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들

연꽃 먹는 치

참 어처구니 없는 수업이야 - 보가트 수업이 끝난 뒤 과제용 양피지를 작성하며 키오건은 생각한다 - 하지만 내 보가트가 더 어처구니 없었지. 굳이 누군가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공포 앞에다가 데려다가 놓는 수업은 그 스파스타(*스파르타) 같은 시대에 이미 끝난 것 같았는데 높으신 분들은 굳이굳이 어린 학생들이 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애들을 바다에 던져 넣는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치고 키오건 오’켈리의 보가트는 본인의 생각처럼 제법 무난했다. 형상화됐던 걸 보고 오히려 키득거렸던 사람도 있었다. 의외로 이것은 그 보가트를 만들어낸 사람에게도 해당됐기 때문에 그는 리디큘러스를 외우기 전부터 입꼬리가 비틀리게 올라가 있었으며, 후련하게 리디큘러스를 맞고 변해버린 형상을 보며 웃을 수 있었다.

덕분에 굳이 할애한 시간은 적었으며 기억에 각인된 정도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 보가트라는 것은 이 수업의 과제를 제출한 학생들의 정의 란에 쓰여있는 것처럼 그것을 본 당사자의 공포를 형상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향력 대비 지속적으로 신경을 건드렸다. 물론 그마저도 금방 털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아래는 보가트의 정의 제외 그가 작성한 보고서의 전문이다. 그는 초고를 완성도 있게 쓰는 편은 아니었던지라 지나간 곳을 덧씌우는 데 할애된 잉크의 양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편집된 내용의 완성도가 보장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보가트: 나 자신

이상하니까 부연설명 추가하겠습니다. 저의 보가트는 저보다는 약간 나이가 들어보이는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15살에서 29살 사이의 그 어딘가 같았습니다) 저였는데, 카라멜 맛 나는 비스코프 과자 포장지를 벗겨서 먹고 있었습니다.

첫인상: 공포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도시락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서웠다’는 감정 아래 있었던 기억은 초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친구와 학교에 갔을 때가 전부거든요. 그 때 제 뒷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코드 레드’를 외치며 버스를 멈추게 했는데, 그 사람 말로는 자기 옆자리에 누군가가 폭탄을 두고 갔다는 거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그건 폭탄이 아니라 그냥 누가 놓고 간 도시락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폭탄인 줄 알고 무서웠거든요습니다. 호그와트 입학하고 나서도 비슷한 느낌을 겪긴 했으나 그건 공포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전환점: 눈을 마주쳤습니다.

텅 비어 있었습니다. 눈이 없다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눈이 있기는 있었는데 뭔가 공허한 느낌이었어요. 행동은 계속 그 과자를 까서 먹고 있는데 계속 로봇¹처럼 똑같은 행동만 하고, 별다른 걸 하지 않고. 그걸 깨닫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 때 저는 저 보가트-제가 15살에서 29살 사이의 어딘가가 아니라 훨씬 그것보다 더 많은 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냥 그 한 시간대에 묶여서 나아가지 못한 채로 계속 그렇게 있었던 거예요. 5년이고 10년이고 100년이고 쭉, 저라는 존재를 잊은 채로.

해결: 리디큘러스Riddikulus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ridiculous 주문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의 경우에는 다행이었네요. 일어나지 않을 미래이고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보여준 거라고 취급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마음껏 비웃어주며 퇴치할 수 있었습니다가 가능했습니다. 제가 바나나 껍질로 변하는 게 엄청 유쾌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건 제가 아니라 보가트였으니 다른 것이라고 취급할 수 있었습니다했습니다.

개선점: 그 모습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기,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지 말기 개선점이 뭔지 착각했습니다. 저의 경우 별다른 개선사항은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인지 예상하는 건 완전히 실패했지만 그래도 나름 준수한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공포를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¹비마법사 세계에서 인간을 본따 만든 기계

과제를 마친 키오건은 기숙사의 침대에 풀썩 누웠다. 많은 내용을 쓰다 보니 몸이 고단했다. 자연스럽게 머리맡으로 시선은 돌아가게 된다. 신입생 때 친구들과 교환했던 화분들은 슬리데린 기숙사의 절망적인 채광을 뚫고 잘 자라나고 있었고 (물론 종종 빛을 쬐여 주긴 한다.) 읽던 책들은 선반에 잘 놓여있었다. 책 한 권을 더 읽을까 생각하다가 오늘은 조금 이른 잠을 자도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뒤 눈을 감았다. 고요 속에서 잠을 청할 때면 가끔씩 외갓집에 갈 때면 어머니가 몇 번이고 재생하던 1998년의 라디오 멘트가 머릿속에 떠오르고는 했다. 71.12퍼센트. 압도적인 투표율 속에서 압도적인 찬성율을 이끌어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사람들의 평화를 향해 직접 입을 열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 이 지역이 이제 미래로의 첫 걸음을 내딛은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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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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