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밀리 브론테 - 폭풍의 언덕

20240401~20240403

한양물 모임에서 독서 모임이 시작됐다. 첫 작품은 (내가 읽고 있던)‘폭풍의 언덕’이 되었다.

몇 년 전에 알라딘에서 구매하고는 처음 몇 장을 읽다 말았는데,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직전에 읽었던 ‘디 에센셜: 다자이 오사무’가 너무 우울하고 쳐지는 분위기였으니 연애 소설을 읽으면 환기가 될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였다.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과 함께 고전 로맨스 소설 3대장 정도로 취급되기에 그 두 작품과 비슷한 감성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놓치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세 작품은 그냥 묶인 게 아니라 그 셋으로 로맨스 소설 취향을 알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결이 달랐다는 것이다. 소설의 중반에 접어들 때까지도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고, 심지어는 이 소설이 히스클리프와 록우드의 사랑 이야기라고 착각하며 읽었다.

우선 초반에 나오는 록우드와 히스클리프의 첫 대면 장면을 ‘싸가지 없는 남자 주인공’과 ‘굳센 여자 주인공’의 만남으로 이해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관계성을 금방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그것으로 대입해서 그 오해가 더 오래갔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이야 책 뒤에 수록된 해설도 읽었고, 따로 검색도 해가며 다양한 감상문을 읽어서 그 장면은 그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받아들이게 됐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그랬다.

록우드는 워더링하이츠에서 돌아온 후 넬리로부터 히스클리프의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다. 방금까지 내가 여자주인공이라 생각하던 인물은 독자인 나처럼 이야기 밖의 관객이 되고, 소설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런 구조를 ‘액자식 구성’이라 하는데, 문장이 구어체로 되어 있어 마치 내가 소설 속의 청자(록우드)가 된 것처럼 이입할 수 있게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언쇼 집안에 오게 된 히스클리프. 그리고 그런 히스클리프를 이방인, 더 나아가서는 이물질처럼 취급하는 주변 사람들(특히 힌들리). 그 사이에서도 히스클리프와 가까이 지내는 캐서린. 내가 느낀 작품의 세 파벌(?)은 대충 이렇다. 히스클리프와 힌들리(를 비롯한 주변인들)은 눈에 띄는 갈등을 보이지만,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과도 큰 갈등 없이 지낸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나는 캐서린이 정말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나? 하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다. 히스클리프야, 고난 뿐인 삶에 유일한 빛 같은 존재인 캐서린을 사랑하지 않는 게 더 부자연스럽겠지만… 캐서린은?

캐서린도 처음부터 히스클리프를 좋아하던 건 아니였다. 기대하던 말 채찍 대신 웬 지저분한 남자애를 데려온 아버지 때문에 엉엉 울었던 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였다. 넬리는 캐서린이 금방 히스클리프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그게 그를 동등한 입장에서 좋아한다는 의미였을까? 여섯 살도 안 되었는데도 농장의 말을 다 타고 다닐 정도로 활발한, 곱게 자란 여자 아이가 말 채찍 대신 나타난 집시 남자애를?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함께 있을 때에도 캐서린이 그를 대하는 모습은 뭐랄까, 좋아하는 장난감 내지는 특이한 애완 동물을 아끼는 모습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스러시크로스 저택에 간 날,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만 쫓겨난 상황에서도 린턴 집안의 하인에게 시중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캐서린이 조금 긴 기간 동안 스러시크로스 저택에서 지내고 돌아와서는 히스클리프가 새까맣고 흉측하다며, 지저분하고 이상하다며 웃는다. 집이 비는 날 에드거를 집으로 초대하고, 히스클리프에게는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히스클리프가 같이 있고 싶다고 하자 에드거와 이사벨라가 온다고 거짓말을 하며 히스클리프를 내보내려고 했다. 그 말에 히스클리프가 에드거와 이사벨라를 바보 같은 친구들이라 칭하자 너는 나를 즐겁게 해주는 말도 못하는 벙어리나 마찬가지라며 쏘아붙였다.

막상 찾아온 에드거에게는 갖가지 히스테리를 부리더니, 어찌 된 일인지 연인 비스무리한 사이가 되었고 청혼까지 받았다. 심지어 수락까지 했다. 그러고선 난 정말 불행하다며 눈물을 흘린다. …나도 한 감정기복 하는데 따라갈 수가 없었다.

캐서린은 에드거와 에드거의 재산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를 받아들였지만 히스클리프 역시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청혼을 받아들인 자신의 선택에 불안을 느낀다.

“어디에 영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영혼은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그 영혼… 믿을만한가? 믿을만한 영혼이라면 진작 다른 잘못부터 알았을 거다. 심지어 그 뒤에는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내 품위가 떨어질 테지.”라는 말이 온다. 결국 그 말을 듣게 된 히스클리프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고, 그 길로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다. 그 와중에도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는 사랑에 빠진다는 게 뭔지 모를 것이라 말한다.

이 후에도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초중반에 박힌 인상 때문인지, 캐서린의 오락가락하는 태도가 히스클리프 마저 망치고 결국 언쇼 가문과 린턴 가문까지 망쳤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로맨스 소설이 제목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대혼란 쇼일 줄은 몰랐고 약간은 당황스러운 기분 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좋았던 점을 고르라면 내가 생각하던 “고전” 로맨스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의 풍부함이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제인 에어’는 두 로봇의 사랑이였고 ‘오만과 편견’은 이미 익숙해진 형태의 감정들이라 큰 감흥이 없었지만, ‘폭풍의 언덕’에서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감정에 맥도 목추리고 휩쓸리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신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