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있는 것
28주차 주제
28주차 주제 : ㅇㅈ(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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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연량은 그것이 무엇인지 끝없이 자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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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蜽가 그럼 그렇지 뭐. 무엇을 가질 자격도, 아낄 자격도 없음이 분명했다. 그의 삶은 오롯이 무고한 피와 생명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길을 걸을 것이 자명하므로.
천살성. 태생이 오직 그러하기에 그는 이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어려서는 가족과 생이별할 팔자로되, 커서도 주변인들을 풍파에 휘말리게 해 순탄치 못하게 할 테니. 끝에 가서는 살육에 미친 괴물이 되는 수밖에.
‘그럴 리가 없잖아!’
가면 갈수록 성격이 나빠지고 있는 어떤 누이는 그렇게 말하겠지만…….
‘나는……사람은 선택으로 삶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
……정말 그럴 리가 없지만.
그랬다면, 만약 선택으로 삶을 바꿔나갈 수 있었다면……고작 어떠한 별을 타고났다는 운명 하나로 그가 이렇게까지 어두컴컴한 곳에 처박히게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곱씹고 있노라면 코끝을 찌르는 역한 혈향이 있다. 오래도록 평화에 절여진 모양이었다. 잠시 몸을 움찔한 것을 보면. 사람의 생명도, 의지도 전부 헛것인 이곳…….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연량은 벽에 머리를 기대 뉘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그 또한 이곳에서 다시금 미쳐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소혜의 이름을 되뇌다가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런데 소혜가 누구지.
*
*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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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하지 못한 의식으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간혹 연량이 의식을 차릴 때마다 그는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고, 경배를 받고 있었고,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고,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고, 경배를 받고 있었고,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고,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고,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고…….
“오라버니!”
부유하던 의식을 붙잡고 끌어올리는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있다. 또다시 자신이 죽인 무언가의 가족일까. 끝없이 침잠하기만 하던 의식이 불쑥 고개를 들고, 시선이 문득 그 목소리의 끝을 밟는다. 이제는 익숙해진 개미 떼처럼 많은 죽음 사이에서 어째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
“너는…….”
증오 섞인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려는 듯 허우적대는 한 여자가. 그는 입술을 달싹인다. 너는 내가……반드시……. 그 입 모양을 읽어내며 그는 여자를 들여다본다. 저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절망과 분노, 증오에 속이 울렁대는 것 같았다. 다시금 연량은 목소리를 내어 여자를 불렀다. 너는……. 문장을 채 끝맺지 못하고, 그는 다시금 가라앉는다. 밑으로, 저 밑으로…….
…아, 소혜야.
*
*
별이 반짝였다. 쏟아질 것처럼 하늘을 뒤덮은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는 아래 앉아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여인. 분명 앳된 티를 벗지 못했던 어린아이가 어느새 완연한 성인의 태를 하고 있음에 어떤 감정을 느꼈던지.
검푸른 하늘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운다. 그러나 검푸른 빛이 도는 눈이야말로 밤하늘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여 가만히 들여다보았던 날. 그날 뺨을 스치우던 바람과, 자신을 향해 오라버니, 하고 부르던 애정 담긴 다정한 부름.
도깨비蜽라는 이름을 가진 마교도 따위가 가지기에는 너무 과분했던……그의 가족.
“있지 오라버니.”
“응.”
“만약 오라버니가 별이라면……오라버니는 내 길잡이 별이야.”
다정하기 짝이 없던 목소리, 자신을 보며 별을 품은 듯 반짝이던 눈…….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지? 연량은 더듬어 본다. 지금 눈 앞에서 웃고 있는 얼굴 위로 겹쳐오는, 절망이 가득했던 그 얼굴을. 이것은 그저……그의 과거에 기반한 꿈에 불과하니까.
오라버니가 저기에……. 무기력하던 중에도 소혜가 뱉었던 그 한마디 말을 달싹이면 그저 이렇듯 무력하게 마魔에 잠겨 사라질 수는 없어서. 그는 의식 저 너머로 가라앉는 도중에도 발버둥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영 그는 선택할 수 없을 테고, 그가 천마의 그릇인 이상 그의 끝은 정해져 있었지만.
미안해, 소혜야. 마지막까지 좋은 오라버니는 되어주지 못했구나.
연량은 읊조린다. 이별에서도, 재회에서도 그는 이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사무쳐 그는 바람이 불어와 쓸어낸 소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꿈 속의 소혜는 과거일 뿐 현재가 아니기에 그저 웃을 따름이었으나, 아마 그 때 같은 일을 했더라도 같은 반응이었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것보다 조금은 더 안심한, 기쁜 얼굴로…….
깜빡, 다시금 의식이 점멸한다. 그의 몸은 수많은 시신이 쌓인 시산혈해와 꿈, 그 어중간한 구석에 걸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누이를 잊지 않기 위해 과거만을 곱씹었다.
‘나는……사람은 선택으로 삶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
연량은 하늘을 본다. 그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이것을 선택했다. 자신의 뒤늦게 찾은 동생이 죽게 두지 않으려고. 량蜽이 아닌 량亮이기에 가족이 소중했던 그는.
아, 그래. 그렇다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준 이를 위해 괴물이 되기를 택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결과 또한 그의 의지이고, 선택의 결과일까. 소혜가 죽은 연량은 더 이상 연량亮으로서 존재할 수 없었으므로?
마魔에 잠식된 몸은 여전히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그것은 자신이 간혹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발버둥치다 수면 위로 올라와 행동할 때마다 무엇인가를 읊조렸으나, 연량에게는 그것이 들려오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내 길잡이별이야.’
자신을 살육을 목적의식으로 가진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만들었던 그 말. 다정한 목소리는 다시금 처절한 비명 소리로 변모한다. 연량은 멍하니 기억 속 하늘의 별을 헤아렸다.
여전히 혈향은 가시지를 않고 있었다. 쨍―하는 소음. 악을 쓰는 익숙한 목소리.
아. 너구나.
점멸하는 의식 속 다시 현실. 별들이 반짝이는 새카만 밤이 팔을 벌렸다. 언젠가의 그 평온했던 기억과 다르지 않은 밤이다. 비록 그때와 다르게 귀뚜라미는 울지 않았고, 시원한 숲의 향기 대신 짙은 혈향이 맴돌았지만. 서늘한 한줄기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연량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도를 보며 구태여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소혜야…….”
밤하늘 그림자가 드리운 누이를. 이전처럼 찰나의 순간에도 즐거워하거나, 자신을 보며 웃거나, 자신을 걱정하는 대신……슬픔과 분노, 복수심을 가득 안은 얼굴을 한, 자신의 동생을.
놀란 듯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연량은 웃었다. 이제 더는……너의 길잡이별이 될 수 없겠지만. 그렇지만 연량은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죽음만큼은 그가 고를 수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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