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자발라른

[케발라] 일그러진 거울 - 1

케이드 x 자발라

* 케이드x자발라 

* 공미포 2400여자 

* 비공계 계정에서 풀었던 썰 이용 

* 지나간 시즌에 대한 스포일러 있음 

* 데가 설정에 대해 아는 게 없음: 오류 발견 시 수정 

* 개인적인 설정 다수 추가 

“준비됐어, 친구?”

 책상에 다리를 꼬고 앉은 엑소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자발라는 그 뒤에 비치는, 어둠 속 뿌옇게 빛나는 여행자를 향해 눈을 가늘게 접었다가 떴다. 희미한 간접 조명 아래 색 옅은 엑소에 비해 더없이 크고 뭉툭한 손을 내민다. 세월이 아닌 고통이 남긴 흉터와 주름을 본 엑소가 렌즈를 빛낸다.

“정말로?”  

“아니, 확인할 게 있네.”  

“그럴 줄 알았어.”

 낄낄 웃고는 후드를 젖힌다. 자발라의 눈에 스치는 그 흙먼지가 네소스의 것인지, 고대의 감옥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엑소의 형상이 고개를 기울인다.

“케이드는 날 그렇게 부른 적 없네.”

“그래서 그래? 케이드가 속마음으로 그랬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훨씬 더 황당하고 간지러운 호칭을 생각했겠지.”

 무거운 손을 내밀어 맞잡는다. 가벼운 악수에 묻어 나는 더없이 묵직한 그 모든 것에도 자발라를 놓지 않고 오히려 더 밝게 웃는다. 휘어진 부품의 선을 따라 그려지는 웃음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냈다. 더 이상 손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똑똑하네, 사령관님. 그러면 이런 금속성 유령은 어떻게 생각해? 응? 만져지고 차갑잖아. 아, 대령은 누가 쓰다듬을 때마다 뿌리치더라. 일은 잘 하지만 차가웠어.”

“에리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겠어.”

 무뚝뚝한 말에 웃음을 참는 듯 어깨를 들썩이더니 기계음에 가까운 높은 쇳소리가 날 때까지 깔깔 웃는다. 케이드는 가벼우나 경박한 적 없었고 소리 높여 웃어도 귀를 후벼 판 적은 없었다. 케이드의 모습을 빌린 엑소의 형상이, 아니면 엑소의 모습을 한 유령이 웃는다.

“얼굴 없는 붉은 수호자들을 행성에 묶어 놓는 게 무엇일까? 빚? 원망? 뽑자마자 놓고 죽어버린 참새에 대한 미련? 자발라, 케이드의 모습을 한 먼지 덩어리를 탑에 가둔 게 무엇일까?”

“이만 사라지게나.” 

“그럴 순 없지! ‘내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케이드도 여기엔 잘 안 놀러왔잖아.”

 책상에서 내려와 한 걸음 내딛는다. 숨을 마시고 단단히 뿌리내려 참았다. 가슴 앞까지 다가온 이가, 자발라가 차마 마음껏 그리워하지도 못 한 누구를 기억에서 끄집어내는 존재가 웃는다.

“그러니 빨리 결정해. 나랑 갈지, 나를 사랑할지, 나를 통해 내 너머의 것을 볼지. 아홉도 어둠도 빛도 아닐 거야. 고난을 포기하면 성장하지 않는 대신 주저앉지도 않겠지.”

 제 허리를 능숙하게 끌어안는 손길도 어깨부터 뺨까지 애교처럼 찌르는 이마의 뿔도 익숙한 것이라 자발라는 이를 악물고 그를 밀어냈다. 그는 아주 예전부터 자신이 미쳤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헛된 것을 볼 경우에 대해서도 대비해야만 했다. 비록 전부 잊고 무너져 소용없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케이드보다도 널 사랑할 순 없겠지만…….”

 자발라의 손짓 한 번에 흐트러진 형상이 잔상으로 남아 떠돈다. 그는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리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만.”

 그 대상이 자신인지, 방금 전까지 저를 괴롭히던 모습인지. 고통에 찬 짧은 말마저 사라진 사무실은 그저 고요하다. 자발라는 모든 것이 고장난 것처럼 들리지 않는 사무실에서, 스스로가 고장 났다는 생각을 한 후 들리기 시작한 모든 기계음을 기계적으로 되새기며 의식적으로 숨을 내뱉았다.

- 내가 너 사랑하지만 여긴 좀 싫어. 블라인드라도 좀 내리면 안 돼?

 햇빛 속 케이드가 재잘대며 책상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정면으로 보이는 여행자의 모습이 부담스럽다고 말하며 능청스레 웃는 그 속엔 아마 여행자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하다못해 탑이라도 벗어나고 싶어하던 그 마음이 녹아 가득했을 것이다. 한껏, 찰랑찰랑, 흘러 넘치기 직전까지.

- 우리 밖에서 데이트하자. 응? 아이, 데이트할 시간 없단 말 하려고 그러지? 알았어, 내가 딱 한 번만 더 참아준다. 그래서 고양이는? 고양이는 어디 갔어? 우리 대령은 소개 못 해주지만 적어도 헌터 선봉대장이 나라는 건 알려줄 수 있지!

 발꿈치를 들고 걷는 듯 사뿐사뿐 움직이는 헌터의 등 뒤에 너덜너덜해진 망토가 흔들린다. 자발라는 달 대신 여행자가 떠오른 밤 속에서도 햇빛 속 케이드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 케이드가 걷는 부분만 밝은 낮이 겹치고, 활기찬 도시의 낮이 조각나 비치고, 반짝이는 먼지가 보일 정도의 인간성이 사무실에 남는다. 발자국도 없이 지나간 뒤를 빈틈없이 채우는 어둠에 자발라는 눈을 감았다. 케이드가 보이지 않는다. 눈을 떴다. 케이드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은 채 가슴을 짚은 손을 꾹 누르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사무실 곳곳에 불을 붙일 수 있다. 자발라는 그 순간이 지난 후 일어날 혼돈에 대해서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원인으로 자발라를 지목하지 않으리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자발라는 눈을 뜨고 텅 빈 사무실을 직면하거나 그 속을 불로 채우는 대신 일렁이는 가슴이 가라앉을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리길 택했다. 타이탄이자 사령관인 그에게 인내는 장기나 특기가 아닌 그저 몸에 밴 본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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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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