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오래 전에 묻어둔 발자취를 들여다보듯

[오늘의 연성 한 문장] https://kr.shindanmaker.com/679163 E.v.a─에바 편 (2022-04-11) 고민하다가 백업해둠

E.v.a─에바 의 연성 문장 끝이 어찌 됐든 간에 마음을 내어준 상대였으니까, 문득문득이나마 생각나는 거겠죠. #shindanmaker

 

“에바 어떠냐? 네 이름.”

“에바?”

“부르기도 쉽고, 쓰기도 간단하고. 무엇보다 최초의 생명 중 하나인 하와의 다른 이름이거든.”

어른은 담배를 문 입으로 씨익 웃었다. 이제 막 이름을 받은 꼬질꼬질한 아이가 드물게 미간을 구겼다. 나 놀리는 거야? 어른이 아이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눈치는 있네. 와하하 웃으며 저를 괴롭히는 어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가 바동거렸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의 이런 거리감에 가슴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래서… 그건 어떻게 써?”

“뭐야. 너 글자도 모르냐?”

“응.”

“야단났네. 쓸만한 걸 주웠다 생각했더니 짐덩이를 데려와버렸어.”

어른은 툴툴거리면서도 낡은 집 구석에 놓인 책장을 뒤졌다. 잠시 후 그는 책상 위로 사전 하나와 누런 종이 한 장, 연필을 내려놓았다.

“잘 봐라, 꼬맹아. 이렇게 쓰는 거다. E- V- A.”

“이-브이-에이?”

“그래.”

쭉쭉 그어진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간단한 글자. 낡아서 변색된 종이 위에 수놓인 선을 본 아이가 몇 번이나 그것을 중얼거렸다. 이 브이 에이, 이 브이 에이.

“─에바.”

“마음에 드냐?”

에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악취와 구취, 혈향이 뒤섞인 고약한 냄새가 코끝에서 술렁거렸다. 에바는 온몸이 아파 일어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그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아, 익숙한 공기다. 죽음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고.

결국 이런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알았다. 처음 사람을 죽인 아주 오래전부터. 에바는 언젠가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뻗어나온 죽음이 제 발목을 붙잡으리라 예견했다. 이렇게 빠르리란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죽는 순간에는 주마등이 지나간다더니 실제로 그랬다. 에바는 색색거리는 숨을 뱉으며 제게 이 일을 연결해준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호쾌한 목소리에 구김 없는 얼굴이었다. 독한 담배 연기를 풍겨오는 것도 같았다. 간접 흡연 이전에 체취를 숨겨야 할 때 방해된다며 뚱한 표정을 짓게 만들던 행동이었다.

‘너…… 어떻게 살아있냐?’

섬광. 그리고 폭발. 그 속에서 겨우 숨만 붙인 에바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굴렀다. 저들에게 들켜선 안 되었다. 계속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핏자국을 지울 형편이 못 되니 조금이라도 더 멀리, 빨리 도망쳐야 했다. 에바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려 했다. 그리고 우연히 제 유일한 보호자와 마주쳤다. 일을 연결해준 후 그 근처로는 발 한 끝도 들이지 않는데, 이상한 일이지. 아니면 당신은 뒤늦게 내가 위험한 걸 알고 와준 걸까? 그리 안심하려던 찰나.

건네진 말이 저것이었다. 몸이 차갑게 식었다. 온몸에서 무섭도록 빠져나오는 피 때문일 터였다. 에바는 무지성으로 그를 밀치고 달렸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수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바를 함정에 빠트린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에도 테러를 일으킨 듯했다. 곳곳에 자리한 콘크리트 잔해 밑에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에바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예상보다 한산한 장소였다. 이래서는 숨어봤자 그리 의미도 없을 것이다.

힘이 빠졌다. 에바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콘크리트 가루와 조각들이 거칠하게 뺨에 닿았다. 이럴 것이었다면 도망치지도 말 것을.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다면 조금은 덜 번거로웠을까. 자신에게도, 함정을 준비한 이들에게도.

죽음이란 정말이지, 간결한 것이었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땅으로 전해지는 진동, 돌조각이 발에 채는 소리. 그것은 점차 가까워지더니 끝내 에바의 앞에 다다랐다.

어깨를 흔드는 감각이 미약하게 전해졌다. 에바는 숨을 뱉었다.

“괜찮……, …게 아니라 어서……….”

상대가 에바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흐릿한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비쳤다. 당연한 얘기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 다급한 태도는 뭔가.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며 등을 두드리는 것이 거슬렸다. 당신이 뭔데, 내가 뭐라고.

체념과 혼란과 좌절이 한 데 섞인 상념에 빠져 있던 에바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상황에 실로 어울리지 않는 온기였다.

-

“어머, 이것 참. 오랜만이네요.”

에바는 꽤 오래전에 입었던 옷을 보고 감탄했다. 그 곁에서 하나가시키의 쌍둥이가 나란히 눈치를 보았다. 옷장을 마음대로 뒤져본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들이 제 심장에 칼을 꽂는데도 에바는 웃으며 그것을 뽑아 제 숨통을 확실히 끊을 곳에 박을 것이다. 하나가사키 가에는 그만한 은혜를 입었으므로.

일전에 입을 옷이 메이드복밖에 없다는 얘기가 그렇게 충격이셨을까. 에바는 메이드복 외의 옷이 필요한지 잘 느끼지 못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집착이고 고집이었다. 에바의 마음을 잘 아는 주인 어른-사쿠야는 에바가 바라는 대로 하라며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와 도련님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듯했다. 가족이 아닌 타인임에도 이리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자신에겐 과분한 복이라고, 에바는 생각하며 웃었다.

괜찮으니 눈치볼 것 없다는 에바의 말에 먼저 회복한 것은 노노하였다.

“에바, 그 옷은 뭐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아.”

“당연한 일이에요, 아가씨. 이 옷은 하나가사키 가문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입었던 것이니까요.”

“에바가…… 청부업자일 때?”

누나의 행동에 조금은 용기를 얻은 것인지 네네하가 소심하게 물었다. 에바는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그렇네요, 맞아요. 에바는 여기저기 올이 나가고 재가 묻어 때가 탄 검은색 스웨터를 제 몸에 대보았다. 1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신장이나 체격이 그리 변하지 않아서인지 스웨터는 지금 입어도 제 몸에 맞을 듯 보였다.

입는 것에 관심이 없던 것은 그때 그 시절에도 마찬가지라. 에바가 입었던 옷은 대개 그 당시 보호자가 준비해주는 것이었다. 가끔은 화사한 걸로 꾸며보라며 답지 않게 밝은 색의 옷을 가져왔을 때는 바닥에 내팽개쳤었지. 은혜도 모르는 버릇없는 꼬맹이라며 툴툴거리던 어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떠오르다 가라앉았다.

“끝이 어찌 됐든 간에 마음을 내어준 상대였으니까, 문득문득이나마 생각나는 거겠죠.”

중얼거리듯 내어진 말에 노노하와 네네하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바의 과거를 일부 아는 만큼 무슨 뜻인지 짐작은 가는데, 그에 대해 묻기엔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어차피 지나간 일이죠. 지금의 제겐 아가씨와 도련님이 있는 이 하나가사키 가문밖에 없답니다.”

입매를 부드럽게 휘며 한 말에는 한 점 거짓도 없었다. 에바는 새삼 감동받은 것처럼 저를 끌어안는 두 어린 청소년의 등을 토닥이며 옅은 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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