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청춘은 노숙이지 (1)
프로테우스
♪: Van Morrison - Bright Side of the Road
*데리-더블린 직통 기차가 2002년 기준 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이 동시에 존재하네요... 후자를 채택할 시 마법과 비행기 없이 이틀 가지고 학교 가는 열차를 타러 갈 수 없기 때문에 있다고 상정했습니다. 고증 오류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포일러 하나, 졸업 후 키오건 오’켈리는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학기가 시작하기 이틀 전 동생과 집의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학교 일찍 갑니다>를 방의 침대 위에 올려놓고 나올 때에는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키오건은 굳이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섰다. 가로등이 그닥 많지 않은 스트라반의 골목은 어둑했고 동쪽 어드메에서 희미한 빛만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보이는 것들은 그닥 많이 없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키오건은 키바가 마당에 심어 둔 이름 모를 풀들과 시기보다 일찍 핀 코스모스들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차고에서 자전거를 꺼내왔다. 몇년간 거의 만져 본 적도 없어 상태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딱 생각만큼 상태가 안 좋았다. 이런 것도 레파로로 고칠 수 있으려나, 키오건은 생각하다가 손잡이에 슬어 있는 녹을 보고 그 생각을 관뒀다. 그래도 이동하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한 번 타 보고자 자전거를 꺼냈다.
일찍 나선 이유는 간단했으나 데리까지 가는 길은 간단하지 않았다. 분명 버스로는 차가 막히지 않으면 20분 정도 되는 거리였으나 더블린으로 가는 첫차를 타기 위해선 버스 첫차보다 일찍 움직여야 했다. 순간이동으로 갈 수는 없었고 굳이 아침부터 4시간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틀을 더 기다리고 동생과 함께 기차역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동생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자신이 껄끄러웠다. 동생이 아버지한테 세계가 진짜 멸망하냐고 물어보는 걸 들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그걸 듣고 아버지는 네가 세상의 모든 약초들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멀쩡할 거라고 하셨으며, 함께 그걸 들었던 어머니께서 너희 마법사들은 너무 먼 데를 보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타박하는 걸 우연히 짐을 정리하다가 들어버렸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일찍 나가는 겸 생각해보기로 했다.
잠시 키오건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바니카는 현재 집을 나와 있는 상태였는데, 그 가출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바니카는 심했을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는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 사실 또한 화근이었던지라 짐을 일찍 챙기게 되었던 것 같다. 비록 그런 답을 한 바니카 미들턴은 지금 현재 옆에서 떠날 준비를 함께 하고 있어 집을 나온 사람에게 잠깐 머물라고 방을 내줬는데 조금 더 쉬지 않고 함께 간다는 게 과연 괜찮은가 고민을 했지만 이미 바니카는 나와 있었고, 여기에서 딱히 지금 철회하고 들어가라고 하기에도 상황이 애매하다는 게 자신의 지론이라, 이왕 나온 겸 끝까지 함께 가는 걸 목표로 삼기로 했다.
어쨌든 길과 생각이 울퉁불퉁한 것 치고, 해가 없어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 것 치고 제법 나쁘지 않은 여정이었다. 40분 정도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강을 따라 이동하는 길이 나오는데, 조용히 어둠을 담은 강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거리에 차는 없었기 때문에 일직선의 길을 가면서 잠시 한눈을 팔아도 제법 보기 좋았다.
생각보다 떠난다는 행위는 쉬웠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 머물렀다면 가지게 되었을 하나의 가능성을 놓친 거겠거니 싶었다. 그런 생각들과 함께 낡은 자전거를 이끌고 찬공기에게 열렬하게 양 뺨과 이마, 귓볼을 꼬집히다 보면 어느 순간 가로등의 간격이 미세하게 좁아지며 어스름 속에서
데리
의 기차역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는 근처 철물점에 미련 없이 버렸다. 아마 필요한 사람(아마도 주인)이 잽싸게 주워 가거나 그렇게 자연의 일부가 되어 세상이 정말로 멸망해 이 데리라는 스트라반보다는 크나 벨파스트보다는 작은 도시까지도 스멀스멀 기어들어왔을 때 이 자전거가 녹스는 걸 막아주어 오히려 멸망에서 구원받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몇 년의 정을 담아 조심스럽게 철물점 근처 기둥에 자전거를 세워 둔 키오건은 기차역으로 들어가 더블린행 열차 티켓 하나를 끊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승차권 판매원은 키오건의 그 초록색 로브를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해 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색채 같은 걸 가진 천은 왜 몸에 뒤집어쓰고 있냐고 꼬치꼬치 토를 달았지만(파란색은요?) 착실하게 표 두 장을 끊어주었다.
열차 탑승은 바로 가능했기 때문에 창가 칸에 앉아 [ DER ▶ DUB ] 이 적힌 표를 만지작거리며 키오건은 천천히 떠오르는 햇빛을 구경했다. 아직 광원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키오건은 이런 일출의 순간을 꽤 좋아했다. 노란빛과 오묘한 붉은빛이 어둠과 만나 희붐한 보라색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엉망진창의 묽은 무지개 같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곧 열차가 출발했고, 잠시 눈을 붙이고자 눈을 감았다. 이제는 완전히 해가 떠 눈꺼풀을 뚫고 햇빛이 들어왔지만 잠을 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은 꽤 남았으니 여기에서는 자 두는 게 이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깨지 않고 쭉 자다 보니 체감상 30분으로 느껴지는 4시간 뒤,
더블린
으로 열차가 진입하고 있다는 방송에 눈을 떴다. 바니카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일어나는 데 시각 기관보다 조금 늦게 걸리는 두뇌를 붙잡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사람이 꽤 내려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자리는 띄엄띄엄 채워져 있었고,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한가롭게 보드 게임을 하다가 방송에 잠시 게임을 중단한 듯했다. 구름이 조금 꼈지만 기관사의 목소리는 유쾌했고 창밖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샴록이 그려진 그래피티들은 근사했다. 창문이 잠겨 있어 바람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이 바람을 맞았다면 분명 빗자루를 탈 때 만큼 시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더블린은 한 나라의 최대도시이자 수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제법 조용한 도시였다. 레오폴드 블룸이 하루 종일 근방을 돌아다녔던 그 날짜였다면 축제를 하느라 조금 더 북적거렸을지도 모르지만 학기가 시작되기 전의 도시 시내는 딱 하트퍼드셔 시내 외곽보다 미세하게 붐비는 수준이었다. 그 도시 사이사이를 걸어가며 키오건은 페퍼민트 차를 입에 물고 건물 사이의 낡은 홈통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저 멀리에 어떤 뾰족한 첨탑 같은 게 보였는데, 더블린 스파이어인가 싶었다. 그걸 제외하면 스트라반보다 약간 번화했지 강도 있고 사람들이 있고 오전부터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복수형으로 있다는 점에서 별 다를 점이 없었는 메마른 감상을 내리며 키오건은 계속 걸었다. 차이라면 여긴 북쪽 남쪽으로 구도심 신도심이 갈라져 있다는 점 정도가 다라는 평을 내렸다. 근처에서 바니카 손에 들려 준 무화과 파운드 케이크의 향이 희미하게 났다.
워낙 출발을 일찍 해 아직도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기까지는 두 시간 가량이 남아있었고, 영국으로 가는 배가 출발하기까지도 딱 그 정도 시간이 남았으며, 거기까지 버스로 가는 데에는 환승 3번에 1시간 40분, 걸어가면 1시간 20분이라고 지도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도보를 택했다. 이정표들이 많아 어려운 여정은 아니었다. (혹은 에이레네 만세. 당신이 형성을 도운 루틴이 빛을 발했습니다.)
“홀리헤드행 표 두 장 주세요.”
“홀리헤드는 뭣 하러 가나?”
“학교 갈라구요.”
“학교가 홀리헤드에 있어?”
“아뇨, 거기서 또 차 타고 가야 해요. 런던까지요.”
“아니 너는 저 위 쪽에서 온 거 같은데 벨파스트에서 비행기 타고 가지 그러냐?”
“비싸잖아요.”
키오건은 솔직하게 답했다.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으나 첫번째 이유이기는 했다. 비싼 비행기값은 절대 반문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선박 표 판매원은 어렵지 않게 표를 끊어주었다. 교복을 입고 배를 타러 가는 사람은 처음이었는지, 혹은 배를 타러 가는 사람들 중 이야기 상대가 되어 준 사람은 적었는지 이 판매원은 친절했으나 말이 많았다. 의외로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겼으나 질문 많은 사람 앞에서는 약간 속수무책이었던 키오건은 하나하나 대답하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나 자신을 의심했다. 그렇게
“혹시 전에 배 타 봤냐?”
“아뇨? 왜요?”
문득 신입생 때가 생각났다. 그 때 이오랑 해외 나간다 배 안 타 봤다 뭐다 하는 얘기를 나눴는데 이제야 처음 타 보네. 걔도 이번에야 미국에 갔다고 했는데 -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그걸 곱씹고 있는데 판매원이 장난이라도 치듯 웃었다.
“아니야, 준비 만반으로 하고 본 보야지 돼라 - ”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 싶어하며 승선하는 키오건의 머릿속에서 그 판매원의 얼굴은 사라지고 웃음만이 잔상처럼 남았다. 마치 그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만난 체셔 고양이의 웃음처럼. 배의 객실은 1층에 있었는데 선착장보다는 약간 아래에 있었다.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 키오건의 머리카락을 강바람보다는 굵은 바닷바람이 마구 헤집어놓았다. 하얀 배들은 전부 일정한 간격 아래 놓여 있었는데, 제법 그 수가 많아 키오건이 타는 배에 가려졌는데도 삐죽하게 몇 척의 배 끝부분이 보였다. 눈에 들어온 앞머리를 잡으면 건조한 바람이 이때다 싶어 눈을 찔렀다.
홀리헤드
항구에 약 5시간 뒤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영국 땅을 디디며 키오건은 절대 수업으로는 배우지 못할 귀중한 두 개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 사실은 아래와 같다;
1. 자신은 뱃멀미를 한다.
2. 그것도 굉장히 심하게.
‘굉장히‘ 위에 한 번 덧쓰며 강조한 뒤 옆에 따옴표를 세 개는 붙인 다음 밑줄까지 그어야 할 정도였다. 이 사실을 적어내릴 냅킨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아니 사실 없는 건 냅킨뿐만이 아니었다. 뱃속도 완전히 비워버렸고(게워버렸고) 몸은 피곤했지만 그래도 바니카가 즐거워 보이니(추정) 다행인 건가 생각하기로 했다. 오히려 바니카의 상태가 더 좋아 보였다. 퀴디치 주장 하느라 체력이 좋아진 건지 아니면 멸망 때문인지 가출 때문인지 자신에게 브레이크 걸기를 그만둔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속적으로 맴돌았지만 그걸 문제 삼거나 이야기로 꺼내기에는 몸이 너무 고단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 움직여야 했다. 잠시 쉬는 순간 열차는 떠나버릴 수 있다. 더 잃을 게 없다는 걸 위안 삼기로 했다. 그 무엇도 자신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키오건은 항구의 잔상을 뒤로하고 손가방을 다시 들었다. 기분이 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말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어딘가로 향해 간다는 건 굉장히 즐거운 기분이라는 사실을 굳이 빗자루를 타지 않고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생각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굳게 숨겨져 있었는데, 그걸 찾아내서 먼지를 닦고 말로 세공해 낸 기분이 들었다. 의외로 상쾌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마치 상처가 났던 곳을 비마법사식 알코올 소독약으로 문질렀을 때 시리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떠나는 그 순간은 살고자 하는 두 번째 의지로구나! 즐거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형상을 이루었다. 비록 배는 매우 허했고 주머니에는 갈레온과 유로 몇 장, 그리고 미처 환전에 실패하고 교복에서 빼는 것도 까먹어버린 퀴드 동전만 있어 살 수 있는 저녁은 없었지만 목이 너무 말라서 저 분수대의 물을 들이키고 싶지만, 어쨌든, 떠난다는 건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다. 왜 오’켈리들이 그렇게나 떠나버렸는지 알 것도 같은 기분으로 키오건은 걸음을 옮겼다. 몇 가지 가능성을 뒤로하고, 모든 가능성을 내 앞으로 두고, 아직도 그닥 굳건해지지는 않은 발걸음으로 땅을 밟았다. 아니 그냥 염치 불구하고 바니카한테 돈을 빌릴까..? 아니 같이 고생하는 친구한테 돈까지 빌릴 이유가 있나..? 배고픔과 이성이 머릿속에서 계속 싸우게 둔 채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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