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러셀 로그

김유이 by 김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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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평범하다기엔 조금 특이한 하루였다. SID를 통하지 않은 의뢰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업혈귀와 관련된 일이었고 상대는 SID의 협력자였기에 무난히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원래대로라면 러셀은 제 파트너와 함께 경매가 열린다는 날에 행동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그는 심지어 경매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만 가진 와타루를 위해 약간의 쇼핑을 계획하고 있기도 했다. 도쿄 야회의 원조 ‘실루아노’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실루아노는 러셀이 기다리던, 그의 인장―반지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그는 과거에도 그랬듯 의뭉스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당신에게 꽤 중요한 인장일 텐데, 정말로 다 잃어버렸군요?’라는 긁어대는 말이었지만, 실루아노와 러셀의 관계는 늘 그랬으므로(원조들은 대체로 안하무인이다) 무시했다. 다만, 그 반지가 불과 몇 시간 전 받은 의뢰인 H.V 경매장과 관련이 있단 점에서 러셀은 조금 위화감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래서 그는 밤 산책을 가볍게(정말 가볍게 할 생각이었다) 하고 돌아갈 계획을 세웠고, 그 밤 산책의 경로에 H.V 경매장이 포함된 건 단순한 우연이었다.

아직 경매가 열리지 않은 경매장은 일견 평범한 공연장과 다름없어 보였다. 아무런 호위도 없는 공간에 들어온 러셀의 소리 없는 발자국만이 내부를 채웠다. 침입자를 환영하듯 공개되어 있는 공간에 위화감을 눈치챘을 땐 이미 혈주법의 한복판에 들어온 후였다. 

「러셀 님, 뭔가 이상합니다.」

“나도 알아. 단단히 준비했는데?”

두 흡혈귀의 힘 앞에서 대부분의 혈주법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이건 조금 달랐다. 불특정한 다수를 대상으로 전개한 힘이 아닌, 특정한 대상과 그와 관련된 매개체를 통해 행해진 술식, 그 대상은 명백하게 러셀이었다. 러셀은 자신을 속박하는 힘에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동시에, 몸에 새겨진 사슬이 술식과 기묘하게 공명하며 심장을 강하게 옥죄여왔다. 윽, 짧은 신음을 내며 가슴께를 움켜쥔 러셀의 얼굴은 통증에 일그러졌다.

「러셀 님, 바로 부술까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틈이 보입니다.」

“아니. 잠깐 기다려 봐. 우릴 기다린 것 같은데, 주인의 얼굴은 보고 가야지?”

「과연, 러셀 님! 얼굴을 기억하여 완전히 없애버릴 생각이시군요!」

네페쉬의 착각을 굳이 정정하지 않으며, 러셀은 이 무대를 준비한 동족을 기다렸다. 이 정교한 함정은 그의 현재 상태에 대해 훤히 알고 있는 자에 의해 준비됐을 것이다. 혹은 그런 자가 배후에 있거나…. 러셀은 예감처럼, 그 배후에 자신의 귀종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유다.

쿵, 쿵, 기묘한 공명이 한층 더 강해질 때쯤, 고요한 공간을 구둣발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검은 머리칼을 늘어트린 업혈귀는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했음에도 본디 그것이 자신의 본질인듯 자연스러웠다. 그는 술식의 가운데로 걸어와 러셀의 앞에 멈춰섰다. 갸날픈 엄지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큰 반지가 작게 진동하는 모습에 러셀은 짧게 혀를 찬다.

“그래, 거짓말은 아니었네.”

“어머, 그대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롭네요.”

“이 술식의 주인이 누굴까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너, 뭐야?”

“후후후, 레이디에게 자기소개도 하지 않다니, 무례하셔라.”

업혈귀는 제 가슴팍을 짚으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고, 붉은 눈꼬리를 휘며 기쁜 듯 웃었다.

“괜찮아요. 그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저는 로벨리아랍니다.”

“네 이름 같은 거 궁금하지 않아. 그것, 누가 준 거지?”

러셀의 시선은 줄곧 반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 제가 알려줄 리가 없잖아요? 뭐, 그대가 저의 소장품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헛소리.”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요.”

업혈귀의 차가운 손가락의 러셀의 얼굴을 따라 느릿하게 선을 그렸다. 서로 다른 온도를 품은 붉은 눈동자가 마주치자, 러셀은 상대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없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짧은 밤산책을 마무리하고 제 파트너와 함께 눈앞의 업혈귀를 처리하는 편이 효율적일 거란 판단이 내려지자, 러셀은 힘을 끌어올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내부에서 긴 머리카락이 날리고, 무언가 끊어져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 현상에도 업혈귀는 제 손아귀에 있는 소장품을 감상하다가, 알약을 꺼내 제 혀 위에 얹고 미소 지었다.

“제가… 아무런 대책 없이 그대를 둘까 봐요?”

업혈귀는 발꿈치를 살포시 들고 입을 맞췄다. 매끄러운 입술이 겹쳐지고, 혀가 뱀처럼 기어들어와 선악과를 건내주듯 톡, 정체 모를 것을 터트렸다. 러셀은 역겨움에 표정을 찌푸리곤 업혈귀의 혀를 반토막 낼 것처럼 깨물었다. 물론, 상대는 얄밉게도 이미 입술을 떼어낸 뒤였다. 그는 제 입술을 핥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너, 뭘 한 거…………아, 윽….”

러셀은 제 입에 들어온 것을 곧바로 뱉어내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입 안에 번지는 혈향과 이어지는 끔찍한 고통에 그는 몸을 웅크렸다. 일순간 사고가 흐려지고 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난도질하는 통증이 러셀의 숨을 틀어막았다. 

“효과가 좋군요. 그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극혈’이랍니다. 어떠신지?”

“악, ……………쿨럭, 읍…….”

흡혈귀에게 독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피가 있다, 는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러셀도 실제로 마셔본 적은 없지만 그 실제를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끔찍하다더니, 과장이 아님을 몸소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러셀은 업혈귀에게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비릿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울컥, 핏물이 넘쳐흘러 바닥에 붉은 꽃을 점점이 그려낸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 같이 온 몸이, 온 신경이 뜨거웠다. 

빌어먹을. 러셀은 그 답지 않게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곤 계속해서 무어라 말하는 네페쉬를 손으로 꽉 쥐었다. 

“안, 돼….”

이 상태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 저것이 널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가만히 있을 것을 명하는 러셀의 말에 네페쉬는 곧 조용해졌다. 네페쉬의 말소리마저 사라지자 러셀은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파트너의 얼굴을 떠올리곤 생각했다. 짜증 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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