.

머그잔에서는 단내가 난다. 밀크티를 가져왔을까.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담요를 끌어당겨 덮어주는 손길에서도 단 향이 났다. 졸려? 시선 너머, 서서히 옅어지는 하얀 김을 바라보고 있으면 당신이 말을 걸어왔다. 졸리지 않아요. 투정을 부리듯 말하곤 어깨의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거 알아? 넬은 생각보다 엄청 거짓말쟁이야. 작게 키득거리며 귓가에 속살대는 목소리는 꼭 숲 속의 비밀 기지를 찾으러 가자는 장난꾸러기의 웃음소리를 닮았다. 졸리지 않아요. 넬은 엘리언의 품에 이마를 문지르면서 재차 고집을 부렸다.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고 쓸어내리는 손길은 거부하기에는 너무 막강하다. 당신이 나를 위해 따스한 밀크티를 가져와 주었으니,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맛있게 마셔야 하는데.

엘리언. 응. 자신을 품에 꼭 끌어안고 몸을 흔드는 동작이 몹시 능숙했다. 이렇게 안고 토닥여주면 다들 금방 잠들어. 그 목소리는 언제 들었더라. 혹은 언젠가 듣게 될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있나요? 응. 품에 닿지 않아 여즉 차가운 한쪽 뺨을 문질러주는 손길에서는 여전한 단 향이 풍겨온다. 언제까지요? 계속 있을게. 쭉 바라오던 영원이라는 말은 그만큼 희끗하고 연약해서, 나는 기어코 어리광을 부리고야 만다. 정말요?

"네가 허락해 주는 만큼, 언제까지나."

*

심장이 두근거린다. 꼭 아주 오래도록 물 속에 잠겨 숨을 참고 있어야만 했던 사람처럼. 넬은 담요 속에서 기도하듯 맞잡은 양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여즉 눈을 감은 채 찬찬히 심호흡을 한 후 숫자를 세었다. 셋, 둘, 하나… 품에 가득 끌어안고 있던 낡은 나무 상자가 사라졌다고 깨달은 것은 순간이다. 눈을 반짝 뜨고 뛰어내리듯 침대에서 벗어난다. 하얀 담요가 날개처럼 넓게 펼쳐지는 만큼 시야는 희게 스민다. 하얗게 갠 아침의 파편 같은 찰나, 새들의 샛노란 지저귐, 시냇물과 재잘거리는 수풀들, 그리고 그 사이로 자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당신이….

"엘리언."

"잘 잤어?"

"상자가 사라졌어요."

그렇게나 무거웠는데. 햇볕 속 부드러이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 안에서 더듬더듬 언어를 자아내자 당신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양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니, 어쩌면 죄책감 어린 낯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발자국 늦게 들었다. 어깨에 닿았던 손길이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뺨에 닿는다. 한참을 온기에 문지르고 기댄 탓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언제나의 손길로 귓바퀴 너머로 넘겨준다. 제 뺨이 작아진 탓인지 손길은 한참 남아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미안해, 내가 놀라게 해 버렸네. 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속살거려와 넬은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마냥 끌어안고 용서해 줘야만 한다 느껴 버린다. 괜찮아요. 당신을 끌어안고 가늘은 목소리로 대답해도 그는 대답이 없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왜 괴로워할까. 숨결처럼 새어나온 의문이 희끗하게 꼬리를 끌었다. 그것은 손을 뻗어 잡아내기도 전에 금방 자취를 감췄다. 시선을 갈음하는 동안 당신은 이번에도 나를 품에 안고 걸음을 옮겼다. 엘리언, 저 혼자서도 걸을 수 있어요. 옷자락을 꼭 잡고 말한다. 밀어내야 한다 느끼면서도 밀어내지 않는 까닭은 영원토록 알 길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듯 서성이던 시야는 온기에 붙들렸다. 그게 마냥 싫다고 느껴지지 않아 곤란했다.

"그대로 잠들면 네가 다치거나 상자가 망가질까봐 걱정이 됐어."

고작해야 몇 걸음을 내딛은 당신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넬은 엘리언의 손길을 따라 땅에 발을 디딘다. 앞을 한번 살펴봐 줄래? 엘리언은 제가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앞서 걸어 나아가기 전, 자신의 손을 잡고 등을 감싼 이를 올려다본다. 아주 침울해 보이던 낯은 온데간데 없고 언제나의 다정이 은하수처럼 볕을 밝히고 있다. 넬은 어째서인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넬? 되묻는 목소리는 파문에 가깝다. 밤길 아래 보았던 당신의 낯은 그토록 고요했는데. 지금은 어째서 희미한지 모를 일이다. 수많은 사소한 은유들이… 다만 괜찮다 하여도 그것을 거짓말로 알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넬은 앞으로 나아갔다. 새벽별 아래 보았던 넓고 먹먹하고 얌전하던 공간은 이제 볕 아래에서 작은 솜뭉치처럼 부드럽고 소란스럽다. 손을 뻗어 나무 상자가 존재하던 책장을 어루만지던 넬은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제 무릎만치의 높이에 삐뚤빼뚤한 선으로 그린듯 뭉글한 형태의 나무 발판이 자리잡고 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곤 손을 뻗는다. 만져봐도 될까요? 두근거리는 목소리에 당신은 되레 안도한 낯이다. 물론. 밤새 사포로 문질렀는지 매끈한 감각에 손 끝이 간질간질하다.

"발판."

"이러면 혼자서도 상자를 꺼낼 수 있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발판 위로 올라간다. 완연히 올라서자 시선은 나무 상자가 담긴 곳과 꼭 알맞았다. 언제 제 키를 쟀을까. 이 순간의 자신은 여즉 눈 속에 파묻혀만 있어 엘리언을 모르는데.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나를 모두 아는 것만 같다. 그 사실에 심장의 어딘가가 묵직하게 자리잡는 감각을 느낀다.

"꺼내지 않아도 괜찮아?"

"네."

곧장 그러했던 것처럼 손을 뻗지 않아 당신은 의아한 모양이다. 넬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의 제 무게는 아니니까요. 그러니 난 더는 안아들 수 없어요. 책장 속 낡은 나무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한다. 등 뒤의 엘리언은 잠시 숨을 내쉬더니, 안심한듯 혹은 자연한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주 대답했다. 그렇구나.

*

정말 이곳의 저랑 계속 지내고 있었나요? 넬은 오솔길 위의 도토리를 하나 주우며 물었다. 응. 엘리언은 언제나의 어조로 다정히 대답하고는 바구니에 넬이 주워온 도토리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도토리가 많아요."

"다른 동물들도 먹어야 하니까, 많이 가져가면 안 돼."

"다람쥐가 있나요?"

"사슴과 새도 있어."

"신기해요."

제가 지내던 곳은 온통 하얗기만 하거든요. 그리 말하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수풀을 헤쳐나간다. 굳은 살과 함께 자잘한 흉터가 자리잡은 손은 크고 따스했다. 제 머리가 전부 들어갈 것만 같아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엘리언은 귀여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구니에 올라탄 도토리들이 실로폰을 연주하듯 데굴데굴 구르며 또각거리는 발소리를 냈다.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가득한 것들을 시선으로 쫓다보면 그만 무엇도 잡지 못하고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색이 가득할 줄은 몰랐어요. 건드리면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던 옹달샘은 파도처럼 일렁였다. 손이 물에 푹 젖자 당신은 곁으로 다가와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 주었다. 이만큼 음이 가득할 줄도 몰랐고요. 풀숲을 헤칠 때마다 질 좋은 비단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차박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슬이 맞닿은 만큼 흐드러지는 향에 넬은 엘리언의 손을 이정표처럼 붙잡고 길을 헤멜 때마다 되돌아 보았다.

"제가 이곳에 있는 만큼 본래의 제가 외로워하면 어떡하죠?"

시냇물 위를 발 끝으로 더듬으며 걸어가던 넬이 조용히 읊조렸다. 엘리언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도 느릿하게 감았다 뜨더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를 먼저 물었다. 넬은 앞서 걸어가며 제가 걸어갈 길을 보여주던 엘리언이 뒤를 돌아보자 저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유리조각을 닮은 물결이 포말처럼 발목을 적셔와, 돌아가면 양말을 꼼꼼히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짤막하니 스쳐지나갔다.

"무엇이든 항상 곁에 있고자 하니까, 이곳의 저는 외로운 사람인 줄 알았어요."

두 사람 몫의 베개. 누군가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담요. 비어버린 팔 만큼 채워진 옷자락. 누군가만이 아닌 자신을 쓰기 시작하는 문장들과… 스스로를 말하는 단어 속의 누군가. 그러니 당신을 깨닫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상자의 무게는 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그것이 주어졌을 누군가가 저를 대신하여 눈이 가득한 오두막에 홀로 앉아 있으리란 사실을 깨닫기도 자연한 일이었다.

돌아가면 양말을 꼼꼼히 말려야 하므로, 그러니 우리는 영원한 궤적을 걷듯 헤어지고 다시 만날 것이다.

얼굴을 만져봐도 될까요?

나는 당신을 바라기에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 당신은 나의 부탁에 가만 시선을 내리깔고는, 무릎을 꿇고 차고 깨끗한 시냇물에 발을 담궜다. 당신은 옷자락이 가득 젖어들어도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사람 마냥 눈을 감았다. 저의 시선이 당신의 시선과 꼭 알맞았다.

"왼쪽 눈가에 흉터가 있어요."

"이젠 아프지 않으니 괜찮아."

"앞으로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가 찾아와 준다면 계속 아프지 않을 거야."

"코가 오똑해요."

"아버지를 닮았다던가, 그런 얘기를 숙부님께 들은 것도 같네."

"항상 웃고 있으면 피로하지 않나요?"

"힘들 때는 웃지 않기도 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내가 돌아가고 다시 돌아와도, 당신을 만났던 이 순간의 나를 기억해 줄 건가요? 그 말에 당신은 어리던 시절 오래도록 펼쳐 보았던 동화책을 읽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운 사람이 내가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항상. 오두막으로 비치는 볕이 가득해서, 이제는 돌아가도 예전만큼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는 까닭 없는 확신이 느껴졌다.

조금씩 졸려온다는 말에 당신은 나를 안는 대신 업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당신과 오래도록 손을 잡았으므로 이번에는 그렇게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갔다. 우리가 살아내던 장소로. 나는 다시 당신을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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