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나락
Magbopy
.... 짙고 짙은 진눈개비가 마치 손에 한 뭉텅이가 잡힐 듯 내려왔다. 향방 없이 오가는 바람은 쉬이 그치질 않는다. 이윽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그가 예상한 대로 세상은 온통 잿빛이 되었다. 그 잿빛 풍경이 지난 날의 그 암암한 기억을 되새김질 하게 만든다. 검은 고양이들은 보란 듯 자기들끼리 춤을 추고, 숲은 늪이 되어 그를 휘감아 올린다. ‘너는 인간을 사랑하게 될 거야.’ 고개를 들어 그날 일을 곱씹으니 지금이 아침인지, 밤인지, 새벽인지조차 모르게 칠흑이 드리웠다. 이내 그는 목을 깊숙히 묻으며 상념을 이리저리 좇는다. 이제는 나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그녀가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녀를 향한 갈증일까, 아니면 나를 향한 채찍질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아름다운 ‘수렁’이라는 것. 출구를 알고 있어도,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 않은 수렁. 그녀는 나를 사랑에 굶주리게 만든 주인이자 나만의 독재자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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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긋지긋한 저주는 언제쯤 종말을 맞을지. 내게 필요한 것은 이딴 시덥잖은 운명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할수록 폐부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양날의 저주는, 결국 나를 도려내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을 선사했다. 불시에 피어난 저주, 그리고 본능. 내가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고? 웃기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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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지? 누군데 내 인생에 끼어드는 거냐. 이미 나는 몰락해 버렸는데. 그런데, 너는 이런 나를. 동정할 것이라면 가라. 가 버리라고. 이 숲을 흔드는 바람은 이걸로도 충분해. 네가 이 숲의 ‘바람’이 되지 마. 다가오지 마. 그저 지나가 줘. 나는, 나는.... 이미 저주 받은 몸뚱아리야. 악몽 그리고 소문, 곧이곧대로 믿어. 그게 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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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인간에게 나의 아량을 베풀었다. 근데 하필 그 처음이, 그 여자아이라니. 꿈조차 꾸지 않았던 행동을 내가 한 것에 대해 스스로가 놀라 그 상황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 하지만, 그 무심하고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너. 왜 나는 너를,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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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넘으라고 있는 게 아닌데, 그녀는 불쑥불쑥, 내가 그린 선을 보란 듯이 밟고 들어온다. 우산을 씌워 주었던 그날부터 어쩌면 나는 그녀를 향한 호기심이 생겼는지도 몰라. 저주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이것은.
오늘도 왔구나. 너는 정말 겁도 없어, 안 그래? 다들 그 선을 밟고 넘어오지도 못하는데, 너는 당돌한 한 마리의 고양이 같아. 마법사 무서운 줄 모르고 선을 침범하는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 고양이는 원체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 너도 이러다 말겠지. 내가 기대를 하면 안 되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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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 아프다. 혼자 있기 싫다. 더하거나 굳이 뺄 수도 없는 아픔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곁에 있어 주는 건, 너뿐이구나. 둘 곳 없는 나의 시선은 이내 허공을 향했다. 구해 줘, 나 좀... 나 좀 어떻게 해 줘. 잡을 게 네 손밖에 없어. 그리고, 그때 내가 본 너의 눈은, 사파이어보다도 더 빛나고 푸르른 영겁의 눈동자였어. 마치, 속절없이 빠져들 것만 같은, 그런. 그렇게 무심한 표정 짓지 마. 아파. 지금 이렇게 아픈 것보다, 네 무관심한 표정이 나를 더 아프게 하잖아. 나 언제부터, 네게 이만치 빠져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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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에게 최후란 없다. 그런 운명을 타고난 나에게 끝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아프지 않았으면 해. 내가 입 밖으로 뱉어 놓고도 민망하여 애써 시선을 피한 채 푸스스 웃었다. 너는 날 비웃을까. 아니면....
마법사의 끝은 다를지도,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 세이렌, 그래, 그때 마침 세이렌이 생각난 이유는 무얼까. 본연의 노랫소리로 사람들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들고, 그렇게 홀려 죽게 만드는 세이렌. 잡아 먹힐 것만 같았다. 나를 당장이라도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너의 말. 이미 그 말은, 일정량의 치사량을 넘겼다. 중독되어 죽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너는 한때가 아닌, 나를 독재할, 오직 나만의 치명적인 세이렌. 떼를 지은 백금발의 나비가 화려한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렇게 찰랑이는 머리칼을 넘기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그때부터였나, 그녀가 나의 독재자가 된 것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자 찬찬히 나를 올려다 보는 그녀의 눈빛 역시, 치사량을 넘긴 ‘사랑’이었다.
이젠 내가 어떻게 돼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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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또한 그러한 운명이었구나. 어쩌면 나보다 더 괴로웠을 것 같아. 그러나 이제는 그 걱정을 덜어 내게 나누어 줘야만 해. 나는 이미 네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너의 아픔 하나하나 다 어루만져 주고 싶다. 안아 주고 싶다. 네가 살아가는 세상은 끔찍하니 내 품에 안겨 영원을 꿈꿔 달라고만 하고 싶었다. 그래, 넌 나만의 구원이지. 나를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독재자이기도 하고. 내 생각을 들은 것인지, 수굿이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고, 곧이어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찬란해서. 금방이라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그만,
나만큼 너를 소중하게 여길 누군가는 존재치 않을 거야.
사랑이라는 감정이 메말라 버린 줄 알았어. 저주라는 것이 참 무서운 거잖아. 그런데, 너만이 나를 구원했어. 네가 나를 안아 주었어. 내 심장까지 파고든 저주가 살을 에는 고통을 선사했고, 너는 태풍의 눈처럼 그 안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내 손을 잡은 채 너만의 아름다운 나락으로 나를 이끌었지. 그래, 너는 나만의 고양이, 나만 안을 수 있는 토르소, 그 누구도 무시 못할 절대적인 존재, 나의 목줄을 쥔, 나만의 독재자. 나를 침범해 줘. 마구 물들여 줘. 파편으로만 떠돌았던 내 사랑을 다시 붙여 줘. 눈이 먼 채로 너만 찾을 수 있게, 이 나락에 나를 가둬 줄래. 지옥이라도 좋아. 네가 가는 곳이라면, 그곳이 가시밭길이라도 맨발로 따라갈 테니.
오직 나만을 구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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