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허상이 아닌 현실이라

미정->심다민 답변로그

자캐들 썰 by 제이
2
0
0

Take 0.

사람들은 말한다. 허상에 빠지지 말고 현실을 살라고. 그러면서도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사랑이라는것을 추구하다니. 그 감정의 끝에는 무엇이 남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사랑을 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그녀는 정의 내렸다. 그 감정은 살아가면서 필요 없는, 현실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장애물이라.

추상적인 허상을 추구하는것은 현재로도 족했기에, 확실한 것을 원하였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그 불확실한 감정은 더 이상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어울리지 않았었다.

미정,그녀는 기억력이 좋았다. 자신이 관심있는 것이라면 사소한것까지 모두 기억할 정도로. 다른말로 하자면, 그녀는 자신이 관심 없는 것과 관련하여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다민의 사소한것마저 기억 하고 있을까. 어째서 다민이 했던 모든 말과 행동, 심지어는 스쳐지나가듯 말하였던 이름과 번호.이미 영상으로 남아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그 모든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Scene 1

Take 1.

시작을 회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꿇으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왜 너는 여유로운 태도를 취했던 것일까. 당황스러웠다. 그렇기에 손을 뻗어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 감촉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이 순간이 더욱 오래 이어지길 원했었다.

이후 대화는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리 기억에 남지 않는다. 당연한 결과이다. 당시의 나에게 너는 영화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되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한계이다. 그래도 몇가지 기억을 끄집어 내보자면,

너는 영화를 좋아하였고 나처럼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면모를 보였다. 영화에 대한 식견이 달라 이에 대해 이야기 하는것이 퍽 재미 있었다.

이런 무미건조한 결론뿐. 기억의 필름은 다음 장면을 향한다.

Take 2.

다음 장면 역시 몇가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잠에 취한듯한 나긋한 목소리, 그 목소리로 나에게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했던 말. 처음 듣는 영화일것이 분명함에도 어떠한 내용인지 물어보지 않는 그런 태도가, 꽤 마음에 들었다.

감독이라고 말하자 생기가 생기던 그 모습 역시 기억에 남는다. 영화를 어찌 찍을 것이냐고 묻는 그 모습이,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자처럼 보여서, 더욱 알아가 보고 싶었다.

분명 꿈이라고도 하였던것 같다. 현실이라면 너무 이상하다고, 꿈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너의 모습은 마치 내가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와도 같아 보여서. 그때부터는 너에게 관심이 생겼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전에도 느꼈던 그 동질감은, 과연 착각이었을까 아니었을까.

Take 3.

너가 더욱 궁금하여,한마디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어떠한 말을 할지 궁금했지만, 상관 없었다. 어떠한 말을 하든, 내가 만들 영화에는 너의 모습이 들어갈 것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길줄 알았던 예상과는 다르게,성실히 임해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대사는 중요치 않았었다. 처음으로 보는 너의 미소가, 영상에 그대로 담기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줄 알았구나. 언제나 보던 그 변화없는 졸려보이는 표정이 아닌 미소라는 지극히 평범한 미소를 지을줄 알았구나.

Scene 2

Take 0.

사람들이 모두 혼란스러워 한다. 어떤 자들은 시체를 보았고,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자들은, 알 수 없는 말이나 내뱉는다. 현실감 따위는 없었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길 원했다. 다시 한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으로 알 수 있지 않던가, 허상에 빠지고자 하는 자는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 때의 절망감을, 이미 뼈져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이번에는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Take 1.

기분이 어떤가, 그런 태평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건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너의 모습이 그대로 캠코더에 담겼다. 첫만남과 같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과 만남에 너는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었다. 누군가는 분명 차분해 보인다고 말할 너의 태도가, 어째서 이번에는 좀처럼 여유로워보이지 않았던걸까. 그래서 던진 말이었다. 너보다는 괜찮아 보인다는, 그런 소리를 던진건.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전과는 확연하게 대비되는 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이곳을 나가야 한다고 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 같아 보이진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그 단어를 입에 쉽게 올릴 수는 없는 법 아니던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나더러 죽지 말라고 하였다.

그 말에 혼란이 왔다. 과연 너는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만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나에게 죽는 것 보다 사는것이, 더 낫다고 그리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너는 내가 죽지 않기를 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네가, 그런 말을 했다는건, 내가 너에게 단순한 엑스트라, 그 이상의 의미라고 생각해도 되는걸까.

다음 주제는 역시나 영화였다. 너는 나에게 왜 촬영을 하냐고, 정말로 나가서 영화를 만들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하였다. 그 대답을 하며 살며시, 사심이 나왔다. 너를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를 찍고 싶다고. 그 방법을 통해 너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그 목소리를 한번이라도 더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뱉었다. 내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달라. 답변은 긍정적이었다. 예상도 못한 수확을 얻기도 했다. 영상으로 찍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기억할 필요 따위는 없었지만, 그래도 답변을 기억했다. 너의 이름과 번호를 머릿속에 넣었으며 그 말을 하며 느껴지는 목소리의 높낮이, 향기, 시선의 이동. 사소한 모든것을 기억했다.

화면을 바라보는 너를, 캠코더를 통하여 봤다. 영상은 여기서 끝이다.

Scene 3

Take 0.

그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어둠뿐. 그때의 감정은 미정,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을 터이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을 못한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원래의 미정,다민을 만나기 전의 미정이라면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현실이 아님을 인지하는 것과 이를 받아드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기에, 어쩌면 기뻤을 것이다.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갇혀, 잠시간 현실에서 외면 할 수 있었을테니.

Take 1.

캠코더의 전원을 켜봤다. 역시나 작동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비었다. 한동안은 생각을 비울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현실에서의 복잡한 생각들을 버리고, 좋은 기억만을 떠올리고 다시 한번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 비운 기억의 공백 속, 떠오르는건 붉은색의 머리였다. 이어 진한 보랏빛의 눈동자가 떠올랐고 부드러운 얼굴 역시 떠올랐다. 이어 늘어지는 말투가 떠올랐고, 산뜻한 장미향까지도 떠올랐다.

어느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너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아서, 기억이 멋대로 흘러가게 두었다. 손에 들고 있던 캠코더는 더 이상 무의미했다. 기억이 이리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너라는 존재를 그렸다.

알고 있었다. 내가 관심이 없다면 이리 사소한 것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너에게 관심이 있다는걸 부정하는건 기만이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건 사랑인걸까, 아니면 다른 류의 관심인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 역시 없었다. 어느쪽이든, 확실한건 내가 네 곁에 있고 싶다는 사실이었다.

Take 2.

사람들은 매순간 죽어간다. 예외따위는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과 같이 죽어갈 반려를 찾는다. 그걸 연애라는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지 않았던가. 연애를 안해본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 감정이 더욱 혼란스러웠다. 전에 연애했던 이들에게 느꼈던 감정과 일치하지 않았기에. 하지만 네 말에 확신이 섰다. 이건 어쭙잖은, 가벼운 관심 따위는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할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가 이름도 안말해줬었니 그대야? 앞으로는 미정이라고 부르게. 다른 방법으로 불러도 좋고. 계속 시간을 같이 보낼려면 이정도는 알고 있게. 그러니깐...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다민아? 너 고백 받아준다는 소리야 다민아. 나도 좋아해.”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