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W 사자나미 미우] 포말

【사자나미 미우】 RW 캠페인 PC5로 가는 중 / 미우 씨가 히어로로 복귀하게 된 계기 같은 얘기 (2023.09.30 작성 퇴고 없음)

처음에는 이런 느낌으로 쓰려고 했던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중간부터 어라라... 하다가 그냥 씀

미우 씨가 히어로로 복귀하게 된 계기 같은 얘기

근데 진짜 이런 느낌으로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제목도 제대로 지을 기력 X


세상은 대히어로 시대. 세계의 평화와 안위를 위협하는 빌런에 대항하여 히어로 또한 정의를, 신념을, 이유를, 감정을 등에 지고 일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나 히어로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도 지금 이 순간에도 우후죽순 생겨나는 각양각색의 빌런의 기세만큼은 못한 법. 파괴하는 것보다 수호하는 것은 언제나 더 어려운 법이므로 ─

히어로들의 눈과 힘이 미처 닿지 못하는 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빌런들이 허구한 날 일으키는 사건·사고가 언제 안전을 위협할지 모를 세상에서 살다 보면 노말-오버드가 아닌 자-들 또한 비상시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활수칙처럼 익히기 마련이다. 히어로가 구해주러 오기 전까지 최대한 빌런을 자극하지 않는다거나, 빌런들이 일으키는 피해의 규모를 축소하기 위해 지어진 전용대피소 등으로 몸을 피한다거나.

그러나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없고 그것이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빌런이 나타난 현장은 쉬이 아수라장이 된다. 사람들은 혼란에, 공포에 빠진다. 경찰 부대 등의 인력이 근처에 있다면 그래도 안심할 수 있겠지만, ‘우발적으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의지할 곳 없는’ 상태에서 맞닥뜨린 재난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오직 생을 향한 본능만을 좇게 만든다.

 

 

대피하는 군중에 휩쓸려 부모와 떨어져버린 어린 남매는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손을 잡고 이끌어줄 부모님은 곁에서 없어졌고 언제 빌런의 테러가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 둘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누나… 우리… 어, 어떡해…?”

“…괜찮을 거야. 금방 히어로가 올 거니까!”

 

남매 중 누나인 아이가 울음을 꾹 참으며 남동생을 달랬다. 히어로가 멋지게 짠, 하고 나타나서 구해줄 거다. 그리고 팟! 하고 빌런을 퇴치해 줄 것이다. 그게 히어로고 빌런이니까.

그때까지 어디 숨어 있자, 라고. 여자아이는 동생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남동생은 저보다 걸음이 느렸다. 가로수 옆 수풀 너머조차 보지 못하는 키로는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기에, 아이는 서둘러 바로 옆에 있던 골목길 안쪽으로 동생을 잡아끌었다. 탁 트인 곳이 아니니 빌런에게 잘 발견되지도 않을 거고, 여기저기 버려진 박스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감쪽같을 터였다.

상황이 얼마든지 최악이 될 수 있음을 상상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으레 하는 생각이었다.

 

남동생을 끌어안은 채 박스를 거꾸로 뒤집어쓴 아이의 심장이 콩닥콩닥, 시끄럽게 뛰었다. 몸을 숨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까운 거리에서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동생의 입을 막고 저도 숨을 흡, 참았다. 어른들이 정신없이 달려갈 만큼의 소동이다. 저 밖의 빌런이 얼마나 무서운 악당일지 모른다. 아이는 숨을 죽였다.

이 근방을 어슬렁거리는 듯했던 기척이 조금씩 멀어지다가 완전히 조용해졌다. 갔나? 아이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지나쳤으니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라는 마음으로, 덮어쓰고 있던 상자를 들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제 괜찮아?”

“으응, 아마도…….”

 

품 안의 동생이 불안과 칭얼거림이 약간 섞인 투로 묻자 여자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투둑,

 

돌 부스러기 같은 것이 반쯤 들춰진 종이 박스 위를 연약하게 두드렸다. 아이의 몸이 바짝 굳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마치 이끌린 것처럼 고개를 들자, 골목 담 위에 선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이는 제게로 낙하하는 형체를 마지막으로 눈을 질끈 감고 본능처럼 동생을 감쌌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미약한 산들바람. 그리고 약간의 소란.

시간이 지나도 아프지 않고, 저편에서부터 밀려온 듯한 먼지가 다리를 간지럽혔다.

남동생을 품 안에 가두듯 안고 있던 아이는 눈을 슬쩍 떴다.

 

“괜찮으냐?”

 

꼭 방금 전의 바람과 같은 잔잔한 목소리가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슬며시 지은 미소는 온화했고, 눈동자는 다정했다.

여자아이는 상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도르륵 굴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서운 무언가’가 덤벼들었던 것 같은데, 꼭 꿈을 꾼 것처럼 주위가 조용했다. 아이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면서도 빛이 깃든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히, 히어로……예요?”

“아니.”

“힉, 그, 그럼……!”

 

빌런?! 저도 모르게 동생을 끌어안은 팔에 꽈악 힘을 주던 아이가, 이내 눈앞의 사람이 짓는 깃털 같은 웃음을 보고 멈칫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아니, 나쁜 사람이었으면 저와 동생을 본 순간 나쁜 짓을 했을 것이다. 아직 꿈인지 진짜인지 알쏭달쏭한 방금 전의 형체처럼.

 

“히어로도, 빌런도 아니다. 그렇지만 가끔씩…… 사람을 돕고 다니는 이라고 해둘까.”

“사람을 도와주는데 왜 히어로가 아니에요?”

“글쎄… …사람을 구하는 데 있어 꼭 히어로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그치만…….”

 

아이는 어물거리다가 제게 내밀어진 사탕에 말을 멈췄다. 척 봐도 딱딱해보이는 살이 잔뜩 있고, 잔 흉터가 있는 손 위에 있는 막대사탕 2개. 아이가 반응하기도 전에 남동생이 먼저 사탕을 집었다. 여자아이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저 또한 사탕을 쥐었다. 아이들을 보며 잔잔한 웃음을 흘리던 이가 팔을 내밀었다.

 

“이리 온. 어른들이 있는 곳에 데려다 주마.”

 

아이들은 저항 없이 눈앞의 이에게 안겼다. 팔 하나에 아이 하나씩. 그는 여자아이가 제 목을 끌어안고, 남자아이가 사탕을 문 채 제 옷깃을 꼬옥 잡는 것을 느끼며 아이들을 고쳐 안았다.

 

“눈을 감고 다섯을 세거라. 금세 도착해있을 거란다.”

 

잔물결이 스며드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이는 눈을 감았다. 남동생도 사탕을 도르륵 굴리며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천천히 다섯을 세는 그 순간에 살랑, 바람이 부는 느낌이 들었다.

 

“자, 저기 너희 부모님이 계신다. 어서 가보렴.”

“어, 어? 어─ 엄마! 아빠!”

 

다음에 눈을 떴을 때엔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 대피소로 보이는 장소, 와글와글 몰려 있는 사람들. 아이의 보폭으로 오십 걸음쯤 앞에 부모님이 있었다.

남매는 한달음에 달려가 엄마 아빠에게 안겼다.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감격과 안도 어린 목소리와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품안에 가둬오는 온기를 느끼며 여자아이는 비로소 콩닥거림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아이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몇 번이나 상태를 확인하던 부모가 이내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거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분명 너희들을 놓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모르는 어른이 데려다 줬어. 저기에… …어? 어디로 갔지?”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절 데려다준 어른을 찾아보려 두리번댔지만 상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감사한 일이네. 엄마와 아빠의 말을 들으며 아이는 멀거니 제 손안의 막대사탕을 내려다보았다.

 

 

란도셀을 식탁 아래에 내버려 둔 채 다리를 흔들며 밥을 먹던 아이가 거실 TV 속 리포터들의 높은 목소리와 함께 비춰진 익숙한 얼굴을 보고 “어? 그때 그 사람이다!” 하고 외치는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한산한 길목, 종종 누군가의 만남의 장소로 쓰이는 시계탑 앞에서 윤이 흐르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려 묶은 여인 - 미치루는 가만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외식이었다. 다만, 약속 상대와 가기로 약조했던 일식집은 이미 예약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미치루는 그다지 초조하거나, 불만 어린 기색 없이 제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렸다.

 

그때, 산들바람이 일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엔 짙은 남색빛이 도는 하카마를 단정히 차려입은 이가 바닥에 발을 딛고 있었다. 순백의 머리카락이 새가 떨어트린 깃털처럼 가볍게 나부꼈다가 내려앉고, 펄럭였던 소매가 얌전히 가라앉았다. 문자 그대로 ‘눈 깜빡할 새’에 나타난 이는 상대를 보자마자 몹시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오. 많이 기다렸소?”

“별로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시에서 빌런들이 한 차례 소동을 일으켰단 뉴스는 접했습니다만, 시민들을 구하고 온 것이지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아이들이 있었기에 부모에게 데려다 주고 왔소. 무리에 있던 빌런 중 하나가 아이를 해하려 하기에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고 왔소이다.”

“잘하셨습니다. 그대의 영역에서 감히 일을 벌인 치들을 가만 내버려두어선 안 되지요.”

 

붉은 찔레꽃 같은 여인의 칭찬에 미우는 슬며시 잔잔한 웃음을 띠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꾸짖거나 배려하려 하지 않는 것도, ‘사자나미 미우’를 이해해주는 것도.

미우가 자리를 떠난 후 일을 벌였던 또다른 빌런들도 그 근방의 히어로들에게 퇴치되었음을 알린 미치루가 곧 아, 하고 운을 띄웠다.

 

“원래 가기로 했던 곳은 취소하고 다른 곳을 예약했습니다. 괜찮겠지요?”

“미치루. 당신이 고른 곳이라면 어디든 좋소.”

“그럼, 레스토랑으로 가죠.”

 

미우는 손을 내밀었고 미치루는 그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바람결에 구름이 밀려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이내 시계탑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

 

 

“고민이 있어 보이십니다.”

 

미치루가 그리 말했을 때, 미우는 입을 벌린 그대로 멈칫했다. 포크에 매달려 있던 스테이크 조각이 접시를 향해 툭, 미끄러졌다. 미우는 빛이라곤 깃들지 않은 검은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가 이내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리 보이오?”

 

당신의 눈은 피할 수가 없는 것 같소. 약간은 멋쩍은 목소리로 해오는 말에 미치루가 웃으며 답했다. 알고 지낸 세월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슨 고민입니까?”

 

스윽. 칼이 부드럽게 고기를 갈라 가는데 소리 한 점 나지 않았다. 붉은 기가 조금 도는 고기를 입에 넣은 미치루가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고 물었다.

미우는 잠시 말없이 제 앞에 놓인 물잔을 바라보았다. 일렁,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 유리컵 속의 투명한 물에 작게 파문이 일었다.

 

“최근……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터전을 어지럽히는 치들이 더 많아진 것 같소.”

“그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빌런은 계속 생기고 있으니까요. 히어로와 달리 빌런은 따로 자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 그 수가 개미 떼처럼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알고 있소. 그러나, 그뿐인 이야기는 아니오.”

 

그가 영웅이라는 자리에서 물러난 뒤, 훌륭한 히어로들이 많이 생겼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이들. 저마다의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자들. 제게 감히 그들을 후배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대견했다. 평화를 위해, 손에 닿는 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것은 얼마나 갸륵하고… 힘든 일인가.

고통을 안다. 그 고통을 익히 앎에도 끊임없이 검을 휘둘러야 할 때가 있음을,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있음을 안다.

가끔, 수십의 생명을 수호해도 수백의 생명이 스러져 갈 때의 순간을 목도하고 길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분명 과거의 그는 지쳤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검을 휘둘러 악을 베고, 처단하고, 단죄하고, 쓰러트려가면서 ─ 그 끝없는 행위의 종장이 언제쯤 보이게 될지, 내심 갈구하던 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것이 찾아오기까지 곁에 있을 것만 같던 나비가 곁을 떠나고, 더는 꽃에 닿을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그리도 흔들리고 말았겠지.

 

허구에서부터 탄생한 이야기에는 으레 하나,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있고 그것을 무찌르고 나서야 진정한 평화, 행복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좋든 싫든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오. 전부를 바칠 각오로 손을 뻗어도 끝내 이룰 수 없는 것이 있고, 영원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라도 마지막에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소. 웃음기 없이 가라앉은 입매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잔물결보다는 바위에 부딪쳐 흩어지는 포말 같았다. 언제까지고 해안가의 모래를 부드럽게 쓸어내다 바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물결이, 산산이 부서져 스러지는 최후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달은 듯한 울림.

 

“쉼이란 안락하오. 휴식이란 편하더이다. 그런 내게 어떤 이가 말했지. ‘평생 지켜주겠다고 했으면서, 부상 따위를 이유로 우리들을 포기하다니! 믿었는데, 우리를 버렸어!’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오. 내가 진정 지쳤다는 이유로 쉬어도 되는 위치였는가. 영웅의 이름을 내려놓고, 이후 내가 행하는 수호는- 그저 죄책감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알량한 행위가 아닌가.”

 

잔 속의 물이 일렁였다. 가벼운 파도가 휘몰아쳐 유리로 된 벽을 때렸다. 그 속에서 한때-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자가 씁쓸함을 머금고 웃었다.

 

“힘이 있는 이에게는 그만큼의 책무가 따르니.”

 

아래로 가라앉은, 누군가의 마지막 숨 같은 거품을 끝으로 수면이 잔잔해졌다. 고요함. 평정. 흔들림 없는 검 끝 같은 것. 미우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저처럼 식기를 내려놓은 채 줄곧 저를 바라보고 있던 미치루의 곧은 시선과 시선을 이었다. 미우는 제 어리석음에 또 한 번 쓰게 입가를 비틀었다.

 

“이제 와 이런 말을 하여 미안하오.”

“미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내게 쉬어도 된다고, 무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지 않소. 나는 그때, 줄곧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에서 풀려나는 듯한 감각을 느꼈는데. 시간이 이만큼 흐른 뒤에야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니오리까.”

“그럴 수도 있지요.”

 

산뜻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미우는 흐려졌던 눈빛을 다시 바로했다. 톡, 이제는 빈 와인잔을 손끝으로 건드려본 미치루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은 유동적인 존재이지요. 기회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생물입니다. 그렇지만 또 그만큼, 변화하기 어렵기도 하지요. 유리잔 속의 내용물이 아무리 갖가지 것으로 뒤섞인다 한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의 본질까지 변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녹색의 눈동자가 빛났다. 언제 피어날지 모를 붉은 꽃봉오리를 감싼 녹음과도 같은 눈이었다.

 

“미우. 그대는 선한 이입니다. 선한 이가 선한 일을 하고 싶다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미치루….”

“그리고 언젠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대가 해낸 위업이 어디 보통 것이었나요. 쉬는 것이 좋겠다 말했다고 바로 은퇴해버린 것에는 놀랐었습니다만, 이런 경우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그렇소……?”

“그러니 제 말은,”

 

미치루가 눈가를 접어 휘었다. 초목이 꽃잎에 감싸인 듯한 웃음이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후회 없이 하시라는 겁니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자책할 시간에 바라는 것을 위해 나아가도 부족한 생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결과를 만들고,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다가 결국 후회할 운명이라면 차라리 온힘을 다해 부서져 보는 것이 나을 터이니.

 

맡은 바 사명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왔다. 그러다 결국 제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제동이 아니었다면 언젠가는 더 크게 망가지고 말았으리라. 그렇기에 책무를 뒤로 하고 길에서 물러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렇기에 후회한다.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했음을. 이제 와 그 선택이 옳은 것이었나 흔들리고, 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준 이에게 죄악감을 가졌다. 선택과 선택 사이에서 길을 헤매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결국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인 것을.

 

미우는 식기를 들고 식사를 마저 입에 넣었다. 조금 식고, 베어낸 틈새로 육즙이 꽤 빠졌지만. 가리는 것이 그다지 없는 그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막 식사를 시작했을 때보다 표정이 풀어진 그를 본 미치루가 엷게 미소 지었다가, 이어 약간 짓궂은 얼굴을 했다.

 

“그건 그렇고. 그대를 그렇게 고뇌하게 만들도록 부추긴 이는 누구입니까?”

“─그건….”

 

미우는 아주 잠깐.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정갈하게 차려 입고 안경을 쓴 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셀 수 없이 늘어가는 악의, 그것을 수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선의.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데 있어 한 명의 손이라도 더 있어주었으면 한다고 말하던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곧이어 -그밖에도- 갑주를 입은 이며, 익숙한 이-동료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날이 불안한 현실에 두려워하면서도 눈에 틔운 불씨를 꺼트리지 않은 이들이며, 오늘 마주하였던 어린 아이들까지.

그저 누군가를 지키고, 수호해야만 한다는 의지에서 잠시 비켜 나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다시금 천천히 제 정의를, 신념을, 이유를 되새기고 마주했다.

 

“글쎄…… 누구든 있지 않겠소?”

 

사자나미 미우는 슬며시 입가를 휘었다. 흘러가는 구름 한 자락, 허공을 맴도는 깃털 하나. 바위 위로 튄 포말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앎에도 문제없다고 읊조리는 듯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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