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소혜]勺藥之贈
가장 곱게 핀 것을 꺾으며 어떤 여인을 생각했다.
6주차 주제 : 함박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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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작약이 피었다. 가장 곱게 핀 것을 꺾으며 어떤 여인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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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 도사로서는 걸맞지 않은 마음을 품은 것은 제법 오래된 일이었다. 자각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한창의 나이대를 생각하면 꽉 막힌 도사에게도 봄이 찾아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라.
음, 진성은 자신이 그런 헛된 마음을 품은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역시 그렇게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 별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눈이 제대로 달린 사람이라면 무릇 그 당가의 소저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텐데……. 진성은 제 사형들과 사손들이 그 당가 소저와 자신 사이에서 보인 태도에 대해 그는 어느 순간 납득하고야 말았으나, 무당의 도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아직 자각하고 있었다. 도를 수양하는 입장이기에 함부로 세속에 발 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 모습을 본 어떤 철없는 사손은 굉장히 답답해했으나…….
“아.”
때는 푸르른 오월이었다. 봄꽃이 마지막으로 피는 달이었고, 하필 그때 그곳을 지나가게 된 것은 명백한 우연이었을 터다. 진성은 여느 때처럼 무림맹의 임무를 수행하러 나왔다가 작약이 가득 피어있는 꽃밭을 하나 발견했다. 이곳에 이런 곳이 있었군. 봄철, 그것도 작약이 필 시기에 이곳을 지나 본 적이 없어 처음 안 이야기였다. 평소라면 이를 그저 지나쳤을 것이나, 그는 무심결에 어떤 한 여인을 생각했다.
작약을 닮은 여인 하나를……. 그는 그냥 작약을 보며 그런 생각만 한 줄 알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작약 꽃밭의 바로 앞이요, 새하얀 꽃이 손에 들려있었으니.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을 보며 그는 마른 세수를 했다. 수행이……수행이 필요했다……. 오로지 당가의 소저가 생각난다는 이유로 이렇게 스스로를 잃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다니. 하지만 멀쩡한 꽃을 이미 꺾어버렸으니, 도인으로서 이를 그냥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사숙조? 무엇을 가져오신 겁니……아하.”
그저 그런 이유였을 뿐인데, 송화가 진성이 들고 온 꽃을 보더니 기분 나쁠 정도로 히죽히죽 웃었다. 흘긋 둘러보니 삼대 제자들이 다 똑같은 몰골이라, 진성은 자신의 사손들이 쓰잘데 없는 곳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보니 수행이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를 수행하는 이들이 남의 연애사에 관심을 두다니. 그러므로 저들은 송광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도 훈련은 확정이었을 것이다. 삼대제자들이 안다면 통곡할 노릇이었다.
“그분께 드릴 겁니까?”
그리고 송광이 진성이 꽃을 들고 있음에 히죽거리며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진성은 사손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당소혜를 생각하며 꺾은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짜고짜 이런 것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성은 그가 작약을 받고 웃는 모습을 생각했다. 흰 작약꽃과 그는 정말로, 잘 어울려서…….
“에이, 아니기는요. 작약이 남녀의 정을 두텁게 하니, 그분 말고 또 사숙조께서 작약을 드릴 여인이……컥! 읍, 읍읍!”
“하, 하하하하! 사숙조, 오늘따라 날이 덥네요! 임무지까지는 아직 멀었습니까?”
송화가 송광의 입을 틀어막고 식은땀을 흘렸다. 괜히 철없는 사형으로 인해 가혹한 수련이 추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작약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딱 봐도 혼란한 심경이 느껴졌다. 작약과 사랑에 빠진 도사의 조합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울렸지만…….
……아, 그렇지만 저게 당 소저 손에 들어가는 일은 없겠군. 송광을 제외한 이들은 하나 같이 속으로 생각했다. 남녀관계에 대해 그리 잘 아는 것도 아니니 작약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때라면 오는 길에 문득 꺾었노라고 하며―아니, 생각해보니 이건 너무 대놓고였으니 다른 이유를 대야 했겠지만!― 선물할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작약을 선물하는 것의 뜻을 인지하고 있으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뜻을 알게된 이상, 진성은 이를 절대로 당 소저에게 이를 선물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사숙조는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도 당 소저에게 호의를 드러내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으나, 이상한 곳에서 굉장히 꽉 막힌 면이 있었기에……. 그런데 그럴 거면 평상시에 보이는 나 당 소저 좋아해요, 하는 태도라도 버려야 하지 않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무당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 남녀관계에 무지한 사숙조를 배려하기로 했다.
저러다가 뭐, 어느 순간 연인도 되고 혼인도 하고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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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 도장, 봤어요? 눈 내리는 거!”
지나가는 길에 충동적으로 작약을 꺾은 뒤로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무림맹의 임무 차원으로 사천을 방문한 진성을 보러 찾아온 소혜가 방문 안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무림맹에 보낼 서찰을 쓰고 있던 진성은 붓을 움직이던 것을 멈춘 진성이 가만히 시선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이미 멀찍이서부터 그가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 검푸른 눈이 호의과 즐거움으로 빛나는 것을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소혜의 뒤를 쫓아온 바깥의 찬 기운이 그에게도 훅 느껴졌다.
“눈이 오고 있습니까?”
“아까부터 오더라구요. 오면서 들으니 진성 도장은 새벽에 수련하고 지금까지 계속 여기 있다고 들었으니까, 모를 것 같아서 와봤어요. 일은 다 했어요? 같이 눈 구경 가지 않을래요? 엄청 내리거든요. 벌써 많이 쌓였어요. 사천에서는 보기 드물어요.”
따지자면 눈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소혜가 저토록 들뜬 얼굴을 하고 있으니 같이 들뜨는 기분이었다. 진성은 기꺼이 서찰을 쓰고 있던 붓을 내려놓기로 했다. 무당파의 어느 누가 본다면 저럴 거면서 왜 자꾸 도사랍시고 벽을 치느냐고 분통을 터뜨릴 일이었다.
“제가 사천에서도 유독 경치 좋은 곳을 알아왔거든요! 눈이 올 때 보면 특히 예쁘대요, 같이 가요!”
당가의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알아온 곳이랬다. 오는 길에 맛있다는 곳에 들러서 구경하며 같이 먹을 음식도 샀노라며 당소혜는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제가 들겠다고 그의 손에서 가져오자 아직 따끈했다. 이 추운 겨울에 아직 온기가 남아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정말 이곳에 오기 직전에 산 모양이었다. 소혜의 걸음을 좇아 밖으로 나오니 사천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 가요!”
새하얀 숨이 번진다. 새하얀 눈을 밟는 소리. 추위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당소혜가 뒤를 돌아보았다. 햇빛에 비쳐서인지, 눈이 반짝거리며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진성은 잠시 말을 잃고야 만다. 언젠가 꺾었던 작약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마침 자신이 꺾었던 그 꽃도 흰색이었는데. 그래서 그런 걸까? 언젠가 붉은색도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사실 저 여인과 어울리지 않는 색은 없을지도 몰랐다. 당소혜와 흰색 또한 자신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너무, 너무 잘 어울려서…….
“……작약이,”
“작약이요?”
그래서 진성은 어느 오월에, 당소혜에게 채 주지 못했던 작약 한 송이를 떠올렸다. 소혜는 눈을 끔뻑이며 진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이런담? 그런 시선이었지만……. 진성은 문득 후회가 되었다. 그때 그냥 줘버릴 것을. 흰색과 이렇듯 잘 어울리는 사람인데. 그 정도는 어쩌면 해도 되었을지도…….
진성은 그렇게 갈등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함박눈을 흠뻑 맞은 소혜는 이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진성의 시선과 눈을 맞추었다.
“언젠가 작약이 많이 핀 꽃밭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당 소저에게는 역시 작약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때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그때 선물할 것을 그랬습니다. 소저에게는 눈꽃도 어울리시지만…….”
제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주는 손에 당소혜는 얼어붙은 채로 그 손길을 받았다. 이상하게 눈 둘 곳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
“……그게, 진성 도장. ……고, 고마워요?”
……어라? 분명 날이 추워서 아까까지는 손이 자꾸 곱아들었는데, 이제 와서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소혜는 갑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지? 열인가? 약을 찾으러 가야 하나? 왜, 왜 갑자기 안 추운 것 같지? 그보다도, 진성과의 거리감이 갑자기 무척이나 가까워진 것 같았다. 분명 아까 전까지 별생각 없었는데? 도사가 이래도 되나? 도사인데? 고매한 무당파의 도사가 그럴 리가 없지? 나 혼자 착각하는 거겠지? 소혜가 속으로 지르건 말건 진성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지자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반사적으로 버럭 외쳤다.
“야, 약!”
“예?”
“약이 좀 필요한 것 같아서, 찾으러 갈게요! 하하하, 눈 보러 가려고 했는데 너무 아깝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미안, 미안해요 도장! 같이 보러 가자고 해놓고 이렇게 해서……. 내일 같이 봐요! 내, 내일 다시 올게요!”
당소혜는 치맛자락을 잡고 쌩하니 진성을 스쳐 지나갔다. 어찌나 빠른지 진성이 채 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당소혜 또한 자신이 먼저 제안해 놓고 바로 도망치는 게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 같이 있으면 안 될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저 사람이 갑자기 왜 저래? 아니지, 생각해 보니 그는 원래 그랬는데, 자신이 갑자기 저런 평상시의 행동에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이럴 수가, 미친 것이 분명했다! 진성 도장은 진성 도장인데! 진성 도장은 도사이고, 그리고 주인공의 라이벌이고, 그리고…….
당소혜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당 소저에게는 역시 작약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때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그때 선물할 것을 그랬습니다. 소저에게는 눈꽃도 어울리시지만…….’
이럴 수가! 저 남자, 이곳에서 통용되는 작약이 어떤 의미인지 빙의한 자신보다도 더 모르는 거 아닌가? 왜 하필 말을 꺼내도 작약을 꺼냈지? 연모지정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걸 도사니까 모를 수도 있지만! 모를 수도 있지만……. 도사가 저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 아닌가? 눈을 밟으며 달리는 와중에도 흘긋 뒤를 돌아보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얼굴이…….
“…….”
역시 못 본 걸로 해야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소혜는 자신이 오늘 본 것을 잘못 본 것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그래, 역시 진성 도장은 도사니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평소에도 잘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부끄러움이람! 얼굴에서 열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진성은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걸 모르니까, 딱 하루만 쉬고! 그냥 전처럼 대하면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처럼 편하게 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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