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18주차 주제 : 온통 붉은색이었다.
목표 글자수 : 5300/5000
온통 붉은색이었다.
하늘 위, 기울어지는 붉은 노을 탓에 세상은 종말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지. 이는 종말이라 부름이 옳았다. 인간 같지 않은 무공을 휘두르는 천마, 쏟아지는 마교도들과, 불타는 세상, 산처럼 쌓인 시체들…….
시산혈해라 하는 옛말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소혜는 불타오르는 세상을 본다. 머리로 붉은 피가 주륵 흘러서, 세상이 붉은 것이 노을 탓인지, 자신의 피 때문인지, 혹은 정말로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혜는 보았다. 이 세상의 가장 정점. 붉은 노을 아래 서서, 만인을 굽어보고 있는 가장 순수하게 증오스러운 악을.
“연량…….”
힘겹게 이름을 부르면, 그 궤적을 따라 울음소리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온다. 한때 오라비라고 불렀던 것. 자신의 가족, 자신의 오라비, 그의 길잡이별……. 몸이 떨렸다. 숨이 가쁘게 새고, 비명 소리와 절망하는 소리들이 아득하게만 들렸다.
“네가 이 그릇의 동생인가?”
그 말과 함께 온기 하나 없이 무심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 구르고, 콜록. 소혜는 혈향 가득 어린 숨을 뱉었다. 숨을 따라 핏물이 기도를 타고 넘어와 입가에서 넘치도록 흘러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주변이 핏물로 축축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핏물도, 혈향도, 전부. 소혜는 답하는 대신 무기를 쥔다. 손에 닿는 비도의 냉기……. 소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발 아래로 무엇인가가 밟혔다. 시체, 시체인가? 이 많은 이들을 그저 손짓 한 번으로 땅을 기는 벌레처럼 죽이고서도 어떠한 감흥도 없이 내려다보는 이. 그제야 실감이 난다.
“그래…….”
이제 너는 연량이 아니지. 자신의, 혹은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죽을 때조차 더는 연량으로는 죽을 수 없게 되었다. 너는 천마의 그릇이고, 네 죽음은 이제 역사 속에 천마의 죽음으로 기록될 테니까. 그리고 그 커다란 흐름 속에서 연량이라고 불리었던, 죽어가는 면식 없는 여자애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은……. 거대한 운명에 휩쓸리면서도 인간답게 살고자 고뇌하던 그 연약한 인간은 짓뭉개져 사라질 터였다.
기억할 이가 누가 있지? 자신? 그럼 자신이 죽으면?
“……그래!”
……차라리 오라버니의 삶을 살길 바랐어. 오라버니는 정말 바보 같은 인간이야.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연량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해야 했다는 사실에 여전히 사무쳤다. 저건 연량이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연량은 아직 죽지 않았어. 저것만 해치우면, 신의님이나,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방도를…….
“내가, 너를……!”
“안돼! 저건 못 이겨, 소혜야!”
누군가의 절박한 외침이 웅웅거린다. 누구지? 푸른색, 아니……푸른색이 아닌가. 남궁휘? 양교진? 아닌가? 진성? 사마호선, 사마호선인가? 아니, 아니면, 또 누가……. 이전부터 쌓여왔던 심마가 덜걱 올라오며 그렇지 않아도 꼴이 좋지 않았던 내부가 온통 진탕이 된다. 숨 쉬듯 익숙하게 운용했던 독공이 흐트러지고, 독기조차 갈무리하지 못하고 핏물과 함께 쏟아내는 소혜의 머리 위로 황급하게 주령이 자리 잡고, 누군가가 소혜를 들고 한없이 멀어진다. 연량과 멀어지며 소혜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었다.
“안돼, 안돼……!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저기에!”
“정신 차려!”
누군가가 외쳤다. 연량의 겉껍데기를 뒤집어쓴 존재의 시선이 그를 향해 굴렀고, 무감각했던 시선에 문득 이채가 서린다. 그것은 소혜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는 듯했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는 세상이 온통 뒤흔들리고 흐릿해서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발버둥을 치는 소혜를 억누르려던 누군가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의 혈도를 짚자, 소혜는 억지로 버티려던 것이 무색하게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가 자꾸…를…, ……는 군.”
정말로, 무엇이라고 말했던 걸까? 알 수가 없었다.
**
한 줄기 바람이 불어 검붉은 머리카락을 흩트린다. 그렇지 않아도 붉었던 그는 노을 아래 있으니 더욱 붉어보였다. 약초를 골라내고 광주리에 담아 옮기던 소혜가 뒤돌아있던 연량을 발견하고 밝은 목소리로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주령이 연량의 머리 위에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오라버니 지금 엄청 바보 같은 모습인데.
“오라버니, 거기 서서 무슨 생각해?”
“아, 소혜구나.”
사뭇 다정한 웃음. 노을이 하늘에 걸리었다. 이윽고 언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냐는 듯이 가까이 다가온 연량은 해가 지는 때의 숲은 추운데, 옷이 너무 얇지 않느냐며 걱정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잔소리와 함께 제 겉옷을 벗어 둘러주는 손짓에 소혜는 뚱한 얼굴로 연량에게 환자가 할 말이 아니라고 다시 일장연설을 하고 있던 차였다.
“아무튼 오라버니는…… ……내 말 듣고 있어?”
“있지, 소혜야.”
“……응?”
희미한 웃음이 눈에 들었다.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얼굴. 마치 저 붉디붉은 세상 속에 녹아서 사라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 소혜는 문득 연량의 손을 붙들었다. 피비린내가 문득 풍기는 것 같다. 그래, 혈향……어떻게 잊고 있었지?
연량을 붙든 손이 떨리고, 그는 여전히 쓰게 웃고 있는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소혜는 연량이 저 노을 한구석에 녹아 영영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덜걱 겁이 나서 황급히 입술을 달싹였다.
“안돼. 나 두고 가지 마, 오라버니.”
“소혜야, 오라비는 이제 가야 해…….”
“싫어! 싫어……. 오라버니, 가지 마! 나랑 같이 여기서 있자, 응? 우리 여기 같이 숨어있자. 같이 숨어서 있으면 잡으러 올 사람들도 없고, 마교도, 다른 사람들도, 그냥. 우리 객잔이나 열어서 같이…….”
“소혜야.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
이윽고 반전.
노을이 아닌 피로 물든 세상 속에서, 피를 뒤집어 쓴 연량이 무감정한 얼굴 위로 미소를 띄운다. 아까 전, 노을 속 붉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은 전부 피였나? 푹 젖은 장포가 흐느적거리고, 주위에 가득한 마교도들의 시선이 쏠렸다. 아니, 마교도만 있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냥, 그냥……. 망연하게 서 있는 그의 위로 떨어지는 소혜야, 하는 다정한 부름. 언젠가의 기억과 같았다. 어떤 기억이지? 그는 흐느꼈다. 죽을까 봐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언제부터인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그저…….
“거짓말 마, 그러지 마…….”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이건 그저 나쁜 꿈이야, 소혜야.
속삭임과 함께 소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땅을 밟고 있는 맨발이 욱신거렸다. 입은 내상이 채 낫지 않아 어지러웠고, 온 몸이 욱신거렸으며, 내뱉는 숨마다 미약한 혈향이 섞여 색색거렸다. 그리고 비도를 쥐고 들이밀고 있는 자신, 당혹스러운 낯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낭월대의…….
“…….”
아.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무작정 암기를 쏟아내고 비도를 휘두르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추고, 산발이 되어 옷차림조차 흐트러진 채로 소혜는 떨리는 손을 내렸다. 쨍―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비도가 바닥을 굴렀다.
그 날 이후로 며칠이나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며칠이 지난 것인지 아직도 하늘은 노을로 가득했다.
정말로 지독한 악몽 속의 어드메를, 아직도 헤매고 있었다.
**
세상이 온통 붉었다.
가쁜 숨,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섞인 혈향, 그리고 누군가의 환호소리와 절규소리. 소혜는 멍하니 주저앉았다. “천마가 죽었다!” 누군가가 땅땅, 선고를 내리고, 소혜는 그제야 현실을 지각한다. 죽었어. 죽었어? 정말로? 그 말을 끝으로 웅성거리는 주변, 절규하는 목소리, 환희하는 함성…….
그 사이에서 언젠가, 밤하늘 아래에서의 다정한 웃음을 상기한다. 잘못 하나 없는 주제에 바보 같이 자신에게 건넨 사과도,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축축하고 흙먼지와 피 냄새로 가득했던 산속 동굴 어딘가…….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앞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피와 시신, 흙먼지와 무기들의 잔해가 뒤섞인 진탕 속을 기었다.
“오라, 버니…….”
누군가는 붉은 별을 불길한 별이라고 한다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길을 알려주던 다정하게 빛나는 별이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운 밤중에, 오직 그만이 빛을 내며 길을 인도했다. 그는 연량亮이었으니까. 죽었을 리가 없잖아. 별이 그렇게 쉽게 질 리가 없잖아. 정말로 나를 두고 그렇게 죽은거야? 이제 저 하늘에 이제 붉은 별이 보이는 날이 오기는 할까? 소혜는 떨리는 손을 뻗는다.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이들이 곧 이어질 상황을 직감하고 소혜와 천마의 주변을 둘러싸 다른 이들로부터 그들을 가렸다.
“소혜야.”
누군가가 그를 불러세우려고 했지만, 다른 이가 막았다. 소혜는 그 사이 핏물로 잔뜩 젖은 처참한 몰골로 기고, 또 기어서 연량을 기어이 끌어안았다. 이윽고 눈물이 뚝 떨어져 연량의 뺨에 흔적을 남긴다. 고대하던 이와의 재회인데, 그의 몸은 생명 한 조각 없이 차갑고 뻣뻣하기만 했다. 나는 오라버니와 재회하는 날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렇지만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소혜야,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언젠가 그러했듯 걱정과 애정이 담긴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며 소혜는 깨달았다. 비도가 공기를 가른 후 심장에 박히고, 그를 도와 검이 완전히 그의 피륙을 갈라내고 나서야.
그제야.
그렇게 되고 나서야 깨달아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망할 인간, 망할 인간……. 이겼음에도, 이 처참하고도 장대한 전투의 종막을 승리로 장식했음에도 소혜가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오라버니…….”
울컥, 목 안쪽에서부터 핏물이 치솟았다. 눈가로 흐르는 눈물은 따뜻했고, 붉었다. 지독하리만치 깊게 썩은 심마가 단전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사람으로서의 연량이 아닌, 천마의 그릇이었던 그의 죽음에 안도하는 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연량의 삶은 결국 이렇듯 부정당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서…….
“같이, 객잔에서…….”
이제 나, 정말 부자인데. 오라버니가 원하는 객잔 따위 수십, 수백 개라도 세워줄 수 있는데. 어쩌면, 어쩌면……. 이렇게 죽이지 않았어도…….
“객잔, 에서…….”
……알고 있다. 이미 연량은 그릇이었고, 천마가 담겼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사실이 사라지지 않기에 어떤 방법을 찾아내더라도 연량을 살릴 수 없었다는 것. 어쩌면, 어쩌면 그릇 속의 기억을 읽어낸 천마의 흉내일 수도 있었다는 것. 그렇지만…….
후두둑, 핏물이 눈물과 섞여 추락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다면, 어떻게든 같이 도망쳐서, 마교와 정파,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을 곳으로…….
“당대협! 이젠 정말로 한계입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하단 말입니다!”
필사적으로 소근거린 사마호선과 양교진이 억지로 둘을 떼어내고, 각오했던 것과 다르게 소혜의 몸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고개가 힘없이 뒤로 젖혀지고, 검붉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 새벽노을인가. 해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뜨고 있었던 모양이다. 검은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여명이 시산혈해로 가득한 세상을 비춰오고 있었다.
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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