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날, 즐거운 날

러셀 로그

김유이 by 김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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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너머의 세상은 화려함으로 장식되어 더는 어둡지 않다. 그가 관찰하지 못한 시간동안 세상은 순식간에 변화했다. 턱을 괸 채로 밖의 풍경을 보던 러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에게 있어 두렵고 위협적이었던 어둠은 이제 더는 그들에게 공포가 될 수 없노라고. 그는 세삼스럽게 인간들이 가져온 시간의 길이를 체감한다. 

단지 300년. 끝이 정해지지 않은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에게 있어 그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필멸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변화를 이루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아니, 한 생명의 모든 시간을 바쳐도 이뤄낼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유하고, 소유하고, 기록하여, 시간을 이어감으로써, 그들이 있었음을 세상에 아로새긴다. 러셀은 그런 그들이 한없이 이기적이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마치, 불꽃과 같노라고.

봉인에서 깨어나 다시 바라본 세상도 그랬다. 밤하늘을 밝히던 달마저 가려질 정도로 화려한 야경. 어둠이 숨어버린 밤. 그의 것이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 러셀은 종종 생각한다. 인간들이 쌓아올린 문명 속에서, 그는 존재함에도 유리되었노라고. 그래서일까, 그는 이따금 발견하는 이어지는 흔적 속에서 안정감을 찾곤한다. 예를 들자면, 과거에서부터 쭉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같은 것들에게서 말이다.

크리스마스. 성탄절. 예수가 태어난 날. 그가 축복을 내린 아이들 중에선 종종 이런 축일을 챙기기도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인간을 종종 관찰하는 그에게 있어 인간들이 기념하는 날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러셀에게는 단순히 잘 구워진 다과와 함께 하는 날 정도의 인상이었다.  하지만 거리는 러셀마저도 무슨 날이 다가오고 있는지 쉽게 눈치챌 정도로 들떠있었다. 온 세상을 장식하는 트리와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 평소보다도 기대와 행복으로 가득한 정기의 흐름 속에서 러셀은 낯선 그리움을 느꼈다. 

 

‘■■■■■님은 성탄절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알아. 인간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잖아.’

‘…아, 하하하. 뭐어, 틀린 말은 아니네요.’

‘왜 웃어? 너도 얼굴도 모르는 녀석의 생일이나 챙기고 싶어?’

‘아뇨, 그런건 아니에요. 저는 신을 믿지도 않고요. …그냥, ■■■■■님도 이 날을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째서?’

‘■■■■■님께는 평범한 날이겠지만, 제겐 즐거운 날이거든요. 그리고 당신께서 이 날을 저와 함께해서 즐거웠다고 기억해준다면, 기쁠거에요.’

‘정말 특이한 인간이야, 넌.’

 

그에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인간들의 오랜 기념일일지라도, 그 위에 쌓여있는 시간은 의미가 있었다.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린 러셀은 팔짱을 낀 채로 텅 비어있는 깨끗한 식탁 위를 빤히 바라봤다. 맨날 대련이나 해달라고 하고,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이나 수행하는 제 파트너는 영 재밌는 구석이 없는 인간이다. 이 인간은 이런 날도 안 챙기는 건가? 그때 경매장에서 단 한 번 봤던 친구라는 인간도 ‘메리 크리스마스에요!!’라는 라인을 남겼는데, 호조 와타루는 평소와 똑같았다. 매일같이 하는 러닝을 위해 운동복을 갖춰입고 나오는 와타루를 보며 러셀은 짧게 혀를 찼다. 현관까지 걸어가 운동화에 발을 넣던 와타루는 시선을 무시하지 못하고 뒤돌아봤다.

 

“할 말 있으신가요?”

“너,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

“…? 25일이요.”

“알고는 있네. 너 뭐 까먹은거 없어?”

“…음…. 오늘 피 드리기로 한 날이었나….”

“어. 맞아. (사실 아니다.) 그거 말고 또 없어?”

“모르겠는데요….”

“네 스승이란 녀석은 대체 뭘 가르친거야?”

“갑자기 스승님 이야기가 왜 나와요.”

“됐고, 나가자.”

“러셀도 나가게요? 운동 안하시면서….”

“너도 운동 안 가.”

러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는 와타루의 옆을 휙 지나가며, 툭 내뱉듯이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잖아.”

러셀에게는 여전히 수많은 평범한 하루 중 하나, 그저 인간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는 날에 불과하지만, 조금 색다른 기억을 만들어도 나쁘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살아있고,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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