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당가 시비로 살아남기

[진성소혜]和風暖陽

보존도서관 by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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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간만에 찾아온 소혜와 진성이 대련을 주고받은 날이었다. 후기지수들 중에서 그와 검을 맞댈 수 있는 이가 몇 없었기에 그는 간만에 검을 섞을 상대를 만나 조금 들뜬 상태였고, 그것은 당소혜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지고 만 소혜는 지쳤는지 자리에 주저앉아서도 기분 좋게 활짝 웃었다.

“이제 곧 있으면 정말 제가 진성 도장을 이기겠는데요?”

처음에는 지기만 했지만 날이 갈수록 맞대는 합이 늘어나고, 이제와서는 그를 넘어 점점 비등해지던 승률이다. 이젠 정말로 자신이 더 많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호기롭게도 외치는 여인을 보며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입가로 띄웠다. “도장, 지금 아니라고 생각해요?” 곧장 뚱해지는 얼굴을 보며 그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아닙니다.”

“……도장은 천재다 이거죠? 됐어요.”

소혜는 샐쭉하게 이야기하고는 흙이 묻은 옷을 탁탁 털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하려던 그는 그 말을 삼키고 손을 내민다. 당소혜는 자신의 재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면이 있었고,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해도 “됐어요, 도장. 너무 진지하게 사과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하는 답이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학습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내민 손을 자연스레 잡고 벌떡 일어선 소혜가 웃으며 진성을 돌아보았다. 녹빛 장포가 푸른 하늘 아래에서 하늘거렸다. 검푸른 눈이 문득 반짝였다. “아, 도장. 저 살 것도 있으니 같이 시장이나 갈까요?” 활기찬 목소리로 앞서나가는 여인을 보며 도사는 우두커니 서있다가 뒤늦게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발걸음 끝에 기이한 무게가 남았다.

**

“도장. 만두 먹을래요?”

“괜찮습니다.”

“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저 돈 많거든요.”

그렇게 말한 소혜는 만두 하나를 사서 입에 물고 시장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기왕 사천에서부터 먼 길을 나서 여기까지 온 것, 형제자매들과 시비에게 사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천당가에 대한 인식과는 전혀 다른 여인이었다. 서책이라면 몰라도 장신구나 옷가지 같은 것은 모르는 진성은 물건을 고르는 소혜의 뒤를 하릴없이 좇았다. “짐이 많으니 제가 들겠습니다, 소저.” “그래주시면 고맙죠.”

손에 하나, 둘……. 물건들이 계속해서 쌓였다. 소혜가 골라사는 물건마다 족족 받아들고 뒤따르던 진성의 시선이 문득 가판대 위에 놓인 귀걸이 하나에 머물렀다. 진성 도장?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신이 나서 물건을 고르던 소혜 또한 진성의 행동이 의아스러웠는지,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귀걸이에 관심 있어요?”

귀걸이. 백금으로 만들고 검푸른 보석이 박힌, 제법 화려하고 고운 것. 당소혜의 의문은 지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당파의 고매한 도사님이 할만한 것은 아니어서. 진성은 소혜의 물음에 나직히 이야기했다. “당 소저에게 어울리실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동그랗게 눈을 떴던 여인은 그 특유의 웃음을 터뜨리며 옆머리를 뒤로 넘겼다. “도사면서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요?” 저 딱딱한 도사는 가끔 자신의 얼굴이 가진 파급력은 상상하지도 못하고 저런 말을 하고는 한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도사를 바라보던 소혜는 문득 짓궃은 표정과 함께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이며 말했다.

“그럼 진성 도장이 한 번 옆에 대보고 어울리는지 말해줄래요?”

진성은 무어라 말하려고 하다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결국 벙긋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있던 귀걸이를 집어들어 잠자코 소혜의 귀 옆으로 가져갔다. 느릿한 손길이다. 채 뒤로 다 넘기지 못해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손에 닿는다. 닿은 것은 손인데, 다른 곳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도장. 어때요? 어울려요?”

왜인지 심장이 조였다. 나비와 같다 하여 독접이라는 별호가 붙은 여인. 녹빛 장포가 바람에 휘날리고, 장신구에 비쳐 비산하는 햇빛이 시야를 흐린다. 그런 와중에도 햇빛 아래에 서있는 여인의 미소는 곱고도 선명해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와중, 진성은 문득 자신의 손이 너무 오래 소혜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예. 곱습니다.”

문득.

어떠한 자각은 예고 없이 급습한다. 자신의 곱다는 말 한마디에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여인이 시야로 걸리운다. 항상 보곤 하던 그 웃음인데, 기이하게도 어쩔 줄 몰라 헤매는 자신 또한 있었다. 계속 이렇게 바라보면 안될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시선을 다른 곳에 두어야 할 것 같은데……. 손은 거두었음에도 시선은 돌릴 길이 없어 진성은 방황했다. 문득 손을 어디에도 내려두는 것이 어색한 것만 같아서.

웃고 있던 소혜는 진성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장?”

“당 소저에게 정말 잘 어울립니다.”

“그럼 이것도 살까요?”

“……제가,”

도사로서의 자아가 확고하였기에 문득 찾아온 자각을 부정하고자 하였다. 무당의 제자가 아닌 자신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티 한 점 없는 말간 눈과 시선을 마주하고, 평생 선도를 수련하며 살아온 도사는 결국 수긍하고야 만다. 지나치리만큼 눈이 부셨던 것은 햇빛이 밝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당가의 소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저토록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대체 어찌해야 가능할까? 이제서야 자각하였다는 것이 더욱 이상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소저께서 호북까지 오셨으니,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기념품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렇지만…….”

진성은 말없이 대금을 치르고, 들고 있던 귀걸이를 소혜의 귀에 가져다 대었다. 진성 도장도 은근히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단 말이지. 소혜가 생각하는 것도 짐작하지 못한 진성은 잠깐 입술을 축였다. 제가,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도장이요? 네, 뭐……그래요.”

기묘한 표정을 지었던 소혜는 잠자코 눈을 감는다. 진성은 흠칫했다가 조심스럽게 백금으로 된 귀걸이를 달아주었다. 검푸른 보석은 눈앞에 있는 여인의 눈색과도 같아 자꾸 시선이 갔던 것이다. 장신구가 흔들리며 내는 맑은 소리에 오히려 마음이 어지러웠다.

“됐어요?”

“예.”

“어때요?”

“곱습니다.”

그 말에 소혜는 웃음을 터뜨린다. 맑은 웃음이 들려왔다. 눈이 부셔서, 진성의 시선은 그의 웃음에 길게 머무른다. “아까랑 너무 똑같은 답인 거 알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귀를 만져보는 모습을 보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무인의 직감과도 같은 것이다. 스치는 바람과 내리쬐는 햇살. 그 아래에서 눈을 휘며 웃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을 잊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햇빛이 유독 눈부시던 어느 날이었다.

여인은 햇살 아래에서 그를 바라보며 곱게 웃었고, 남자는 그날에야 자신의 감정을 지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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