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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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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청명, 장일소 드림

설해사 雪海使
 

설해사, 눈과 바다와 함께 보내도록 하니, 그 머리터럭과 홍채가 흰 것도 당연하다. 무른 듯 날카로운 눈매와 희어 눈길이 가는 족족 대상을 비추는 안구에도 불구하고 속을 알 수 없게 구는 성정이 고요한 눈인가 부서지는 파도인가 했다. 어딘가 위태로운 태가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이다만 마냥 여리지는 않고 심지 굳은 데가 있다. 그 강단의 출처를 알 수는 없다만 생김새처럼 그저 곱지는 않다는 것. 혹자들은 설해사의 흰 면만 보고 온실 속 난초네 모란이네 지껄이지만 설해사처럼 악착같이 피어난 연꽃도 없다. 진흙을 헤치고 살길을 찾아 겨울날 개화했다.
 

성정
 

설해사를 비유하자면 한겨울 싸라기눈 아래서 피어난 연꽃이다. 하얀 눈이 진득하게 쌓여 진흙 깔린 호수마저 형체를 알 수 없는데 여린 꽃잎이 선명한 광경이라. 아름다운 결과물에 눈이 멀면 뿌리를 간과하는 법이다. 설해사,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나 인간의 추악한 이면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인이든 양민이든, 힘의 유무와는 별개로 기회만 있다면 피안 끝까지 떨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힘이 전제된 자, 고고한 명분이 있는 자는 더했다. 예를 들자면 명문정파의 나으리들이 있겠고. 설해사는 정파인의 허울뿐인 도道와 협俠이 싫었다. 그들의 도는 문파의 이해관계이며 협은 문파의 실리였다. 하, 손해 따지는 도가 있고 행하기 전 제 위치부터 살피는 협이 있구나. 설해사는 곧은 사람이다. 자신의 길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패도의 길을 걷는 것마저 거리끼지 않았으나…. 마냥 선행을 추구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 이타심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되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늘막에서 누구보다 먼저 손 내밀어 주는 사람에 가까웠다. 고리타분한 성격과 맞물려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말하는 것이다. 설해사에게 도는 도이고 협은 협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통틀어, 현 무림에 흔한 인물상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강강약약의 정신으로 바른말을 참지 아니하고, 틀린 말이 들린다면 곧이곧대로 고쳐 주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마저도 더할 수 있는 것을 일말의 인내심으로 참아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놀랄까. 천성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닐진대 왜 가만 참아 주는 법 없이 꼭 타박을 놓는 건지. 그러나 설해사의 언행은 모두 올곧은 뿌리에서 나오므로, 그리고 현재까지 그녀 스스로가 신념을 배반한 적은 없으므로, 옳다. 맞는 말 하는 사람에게 열을 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말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설해사는 수수하다고 할 수 있다. 겨울밤에 내리는 눈이 고요히 온 세상을 뒤덮듯이 설해사 또한, 마음만 먹는다면 타인과 두루두루 잘 어울릴 수 있다. 잘만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 조용히 공간을 차지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 소저 어떤 사람이었나 싶게 잊힐 수 있다. 옷자락에 아래 깔린 눈처럼, 쏟아지기 전 가만 기다리는 나무 위 눈처럼. 가만 있다 싶다가도 간혹 제 뒷배를 믿고 무작정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워왔나 싶지만, 설해사 자신도 마땅히 답을 내릴 수 없다. 애초에 그 출처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나. 겨울날 눈 아래 깔린 매화가 찬찬히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
 

헌원도화 軒轅桃花
 

과거, 화산이 그 명성이 드높았을 때. 대현검 청문이 십삼 대 장문이고 매화검존 청명이 천하삼대검수라 불리던 시절…. 그보다는 조금 더 이른 과거. 설해사, 아니 헌원도화는 화산파의 청자 배 13대 제자였다. 이는 그가 매화검존 청명의 사매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온실 속 화초란 말이 참으로 어울리는 소저이다. 화초도 그저 평범한 화초가 아니라, 곱디고운 것 같으면서도 억센 것이 장미를 떠올리게 하는, 알아주는 가문의 여식. 도화는 타고 난 집안도 좋았으매 원한다면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서녘의 도자기, 바닷물을 건너왔다는 향낭, 반짝이는 홍옥 비녀같이. 그런 실체가 있는 것만이 그녀의 소유이지는 않았다. 단아한 얼굴과 빼어난 학문, 무예에도 물론 소질이 있었다. 그녀의 성씨 헌원軒轅이 북두칠성 북쪽의 별을 일컫던가. 꼭 그처럼 헌원도화는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헌원 가의 능소화
 

서녘인보다 색이 옅어 흰 머리카락과 눈은 곧잘 지병이 있다느니 방계가 양녀로 들어와 직계 행세를 한다느니 구설수를 불러일으키기는 했으나 도화는 잠깐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많은 것을 태내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나 첫울음 터트리는 순간부터 보장된 미래를 갖게 된 여식답게도. 또한 헌원도화가 몸에 두른 것과 입에 넣는 것, 눈에 담는 것이 전부 도화가 제 가문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으며, 얼마나 가주의 애정을 받는지를 여실히 밝히고 있었다. 고작해야 구설수, 아니 구설수가 아니라면 제 얘기조차 들을 일 없는 이들이 하는 얘기다. 헌원도화는 제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많은 것을 쥐고 태어난 이 특유의 직감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구설수가 이렇게나 불어난 것에는 헌원 가家의 대처도 한몫했는데, 헌원도화는 그게 어떤 일이든, 직접 가문의 일에 나선 적이 없었다. 즉 대외활동이 전무했다는 뜻이다. 이는 자유로이 저잣거리를 거닐고 싶었던 도화의 의중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으며, 따라서 일반 양민들은 헌원의 여식 하면 눈송이처럼 희고 빛처럼 반짝인다더라, 그것 말고는 알 수 없다 수군거렸다. 오죽하면 헌원의 여식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하오문의 문을 두드리다 못해 그 꼭대기 층 정도는 쉬이 가야 한다는 말이 붙어 나오겠는가. 헌원도화는 종종 능소화라는 가명으로 저잣거리를 돌고는 했는데, 엷은 천을 몇 겹이나 겹친 멱리만 쓰고 나가면 감쪽같게도 저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오죽하면 바로 옆에서 당과를 고르는 헌원도화를 두고 얼마나 아끼면 얼굴 음영조차 보여주지 않는 거냐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능소화凌霄花, 하늘을 업신여기는 꽃. 능 소저, 하며 철전 몇 개 값의 당과를 건네며 소저도 그리 생각하지 않소? 웃는 장사꾼을 보며 도화는 그저 웃었다. 저 하늘마저 웃어넘기는 이 헌원의 도화가, 이런 일을 두고 웃지 못할 리 없었다. 다만 덧붙여 주었다. 자네,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헌원이 크게 화낼 테요, 조심하오. 자네 말대로 고이 방 안에만 모셔둔 여식 아니오, 하고.
 

헌원도화에게 저잣거리를 아무 연유도 없이 돌아다니느냐 하면 단번에 아니라 답할 것이다. 이런저런 구경도 하고, 요즈음 양민들 이야깃거리는 뭐가 있나 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저기 지나가는 도사에게 있다. 고소한 향을 풍기는 당과, 제 손에 든 것과 똑같은 당과를 입에 문 화산의 매화. 청명을 이곳에서 가장 처음 만난 것은 아니다. 화산의 위상이 드높으니 섬서와 그 인근 가문들은 자제들을 화산에 많이들 방문시키고, 또는 입문시켰다. 화산의 제자가 되지 않는다면 얼굴도장이라도 찍어서 추후 가문의 일에 보탬이 되라는 뜻이었다. 물론 헌원도 그 행렬에 함께 발걸음했다. 헌원의 공자는 무협보다 학문에 관심이 많았기에 도화가 화산을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 특이점이겠다. 겨우 문장을 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직접 검술을 배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문의 누군가가 화산에 용무가 있을 때 함께하는 정도에 그쳤고, 도화 자신도 도복이나 검보다는 화산에 흐드러진 매화와 험준한 산 너머로 보이는 구름결에 더 관심이 있었다. 비슷한 또래로 청명이 있다 소개받았으나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험하고 거친 성정에 헌원도화가 먼저 발을 뺐다. 낯을 가리기도 했고. 그러나 느껴지는 거친 질감과는 다르게, 저보다 열몇 살은 많은 사형, 사숙들과 비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검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반쯤 연마된 보석을 지켜보는 눈으로. 물론 아직 말을 걸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나무 그늘 아래 털썩 누워 똑같은 도복을 맞춰 입고서 초식을 수련하는 이들을 지켜보는 것도 지겨워졌을 무렵 헌원도화는 대뜸 자리서 일어나 무작정 안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산의 전각의 모양새를 구경하는 것도 그렇지만 혹시 화산의 진정한 은둔 고수라든가 하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아주 조금은 청명이 검술을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단 마음도 있었다. 결국 마주한 이는 지긋한 나이의 은둔 고수도, 장로나 장문인도 아닌 꼬질꼬질한 어린애였지만. 당시의 청명은 한창 사형과 사부의 눈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치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까만 들 강아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흉흉한 눈으로 목검을 횡으로 베, 도화의 목 가까이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흰 머리카락 몇이 잘려 나풀나풀 떨어졌다.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넘어진 헌원도화를 향해 청명이 말한다. 야, 너 뭐야? 라고. 그것이 둘의 첫 대화였다.
 

귀한 아씨 몸에 상처가 났다며 호들갑 떠는 시비의 뒤로, 삐질 식은땀 흘리는 청명. 그렇게 지체 높은 가문 여식인 줄 몰랐던 것은 차치하고(사실 이는 청명에게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청문이 또 어떤 불호령을 내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명이 뒤로 빠져 화산 깊은 산골로 내달리려는 찰나 도화의 곧은 손가락이 청명을 향했다. 어쩌다 그러셨느냐 묻는 시비에게 답이랍시고 내린 것인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청명의 얼굴로 모였다. 훗날 청명은 또 한 번 청문의 뒤에서 악귀가 보였다며 회고했다. 청문이 청명을 다그친 내용은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 가문의 고저를 막론하고, 무武를 배우는 화산의 제자인 네가 양민에게 함부로 검을 쓴다면 그것은 시정잡배나 사파인과 다를 바가 없다던가. 너는 참을성을 기를 필요가 있다던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부터 할 것이지 도망치는 것은 어느 문파의 도道냐고. 청명은 늘 그렇듯 눈을 이리저리 피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일다경 혼날 것을 한식경 혼나게 되었지만, 어쨌든 제가 양민에게(설령 급이 높은 양민이더라도!)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다음날 청명이 입을 삐죽이면서도 헌원도화의 앞으로 나선 이유이다. 다만 정식 제자도 아닌 이들이 문파의 도관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예가 아니기 때문에, 둘은 당시의 일을 매듭 짓지도 못 한 채 헤어지게 된다. 이후 헌원가의 가주와 소가주가 정식으로 화산과 일을 함께하게 되며 굳이 도화가 화산으로 걸음하게 될 일도 사라졌으니, 이가 그 후 약관이 된 둘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 한 이유이다. 기억나는 것은 은은한 매화향과 목검에서 묻어나는 나무와 먼지 냄새, 희게 반짝이던 헌원도화의 눈 정도. 남겨진 청명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잠깐 허전하다 느꼈을지 모르는 일이다. 혹은 사과하지 못 했다는 찝찝함뿐이었을지라도.
 

이후는 위에서 서술한 바와 동일하다. 종종 저잣거리로 나가, 멱리로 용모를 숨기고 청명을 눈에 담았다. 도사답지 않게 이리저리 뻗쳐 하나로 묶은 머리나 걷는 모양새가 독특해서일지, 조금만 오래 보고 있으면 귀신… 혹은 짐승 같이 알아채고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이 재미있어서일지. 다만 청명이 직접 검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아직 없었다. 기껏해야 흰 도자기 술병을 손에 쥐고 호탕하게 웃다가 이거 하나 더 없냐며 장사꾼과 대거리를 하는 걸 봤을 뿐이다. 아무리 그 청명이라 한들 양민에게는 함부로 손을 휘두르지 않았다. 사건은 도화가 본래 자주 나다니던 섬서가 아니라 그보다 바깥, 즉 서안으로 향했을 때 일어났다. 서안이 도시라 한들 그 크기가 보통 큰 것이 아니다만, 그날은 장이 크게 섰기 때문에 도화와 청명, 그리고 종남의 제자들이 모두 한 장소에서 모일 수 있었다. 이것이 종남에게는 큰 불행이, 청명에게는 종남을 팰(…) 기회이자 도화와 다시 한번 재회할 날이, 도화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성문을 지나 걷다 보면 색색의 등불이 나무에 걸려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헌원도화는 시비 한 명과 함께, 늘 그랬듯이 멱리를 깊이 쓰고 있었다. 능소화 빛의 옷감으로 만든 유襦와 군裙. 연한 노란색을 함께 써, 막 저물어가는 태양과 닮아 보였다. 소매와 치맛자락 끝에 엮인 금실, 은실, 백옥에 비록 얼굴을 가렸으나 지체 높은 가문의 따님이라는 사실이 감추어지지 않았다. 비록 도화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평범한 상인의 딸처럼 보였겠거니 짐작했지만. 나무 자판에는 얼음을 갈고 설탕을 뿌린 설탕빙설이나 양념에 절여 구운 꼬치구이와 각종 속의 만두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창문 열린 객잔 안에서는 얼큰히 취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흙길을 밟는 사람 소리가 가득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길 끝에 청명이 있었다. 손에는 잘 구워진 고기 꼬치와 도자기 술병을 들고 있었는데, 이미 몇 병이고 마신 이후인지 얼굴이 붉었다. 배부른 범처럼 입맛을 다시던 청명을 향해 흰 무복을 입은 무리가 다가갔다. 희고 푸른 복장에, 둥글게 말린 구름 문양을 한…. 종남이었다. 아무리 헌원도화가 가주의 총애 아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라났다고 하더라도 화산과 종남 사이 깊은 골을 모를 리 만무했다. 즐거운 구경거리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을까, 아니면 혹시 그에 휘말릴 수 있으니 피해야 할까. 헌원도화는 전자였고, 헌원의 시비는 후자였다. 곤란한 낯을 하고는 제가 모시는 아씨를 향해 몸을 돌린 시비는 멱리 사이로 눈을 반짝이는 도화를 보고는 합, 입을 다물었다. 방금 산 만두를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조심 멱리 사이로 들이며 도화가 즐거이 웃었다.
 

시초는 종남이었다. 내지르는 고함을 보아하니 일전에 청명이 육합검으로 잘근잘근 짓밟은 것을 마음에 둔 모양이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한 종남의 검수들이 검을 높게 치켜들고, 종남 특유의 진각을 밟았으나…. 그 검로가 청명을 향하기도 전, 청명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하늘로 던지고, 검을 횡으로 비틀었다. 극성에 다다른 칠매검. 검의 궤적을 따라 매화가 꽃 피워지고, 바람에 꽃잎이 나부낀다. 화려한 광경에 사람들이 입을 벌리자마자 사뿐히 종남 검수들에게 내려앉은 꽃잎은, 깔끔한 흔적을 남기며 그들의 도복을 찢어발겼다. 환상처럼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도화는 순간적으로 제가 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럴 리가 없음을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어디선가 아스라이 매화향이 났다. 아무 데도 닿지 못한 매화들은 땅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고, 모든 매화가 사라질 때까지 도하는 눈을 떼지 않았다. 모조리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청명은 하늘로 던졌던 고기와 술을 다시 잡아채고는 쓰러진 종남 검수들을 몇 번 발로 콱콱 밟아 주고 떠났다. 가히 박수칠 만한 끝이었다. 청명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있던 헌원도화는 곧이어 저를 흔드는 시비의 손에 정신을 차렸다. 시비가 무어라 괜찮으시냐 말했지만, 도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귀한 아가씨의 머리에 매화, 붉은 매화가 한 아름 꽃핀 날이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도화는 경대鏡臺 서랍에 고이 넣어뒀던 패물과 금전을 청색 비단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시비도 없이, 달리 말하자면 가문의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몰래 움직인 헌원도화는 화음의 개방 전각을 찾아내자마자 쾅, 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허름한 문이 끼이익 곧 무너질 듯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개방 안은 혼란 그 자체. 섬서, 그리고 서안 각지에서 날아온 전보와 멀리는 전국에서 날아온 전보들. 먹이를 먹고 날아갈 준비를 하는 전서구들과 깃털 쌓인 횃대, 거지들이 앞에 두고 앉은 탁자에는 낡고 색바랜 종이들이 더미로 쌓여있었다. 그 모든 풍경이 일시 정지된 듯한 모습. 왕거지, 달리 말하자면 섬서의 분타주가 겨우 멱리 쓴 이방인을 향해 묻는다. …뉘, 뉘시오? 헌원도화가 멱리의 천을 슬쩍 들추었다. 흰 천 사이로 그보다 더욱 흰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보이면 저자의 소문을 꿰뚫고 있는 개방 거지들로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헌원의, 그 여식. 당당하게 걸어간 도화가 분타주의 책상 위로 비단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주머니 입구 밖으로 반짝이는 금빛 패물들이 보인다. 그 길로 헌원도화는 청명과 화산파에 대한 정보를 탈탈 털다 못해 오늘 청명이 쓰러뜨린 종남파 제자들의 이름이 무엇인지까지 알아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물론 청명과 싸우려 화산에 오른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어쨌든 들고 있는 패가 많을수록 승률 또한 올라가는 법이었다. 가문 어느 누구도 몰랐던 조용한 암행이, 가문 어느 누구도 모르는 헌원도화의 화산파 제자 입문 날이 되었다.
 

화산에 핀 복숭아꽃 桃花
 

화산을 올라가는 길은 명문가 여식에게 고난 그 자체와 다름없었다. 가파르고 난간조차 없는 좁은 돌계단을 수백 수천 개 오르고서야 저 멀리 화산의 전각 지붕 끝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깎아지른 바위산이 파도처럼 겹겹이 늘어선 모습과, 그 너머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구름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었으나, 도화는 그런 것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개방에 다짜고짜 금을 들이붓고 정보를 캐낸 것이 막 해가 떠오르던 파르스름한 새벽이었는데, 벌써 해가 하늘 정중앙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하필이면 오늘은 상단의 심부름꾼도, 타 문파의 제자나 개방의 거지조차 화산을 방문할 이유가 없었는지 첩첩산중 한복판을 도화만이 걷고 있었다. 사람이 없어 멱리 따위 진작 어깨로 넘길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화산의 정문은 웅대한 분위기를 풍겼다. 도문이기에 여느 세가처럼 화려하고 번쩍이지는 않아도, 아버지인 헌원가 가주 어깨 너머로 상단이 돌아가는 걸 구경한 도화는 알 수 있었다. 최고급 목재에, 장인의 손길이 기왓장 하나마다 닿은 것이 보인다. 단정하지만 힘 있는, 흔히 용사비등龍蛇飛騰의 필체라 불리는 것으로 적힌 대화산파大華山派 현판. 곧게 선 기둥에 칠해진 옻. 분명 이곳이 그 매화가 피어나는 곳이렷다. 숨을 고른 헌원도화가 결연한 표정으로 화산의 정문을 두드렸다. 화산에 청이 있어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간청드리니, 부디 장문인을 뵙게 해 주십시오! 느리게 목문木門이 열렸다. 단정한 도복을 차려입은 화산의 제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간을 넘어 도화를 맞이했다. 도화가 외친다. 장문인을 뵙고 싶습니다! 본도 헌원... 아니, 본도 도화. 화산에 입문하고 싶습니다! 비록 화산까지 오르는 길이 가팔라 입고 있는 옷이 더러워지고 머리가 헝클어졌다지만, 옷감의 질이나 태가 헌원도화의 태생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러나 삼대 제자가 데려온 화산의 일대 제자는 정중히 도화를 돌려보낸다. 화산의 규범과 위신이 있으니, 다짜고짜 제자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도화가 쉬이 질 꽃이던가, 당당히 비구름 저문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능소화는 매일 묘시마다 화산의 정문을 두드렸다. 기어이는 식음을 전폐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니, 그 열정을 보아서는 제자로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겨우 화산의 장문인과 독대하게 된 헌원도화는 당당히, 그러나 완벽한 예를 갖추어 말한다. 저를 청자 배로 받아달라고. 비록 명자 배를 받고 있는 와중은 맞으나 저의 나이를 미루어보아 명자 배로 입문하기에는 균형이 맞지 않겠습니까, 했다. 속은 청명과 같은 배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으나… 결코 틀린 말 또한 아니었다. 이후 더러워진 세속의 옷을 벗고 화산의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흰 도복에 새겨진 가슴팍의 붉은 매화. 헌원도화의 흰 눈동자에 매화가 개화할 듯 새겨졌다. 그렇게 청자 배 막내 제자가 된 도화는 화산의 이름 아래 있는 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화산의 제자일 뿐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헌원도화가 아닌, 화산의 도화가 되었다. 도호道號를 받기에는 도화가 입문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제자였기에 잠시 미루어졌고, 도화는 되려 이를 더 마음에 들어 했다.
 

비록 같은 청자 배이나, 도화는 청명을 사숙이라 불렀다. 사숙은 뭔 사숙이냐는 청명에 왜요, 사숙이 싫으시다면 사형이라고 부를까? 청명 사형? 하며 즐거이 웃는 도화. 청명은 도화를 이겨낼 수 없었던 건지 눈썹을 삐뚜름히 올리며 네 마~음대로 해라, 툭 말할 뿐이었다. 그 청명에게 장난처럼 말을 놓다가도 금세 예를 갖추고, 웃으며 곁을 지키는 이는 오로지 도화 홀로였다. 청문이 전각 밖에서 들려오는 고성과 웃음소리에 이마를 짚다가도, 아끼는 제자들의 우애에 웃어넘길 만큼이나. 추후 도화의 도호는 청화靑花로 정해졌다. 그러나 도화는 제 도호로 불리는 것보다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고 굳건하게 주장했다. 화산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도호인지라, 화산의 이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계속해서 그를 청화라고 불렀다. 물론 이를 전해들은 청명이 거친 목소리로 (애가 싫다잖냐, 안 들리냐? 엉? 하지 말라고!) 고성을 지르며 머리에 주먹만 한 혹이 나도록 때려준 덕에 별호가 후대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청명은 도화를 도화라고 불렀으며, 다른 제자들은 대체로 화 사매, 하고 불렀다. 물론 윗 배분이나 장문, 장로들이 도화를 청화라 부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청명이 화산의 위아래를 아는 것과는 별개로 청문이 그것만큼은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 그들은 도인이고 화산은 도가 성향의 검문이니.
 

청명의 매화를 가장 좋아한 이 또한 헌원도화였다. 청명의 매화는 말하자면 다른 매화검수들 누구보다 더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화려했다. 그뿐이랴. 꽃잎의 여린 분홍색에 숨겨진 날은 얼마나 매섭고 잘 벼려져 있는지. 청명의 매화는 곧 화산의 매화라 불렸다. 그가 훗날 매화검존回光返照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는 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는 양. 설해사는 정말로 청명을, 청명이 개화해내는 매화를 좋아했다. 이따금 시간이 비면 청명이 수련하는 곳을 찾아 나무 그늘 아래서 몇 시진이고 청명을 쳐다볼 정도로. 향이 존재할 리 없는 매서운 칼날에서 다정하고 포근한 매화향이 물씬 나는 것 같았다. 도화는 끝까지…. 청명에게 매화란 무슨 의미인가. 헌원도화, 청화에게 매화란 무슨 의미인가. 아직은 둘이 겪지 못한 겨울, 그때가 도래했을 때도 둘의 매화가 가진 의미는 변함이 없었다.
 

…사숙. 청명아. 그거 기억나요?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말이야. 그때 본 매화, 정말 아름다웠는데….
 

도화가 말하는 처음이 화산에 교류차 방문한 어릴 적인지 저자에서 청명이 종남을 물씬 때려준 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청명이 이를 아득 깨물었다. 부러 괜찮은 척 목소리를 내었다. 어어, 기억나지. 그래서? 헌원도화가 이 이상 말을 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그렇다고 의식을 잃게 둘 수도 없었다.
 

아마 내가 너를 다시 볼 때에도 너는 변함없이 단 하나의 매화를 피우고 있지 않을까 싶어. 너는 겨울 바람에도 지지 않을 매화를 피울 수 있잖아.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참 좋은… 잘 된 일이야. 내가 언제 너를 다시 보는 바로 알아볼 수 있을 테니. 이 난세를 끝내고, 겨울을 몰아내고, 봄을 다시 불러와 줘. 눈이 녹고 새싹이 움트게. 내가 아는 청명은 당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야,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래. 어? 그리고 너는 뭐 빠지려고 그러느냐? 대화산파의 일원인 이상, 당연히 너 또한 매화를…. 함께……. 청명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시리게 아픈 표정이 잠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수히 많은 매화가 짓밟혔지만 익숙해지지 못했고 다만 무던해질 수 있었는데, 도화의 끝에서는 도무지 매화검존으로 있을 수 없었다.
 

사숙이 보여 준 매화는 내 잊지 않고 기억하리다. 정말로 잊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울지… 말고. 부디 이 매서운 계절을 끝내 주세요. 짐을 더 지워 주는 것 같아 미안해요…….
 

다행히도, 이 계절이 돌아오는 것은 조금 먼 이야기. 매화가 만개한 이후 필연적으로 당도할 낙화 때의 이야기.
 

피어난 이상 모두 매화라
 

초기에는 다른 화산의 제자들처럼 융합공부터 소청기공. 나아가 칠매검과 매화검법을 배우는, 평범하게 무에 치중된 노선을 밟는 이였으나 화산에 매화가 만발하는 시기, 봄에 대뜸 재경각으로 소속을 바꾸고자 한다 선언했다. 같은 빛깔을 하고 모여 하나의 향을 내는 매화라고 한들 모두 같은 모양으로 피어날 리 없었다. 청명이 유독 짙은 붉은빛을 머금고 피어나는 매화라고 한다면 도화는 꽃잎 속부터 시작해 은은히 붉어지는 매화였다. 또한, 채 만개하지 못하고 이제야 꽃잎 다섯 장이 사방으로 움트는 중인 매화이기도 했다. 화산은 매화로 대표되는 문파이나, 매화만이 화산의 전부이지는 아니했고 그 매화마저 검이 전부는 아니었다.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은 개화의 결과물, 눈에 보이는 향취와 미색微色의 발걸음. 하늘과 땅과 천하만물을 말하는 목소리…. 따라서 도화는 매화검수들의 매화가 가지마다 매달려 향과 색을 뽐낼 수 있도록 하는 가지가 되기로 하였다. 강인한 문파를 이루는 것은 재물과 무학과 인재. 그 중 가지로서, 가장 조용하고 단단히 문파를 받쳐 줘야 하는 것이 재물이다. 문파의 전각, 의복, 검과 훈련장을 이루는 청강석부터 매일 제자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까지. 아무리 도道를 추구하는 화산이라 한들 속세의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길을 걸어왔다면, 지금처럼 大화산파의 이름을 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헌원의 일원이자 가주의 총애를 받는 여식이었던 도화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도화는 어렸을 적 문文과 무武는 기본이요, 예藝까지 출중한 이였다. 그러니 무를 포기하고 문에 이바지한다 한들, 화산에 해가 될 일은 없었다. 이러한, 화산을 극히 위하는 이유 외에도 도화가 도사치고는 속세에 연연하고 물욕이 많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뭐든 곱게 포장된 것은 보는 이의 관념까지도 사로잡아 홀리게 하는 법이다. 화산의 매화가 상대의 눈을 가리듯이. 이리 보면 틀림없는 화산의 제자였다. 여하튼 도화는 도사의 길을 걸은 지 몇 주야, 혹은 그 이상이 지나고도 속가에서의 심미안이 바래지 않았다. 무엇이든 더 어여쁜 것이라면 눈길이 갔고, 사치스럽게 반짝이고 귀한 것이 좋았다. 물론 스스로를 치장하는 등 화산에 걸맞지 않는 언행을 감히 실천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어여쁜 건 어여쁜 것이고, 빛나는 것은 여전히 빛났으며 비단의 결과 수놓아진 자수가 옷감의 가격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명명백백히도 알았다. 타고나기를 재경각의 인재였던 것이다.
 

재경각 소속이라고 해서 무武와 완전히 별개의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도화는 환과 변에 중점을 두어 자신의 검을 갈고닦았다. 그 검이 지나가는 검로 사이로 스스로가 전장에 실제로 나설 리 없다는 안일함이 언뜻 깃들어 있었으나,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구파와 일방, 세가를 막론하고 은은하게 흐르고 있던 오만이자 평안이었다. 환과 변을 특징으로 하는 검은 더욱 화려하고, 붉으며 만개했다. 검을 이리저리 꼬고 비틀어 휘두르며 검기를 짧게 끊어 날린다. 매화 꽃잎의 모양새를 띠는 검기가 변칙적으로 흩날린다. 매화나무에 돌풍이 불었을 때의 모습이 꼭 이러하였을까. 힘이 약해 상대의 눈을 속이는 쪽에 치중되었다. 한아름 피어나는, 어느 하나 흠없이 곱게 피어난 매화가 곧 도화의 특기이다. 적이 곧 자신의 급소를 스치고 가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꽃 무더기. 정확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라, 같은 적을 죽이기 위해 사형제들보다 더 많이 검을 휘둘러야 한다는 것이 취약점.
 

다시, 겨울. 설해사 雪海使
 

설해사가 매화가 피고 지는 굴레를 다시금 걷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교의 신실한 신자들이 그들의 신, 천마를 다시 현세에 부활시키기 위해 사장되어 중원 각지에 퍼져 있던 무렵. 천마와 동귀어진한 청명이 생의 끝물을 함께한 죄인지 의식에 말려들었고, 헌원도화는 영혼과 껍데기가 분리된 채 도복 소매에 언젠가부터 들어가 있던 말린 매화 꽃잎 마냥 그들의 뒤를 따랐다. 헌원도화는 타고나기를 순리를 거스르는 존재요, 청명과 긴밀히 연을 이었으니. 미완성된 의식에 천마에 반하여 강한 자아를 가진 청명이 스며들 때, 도화는 청명에게 스며든 것이다. 생의 아쉬움도, 재회의 바람도 그 어떠한 그리움도 대산혈사大山血事 중 나눈 적이 없건만.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고, 그것들은 모두 후회의 탈을 쓴 사념思念이 되기 마련이었다…고, 청명은 추측했다.
 

설해사를 이루고 있던 핵심적인 것들은 모두 동일하다. 예컨대 깊은 산중에 쌓인 눈과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선을 기준으로 삼는 그 당돌한 성격. 금은보화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특징까지도. 그러나 무언가를 바라볼 때 으레 짓곤 했던 웃음, 청명의 매화를 바라볼 때의 반짝임, 동경, 친애,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愛. 그것만은 오랜 과거에 남아 청명의 눈에만 보이는 혼魂처럼 떠돌았다. 이제는 설해사. 그때는 도화. 달큰한 향이 맴돌았던 꽃이 눈에 묻혀 바다에 떠밀려 향을 잃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설해사는 거지였다. 그 간단한 한 단어만이 설해사의 과거를 완벽히 설명할 수 있었다. 장일소, 그 패군 장일소의 노리개라는 자리와는 완전히 비견되는, 한없이 초라한 곳. 사파 수장의 애첩, 노리개. 그런 말들이 양민들의 입에 공공연히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깊은 밤 등이 켜진 객잔 구석이나 술에 취해 앞뒤 못 가리는 이들이 주막 방에서 곧잘 얘기하던 소재이다. 그 패군이, 한 계집을 그리 아낀다더라. 머리가 그렇게 비상해서 개방이 그녀에 대한 정보라면 촌각을 다투고 수집한다더라. 아니다, 별거 없다더라. 그저 어여쁘게 피어난 작약 아니겠느냐. 그러나 그치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작약은 고운 색과 화려한 꽃잎 탓에 짙은 향이 날 것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상쾌하기 그지없음에도. 본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오해를 뜻하고, 오해는 좋은 장막이 되어 준다. 장일소에게는 그저 좋은 일이었다.
 

거지였던 설해사는, 비록 출신에 묶여 변변찮은 일조차 하지 못했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타인보다 한 발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하는 눈치와 지략. 동냥으로 밥 벌어먹는 거지였던 탓에 그 재능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런 좋은 눈을 가지고 있으나 무예에도 소질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천존天尊은 설해사에게 많은 것을 쥐어주지는 않았다. 애시당초 잘 먹지 못해 발육 미진한 거지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힘으로 협을 행하고 부를 쌓고 저 자신을 지키는 이 중원, 무림에서 살아남기에 설해사의 재능은 바람 앞의 촛불만큼이나 연약하고 비효율적이었다. 설해사가 위치한 곳은 벌레가 기어다니고 흙먼지가 숨 쉴 때마다 나부껴 텁텁한 곳. 가장 미천한 곳이었다. 개방의 일원조차 되지 못 한 설해사에게는 많은 것이 부족했으며 많은 기회가 그녀를 비껴 지나갔다. 그러나 높디 높은 곳에 걸리고 싶었다. 별이 되지 못한다면 가장 먼저 달빛을 받는 꽃이 되고 싶었다. 길거리에 핀 들꽃보다는 부잣집 창틀에 걸린 조화라도 되고 싶었다. 그런 야망이 설해사를 속부터 천천히 메우고 있었다. 먼저 개방에 들었다. 설해사가 거주하던 곳의 왕초 눈에 들어, 무결개부터 천천히, 눈에 띄지는 않지만 흘려보내지도 않도록. 적소에 말을 얹거나 중원 각지 정보의 흐름을 읽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일결개였다. 개방의 정식 단원이기는 했지만 말단이었다. 그 이상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곳 무림은 그저 존재하고 살아간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아니었다. 특별한 이들, 기연을 얻은 이들, 태생부터 다르거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이들이라면 훨씬 수월하게 오를 수 있는 사다리. 설해사의 손에는 나무 가시가 박히고 쓸려 생긴 상처가 자잘히 많았다. 어떻게 보면 가장 공평하며, 불평등한 곳이 이곳이다.
 

설해사가 겨우 무결개가 되어 백방으로 돌아다니던 무렵 초삼草三을 만났다. 청명이 아닌 초삼이다. 설해사는 어린 거지가 잔뜩 흙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 저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지, 혹은 적은지는 거지 특성상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얼추 또래이겠거니 했을 뿐. 추후 초삼이 청명으로서 기억을 되찾은 후에, 왕초인 종팔과 대거리를 하고서는 상처난 얼굴이 불쌍해 꼬질한 천조각을 손수건 대용으로 건네 주었다가 더럽다며 궁시렁거리는 것에 일어나는 척 머리를 주먹으로 꿍 때렸다. 어이없어하는 청명을 내려다보며 모르는 체 고개를 돌렸다가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왁왁 소리 지르는 청명을 온전히 받아내게 됐지만. 청명은 그 나름대로 죽었다 눈 깜박하고 보니 100년이 지난 현실을 이해하는 것만 해도 벅찼으며, 가만히 서 있어도 고아한 태가 나던 헌원도화와 현재의 설해사는 명백히 달라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설해사의 흰 머리카락을 보며 언젠가 흩날렸던 같은 색의 머리카락과 작고 단단했던 목검을 추억할 뿐이었으니. 이후로 청명은 화산이 망했는지 어쨌는지 직접 확인하겠다며 섬서성으로 발길을 재촉했으니 만날 일이 전무했다. 청명은 예나 지금이나 매화를 따랐다. 그러나 설해사의 매화는 눈에 파묻혀 도통 보이지를 않았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인간들의 금은 장신구를 목에 걸고 어슬렁거리는 흰 호랑이. 피를 그득 묻히고 다니는 호랑이였다.
 

녹림 산적 놈들의 거동이 수상치 않으며, 움직이는 경로를 보아하니 무언가에 쫓기는 모양새다, 하는 정보가 속속히 들어오며 섬서의 무결개부터 분타주까지 바쁘게 움직였다. 섬서와 서안 사이를 감싸고 있는 산에 산적들이 죄 씨가 말랐다. 죽은 것은 아닐 테고, 짐승 고기 탄내만이 남았다. 산적들이 몰리는 곳은 곧 장일소와 그의 만인방이 발걸음한 곳. 설해사는 개방을 일원으로서 장일소의 자취를 쫓는 역할을 맡았다. 설해사는 장일소에 대해 정확히는 몰랐다. 해봤자 위험한 사내, 사파, 피를 몰고 다니는 자. 애당초 제 먹고 살아 사다리 오르기에 급급했던 설해사가 단순히 개방이 파악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대상에 불과한 장일소에게 관심을 가질리 없었다. 설해사가 선 자리에서 강남은 너무 멀었다. 그렇게 인근의 거지로 위장하여 장일소의 그림자를 야금야금 따라붙던 어느 날.
 

황금용이 수놓아진 수백의 비단 장포. 황제의 의복에만 허해지던 용이 강렬히 그려진, 윤기나는 옷감 밑단에는 굳은 피가 묻어 붉었다. 마치 불길 한자락이 하얀 하늘을 그을리듯이. 권태롭게 얼굴을 스치고 쓰다듬던 손가락에는 가득히 가락지가 껴져 있었다. 순금과 취옥, 비취. 투명하거나 번쩍이는 가락지들이 장일소 턱 아래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연히 고개가 올라가고 있었다. 손목이 버텨낼 수는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꺼운 팔찌 여러 개를 본 순간 설해사의 머리가 굴러간다. 저게, 다 얼마짜린지. 흰 얼굴이 웃음기를 머금자 붉은 칠을 한 입꼬리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린다. 이자는 위험하다. 자동적으로 개방의 전서구들이 물고 온 종이 쪼가리에 적힌 붓글씨를 떠올린다. 패군悖君 장일소! 사파의… 뭐더라, 아무튼 중요한 건 고작 그런 게 아니었다. 살아남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어떻게 행동해야 저 장일소가 저를 가여히 봐서라도 놓아줄까. 호랑이 발톱에 꼬리가 걸린 쥐도 이렇게 답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설해사는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선택에 숨이 걸려있었다. 하다못해 어디서 자고 어디서 동냥을 하는 것까지도. 이미 인생은 도박이었다. 야바위라도 하듯이 사기그릇 안에 담긴 저것이 독약일지 영약일지 잡초나 고기일지를 판별해야 했다. 삶이 태어나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그 길에 굴곡을 만들고 다리를 놓는 것은 온전히 그녀 자신의 몫이었다. 계산을 끝마친 설해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얀 눈동자에 흥미로워하는 장일소의 얼굴이 보인다. 소리장도笑裏藏刀라는 별호가 있는 이상 감히 그가 드러내는 모든 걸 믿을 수는 없었지만… 설해사는 자신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비싼 비단옷을 입고도 피로 물든 흙바닥을 걸을 수 있는 그 패기를. 분칠을 한 고운 얼굴, 온몸을 휘감은 순금과 보석 장신구들. 안 되면 짧은 생에 안녕을 고하는 거지만 되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길거리 도박에서 이런 패를 쥘 기회가 또 있으랴. 제게 다정치 못했던 정파 아래 그늘은 시원하지조차 않았다. 생각은 짧고 판단은 과감하다. 돌이킬 수 없는 개울을 건넜다. 흙바닥을 딛은 발이 더러웠다. 손등을 간질이는 머리카락만이 희었다. 명과 암이 극명했다, 만. 짙은 그림자는 밝은 빛과 함께하는 법. 양극에 선 이상 둘은 본질적으로 동류였다.
 

저를, 받아 주세요. 패군.

그럴까? 그럼 그러자꾸나.
 

되려 당황한 것은 설해사였다. 그, 그러니까… 저는 패군께 개방의 정보를 드릴 수도 있고, 저 자신도 나름 쓸만한 머리를……. 그래, 알았대도. 일어나지 않고 뭐하니? 난 말귀 못 알아먹는 애들이 그리 싫더구나. 궤변만도 못하게,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어리둥절한 채로 설해사가 천천히 일어났다. 제 더러운 옷자락을 두 손으로 꾹 쥔 채, 장일소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혹시 옷을 갈아입힌다는 것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는 뜻이라면? 때문에 설해사는 장일소가 손짓으로 불러낸 흑조단의 일원이 그녀를 만인방 본거지로 데려가려 손을 뻗는 순간까지 장일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설해사 자신은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참으로 맹랑한 짓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장일소는 알고 있었다. 사실 설해사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개방의 정보 쯤이야 사파에는 하오문이 있었으며, 지략과 계략이라면 장일소가 더 뛰어났다. 책략이라면 호가명을 빼놓을 수 없었고. 다만 설해사의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장일소 그 자신과 닮은 욕망이 있었다. 설해사가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것뿐이었다. 바라볼수록 그 옛날 자신을 닮은… 아니, 장일소 그와 완전히 같거나 극히 닮은 이는 세상에 존재치 않겠지만. 어쨌든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이다. 이러한 판단의 동의어로는, 변덕이 있었다.
 

만인방으로 돌아오자 호가명이 그들을 맞이했다. 만인방의 일원이 설해사를 곱게 모셔 호가명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만인방 일원에게는 장일소가 직접 데리고 가기를 명한 이를 감히 인질이나 배신자 놈처럼 거칠게 다룰 수 없었던 노릇이었지만, 호가명의 눈으로는 감히 장일소를 보필하고 호위하는 임무를 소홀히 한 것과 다름없었다. 호가명의 눈썹이 불쾌하게 찡그려진다. 지금…. 그가 호통을 치려 하기 직전. 장일소가 푸하하 웃더니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가명아, 가명아. 당연히 내 명으로 이루어진 일이란다. 똑똑한 아이가 왜 이럴 때만 정신을 못 차릴꼬. 다만 방주님. 저것은 개방의 거지가 아닙니까? 나 참. 신경쓸 것 없단다. 더러우니 시비나 불러 씻기고 저 몰골 좀 어떻게 하렴. 장일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단출한, 같은 모양의 옷을 입은 시비 넷이 쪼르르 달려와 설해사를 모셔 간다. 설해사와 시비들의 등 뒤로 장일소가 백화주百花酒를 가지고 오라 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향유를 부어 매끄럽고 향이 좋으며 따뜻한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 그리 반문할 시간도 없이, 시비들이 설해사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탕에 조심스레 밀어넣었다. 거지였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우. 설해사가 거지 신분에서 벗어난 지 불과 한 두 시진은 되었을까.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빨리,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시비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설해사가 단순한 객이 아니라, 장일소가 직접 데려온 이였다. 이 만인방에서 장일소가 직접 한 모든 일들은 큰 무게를 가졌다. 설해사는 제 머리카락이 약초물과 동백기름으로 윤기나고 부드러워지는 것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이리 아름다울 수 있는 색이었다, 백색이. 먼지와 흙으로 더러워져 땅바닥에 굴린 실타래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이윽고 채비를 마치자 다른 시비가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비단옷을 들고 들어왔다. 평행 제흉유군齐胸襦裙의 형태로 상의는 붉은끼가 살짝 도는 백색에 가지각색의 꽃 자수가 금, 은, 비단실로 새겨져 있었으며 붉은색 끈을 묶어 고정했다. 이에 이어진 매듭은 백옥이 나비 모양으로 새겨진 것이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달랑이는 것이 진짜 나비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치마는 여러 겹의 얇은 옷감이 겹쳐져 있는 형태였는데, 치마 밑단에 옅게 붉은색 염료로 물들어있었다. 그 위로 흰색 피백披帛을 두르니 몸이 무거웠다. 설해사로서는 이런 의복을 처음 접하는 것이다보니, 옷의 무게가 너무도 어색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쭈뼛거리다가도 몸에 닿은 옷감의 부드러움이나 장인이 한땀 한땀 새긴 것이 분명한 자수, 사치롭게 엮인 보석을 보면 마음 내밀한 곳에서 짙은 감정이 새어나왔다.
 

설해사는 본질적으로 귀한 것을 깊이 좋아하는 이였다. 슬슬 상황이 제대로 판단되기 시작했다. 장일소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았고, 아마도 그의 마음에 들었다. 이런 옷을 내어 줄 정도면 꽤나. 물론, 여전히 함정일 가능성을 아예 버리지는 않았지만. 설해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히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장일소가 설해사를 보고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그래, 이렇게 입으니 얼마나 예쁘니. 얘, 시비야. 적당한 곳에 처소를 마련해 주렴. 이야기는 내일 하자꾸나. 장일소는 예쁘다는 말로 일단락했으나, 사실 그가 어떠한 평가를 내렸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대단한 일이었다. 실제로 설해사는 마치 모란도의 나비 같았다. 섬세하게 그려진 모란과 나비. 어느 나비가 진짜 꽃인 줄 알고 날아왔다가, 먼저 내려앉은 나비를 보고 다시 떠나갈 정도로.
 

장일소에게 설해사는 한 마디로 정의하여, 맹랑한 이였다. 어느 때는 장일소를 위해서라면 한낱 제 목숨도 바칠 듯 굴었다. 어떤 때는 장일소를 위한다며 필요도 없는 미끼를 자처하는 등 어리석은 짓을 했다. 또한 호가명조차 읽어내지 못한 장일소의 수를 편린이나마 간파하지를 않나, 곧 사라질 듯 아스라히 굴어 괜히 보는 사람을 두렵게 하고. 예측하려 든다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으나 전부 알아냈다 싶어 손 놓고 있으면 예상 외의 수를 들고 나타났다. 충분히 성가셨으며 장일소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이였음에도, 즉 수틀리면 장일소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존재하는 이였음에도 패군 장일소는 설해사를 제 곁 가까이에 두었다. 이런 위협에도 자신은 건재하다는 하찮은 증명은 아니었다. 장일소는 난제에 가까운 설해사를 총애했다. 보고 있으면 웃겼는데, 그것이 단순히 우스움을 뜻하지는 않았다. 장일소가 그녀에게 질리는 일이 없도록, 눈치챈 것 빤히 알면서도 예쁜 짓만 하는 것이 그래 어디 한번 더 해보렴, 하고 용인하게 만들었다. 영혼 없이 껍데기만 남은 운명도 운명인지 귀하고 값진 것으로 치장한 설해사는 과거의 그녀, 혹은 헌원도화와 유사했다. 장일소를 비롯해 시비들, 만인방의 책사나 장일소가 종종 만나는 이들을 보고 배운 것인지 행동거지가 과거와 비교해 확연히 달라졌다. 조금 더 조용했고, 우아했다. 또한 입은 다물고 있으나 머리로는 상황을 죄 나열해 꿰뚫는 능력이 더욱 발전했다. 설해사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어디라도 바깥을 향한 외유를 나설 수 있었으나 설해사는 자신의 의지로 그러지 아니했다. 장일소가 그녀를 살려 준, 혹은 받아 준 그 순간부터 자신의 자리는 장일소의 곁이라는 것마냥. 장일소의 귀가 두렵기는 커녕 기꺼웠다. 그가 두른 장포에서 짙게 배어나는 피비린내와, 팔찌에 굳어 부스러지는 육편과 피마저도. 그가 나서는 발걸음에 깃든 오만과 그런 오만이 정당하게끔 보이는 능력,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는 황제를 능가하는 옷차림이 이제는 정情의 영역에 있었다.
 

장일소가 사패련을 통해 사파일통을 실현한 이후부터 그를 방문한 사파 인물들에 의해 설해사의 정보가 새기 시작했다. 만인방을 비롯하여 장강수로십팔채, 하오문, 흑귀보에 퍼진 설해사에 관한 소문은 모순 없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련주의 총애를 받는 이방인. 련주가 곁에 없다면 아름다우나 물감을 덧칠한 조각상인 듯 생기 없는 이. 썩지 않도록 말려둔 꽃인지 현세의 꽃을 모방해 최고급 비단에 그린 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 그러나 설해사는 자신의 대우나 자신을 향한 여럿의 수군거림에 불만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거지 시절로 다시 돌아갈쏘냐. 추잡스럽고 처량한 과거는 빛나는 현세에 씻겨 아득해졌다. 설해사는 이 모든 걸 내버리고 다시 사다리 아래서 아등바등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설해사는 다 시든 꽃이래도 아무렴 좋았다. 이맘때면 사파들이 진지를 치고 있는 강남 및 장강 인근뿐만 아니라 양민들과 정파 속가들이 자리한 곳까지 련주가 그렇게나 아끼는 아이가 있다더라, 하는 소문이 파다했다.
 

밖에 나가보지 않으련? 장일소가 설해사에게 수도 없이 물은 질문이다. 거절한 쪽이 되려 설해사. 이유는 특별히 말해 주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저었는데, 사실 설해사가 공식적으로 외출한 기록이 전무할 뿐, 비공식적으로는 몰래 나간 적이 몇 번, 사실은 자주 있었다. 무학에 연이 깊지 못한 설해사의 기척을 장일소가 알아채지 못 했을 리는 당연히 만무하다. 그저 눈감아 준 것뿐이다. 설해사에게 붙인 홍견들이 있거니와, 장일소를 배신하려는 수작도 아니었고 사고를 친 적도 아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장일소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서, 혹은 설해사가 먼저 운의 띄워 밖으로 나간 것은 장강참변이 처음이다. 직접 그 자리에 서 모든 광경을 눈에 담은 것은 아니다. 장일소가 퍽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인데 직접 보겠느냐 하여 긍정했다. 물론 호가명은 장일소의 옆, 혹은 뒤에서 끊임없이 둘을 말렸으나… 장일소고 설해사고 도통 그의 말을 들어 주는 이 없었다. 섬서에 정착하기 전, 사실 그 후에도 중원 각지를 수도 없이 돌아다녔건만 이런 자리에서 보는 것은 그 심정이 달랐다. 장일소의 마차를 둘러싸고 도열한 사패련의 일원들. 각자 맞춰 입은 의복이 명백하게 소속을 알려 줘 마치 팔보채八寶菜를 인간으로 구현한 것 같았다. 예쁘다며 저 멀리서 감탄하고 있을 때 장일소가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 당부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가만 풍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난 며칠 간의 지루함이 다 가실 것 같았다. 때문에 참담한 일들, 말하자면 피가 튀기고 사람의 명이 끊어지는 일을 보지는 못 하였다. 청명이 마차를 향해 칼을 던질 때 쇠붙이가 공기를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마차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이 설해사가 초삼, 혹은 청명과 재회한 순간이자 청명이 헌원도화와 재회한 순간이었다.
 

이 생의 도화-설해사를 본 청명의 반응은 그 무엇으로도 정의할 수 없었다. 칼이 콰득 지면을 뚫고 박힌 후에도 손을 뻗은 채로 가만히 있는 청명을 의아하게 여겨 청명아? 하고 불러본 백천이 본 청명은, 그리움으로 시작해 의아함, 분노, 의심, 불안 등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광경이었다. 분명히 제가 그리도 아꼈던 사매이자 정인이었건만, 설해사가 정말로 환생한 헌원도화인지부터 문제였으며 헌원도화와 청명 저 자신. 벌써 과거의 망령이 둘이나 현세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천마의 부활 여부에 무게추를 더했다. 천칭이 느린 속도로 기울고 있었다…. 다만 그것보다 더 청명은 도화가 그리웠다. 제 실수로 짓밟히고 스러진 옛 화산의 잔재. 살아남았다 하기에는, 살아있다 하기에는 애매할지라도. 겉으로 드러난 청명의 반응은 작은 목소리로 시작해, 어, 어, 어, 어어어어? 뭔데?? 쟤 왜 저깄는데??! 였지만. 덩달아 놀란 화산의 제자들이 쟤가 누구냐며 아우성치는 것이 메아리처럼 바위를 때리고 퍼져나갔다. 눈을 보아하니 저를 처음 본 것 같았다. 몸을 감싼 것은 모두 장일소와 같은 값비싸고 귀한 것. 따로 시중들어 주는 이라도 있는지 마차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잠깐의 만남으로 현재의 헌원도화에 대한 정보 몇 가지를 나열한 청명이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다. 데려오자. 데려와서, 물어보자. 사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납치였지만 헌원도화는 본래 화산의 제자였다. 화산의 일원을 화산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한다는데 뭐가 문제겠느냐. 청명은 이제야 일전에 당군악이 말한, 장일소가 그리도 아낀다는 아이가 제 옛 정인임을 깨달았다. 그 사파 자식이 누굴 아끼긴 개뿔로 아끼냐며 귀나 후비던 것을 후회했다. 조금만 더 의심해볼걸. 괜히 당군악에게 왜 제대로 말 안 해 줬냐느니 그 장일소가 아끼는 애라면 정보라도 알아 와야 하는 것 아니냐느니 갈궜다. 당군악만 불쌍한 노릇이었다. 머리가 뜨겁게 달구어지다 한계점을 넘으니 되려 차가워졌다. 좋아. 그때는 허무히 도화가 떠나도록 손 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리라. 이번만은 기필코 지키리라.
 

암향소영 暗香疎影
 

청명은 홍대광을 닥달해 련주가 아낀다는 이에 대한 뜬소문부터 사실까지 있는대로 닥닥 긁어모았다. 그래, 설해사다 이 말이지? 설雪해사. 그녀를 잃었던 계절 냄새가 물씬 풍겼다. 련주의 애첩이고 장일소가 총애하는 아이고 그게 무슨 문제냐. 청명은 장일소가 사건의 극적인 결말을 위해 아직은 쉬이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청명이 설해사를 데려갔다고 해서 홍견이나 흑조단, 적사대, 독혈수, 혈검단 따위를 풀 수 없었다. 만인방 뿐이랴? 장강수로십팔채는 애초 수적이므로 흑룡왕을 차출할 수 없는 이상 도움이 그다지 되지 않을 것이고, 흑귀보와 하오문도 사정은 같았다. 온 세상이 강남과 강북을 주시하고 있는 마당에 설해사 하나를 위해 지금껏 유지해온 태도와 전략을 망가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일소는 사람에 대한 정情보다 세상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한 사내였으니까. 청명이 아는 한 장일소는 욕망의 화신이란 이름이 부족할 지경인 이였다.
 

매화도 참변 당시 뭣도 모르고 강가에 무방비하게 서 있던 설해사를 발견, 배로 도주하기 전에 들고 날랐다. 말 그대로, 들쳐 매서, 날랐다…. 그 과정에서 화산오검을 비롯하여 화산의 장로들, 장문인, 천우맹 맹원들 모두 청명의 어깨에 둘러진 의문의 여인을 보고는 에이, 설마 아무리 청명이라고 한들 납치했으리라고… 정도의 약간의 믿음과 불신과 의혹이 담긴 눈빛을 보내왔다. 보다 못한 현종이 조심스레 말한다. 음, 그래 청명아…. 그 여인은……? 그리고 청명은 그들의 기대에 아주 명쾌한 답을 내려 준다. 네? 아, 얘 부자예요. 장강 근처에서 멍하니 서 있길래 데려왔죠, 뭐.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청명을 본 천우맹 맹원들이 반쯤 혼이 나간 채로 소리를 질렀다. 야!! 그걸 세간에서는 납치라고…. 장일소 그 놈이 얘 납치하고 있는 거 데려온 건데, 뭐 어때?! 엉?? 아, 그럼 뭐. 잠깐, 뭐? 장일소 사람을 납치한 거라고?? 얘도 별로 거기 있고 싶진 않았을걸? 야, 네가 뭐라고 말 좀 해 봐. 나만 나쁜 놈 만들고, 이쒸. 그러나 설해사는 청명이 자신을 데려왔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꾸준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충격과 혼돈에 빠진 이들이 제 말을 들어 주지 않자 조용히 미간에 주름을 진 채 짜증난 표정을 지었을 정도로. 마침내 설해사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발언할 기회를 얻은 설해사가 입을 열었다. 저는 부자가 아닙니다. 이 장신구도, 의복도 무엇 하나 제 것인 것이 없지요. 그리고, 도사 님께서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누구든 다른 이와 착각하신 듯 합니다. 그러고는 가만 청명의 표정을 바라보다 덧붙인다. 저는 거지였고, 거두어 주신 분은 련주 님이시며 어찌되었든 저는 도사 님을 처음 보는 거니까요. 얼이 빠진 청명을 두고 윤종과 백천을 필두로 노발대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역시 다시 데려다두는 편이 좋지 않겠나, 장일소가 또 예측 못 할 짓을 벌이지는 않겠나. 점점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쳐다보던 청명이 툭 내던졌다. 걔 지금 머리 복잡해서 못 와. 얘가 일 다 그르칠만큼 중요한 것도 아닐 거고. 애초에 걔한테 지 욕망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는 하겠냐? 으휴. 금세 납득한 천우맹 맹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청명의 표정에 한심함이 스친다. 그 한심함이 숨기는 것이 있다.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들린다. 나 참…. 내 매화 잊을 일 없다면서, 다시 보면 기억할 거라면서 좋아할 거라면서. 순 거짓말쟁이 아냐. 청명은 제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했지만 화산은 청명을 본 지도 벌써 몇 해째다. 청명의 말이 맞다고 한들 여전히 위험요소는 존재했고, 따라서 결국 청명의 말은 치기 어린 땡깡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잠시간의 유예 기간을 주기로 한다. 장일소가 보이는 모습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기로, 어차피 이렇게 된 일 이마저 이용해 주겠다 결심한 것이다. 천우맹의 책사인 녹림왕 임소병만 골 아픈 일이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명의 혜안이 옳았다. 장일소는 청명이 설해사를 데려간 것부터 하여 일련의 사건들이 심기에 심히 거슬렸으나, 정사대전을 위해서라면 잠깐의 인내는 쉬웠다. 정사파를 막론하고 다음을 준비하여 열심히 톱니바퀴를 맞물리고 있을 때에, 그리고 천우맹이 항주마화와 해남구출을 위해 차출되었을 때에는 따라갈 명분도 능력도 없거니와 청명이 제정신이니냐며 제발 안전할 곳에 가만히 앉아서 저기 사파 자식(이는 임소병을 뜻했다)이랑 얘기나 하라며 보냈다. 그 시간 동안 설해사는 임시 거처에서 무료히 시간을 보내거나 청명의 말을 충실히 따라 임소병과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라 함은 단순한 사담이 아닌, 아니 얼핏 보면 흔한 계절과 꽃에 대한 말이지만 그를 들여다보면 현 중원이 굴러가는 모양새를 은유하고 있었다. 임소병 또한 말이 잘 통하는 설해사를 굳이 내칠 필요 없었고, 혹시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걸 수도 있으니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집무실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것을 용인했다. 설해사 딴에는 장일소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라과 같은 것 빼문에 시선이 모이는 것이 껄끄러워 이리저리 샛길로 다니며 피해다녔다. 임소병의 집무실 또한 피해있기 좋은 곳이기에 택한 것도 있었다. 다만 설해사에 관한 사실 때문에 그녀가 핍박 받는 것은 아니었다. 청명이 떠나기 전 쟤 잘 챙기라고,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싹 다 내 손에 대가리 깨지는 거야! 라며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설해사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수상한 일을 벌이기는 커녕 조용히 제 할 일만 했다는 것도 인상을 바꿔놓는 데 영향을 주었다.
 

개방 총단에서 일이 있었을 당시 책사 겸 바깥 구경 시켜 주는 겸하여 데리고 나간 적이 있으며 청명과 윤종 사이 트러블이 났을 때에는 청명이 수련하던 곳 가까이 앉아 청명을 구경하였다. 이가 청명의 낡고 바랜 기억을 하나둘 덧칠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사람, 익숙한 위치, 익숙한 행동. 낯익지 않은 것은 설해사가 자신을 보는 눈빛 뿐이었다. 분명 전에는 이것보다 반짝였는데, 하는 투정에 가까운 마음. 다만 설해사의 측면에서 청명이 수련하는 곳을 부러 찾아간 것은 아니고, 련주 님을 생각하며 잠시간 산책을 한다는 것이 길어져 도달한 장소가 우연찮게도 그곳이었다.
 

인물관계, 인연.
 

헌원도화
 

매화검존 청명

고귀한 명문가 아가씨, 험한 일이라고는 한 번도 안 겪어본 것 같다. 별로, 친해질 이유 있나? 에잉. (…) …뭐지, 이 덜떨어지고 맹한 아가씨는. 분명 이런 애 아니었는데? 아니었지 않나?
 

비단으로 이파리 닦고 매일 햇볕 쬐어 주고 물 주어 키워낸 온실 속 화초다. 바닥에 굴러보기를 했어, 검을 들어본 적이 있어. 하다 못해 타인과 대거리를 하다 주먹을 치켜든 적이 있어. 화산에 입문하기로 한 계기가 고작해야 저잣거리에서 본 매화 몇 송이라니. 사실 그런 이유로 입문한 제자들은 이미 수두룩했다. 개중 누군가는 꿋꿋이 수련을 거듭했으나, 얼마 못 가고 포기한 이들도 존재했다. 그래서 부러 더 모질게 굴었다. 그것밖에 못 하면서 장문인께 조른 거냐고 성질을 긁기도 했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사숙, 사숙 그래서 칠매검 이다음 초식이 어떻게 된다고요? 묻는 게 꼭 개… 같아서 칭찬도 조금…. 정신 차리고 보니 부정할 틈도 없이 묶여버렸다. 어느 날 청명은 목검을 정리하던 헌원도화를 향해 말한다. 야, 그거 정리하지 말고 들고 와. 알려줄 테니까. 뭐… 뭐 가르쳐 달라고? 칠매검? 물론 청명이 봐주는 일은 없었다. 도화 또한 청명을 알았고, 묵묵히 따르기만 했다. 화산에 입문하기로 결정하고 화산을 오르던 그때처럼.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면서. 노력과 간절함이 무조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도화는 종국에 매화 꽃망울부터 덜 피어난 매화를 한 송이씩 피어냈다. 헌원도화만의 매화였고, 만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렇게 설해사는 비공식적으로 청명의 제자가 되었다. 청명은 애시당초 논외의 존재였고, 설해사는 집념 하나만으로 화산 제자의 자리를 따낸 이니 약간의 특별 취급되는 감이 있었다. 굳이 설해사를 제자로 받으려는 화산의 일, 이대 제자가 존재치 않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둘만 있는 시간이 점점 늘었다. 물론 헌원도화나 청명이나 같이 보내는 시간 반절 이상이 수련이다 보니 하는 얘기도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사소한 사담이 하나씩 붙는 게 열 마디 스무 마디가 되면 친밀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보낸 나날들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며 청명은 헌원도화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다. 처음에는 제 가문 잘난 맛에 사는 똑똑한 아가씨인 줄만 알았는데, 어딘가 좀 애가 맹하고, 이러다 사기라도 당할 것만 같았다. 심지어 연령을 물어보니 저보다 네다섯 살은 어린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청명은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도화를 꼬맹이나 아해라고 부르고 다녔다. 주로 부르고 다닌 이름은 야 아해야, 혹은 도화. 훗날 그 매화검존이 늘상 끼고 다니는 애가 있더라, 의 그 애가 되었다. 청명에게는 공식적으로도 애. 즉 꼬맹이가 되었다며 잔뜩 놀림을 당하였다.
 

청명이 청문 몰래 술을 마시거나 타 문파 제자들과 싸우려 들면 헌원도화가 일차적으로 말리고, 안 되겠다 싶으면 쪼르르 달려가 장문인에게 이르는 역할을 한다. 청명은 화난 청문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청문이 차주전자 안에 든 모든 차를 죄 마시기 전까지 땅을 바라보는 벌을 받고 나온 이후 배신자라며 투덜거렸다. 도화는 슬쩍 시선을 피하고 모르는 척을 고수했지만. 청명이 제 연정을 자각한 날은 어느 달 밝던 밤이었다. 나무 위에서 술을 마시며 발만 까딱이다 익숙한 곳에서 검 휘둘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훌쩍 넘어가 봤더니, 역시나 헌원도화였다. 달밤에 연하게 검날이 빛났고 어디선가 매화향이 밀려왔다. 흰 머리카락에 달빛이 반사되어 윤슬마냥 반짝였다. 헌원도화가 펼치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이십사수매화검법. 유려한 변과 환의 검술이, 청명의 매화와는 다소 다른 매화가 아름다웠다. 그때 이유 모르는 두근거림이 동반되었다. 정작 청명은 첫 연정인 것도 모르고, 뭐지? 술 좀 마셨다고 가슴이 다 뛰네. 천하의 청명이 부정맥인가… 따위의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릇 모든 것에 처음이 있으면 그 다음도 있는 법. 청명은 봄날 매화가 만개한 산길에서 땅에 떨어진 온전한 매화 꽃송이 주워 귓가에 꽂고 어때요? 하며 묻는 헌원도화를 보며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인의 예리한 감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얼굴을 죄 벚꽃색, 봄의 색으로 물들이고 하는 말은 고작해야 머리에 꽃 꽂은 놈 치고 제정신인 놈 없다더라. 휘적휘적 걸어가는 청명의 느긋한 모습과는 달리 마음은 진창이었다. 매화검존 다 죽었네. 미쳤지 내가! 저 핏덩이, 꼬맹이를! 내가 저 놈 육합검 배우는 것도 봤고, 어? 이런 말이나 늘어놓고 있었다. 도화가 진작에 눈치챈 것도 모르고 말이다. 헌원도화는 솔직치 못한 바보 같은 제 사숙, 사형, 스승을 절찬리에 홀려내기로 결심한다. 청명은 하이고 당돌한 아해야, 하며 제가 봐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늪에 빠진 다리를 인식할수록 더 빨리 빠지듯이 청명은 헌원도화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결국 정신 차리고 눈 깜빡하니 이미 둘은 정인의 사이가 되어있었다. 청명으로서는 기쁜데, 기쁘긴 한데…. 내가 진짜 이 꼬맹이랑? 싶다가도 웃는 헌원도화를 보면 뭔들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봄날 꽃 질 시간도 주지 않고, 정마대전이 발발한다.
 

설해사는 제 재능의 한계를 알았다. 결국 저는 청명의 짐이 될 것이었다. 워낙에 매화검존이 끼고 다니는 그 애로 불렸어서 청명을 끌고 올 미끼가 될 여지도 있었다. 헌원도화는 단호했다. 이번에도 생각은 짧고 판단은 빨랐다. 청명. 아시잖아요. 저는 당신 곁에 설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짐밖에는 되지 못해요. 그리고 사숙은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지요, 그렇죠? 안다니까요 나는. 그리고 저, 여기서 가만 죽어 줄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청명은 이번에도 헌원도화에게 져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십만대산 봉우리에서 주교가 나타났을 때에…. 도화는 전장의 흐름을 알았다. 매화검존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도, 물론. 청명의 등 뒤에 마냥 숨어있을 수도, 그렇게 청명의 목숨으로 살아남을 수도 없었다. 결국 도화는 저를 지켜 주려는 청명을 밀어내고 주교와 직접 맞서 싸웠다. 무위의 차이로 인해 주교를 죽일 수는 없었으나 분명히 한 사람 이상 몫은 했을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그리하여 청명은 또 하나의 매화를 날려보냈다. 전장은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의 피로 인해 누군가는 살고 또다른 누군가는 죽었다. 끝나지 않는 겨울이었다.
 

암존 당보

이 아가씨가 도사 형님이 아끼신다는 그 애란 말이지? 청 소저! 우리도 한 판 뜰까요? (그리고 당보는 누가 청 소저고 누가 누구랑 뜨냐며 청명에게 신나게 얻어터졌다)
 

헌원가가 있던 곳과 사천은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천의 패다 사천당가를 모를 리는 만무했다. 당보는 의견 차이로 애진작에 당가와 틀어졌으니 당가의 사내로서 이름을 날리지 못해 제대로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청명과 당보가 주구장창 술을 마시고 비무하고 사파를 척결하니 모르고 싶어도 곧 알게 된 것이다. 개방은 아주 좋은 정보 제공지였다. 당보는 헌원도화가 화산에 입문하고서 청명이 뭔 술도 먹으러 안 오고 제자 하나 끼고 돌며 열심히 가르친다는 말에 호기심이 동해 직접 보러 왔었다. 결과는 위와 동일. 머리… 대가리가 정말로 깨질 뻔했다나. 이후에는 셋이서 술자리도 가지고, 어디 놀러 가는 겸 사고도 쳤다. 도화는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청문에게 차마 말릴 수 없었다고 고했다. 사실이었다. 매화검존과 암존을 말리려면 원시천존께서 오셔야 할 것이다. 나중에는 도화와 좀 친해지고서 뭐 이리 험한 일만 하고 다니시오? 저 도-사 형님께서 총애도 하시겠다, 좀 부려 먹으시오. 이것이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란 말이지? 따위의 타박 겸 농을 했다. 그런 암존과 결이 맞는 부분이 있는지 청명은 배고 신나게 놀러 다니며 비녀 구경하고 새로 들어온 서역 비단을 재보는 등 명문세가 자녀들이(었)던 티도 내고 다녔다. 당연히 청명은 입이 댓발로 나와서 당보 놈 만나지 말라며 땡깡을, 땡깡을. 처음에는 대체 뭔 사람이지? 정도의 감상이었다면 이제는 도사 형님 말고 나는 어떻소? 하는 농담도 하며 킬킬거리다가 청명에게 걸려 흠씬 두들겨 맞는 사이가 되었다. 정마대전 중에서도, 평화로웠던 때에도 나름 청명 다음으로 아낀 이.
 

설해사
 

청명
나를 납치한 이…. 나를 통해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마차를 향해 소리친 것은 당연하고, 매화도 참변 당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피투성이인 채로 저를 들쳐 매었으며, 훈련 중이면 저 멀리까지도 청명이 잔소리하는 소리, 악 쓰는 소리, 대가리! 라며 검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봐도 망나니 같은 모습이었고, 이는 설해사가 청명에 대한 인상을 구축하는 데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매서운 얼굴이 저를 볼 때면 언뜻 서글프게도 변하는 것에 사정이 있겠거니, 언젠가는 알려 주겠거니 기다리고 있다. 또한 처음 납치 당했을 때에는 개방을, 정파를 배신한 죄로 드디어 죽나 싶어 두려웠지만 예상 외로 너무 잘해 주니… 마음이 열린 것도 있다. 혼자 밤에 외롭게 있으니까 말동무도 해 주며 나름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덩달아 마음이 커져가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나중이 되면 청명은 설해사에게 꾸준히 검 배워볼 생각 없느냐며, 화산 입문은 어떠냐며 찔러보는 중. 내심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지금에 에잉, 언제는 그렇게 검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더니! 하면서 서운해하고 있다.
 

백천

청명과 무언가의 관계가 있음을 의심하고 있다. 의심보다는 두고 보는 것일까? 청명이 보이는 감정에 비해 설해사는 담백할 지경이라 조금은 헷갈리기도 하는 모양. 지금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장일소의 측근이라는 말에 약간은 껄끄럽게 생각하기도 했으나 검을 들기는 커녕 대충 절벽 끝에서 밀어도 간단히 죽을 것 같은, 무인보다는 양민에 가까운 설해사에 위협이 되리라는 생각을 지우고 있다. 사람을 해친 적도 없는 것 같아 무언가 숨기고픈 사정이 있겠거니 한다. 백천이 장문대리가 되고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도화가 당보와 쌓은 관계와 비슷한 느낌.
 

장일소

설해사에게는 그저 은인이며 빛이고, 구원이다. 그 지독한 사다리를 걷어차고 생판 다른 길을 걷게 해 준 사람. 그리고 그 길에 각종 금은보화가 자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준 사람이다.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장일소는, 이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 일단은 단순 흥미라고 정의했다. 강아지를 아끼고 난초를 아끼듯이 아낀다고. 또한 청명이 설해사에게 관심을 보이고 뭐라도 되는 듯 구니 더욱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있다. 청명의 반응 때문에 설해사를 감싸고 도는 모습을 부러 드러낼 정도로. 흥미 본위와 생존으로 이루어진, 그다지 건강한 관계는 아니다. 장일소는 수틀리면 언제나, 간단하게 설해사를 죽일 수 있으니까. 어딘가에서 매듭이 굳게 꼬였다. 어긋난 이상 풀어내려면 끊어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호가명

솔직히 호가명은 설해사를 만인방에 들이는 것을 막고 싶었다. 이곳에 두어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눈치와 지략이 좋은 건 쓸만하다고 한들 장일소에게는 책사들이 이미 여럿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 독심나찰毒心羅刹 호가명. 만인방의 군사가 있었다. 물론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척박하고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면 시선을 빼앗기는 법. 호가명은 장일소가 장강에 설해사를 데려가기 전, 부디 재고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모든 일은 결국 장일소의 뜻대로 되는 법이다.
 

남궁도위

매화도 참변 탓에 이미 안면이 있었다. 자세히 본 것은 아니고, 오래 본 것 또한 아니었는지라 살아있는 줄은 청명이 자신을 천우맹에 데려오고서야 알았다. 남궁도위 또한 장일소 곁에 있던 설해사를 보았기에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임소병

녹림이 화산과 일종의 동맹을 맺기 이번부터 그 장일소에게 아낀다는 사람이 있다고? 싶었다. 물론 한창 만인방과 녹림이 전쟁하던 중이었으니 소문으로만 접했을 뿐이었고. 실제로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장일소와 만인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깔짝이다가 청명에게 머리 한 대 맞고 기절할 뻔 했다. 같은 사파끼리니 친하게 지냅시다 하고 말을 붙이자 설해사 쪽에서 먼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청명이 같은 사파임에도 취급이 다르자 비법을 묻는데, 설해사 또한 딱히 모르겠다고 답하자 억울하다며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사실 사파가 아니라 녹림을… 음, 그건 아니군요. 실언했습니다. 조금은 우스운 관계이다. 청명과 화산 핵심 인물들이 자리를 비우자 마침 할 것도 많고 하여 말을 조금 텄다. 친해지지는 못한 듯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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