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날 (버전 2)

Espre5S0 by 이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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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 세뇌, 사이비 종교, 성 착취, 아동 성 착취, 학대


“난 있죠, 내 이름만큼 미운 것이 없어요.”

창녀가 웃으며 옷을 벗는다. 그 느릿하고도 요염한 광경에 아무래도 업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았던 상대는 꿀꺽 침을 삼키었다.

“내 이름, 당신이 생각하는 그 뜻이 아니라 가치 없는 년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거예요.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기본적인 나를 부정당한 기분⋯.”

상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는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 짓는다. 그는 여간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거기 유두가 훤히 드러나 있는데도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하였다.

나이는 모름. 아마도 20살. 직업은 창녀.

옷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고객에게 다가간다.

***

놀이터에서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볼 제에 정 씨는 추억에 잠기었다.

그에게도 어릴 적이 있었다. 흙을 뭉쳐 주먹밥이라 우기고 나뭇잎 죽 찢어 김치라고 했었다. 정체 모를 빨간 열매를 돌로 찧으며 놀을 적이 그에게도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소꿉놀이도 참 세련되었다. 날씬하고 평평하게 생긴 돌에 대충 올려두는 것이 아닌 주방을 예쁜 파스텔컬러로 구현한 장난감을 가지도 논다. 저 애는 엄마가 되고, 저 애는 아빠가 되는 모습이 보기에 흐뭇하였다. 저리 사이가 좋다면 저 둘은 진정 미래에도 부부일지도 모른다.

다 낡아빠진 인형을 등에 업고 자장가를 부르며 돌아다니던, 어린 날의 정 씨는 제가 원하던 가정을 소꿉장난으로 꾸며야 했다. 그의 가정사는 그가 사이비에 빠지게 되는 것에 일조를 했다. 그의 가족들도 기분이 좋을 때나 ##아— 하고 이름으로 불러주었지, 평소에는 야, 너 저거여서 명찰을 매일같이 확인 안 하면 이름을 잊을 것만 같았고 부부싸움이 일상이었으며 학생 나이인 정 씨가 중학교를 졸업을 하자마자 공장에 보내는 집안이었다. 그래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 그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고 그의 어버이날에 온 편지에는 사고로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에 그는 그 자리서 주저앉았다. 의지할 곳이— 믿을 곳이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울지도 못하고 멍하니 거기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공장 언니들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길 잃은 이에겐 이정표를, 슬픈 이에게 우산을, 고독한 자에게 따스함을, 그리고 모두 해당하는 이에게는 종교권유였다. 사이비— 외국에서 건너온 이단에 가까웠는데 종말론적이었고 사유재산과 가족을 부정하였다. 공장일에 지치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한 가족들은 매년 돈이 적다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공허하였다. 뜬눈으로 지새며 새벽이 밝기를 두려워하였다. 보통 같은 행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어쩌다가 한 번도 내일을 바라는 일도 없었다. 그는 그럭저럭도 살아지지 않았다. 자신을 잃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보고서 몇시간이 지나고서야 울면서 재봉틀질을 하였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울기 싫단 생각에 웃으려고 하지만 그와 함께하던 추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는 모든 것이 끝난다 믿기로 했다.

사이비에 들어가고서는 모든 것이 편하였다. 그저 믿음을 증명하기만 하면 결혼할 사람, 아이를 만들 때와 낳을 때도 다 정해 주었으니깐. 모든 책임은 타인에게 맡기었다. 이리도 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교인, 엄마 역을 수행하면 되었다. 일종의 소꿉장난이었다. 어울리는 반묶음 머리 하고서 아들을 안고 예배를 드렸다.

남편은 믿음이 강한, 정의를 아는 사람이었고 다정할 줄 알았다. 아들 또한 믿음 속에 자라며 그 셋이서 마냥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라였다. 종말의 말에 다 같이 천국에 가자, 거기서 외할아버지도 만나자 약속. 아들과 소곤대고 있으면 남편이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면 비밀이라고 웃어 보였다.

외부에 의한 구조는 반강제적이었다. 그는 구조를 바라지 않았다. 30대의 정 씨는 아들의 손을 잡으려 하였으나 끌러 이끄는 사람의 손에 의하여 거기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사이가 좋은 부부 놀이는 끝이 난 것이다. 밥을 그릇에 담아 넣고 배추를 고춧가루에 묻힌 것을 죽 찢어 밥 위에 올려 먹었다. 대화 소리는 없었다. 그저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뿐, 이딴 거 소꿉장난이 아니야, 행복한 가정이 아니야. 소꿉장난을 먼저 그만둔 것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다정을 알았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 씨에겐 더 이상 그러하지 않기로 한 것뿐이었다. 낯선 여자의 향수 냄새 훅 끼칠 제 어디 시향이라도 붙잡혔다 나왔나 그저 넘기었고 그 냄새가 반복이 되자 애써 눈을 감았다.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에둘러 그만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우리가 만나 안에서 맺어진 곳이 좋은 곳이 아닐지라도 결혼기념일은 기념일이나 그는 그날에도 사창가로 향하였다.

정 씨는 머리를 쓸어 넘기었다. 숨이 느리게 쉬어졌다. 이렇게 차분할 수가 없었다.

‘이번 정류장은 95파출소, 95파출소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목련 문화예술고, 도화 남고, 서서울공연…‘ 

쓸데없이 긴 다음 정류장 이름을 안내 방송이 다 읊기도 전에 버스가 멈추었다. 95동 사거리에서 들어간다. 어두운 곳으로 향하면 냄새나는 길목이 나오고 청소년 통행금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 눈앞에 들어온 것은 입에 사탕을 물고 서 있는 여자— 여성이 아닌, 여자였다.

“여기는 언니가 올 곳이 아닌데.”

그의 눈이 가늘어지다가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지었다. 사탕을 입에서 빼내는 모습이 마치 담배 피우는 것 같았다. 정 씨의 목소리는 차분한 만큼 차가웠다.

“내 남편 어디 있어?”

“…그 분이 누군지를 알아야 알려주죠.”

그 여자는 고등학생, 과장을 더 보태어 중학생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어려 보이는데 경력은 매우 짙은 것 같았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요염하고 유혹을 하는 것 같았다. 여자의 손가락 사이에서 투명한 분홍빛 막대사탕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깨끈이 흘러내렸다.

창녀는 창녀구나, 눈을 돌리며 침을 삼키었다. 그 막대사탕이 입에 들어간 것만 같이 목구멍이 아리었다.

“언니, 남편 못 찾아서 속상할 텐데, 나랑 노는 거 어때요? 공짜로 해줄게.”

어린 매춘부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뒷걸음질 치려 해도 두걸음이 한계였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는데 그가 정 씨를 안았다. 작은 가슴도 눌리니 골이 생기었다. 빛 적은 거리서 자신의 그림자 안에 있는 여자의 초콜릿색 눈은 거의 검정으로 보일 정도였다. 사이비에 있을 적에 이러한 눈을 한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내면이 산산이 부서져서 텅 비어버린, 또는 인격이란 것이 생기기도 전에 부서진 아이들. 그러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눈썹이 제 마음과 다르게 휘어졌다. 여자의 눈꼬리도 같이 휘어졌다.

그의 애정결핍은 농도가 짙었다. 스스로 느끼지 못할 만큼 애정에 굶주려 있었다. 사막에서 헤매는 이에게 달콤한 물 한 모금이었다. 안아줘요. 안아줘요. 부모님께 남편에게 잔뜩 말해도 안 이루어지던 부탁이었다. 여자의 몸은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초겨울인 탓인지 둘 다 인지 몰라도 약간 차가웠다.

“자, 따라와요.”

여자의 손이 작았다. 정 씨의 굳은 살 베긴 손을 쓱 잡더니 이끌었다. 여자는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방은 좁고 딱 행위만 하라는 것 같았다. 질이 좋은 곳도 아닌 거 같았다.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느끼는데 정작 자기는 신발을 벗고 여자 옆에 앉았다. 그는 누워서 그와 시선을 마주친다. 입꼬리를 올린다.

“나랑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여자의 질문에 정 씨는 머뭇거리었다. 그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소꿉장난.”

여자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엄마와 딸. 아니면 애인? …전 뭐든 좋아요.”

목소리가 예뻤다. 어릴 적 목소리에도 콤플렉스가 있던 사춘기 때에 갖고 싶어 했던 모양으로 나왔다. 정 씨는 눈을 그만 돌리고 말았다.

“이름이 뭐예요?”

답을 하려는데 머릿속에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여자에게 건네었다.

“…## 씨. 이런 곳 처음 와봤죠?”

푸스스 웃었다. 그리고 정 씨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 씨라고 불러줄까요? 엄마나 자기… 다른 호칭도 많아요.”

눈이 마주쳤다.

하나, 사람은 운명을 따라라
하나, 사람은 저속함을 버려라
하나, 길을 어긋나지 않게 따라라

그는 그에게서 신경을 돌리고자 사이비의 교리까지 머릿속에서 외워야 했다. 여자의 작은 머리도 무게가 나름 있어서 무릎을 눌렀다. 그것이 아들이 생각 나면서도 무언가 속에서 꾸물꾸물 뱀과도 같이 자극되는 느낌이 있었다. 한숨을 내뱉는다. 그러나 이것이 어떠한 비극적인 느낌이 들어서는 아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자의 몸을 만져보았다. 작고 가늘었다. 조금 차가웠다. 산딸기 같다. 손으로 툭 터트릴 수 있을 거 같이 약해 보였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여자는 정 씨가 만질 때에 옅은 신음을 흘리었다. 이 여자는 경험이 많다. 남편과의 딱 몇 번 아이를 갖기 위하여 한 기계적 행위 외엔 경험이 없는 정 씨와 달랐다.

“손 뜨겁네요.”

그의 원피스가 말려 올라가자 바로 속옷이 보였다. 배에는 멍든 자국이 보이고 살냄새가 훅 끼치었다. 우유 사탕 같은 달큰하면서도 비릿한 냄새. 이 여자가 동안이 아닌 진짜 어린 것임이 느껴지었다. 많게 쳐도, 아무리 올려 쳐야 20살 정도일까. 이런 여자가 이 정도의 경력을 갖기까지의 과정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름이 죽 끼치었다.

“## 씨?”

정 씨는 도망치었다. 신발을 신고 돈 몇장 던지고서.

언제부터 일을 시작한 걸까, 처음은 언제 사라진 것일까. 그 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남자에게 안겼을까. 자신도 그 역겨운 인간들 중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에 나오는 것이 진짜 욕지기인지 헛구역질인지 몰라 입을 가리었다.

“…아, 언니. 기다려요.”

여자가 정 씨의 손을 잡았다. 양손이 한쪽 손을 감쌌다. 여자는 시선을 잠시 내리깔다가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신발도 안 신고 나와서 아까보다 키가 조금 줄어있었다. 맨 발에 눈이 밟히고 있었다. 그는 발개진 발 끝을 살짝 오므렸다. 발가락이 살짝 말렸다.

“제 이름, 영원이에요. …서영원. 저기, 저기서 일하고 있어요. 잘 가요.”

가로등 밑이었다. 숨을 가쁘게 쉬며 웃는 그의 두 눈에 맺힌 이슬이 숨 가쁘게 뛰어서인지 자신을 원해서인지 매춘부 다운 연기일지 몰랐다.

“또 올게.”

“…거짓말.”

그 말끝이 떨어질 때에 짙은 눈동자에 홀리었다고 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내내 머리가 멍하였다. 마치 무언인가에 취한 것 같이,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여자였다. 여성이 아니었다. 그마저도 여자애의 분포에 들어가는 거 같았다.

95구에는 그가 삶에 고락에 몇백번씩 씻겨져 나온 눈을 한 어린 그가 있다. 그 사실이 머릿속에 사창가 길 입구의 청소년 출입 금지 팻말처럼 세워진 것만 같았다. 갈비뼈가 만져지던데,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걸까.

“뭔 생각 하냐?”

남편이 밥을 푸다가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응, 으응? 아무것도….”

그는 황급히 밥그릇을 쟁반에 놓았다. 서영원에 대한 것으로 자신의 머리가 꽉 차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식탁 위에 두었다. 남편 황 씨가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였다. 어차피 같잖아 자기도 사창가에 다니면서.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은 바로 영원을 남편도 알까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서영원의 길고 죽 뻗은 직모, 다크 초콜릿 같은 눈동자. 토끼 같은 눈망울. 그렇게 예쁜 아이가 처음이라서 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본적인 동정심이었거나. 그 아이가 자려는데 눈에 아른거리었다. 

“…거짓말. “

이 한마디에 그는 어찌할지 몰라 했다. 매춘부를 매번 안으러 가는 남자들의 심정을 알겠다는 데까지 마음이 번질 제, 그는 숨을 삼키었다. 딸꾹질이 나왔다. 안방에서 바로 옆에서 등 돌리고 자는 남편이 깨지 않길 바라며 입을 꽉 다물었다.

그는 영원을 한 번 더 만나보기로 하였다. 날이 지나고 해가 질 때쯤에 돈을 챙겨 95동으로 향하였다. 처음에 왔을 때 나름 인상적이어서 신경이 쓰였던 고등학교가 죽 나열된 다음 정류장을 안내하는 소리가 이번에는 들릴지가 않았다. 그는 진짜로— 진짜로 이제 성 매수자가 된다는 것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타락이다. 사탄에게, 창녀에게 홀려버리었다. 사이비에 있을 때에 그리 경고를 듣던 것이었다. 자신은 여성인 이상 그런 것에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음속에 교리를 다시 읊었다. 머리가 마비된 것 같았다. 삐이— 하는 이명이 들리었다. 그는 가게를 찾았다. 문을 열 제에 심장이 아플 정도였다.

그 길을 걷는 것이 마치 어떠한 큰 잘못을 하는 것처럼 떨리는 동시에 결혼 의식을 치렀을 때처럼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영원의 이름을 말하자 방을 안내받았다. 거기서 영원이 전보다 더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있었다.

서영원을 안는 비용은 매우 쌌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여도 매춘부의 가치는 오래 일을 할수록 떨어진다. 그가 얼마나 오랜 경력일는지는 모르겠으나 웬만한 퇴물들과 비슷한 가격이었다. 아직도 호객꾼으로 전락을 안 한 것은 어리고 아름다운 외모 탓이었다. 명품 옷 속 누더기 같은 가격,

“또 보러 와줬네요?”

그 가는— 여린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돈을 좀 아끼면 될 것이다. 정 씨는 꽤 자주 사창가에 찾아가게 되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몇 주 후에도 찾아갔다. 영원의 미소는 매번 낯선 동시에 서글펐다. 그가 겨울임에도 그런 옷을 입고 있는 것에 감기는 안 걸리려는지 걱정이었다. 목도리와 겨울옷을 사서 쇼핑백에 담았다. 그에게 검은색보단 진녹색이 더 어울릴 거 같았다.

그는 쇼핑백 안에 있는 옷이 꽤 저렴한 것임에도 와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옷을 안았다. 방긋 웃는다. 고마워요. 분홍 입술이 요염하게 움직였다.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내뱉는 숨과 함께 웃었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작은 소리를 같이 내었다.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숨을 느리게 쉬었다. 서로를 안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하였다.

“## 씨….”

영원의 숨이 닿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사모님이라고 불린다. 누군가의 아내라는 뜻이었다. 아이가 있을 때는 예찬이 엄마였다. 호칭 그대로의 의미이다. 이름마저 잊은 정 씨에게 자기의 이름이 영원(永遠)이 아닌 0원짜리 애라고 영원이라 제 이름이 밉다고 알려주었다. 

이름마저 잊은 여자가 이름마저 미워하는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영원의 멍든 배를 쓰다듬었다. 엄마 손은 약손— 흥얼거리면서.

“사이비에서 이렇게 하다가 종교에서 금칙어로 규정하던 의료행위를 감히 하는 거냐고 맞았었어. ‘죄송합니다’의 의식은 매우 아파서, 내가 고통을 잘 참는다 생각했었는데 아니더라. “

“…어디 아팠어요?”

“풀로 머리와 등을 때리거나 물고문을 하기도 하고… 채찍도 가끔 나왔었지.”

“그래요?”

영원이 정 씨의 뒤로 몸을 옮겼다. 등을 쓰다듬으면서, 영원이 손은 약손— 하고 정 씨의 멜로디를 따라 하였다. 퍽 귀여웠다. 이렇게 하는 것 맞냐고 하는데 순간 딸 같다고 느껴지었다. 딸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 생각을 일단 덮어두기로 하였다.

크리스마스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새해 첫날에 부부는 각각 다른 거리에서 매춘부를 안으며 보내었다. 이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았다. 그러나 서영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 씨, 나랑 한 번 사귀어볼래요?”

“뭐?”

“…남편분도 이미 있을걸요, 애인. 그러니깐 언니에겐 내가 애인 해줘야지.”

양 팔이 허리를 휘감듯 감싸 안았다. 정 씨는 또 영원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나 다름 없어서 그런다며 그의 애인이 될 구실을 찾았다. 아마도 이유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배에 얹힌 손이 차가웠다. 자신의 타락을 정 씨는 알았다. 그러나 오싹하게 소름이 돋으면서도 이것이 싫은 것이 아니었다. 어린 매춘부는 사람 동하게 하는 법을 잘 알았다.

“그래, 그럼….”

손을 잡았다. 유혹에 넘어간다. 이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하면 어느 정도 거짓말이다. 행복했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 또 누군가로서 있는 것이 아닌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거 같아서. 제 이름, 정##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야, 너 이 명함 뭐냐?”

남편이 사창가에서 받아온 명함을 눈앞에서 흔들었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혼 도장을 찍어주었다. 어째서 인생에 일종의 불행이 생긴다면 때는 정해진 듯 여름이나 봄이었다. 대지는 보드랍고 바람은 따스했다. 뿌리를 잘못 내린 것이다. 그것이 틀림없다. 그래, 그래….

남편은 이런 구질구질한 아파트에서는 제 애인과 못 산다며 나가버리었다. 황 씨가 나간 집에 결혼사진만이 걸려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자리에서 그 부분만 하얀 채였기에 떼어버릴 수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두었다. 무엇보다도 떼어내자니 허전하였다. 한숨을 쉬었다. 삶은 작은 방의 곰팡내처럼 지긋지긋하고도 꿉꿉하였다. 그러나 그대로 살아지었다.

정 씨는 매번 95동에서 서영원을 안았다.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영원과 건전한 관계를 갖는 것에 시간을 썼다.

영원은 불협화음들로 만들어낸 사랑스러운 음악 같았다. 귀여웠다. 아니, 귀엽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 정 씨 마음은 혼란이었다.

“이번에 밖에서 볼래요?”

“뭐?”

“돈 내는 거 말고 낮에 하는 진짜 연인같이 데이트. 일 언제 쉬어요?”

“…월요일에.”

“그럼 월요일 아침에 만나요. 여기로 9시까지 오기에요.”

정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을 기다린다는 행위를 자신이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자기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깔끔하면서도 단정한 미가 있는 옷을 골랐다.

어릴 적 본 소설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현재 완전히 타락하였으며…. 하던 일제강점기의 소설. 그는 현재 어떠한 상태인가. 완전히 타락하였는지는 몰라도 창녀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 다 줄 거 같이 구는가 묻자면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이다.

영원은 다행히도 먼저 비싼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다른 이가 그에게 그런 것을 걸치게 하지도 않았다. 밖에서 볼 제 정말 예쁜, 윽 하고 숨 들이 마시는 소리 나는 미인이었으나 화려한 것이 어울릴 거 같지 않았다. 수수했다. 그 수수함이 들에 핀 제비꽃 같아서 아름다웠다.

참 강한 들꽃 같았다. 그런 그와 장난삼아 사귀고 있다. 전 사이비 신자와 매춘부라는 해괴한 조합. 그는 얇은 코트를 안 있던 중에 가장 밝은 옷을 입은 것을 보며 너무 멋을 내었다. 망설여지기도 하였다.

정 씨는 남편과 이혼한 후 백화점 청소부로 일을 하고 있었다. 급여는 최저에서 조금 더 받는 정도였으나 혼자 먹고살며 영원을 안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영원이 가격이 이리 싼 매춘부가 되려면 얼마나 구른 걸까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덮어두기로 하였다.

영원은 쥐색 후드티에다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추워 보였다. 그의 창백한 피부가 그날따라 더 하얗게 보였다. 그는 정 씨를 보자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었다. 그는 정 씨를 보자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넘어질 듯이 불안정하게 보였다. 넘어져서 품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대로 꼭 안아줘야지. 생각하고 팔을 살짝 벌리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펭귄 두 마리처럼 서로 안았다. 영원은 다 헤진 운동화— 밑창이 살짝 덜렁거리기까지 하는 것을 신고 있었다.

정 씨는 제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요즘 신발이 얼마나 하는지도 계산이었다. 숫자에는 약하다고, 고등학생 땐 수학 꼴찌였다고 자조하는 그였으나 돈 계산에 대하여 어떠냐 한다면 나름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또 다시 인간 서영원에게는 주고 싶고 매춘부 영원에게는 아깝다는 결론이었다.

핑계를 찾자면 첫째로는 영원이 원한다 직접 말하지 않았기도 하고 둘째로는 이미 그를 안는 것으로도 일반적인 연인으로 하지 않을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손이 차갑다. 십여년 전, 말랑하고 따뜻했던 아들의 손을 기억에서 끄집어낸다. 영원은 그의 손을 신기한 듯 만적거리였다.

“어디로 갈까.”

“…모르겠어요.”

매춘부 영원과 인간 서영원은 큰 차이가 있었다. 매춘부 일 때에는 거절 못할 요부였으며 말을 잘하고 잘 이끌어 일테면 중독성이 강한 약을 들이키는 것 같은 그러한 느낌이 있었다면 인간 서영원은 기억력도 좋지 않은데다 말 수도 적고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마치 하나하나 배워가야 할 아기 같았다.

그가 처한 환경만 보아도 그러하였다. 많이 쳐줘야 20살인 여자가 정 씨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들과 같은 경력이라면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는 것일 거다. 글은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일단은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기었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있으면 이 작은 나라도 영영 길을 잃어버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아, 홍대 입구….”

“갈래요?”

그는 끄덕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길을 세월에 몸을 던져 나이가 있는 자신이 간다는 것이 영 좋을 거 같지가 않았으나 그래도 이 땅의 길이 특정한 연령대에만 열려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리고 영원과 함께니깐 어쩌면 사이가 좋은 애인까지는 아니어도 가족으로 봐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영원이 일회용 교통카드를 뽑는 것을 기다리었다가 같이 개찰구로 향하였다.

영원은 어렸다. 눈에 보이기로는 근처 고등학교의 겨자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보다도 더 어리었다. 정 씨는 그가 아닌 다른 매춘부들과도 말을 섞어보았다. 그렇다면 으레 20살이라는 거짓말이었다. 영원도 그랬다. 20살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몇 년을, 몇 개월을 더한 것일 테다.

개찰구애서는 청소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정 씨의 것처럼 간단하게 찍히는 그 음만 들리었다.

지하철 덜컹거리는 소리에 1호선 특유의 지린내 같은 불쾌한 냄새. 평일 오전에는 사람이 꽤 많았으나 환승 하거나 계속 홍대로 향하는 길에 사람은 줄어들었다. 사람이 적당히 적은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아 영원을 살피었다.

얼마 뒤 역에서 내렸고 평일 오전의 홍대에는 사람이 적었다. 가끔 공주님 옷 같은 것을 입고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이나 약간의 불쾌감을 주는 차림의 남자들이 보였다.

정 씨는 문득 저런 공주님 같은 옷을 영원에게 입혀주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다. 분명 연분홍이 잘 어울릴 거 같았다. 치마는 검정보다 하양이 더 예쁠 거 같았고. 머리는 리본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기보단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거 같다고 생각했을 때에 영원도 그들을 보며 자신에게 저런 옷 입히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었다.

홍대에서는 거기 놀 곳이 은근히 적었다. 그러나 이것저것 보는 재미는 있었다. 엄청 긴 아이스크림이라던가 요즘 유행인 과일꼬치라던가. 여러 가지 중에 하나 골라서 사이좋게 하나씩 입에 넣어보고 새콤달콤한 맛에 놀라기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끼긴 했으나 그런대로 맑은 하늘이었다. 바람에 구름이 이동하면서 때때로 태양을 가려줄 제 그것이 뭐가 웃기는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숨이 오늘따라 맑았다. 초가을이었다. 바람이 훅 불자 옆 키가 크고 마른 남자의 아이스크림이 쓰러졌다. 그것이 멀리서 한 구경이면은 킥킥 웃고 끝냈겠으나 그는 운 나쁘게 영원과 가까이에 있었고 상의는 물론 바지까지도 아이스크림 범벅이 되었다.

“아이고, 이걸 어떡하나….”

남자는 어디 패스트푸드점에서 안 쓰고 가져온 거 같은 냅킨을 주머니에서 뭉탱이로 꺼내어 놀라 얼어붙듯 멈춰있는 영원이의 옷을 박박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아이스크림이 하얀 자국을 남긴 채였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제 명함을 꺼내어 손에 쥐여주었다. 아무리 봐도 대충 지은 가명인 거 같은 이름과 번호가 있었다. 여기서 옷 대충 사 입고 문자로 영수증 보내면 세탁비까지 합하여 돈을 보내주겠다고 하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급히 자리를 떴다.

이 근처에 놀거리만 있고 옷 가게는 없던 거 같다고 하는 그를 보며 핸드폰으로 홍대 옷 가게를 검색하였다. 남의 돈이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영원에게는 요즘 젊은 애다운 예쁜 옷을 입혀줘 보고 싶었다. 그렇게 옷 가게 찾으려면 큰길로 나가보자 하고 걷다가 본 것은 거리의 여자들이 입고 있는 거 같은 그런 옷을 파는 가게였다. 겉부터 연한 분홍으로 페인트칠이 되어서 들어가기 여간 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거기 걸려있는 옷들은 품질보다는 예쁜 것으로 승부를 보는 듯 가격은 학생들 지갑 사정에 맞춰져 있었다. 안에 들어가서 정 씨는 옷들 중에 고민을 하다가 이미지로 그려놓은 옷들 중에서 가장 잘 맞는 것을 사서 영수증을 카메라로 찍어서 계좌번호와 함께 명함에 적힌 번호로 보내었다.

영원은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입고 온 옷을 비닐 쇼핑백에 담았다. 남자는 금방 돈을 보내었다. 어차피 보풀이 꽤 일어나서 버리라고 넌지시 제안을 해볼 후드티에 다 낡은 청바지에도 세탁비를 꽤 많이 보내주었다. 아까의 아이스크림 일이 일테면 행운이었는가 생각해보며 가게를 나서려는데 영원이 치마와 블라우스를 가져왔다.

“이거 사줄 거예요. 같이 커플룩 해요.”

비슷한 분홍 블라우스에 검은색의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치마. 약간 쑥스러웠다. 그러나 영원이 오늘 이렇게까지 흥미를 보인 적은 적었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원은 카드를 한 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든 계산이 현금이었다.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그라고 포주에게 은근슬쩍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니 카드를 만들래도 만들 수 없었을 테다.

영원이 골라준 옷 입도 나오는데 다리가 서늘해서 부끄러웠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는 그 옷을 입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울리나? 생각 해보기도 하다가 결국엔 나이에 안 맞게 내가 왜 이럴까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영원은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예쁘니깐, 착하니깐 …그런데도 퇴물 취급에 언제나 멍이 들어 있었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딱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행복하길 원하였다.

그는 거기서 얼마나 오래 일했을까.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옷은 잘 정리하여 벗어두었다. 딱 한 번 입을 옷이었으나 행복하게 하루 보냈으니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그 이후로 영원을 또 안으러 갔다. 그 사이 계절은 완연한 가을이었다.

“## 씨, 다음에도 나랑 같이 외출할래요? 눈 오기 전에 말이에요.”

그는 딸기 맛 막대사탕을 자주 먹는 것인지 그와 대화하면 그런 인공적인 달콤하고 상큼한 내가 났다. 그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만지며 가볍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서영원을 또 다시 만나고 싶었다.

아까 안 좋은 일이 전부 봄 여름에 일어나는 것 같다고 했던가, 다음 해의 그 일도 벚꽃 피는 봄이었다. 눈송이처럼 꽃잎이 날리고 조금 따뜻해진 기운에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때에 사창가 길목 전체가 철거되었다. 순찰을 돌던 경찰들에게 묻자니 구조라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여자들 다 보호시설로 갔을 거라고. 그 말에, 정 씨는 영원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라 힘이 죽 빠지었다. 전국의 여성 보호시설을 다 돌아다니거나 하는 무식한 방법이 첫째로 떠오르는 것이었고 둘째로 떠오른 것은 없었다.

영원은 행정상으로 없는 사람이었다. 출생신고도 아예 되지 않았고 생일은 물론 나이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을 거 같지 않았으며 애초에 번호를 교환한 적도 없었다. 이렇게 막막하고 속이 꽉 막힌 것과 같이 느껴지던 것은 공장 첫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때에 알았다. 정 씨는 영원을 단순 불쌍하게 보고 있던 것이 아닌 진정으로 그 형태가 모성이든 성애든 사랑을 하고 있었다. 영원과 방에서 소꿉장난을 하는 것도 이제 끝났다. 이제 또 이름을 잃어버릴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타인보다 조금 더 불행한 축이었다. 운이 없어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며 그중에서도 하필 장녀였다. 사이비에 포교에 당했으며 가난했다. 그에게는 책 한권 위로도 없던 삶에 이제야 사람 한 명 들어오나 하였는데 그 마저도 이제 없어졌다.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날만 계속되었다. 4월을 그렇게 보내었다. 구조가 있었던 날, 4월 9일. 그날은 누군가의 생일이었으며, 기일이었고 어떤 나라의 기념일이었다. 그러나 영원이 없으니 자신처럼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날이었다. 벚꽃, 저 하얀 눈송이 같은 벚꽃이 예뻤던 것만은 기억한다.

집에 와서 적막이 싫어 TV를 틀었다. 사창가에서 강제로 성을 착취당하던 여성들이 구조되었다는 기사였다. 백화점 청소를 하는 데 그 기사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었다. 어차피 그래봐야 몸파는 창녀들이라는 말이나 한 사람을 영아기부터 20년간 성착취하였다는 이야기는 좀 지어낸 거 같지 않냐던가.

그는 만나고 이야기를 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아들, 아들을 보러 갔다. 그는 스스로를 종종 예찬이 엄마라고 하였다. 주로 종교에 대해 생각할 때에, 아들이 보고 싶어질 때였다.

자신의 이름을 앗아간 놈이지만 피붙이인 만큼 정 씨는 그를 사랑했다. 예찬이. 사랑하는 예찬이. 사이비- 중국에서 건너온 이단에 가까운데, 예수를 찬미하라는 뜻에서 예찬이라고 지은 이름이었다. 외부 단체의 도움으로 사이비에서 나올 제 그를 두고 나온 것이 아직도 후회였다. 아들을 다시 데려오려고 할 때에 이미 늦어 아들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며 빛나는 광신도였다.

종교 시설은 작은 동네의 고등학교 맞은편에 있었다. 등교하는 학생들은 그 건물에 대해 의문을 표했으나 몇 달이 지나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 가끔 설문 조사라던가, 그런 것으로 포교를 하곤 했다. 정 씨도 사탕을 붙인 전단을 돌리었는데 사탕만 떼어먹고 학교 이름 탓에 핸드폰이 잘 안 터진다던가 수다를 떨며 종이는 버리는 것이 보통 주눅이 들던 것이 아니었다. 녹색 버스를 타고 학교 이름이 죽 나열되어 이름이 쓸데없이 긴 정류장에 내리고, 조금 걸으면 종교시설이 나왔다.

"아들⋯."

예찬은 눈의 가늘어졌다. 눈썹을 찌푸리고, 근처 여고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려던 전단이 그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그러다가 그는 입 안을 살짝 깨물더니 미소를 지었다.

"누구시죠? 저는 고아인데."

정씨는 이 반응이 익숙했다. 그를 놓고 나온 때부터 그를 이렇게 운 좋게 이러한 반응이었다. 배교자는 처단하라는 극단적인 교리가 있었다. 종교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존속 살해가 종종 일어나던- 그로 인해 기사가 자주 나고, 언론에 자주 나던 종교이다.

그는 또 다시 쓸쓸하였다.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가기도 하였다.

정 씨는 미용실 예약명부에 이름을 쓰려할 때 잠시 머뭇거렸다. 제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듣기 전까지 정 씨는 자신이 자신의 이름도 잊고 섰다는 것 조차도 잊고 있었다. 그 질문을 해준 사람은 최근에 그 옆에 부재했다. 158cm의 공백이 너무나도 커다랬다.

영원의 부재, 구멍을 바쁜 일상으로 메운 거 같을 때쯤이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고 훅훅 쪘다. 정 씨의 일은 화장실 청소라서 냄새를 더 느끼게 되는 여름이 비위가 약한 그에게 고역이었다. 백화점 청소부들은 여고생들처럼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수다를 떨곤 했다. 

“여기가 거기야, 어휴….”

“아직도 봉사활동 다녀?”

“그래, 새로 들어온 애— 어른 가르치는 봉사활동이라 쉬울 줄 알았는데 얘는 덧셈도 제대로 못 하는 거 있지?”

“아유, 그건 과장이 심하다야.”

“진짜라니까,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여간 못 배운 게 아녀.”

그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정 씨는 그 여자의 핸드폰을 흘긋 보았다. 나이 든 은숙은 한 때에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는 꿈을 꾸었을 정도로 집이 잘살았다고 한다. 학생 때 집안이 기울고서는 청소부 일을 전전해왔으나 그 꿈을 아직도 놓지 못하였는지 보호시설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가고는 했다. 그 사진에 영원이 찍혀있었다.

“뭐여, 아는 애여?”

“아, 아으…. 그러니깐, 거… 내 남편이랑 바람이….”

정 씨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 거짓말은 안 했다. 바람이 난 여자와 직업이 같다 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중년 여성들은 탄식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은숙이 여기가 서울시 95구 37동의 해바라기 여성 보호소라고… 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였다. 정 씨의 집인 58동과 꽤 가까운 곳이었다. 무엇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조금 돌아서 몇 정거장 후였다. 정 씨는 영원을 원하였다. 안고 싶었다. 바쁜 일상으로 그의 부재를 채운 것 같았는데 그저 눈을 돌리고 있었을 뿐인 것을 겨우 알았다.

은숙이 알려준 곳으로 갔다. 하룻밤 동안 서성거리었다. 들어갈 용기까지 막상 나지 않았다. 몇시간 후에 한 여자가 뛰어나왔다. 영원이었다. 흰 반소매 티에 청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값싸 보이는 운동화까지 신고 있었다. 그가 달려가다 한 번 휘청일 제, 그의 몸을 단단히 잡았다.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시골 사람 특유의 탄탄한 체격에 사창가에서 나고 자란 가녀린 몸이 얹히었다. 영원이 고맙다며 웃는다.

“데이트 할래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봐야 근처 저수지 좀 걷는 것이라지만 즐거웠다. 개구리 우는 소리도 듣고 모기는 하등 쓸모가 없다던가 불평하면서 손을 잡고 흔들었다.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어?”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전화번호를 모르잖아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말 안 하였다. 그 또한 외로웠으리라. 그리고 힘들었으리라. 그의 팔에는 주삿바늘 자국들이 옅은 흉이 되어 남아있었다.

“아, 그동안은 병원에 있었어요. 이런저런 검사도 받았고, 출생신고도 하고… 주사, 주사 많이 맞았어요. …아팠어요.”

“울었어?”

영원이 도리질했다.

“잘했어. 안 울었다니 장하네. 나는 어릴 때 주사기만 보면 울었었는데….”

영원이 큭큭댄다. 농담하지 말라면서 지금 대화하고 있는 이는 매춘부 영원이 아닌 사람인 서영원이었다.

“출생신고 이제야 했구나.”

“네, 생일 정하는 거 어려웠고… 저, 21살이에요.”

“생일이 언제야?”

“4월 1일이요. 2004년….”

“정말? 04년생이 벌써 21살이라고?”

“농담. 사실은 2003년 8월 8일이에요.”

그는 앞으로 먼저 달려 나가서 뒤돌아본다. 어리다. 아직 어리고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병원에 있는 동안 몸무게가 너무 늘었다고 그는 말하는데 정 씨의 눈에는 아직도 너무 마른 거 같았다.

“지금 몇인데?”

“가장 최근에 잰 건 43kg에요.”

“더 찌워야겠네.”

그 느낌이었다. 자기 집 냄새를 모르다가 며칠간 다른 곳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맡아지는 냄새. 그게 내 집 냄새였구나, 느끼는— 그런 식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 후각처럼 날카롭게, 달큰하게 느껴지었다. 그의 체향이 맡아지었다. 우유 사탕 같은 그 냄새, 저번처럼 소름 끼치지가 않았다. 달콤하였다.

영원은 대화를 하면서 ## 씨— 하고 정 씨의 이름을 계속 불러주었다. 이름마저 잊었다가 이제 기억을 한다.

집에 가는 길에 우유 사탕을 사서 입 안에 넣었다. 달큰하고도 비릿한 우유의 맛이 느껴졌다. 입 안에서 굴리다가 어금니로 씹었다. 이가 튼튼한 것은 정씨 집안의 유전이자 유일하게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잘난 점이었다.

그러나 그 공백이 싹 매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보호시설에 간 이후로 배우느라 바빴다. 성 착취를 당하느라 바쁜 것보다야 나았으나 마음에 공백이 느껴지었다.

“##씨, ##씨. 나 이제 구구단 다 외웠어요.”

“뭐, 으응. 잘했네.”

그 말에 구구단을 이제야 배웠냐고 경악이기도 하였고 그리 쉬운 것을 뿌듯하게 자랑하는 것이 귀여웠다. 핸드폰에 찍어둔 영원의 사진을 보며 청소부 일의 쉬는 시간도 보내었다.

“남편하고 바람난 애가 아니지?”

눈치가 빠른 은숙은 샐쭉 웃으며 다가왔다.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매가 휘어졌다.

“아, 으음…. 응. 남편이 바람 났을 때에, 친구. 나름 의지가 되었고, 그런….”

동갑내기인 그는 연상에게도 편히 반말을 썼다. 친화력이 좋아 저번 이후로 정 씨에게도 말을 걸고는 했다. 원체 학창 시절부터 내성적이라 인간 폭이 좁던 그였다. 그러니 지금 자길 둘러싸고 시끌한 것이 이상할 만큼 어색하였다. 걸레를 꽉 쥐었다. 드런 물이 유니폼 위에 젖었다. 그러나 중년의 여성들은 그런 것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정 씨에게 전에 봤을 때부터 예뻐서 친해지고 싶었다던가, 머리가 자연 갈색인 게 귀찮았을 거 같다던가 그런 말을 하였다. 볼이 갈수록 붉어졌다. 쉬는 시간이 이토록 긴 날은 처음이었다.

퇴근을 하고서 영원을 보러 갔다. 그의 손에는 구형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이제 전화할 수 있어요. 제하- 그러니깐, 사촌에게 쓰는 법도 배웠어요. …번호 알려주세요. 가장 먼저 저장하고 싶어요.”

그 표정은 매춘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일까? 아니다. 이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더 이상 매춘부 서영원이 아닌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20대 서영원이다. 아름다웠다, 아무 이유 없이. 흘러가는 구름 속 가려진 저 해에 여름의 공기는 그리 훅훅 찌지 않았다.

그리고 8월 말, 영원의 초졸 검정고시 합격 이야기가 들리었다. 대견하기도 하고 그가 많이 잃고 살아온 것이 실감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미성년자의 시기를 통째로 빼앗기었다. 그런데도 살아진다. 사람으로서 다 살아지게 되어있었다. 중학교 검정고시를 보는 내년까지 힘낼 거라고 손깍지를 끼며 말하였다.

그의 예쁜 목소리가 작게 귓가에서 속삭이듯 들리었다. 그가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신다. 심장박동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살아있다. 그 별거 아닌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니 제 마음도 상대의 마음도 연심이라고 규정을 하였다.

마흔이 넘어서도 마음에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많았다. 어릴 적 읍내에서 구경밖에 못해본 인형의 집이라던가. 생일을 제대로 축하한 적이 없다던가 하는 것들 연심이라면,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달콤한 사랑으로 다 메워질까.

…그렇지 않았다. 어린 날 멀찍이 인형의 집을 바라보던 작은 산골 아이는 중년 여성이 되어서도 인형의 집에는 아직도 손을 가끔 뻗었고 봉제 인형에는 자주 뻗었다. 연정에 다른 감정이 섞여서가 아니었다. 늘 참는 아이였던 그의 속에서는 떼를 쓰는 아이가 있었다. 그 내면을 그대로 둔 채 그대로 두어도 살아졌다. 그저 조금 공허할 뿐, 이상은 없었다. 영원에게 줄 선물 핑계로 원하던 장난감을 여러 번 샀다. 포장도 못 뜯은 채인 장난감이 이젠 창고로 쓰는 작은 방 한구석에 잔뜩 쌓여있다. 그런데도 장난감 코너 앞에서 발걸음이 자꾸 멈추었다. 그는 그것이 사랑으로 메워질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머니에 의한 앙금은 그대로 남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원망과 함께 설거지를 하다가도 종종 멈춰서서 “엄마….”를 중얼거리었다. 그 이후로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결같이 그들의 사과만을 기다렸다. 올 리가 없는데도.

그는 왜 자신이 엄마를 계속 중얼거리는지 몰랐다. 누워서는 종종 아빠를 찾았다. 유일하게 다정이었던 아빠. 17살 때부터 일터에서 안 좋은 일이 있던 날이면 이불을 돌돌 말아 불 끄고 누워 그걸 안았다. 그리고 ##아— 하던 이제는 기억에서 흐려진 목소리를 찾는다. 영원으로 메워질 거라 기대도 안 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공허한 채로 계속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질까.

살아졌다. 영원은 수학에 쥐약이었다. 어려워했다. 중학교 2학년 수학쯤 되니깐 머리를 싸매었다. 그러면서도 문제를 풀어나간다. 종이가 팔랑거리며 넘어간다. 

영원은 보호소에서 검정고시 공부뿐이 아닌 사회로 나가기 위한 제과제빵 자격증도 준비하였다. 이따금 데이트에 달콤한 것들이 잔뜩이었다. 몸무게가 3kg 정도 늘었다. 주변에서는 오히려 보기 좋다 소리였으나 어찌 되었든 찐 건 찐 것이니 빼야만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영원은 바빴다. 제과점 일에 정신이 없는 거 같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말이 있다고 영원이 일하는 제과점을 찾는 것은 최근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운 그에게 나름 쉬운 일이었다.

'해바라기 제과점'

낡은 간판과 때가 낀 인테리어. 밖에 프린팅 스티커로 여성 보호시설에서 지원금을 받으며 운영하는 곳이라고 붙어있으며 케이크가 단돈 9800원이며 가장 비싼 것도 25000원이라는 것을 포인트 삼아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여자들은 다들 한 두 번은 삶에 고락에 씻겨져 나온 그런 눈을 하고 있었으며 가게는 세상에서 한 꺼풀 벗겨져 나와 유리 된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게의 케이크 진열장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지 않는 자동차나 토끼를 그린 아이싱- 초콜릿 펜으로 어설프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적은 케이크가 빼곡하게 놓여있었고 정 씨가 올 때쯤에 상자 하나 조심히 들고 나가던 중년의 남자 몇 안 되는 케이크 구매자인 거 같았다.

캐셔일을 하는 동년배의 머리가 짧은 여자가 "영원아—." 하고 부르자 그는 버터를 풀던 거품기를 그대로 들고나왔다. 여기 여자들은 고통을 받으며 살아와 인제야 안락을 찾았다지만 그의 눈에는 영원의 고통이 제일로 보였다. 하얀 조리복을 마른 체격인 그의 사이즈에 맞춰 줄일 때 수선집에서 서비스로 주머니 안쪽에 살짝 보이도록 붙여준 토끼 와팬이 이 다들 하얀 조리복을 입고 있는 곳에서 일테면 개성이었다. 영원은 정 씨를 사랑했다. 그를 보자 안지는 않았으나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거품기도 놓을 생각도 안 하고 나온 것부터 애정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정 씨는 불안해서 미칠 것 같기도 했다.

서영원은 자신이 정 씨와 사귀는 것을 최소한 제과점에서 티 내거나 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을 했을 때 엄마로 보일 것을 생각하니 서로가 부모 자식의 대체제라는 것이 실감이 되어 정 씨는 반대로 볼에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야 표면상으로도 애인인 티를 낼 수 있을 것일 테다.

영원의 얼굴은 화장을 전혀 안 한 듯- 선크림조차도 안 바른 듯하였다. 

입맞춤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캐셔를 하던 중년 여성은 닭살이라며 웃어대었고 영원은 세상 다 흥미를 잃어 지쳤다는 눈빛을 하고 있더니 눈이 토끼처럼 커져 눈을 깜빡였다.

"영원이 일 하는 거 안 힘들어?"

"괜찮아요."

힘들다는 뜻이었다. 버터를 풀면서 손에 물집이 잡혔다고 거품기를 왼손으로 옮기고선 오른손을 보여주였다. 손에는 피물집이 잡혀 있어 조금 아파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정 씨는 이럴 때까지 버터가 그렇게나 풀기 힘든 것일는지 몰랐다. 베이커리에서 일을 하는 것은 돈벌이보다는 사회진출을 위한 훈련이라 딸기 박스를 주방으로 옮기고 있던 스물 다섯의 수수한 인상의 여자는 아프면 적당히 하고 쉬라고 말을 하였다. 정 씨는 이 곳의 분위기가 좋았다. 자신이 젊을 제 이런 주변 인물이 있었다면 사이비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빨강과 초록으로 장식된 길거리는 예뻤고 사람들은 분위기에 취해 케이크를 하나 사갈까 이야기를 하면서도 수상할 정도로 싼 가격이라며 가게 앞을 다시 지나갔다. 영원은 손에 피물집이 잡혔는데도 케이크와 빵을 참 열심히 구웠다. 전에 옳지 못한 곳에서 강제 노동은 할 때에 인형과도 같은 모습이던 것과 입술을 깨물고 집중을 하며 케이크를 꾸미는 모습은 참 대조적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영원과 여기 시설의 여자들이 만든 케이크를 먹어주길 바랬으나 골목길 안쪽에 있으며 낡은 간판이나 과하게 싼 가격에 거부감을 느끼는 듯하였다. 정 씨는 누군가가 나서 여기는 지원을 받아 하는 곳인 만큼 딸기도 당도가 높은 것을 쓰고 우유 크림도 전부 프랜차이즈 빵집보다 낫다고 말해주기를 원하였다.

영원은 이러한 손님의 공백이 익숙한 듯 하루가 지난 케이크와 오늘 만든 케이크들을 따로 정돈하며 하품을 했다. 빵과 과자를 굽는 일이 다 끝나자 정 씨는 제 무엇이든 안 들고 다니는 성질 때문에 갖고 다니던 작은 반짇고리를 꺼내었다.

"얘, 영원아. 이리 와서 손 좀 보여줘."

지금 보니 오른손 뿐이 아닌 왼손 역시 피물집이 차 있었다. 바늘과 실로 물집을 터트리고 실로 액체를 흡수하게 하는 것은 사이비에 있을 적에 배운 것이라서 그 곳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처치가 맞을지 확신이 없었으나 아무 것도 않는 것보다 나을 거 같았다.

카운터에서 눈치 빠르게 구급상자를 꺼내 온 것으로 처치를 더 하고서 손에 밴드를 잔뜩 붙이었다. 밴드는 정 씨가 기존에 붙여주던 것— 귀여운 캐릭터 밴드가 아닌 일반 대일밴드여서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손에 피물집이 잔뜩 생겨서 일을 더 해봐야 피가 떨어지기밖에 안 하겠냐고 하는 말을 듣고 조퇴를 한 영원은 정 씨의 손을 잡았다. 영원의 몸에서는 달콤한- 설탕 내가 났다. 하얀 봉지 한 가득 받은 어제 팔고 남은 빵에서 나는 냄새도 섞인 것일 테다. 아이 같은 살냄새에 설탕과 밀가루 내가 섞였다. 정 씨는 문득 자신의 체취가 궁금해졌다. 사이비에서 나오고, 영원을 만나고서 그녀는 5살 아이와 같이 호기심이 많아지었다. 세상과 자신을 인제야 알아갈 마음이 생긴 것에서 온 것일 테다.

보호시설로 보내지 않고 그대로 손을 잡고 정 씨의 집에 도착을 했을 제 영원은 이렇게 좋은 집은 처음 본다는 반응이었다. 그저 낡아서 가난의 냄새가 나는 복도식 아파트가 그렇게 보인다면 그 사창가에서 잤던 방은 얼마나 안 좋았냐고 물었더니 판자 방에서 여럿이서 살을 맞대고 구겨져서 잤단다. 그렇다면 여럿이 눕고도 남을 방이 두 개나 있고 가구마다 하나씩 화장실도 따로 있는 이 집이 좋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영원이 아파트 503호를 탐색할 제 모든 것을 신기해했다. 이혼을 한 남편과 그때 임신을 하고 있어서 코르셋을 조이지 않는 것을 찾느라 어려웠던 웨딩사진은 빛이 바랬고 영원이는 그걸 한참을 바라보았다. 결혼에 대해- 결혼 식에 대한 이미지가 뇌에 아직 없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사창가에서 나고 자라서 그것 외에 배우는 정보 없이 현실과 반쯤 유리되어 살던 그이다. 가끔 오던 사촌 남자아이가 있었으나 이러한 결혼의 이미지를 알려줄 일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 사람 누구예요?"

"아이 아빠, 아니. 전 남편..."

정 씨는 영원이 아빠라는 단어에 매우 큰 부정적인 인상을 가진 것을 때때로 잊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이비에 들어가게 된 이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일만큼 정 씨에게 아버지는 긍정적인 단어였으나 영원에게는 말을 하기 전부터 사창가에서 성을 착취 당할 제 포주나 그녀를 범하고자 돈을 지불한 페도필리아들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강요당해왔다. 그렇기에 아빠하면 어린 시절의 첫째 트라우마가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정 씨는 의식적으로 아빠와 그것과 같은 곳에 있는 단어인 엄마라는 단어를 안 쓰고자 했다.

영원이도 비슷하게 아이라던가 정 씨가 사이비에 두고 온 아들을 연상할 단어를 잘 쓰지 않았다. 둘의 대화는 언제나 편한 듯하면서 가족관계에 관한 언급을 할 때면 여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워지니 나중에는 언급을 안 하였다. 정 씨의 아파트에는 침대 없이 차분히 개어진 먼지 냄새 나는 이불만 있었다. 그는 영원이가 보호시설을 나오고 나면 작은 방을 그에게 줄 생각이었다. 우선 그가 좋아하는 색이나 인테리어 스타일을 알아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먼저 옛 남편의 흔적을 치워야 했다. 그리고 요즘 젊은 애들은 침대를 더 많이 쓰니 가구점에서 침대를 사야 할지도 모른다.

작은 방은 현재 깨끗하게 치워두었다. 몇 물건을 버리지 못하여 큰 방에 두었는데 그것은 아들의 흔적이었다. 그 정도로 아들이 그리웠으나 이것도 영영 안고 살 수는 없으니 언젠가 처분해야 할 것이다. 

정 씨는 이불을 피고 영원을 눕힌 후에 TV를 틀어주었다. 전기장판을 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 있어, 귤 가져다줄게."

둘은 각자 내일이 더 바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소박한 여유를 즐겨야한다.

그의 어깨에 머리가 얹힌다. 그리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드라마를 보다 잠든 영원을 본다. 그 뒤에 걸린 결혼사진의 존재감을 깨닫는다. 누런 때 낀 벽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는 뜨끈한 전기장판. 이런 데이트도 나쁘지 않았다.

영원아—.

영원아-.

어머 진짜 자네, 하고 중얼거린다. 속눈썹이 참 길다 여성적이고 순수한 인상이다. 그는 만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영원아."

한번 더 부르니 그가 느리게 눈을 뜨면서 그를 올려보았다. 자기가 지금 잠들었냐고 묻는데 거기에 끄덕이자 부끄러워한다. 그런 그가 퍽 사랑스럽다. 그대로 같이 드라마도 보고 전에 받은 롤케이크게 과일을 올려 먹기도 하였다. 

"이 근처에 진짜 용한 사주집이 있다더라."

"저 그런 거 본 적 없어요. 궁금해요."

그 말에 한 번 가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며칠 후에 그 둘이서 사주팔자 풀이라고 써진 집 앞에 섰다. 일반적인 상가건물들 사이에 눈에 띄도록 촌스러운 스티커 페인팅이 되어있는데 그게 오히려 신뢰감을 주었다.

자신의 이름과 영원의 이름, 생일도 말하고, 영원의 생일을 말하기도 전에 머리카락이 검다 못해 푸른빛인 젊은 처녀는 어떻게 안 건지,

"언니도 그렇고 이 아가씨도 부모덕이 심하게 없네요. 아가씨는 특히— 자기 나이도 생일도 모르는 거 같고."

하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대충 2003년에 영원이니깐, 8월 8일..."

처녀의 쌍둥이로 보이는 청년은 옆에서 영원의 정확한 서류상 생일을 짚어내었다. 용하다고 소문이 난 역술원은 역시 달랐다. 최근의 입주 아파트 단지의 정자에서 수다를 떨던 것을 엿듣다가 여기에 대해 알고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곧 새해를 보고 있기도 하였으며 언제나 믿을 곳을 필요로 하였던 정 씨였다. 영원은 거기에 호기심과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였고 그렇게 보러 간 사주 집의 두 사람은 나이가 꽤 어려 보이다 못해 영원과 동년배로 보였다. 처음에는 미심쩍었으나 정 씨의 인생을 술술 잘 풀어내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운이 있었다.

"40대에 이혼, 사별 운이 있네."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안 들리었다. 청년은 옆의 아가씨랑 헤어지게 되는 거 아니냐고 능글맞게 농담이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사별이면 너무나도 끔찍했다.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정 씨는 자신이 슬픈 것은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인생 고통에 몇백번 씻겨져 나와 고통만 받으며 살아간 영원히 겨우 행복을 맛보려는 때에 하필 자신의 사별 운에 휘말릴까 걱정이었다. 영원은 자신의 인생 풀이를 들으며 꽤 잘 맞는다고 신기해할 뿐이었다.

"언니는 앞으로 일 년간 축원축수, 그러니깐 말이죠—"

점쟁이 처녀가 점을 치고 자신에게 하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영원의 이야기에만 생각을 집중했다. 그는 정 씨의 애인인 동시에 인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두 번째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역술원을 나서면서 신경 쓰이는 것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건만 영원은 아무래도 마지막에 덧붙인 불과 차를 조심하라는 말을 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 씨는 자신이 유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믿을 곳이 필요했다. 언제는 부모였고, 사이비종교, 또 언제는 네 잎 클로버였으며 지금은 사주였다.

영원은 믿는 것 없어도 괜찮아 보여서, 그게 불안했다. 

그게 당연했다. 젖니가 나기도 한참 전에 처음을 빼앗기고 평균보다 조금 좋은 머리로는 생후 2주 만에 울어서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가혹하게 맞기만 할 뿐이란 것을 배웠다. 그렇게 살다 보면 믿을 것이 없었다. 그렇게 늘 공허한 눈을 하고 자신의 육체에서 혼이 여섯 뼘 정도 분리되어 있는 것이 언제나의 영원이며 그런 기운을 정 씨는 잘 느껴 그를 금방이라도 날아갈 거 같은 풍선 같다고 가끔 생각해왔기에 사별을 할 기운이 있다는 말에 신경이 여간 예민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시설까지 데려다줄까?"

"...좋아요."

다행이도 자신이 지켜줄 수 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이었다. 지금 보니 보호시설까지 가는 길에는 위험한 것이 참 많았다. 자전거나 자동차는 할 말도 없고 트럭에 뛰어드는 사고도 최근에 빈번하다는 뉴스를 본 기억도 났다. 심지어 영원은 어디 내놓아도 꿇리지 않을 만큼 예쁘다. 그렇다면 왜 안 사귀어주냐는 범죄의 대상이 될지도 몰랐다. ⋯불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빵 만드는 곳에서 일을 배우는 그가 불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저 헤어지기 전에 당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영원아, 쌍둥이 말 들었지?"

"네, 잘 들었어요."

"불조심, 차 조심하고 그리고 남자도 당연히 조심해."

"⋯알겠습니다."

둘은 양손을 맞잡은 채 말을 하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저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인지는 몰랐다.

"저기, 잠시만⋯."

영원이 발걸음을 돌리려던 정 씨를 붙잡았다. 그리고 볼에 입맞춤 두 번. 저번에 베이커리에서 있던 거 갚아준 거라고 하며 배시시 옅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보호시설 건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그 자리서 한동안 있다가 정 씨는 뒤 돌아 자신의 낡은 임대아파트로 크고 가벼운 보폭으로 걸었다.

사주를 보고 난 후 정 씨는 영원을 더욱 더 많이 보려고 매일같이 베이커리에 드나들었다. 그는 그럴 때에야 몸과 영혼이 연결이 된 듯한 얼굴을 하고 정 씨를 맞아주었다.

"서영원, 연애는 일 끝나고 해!"

둘이서 손장난을 하다가 움찔거리며 놀라고 혹여 맞을까 몸을 움츠리었다. 처음에는 정 씨가 많이 와서 좋다던 성격이 서늘한 중년 여성- 애령도 영원에게 이제는 한 소리를 하였다. 그 정도로 둘은 많은 시간은 함께하고 일을 잘 하지도 못하였다. 특히 정 씨의 직업이 백화점 청소부인 것을 알자 애령은 정 씨를 대놓고 무시하였다. 서비스 빵을 넣어줄 때에도 힘들게 일을 하고 나서는 당이 필요하지 않겠냐며 단 크림빵만 잔뜩 넣어주었다. 다른 이들은 저런 사람 꼭 있다던가, 보호시설에서 일하는 것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닐 텐데 하면서 자학적인 농담이었다. 그래도 정 씨는 매번 영원이 괜찮다는 것만 보아도 행복했다.

영원은 최근 정 씨에게 더욱 사랑을 쏟아주었다. 자신을 과하게 아껴주는 것을 처음에는 어색해하는 듯하지만 이제는 잘 받아먹고 먼저 쓰다듬어달라고 몸을 살짝 숙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이것이 정상적인 연애 관계일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둘이서 유사 모녀 관계가 아닐까 하는 자신의 불안도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였다.

사별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40대에 이혼이나 사별은 한다니, 그 다른 것을 다 척척 맞추고 그런 용한 집인데,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밤마다 불안했다. 병원에서 항불안제를 더욱 처방받고 약을 삼키었다.

영원이 얼마 후 집에서 놀기로 했으니 다이소에서 보드게임을 사와 놓았다. 그리고는 장 청소를 하고 거실에 있던 결혼사진을 큰 방으로 옮기고 남는 천으로 감싸 안 보이게 두었다. 거실 벽에는 결혼사진이 있던 자리만 누런 때가 안 껴서 하얀 크고 네모난 자국이 남아있었다.

청소기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청소는 해도 티는 안 나는데 안 하면 티가 난다. 

정 씨는 최근에 영원이 노란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어본 것은 아니다. 그저 빵을 포장할 제 유달리 빨간 리본과 노란색 리본을 만이 쓴다는 것에서 추리를 해본 것이다. 그렇다면 방의 도배도 당연히 귀여운 병아리색으로 하고 늘 신고 다니는 낡은 검은 운동화가 아닌 비싸고 예쁜 노란 운동화도 한 켤레 사줘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정씨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었다. 은행에서 받은 달력을 보며 영원이 집에 올 날을 기다리며 남편이 이혼을 할 때 놓고 간 어쩌면 영원보다도 나이가 더 많을지도 모르는 낡은 컴퓨터로 방 도배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영원이 집에 오기로 한 날에 정 씨는 심정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처음에는 매춘부의 그것이었으나 지금은 담담하고 유혹하기보단 편안한 그런 목소리였다.

"제가 교통사고를—."

"뭐?! 괜찮아? 무슨 일인데? 어디 병원이야?"

정 씨의 머리에 여러 그림이 스쳐 지나갔다. 평시와 같은 목소리에도 예전 크게 다쳤을 때 주연의 근엄한 남성도 마취를 하고도 아이처럼 난리를 피우며 크게 고통스러워하던 마취 없이 생 살을 째서 하는 시술을 할 제에도 조금도 아파하지도 않던 고통의 역치가 비정상적으로 높던 모습 때문에 차에 치이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 같다고 느끼는 것일 수도 모른다고.

영원이 정 씨의 이름을 크게 다시 한번 불렀다. 생각이 현실로 돌아왔다.

"...교통사고를 목격해서 경찰서에 진술하러 왔어요. 조금 늦을 듯해요."

안도의 한숨. 오는 길에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집에 들어올 때 늦어서 미안하다며 겨울에 먹기 좋은 과일을 두 봉지 사 왔다. 둘이서 큰 방에서 같이 전기장판 위에 누워서 영원이 무엇을 보았는지 들었다.

"나는.... 사고가 난 줄 알고."

"사고가 났으면 직접 통화 못하죠."

그는 정 씨를 달래듯 어깨를 쓰다듬고 머리를 기대에 부스스 우스웠다. 긴 머리가 흘러내린다.

"저번에, 사주 보았을 때 차 조심하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혹시나 했지."

"그것 뿐이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게다가..."

말을 하려는 도중에 목이 메였다, 40대에 있다던 이혼운과 사별은. 영원도 같이 들었을 텐데 그걸 신경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왜 이리도 어려워하는 건지.

"거기서 이혼운과 사별운이 있다고 해서... 혹시 네가 잘못 될까 봐..."

영원은 약간 정 씨를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40대에 이혼운, 사별운이 있다고 한 것 때문에 그동안 자신을 그리 신경을 쓴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거 전 남편분 이야기 아니에요?"

"아, 그렇네... 나 마흔 넷일 때니깐..."

정씨의 왼팔이 영원의 가는 허리를 깜쌌다. 영원의 양 팔이 정 씨를 아프지 않게 안았다.

"그러니깐, 나 걱정 안해도 되는 거에요."

그렇게 둘이 안고 예전에 종영한 예능을 한참 보았다. 보았다기보단 들으며 서로의 온도를 즐기었다. 영원은 귤을 까서 정씨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얼마 후, 해가 지나고 겨우 답을 찾아서 쓰고 나왔으나 어려웠다고 검정고시가 잘 될지 모르겠다고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2월의 영원을 보았다. 정신없이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청소하고 살다 보니 다시 겨울이었다. 영원을 만나온지 벌써 1년이라는 뜻이었다. 저번 해엔 생일을 못 축하했는데,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는데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왔다.

3월이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는 너무 어렵다고 못 할 거 같다고 한다. 스스로 자기는 고등학교에 갔어도 밑을 깔아주는 역할이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보호시설에서 하는 제과점에서 일하고 나온 영원에게서는 늘 맛있는 냄새가 배있어서 그와 스칠 제 뒤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괜스레 부끄러웠다. 

제과점 일은 일인 건지 그는 일이 끝나고 나면 지쳐 보였다. 사창가에서 있던 그가 생각이 났다. 늘 삶의 고통에 몇백번씩 씻겨져 나와 모든 것이 무감해진 얼굴. 이제는 삶에 고락에 씻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아진 것일 테다. 그는 베이비슈를 한가득 가져왔다. 잘 팔리는 제과점이 아니라서 폐기가 이렇게 많이 나온다 말이었나, 아무래도 좋지만. 입안 가득 슈의 생크림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우울함이 문득 설탕 부족이었는가 생각해본다.

사람이란 것이 이렇게 간단한 것으로 살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편의점에서 팩에 담긴 커피를 사서 얼음 컵에 따랐다. 집에 가는 길에 바닷물같이 우울이 밀려왔으나 괜찮았다. 

그는 가난하다. 또 외롭다. 그러나 그에겐 시랑하는 이의 사진 한 장이 있다.

얼마 후 영원은 보호시설을 나왔다. 그에게 짐을 들어주겠다고 시설 앞까지 데리러 갔는데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가서 그 말이 민망하여 손 끝만 만적거리었다. 

그 날 하루는 같이 보내었다. 집안을 청소하고 작은 방을 정리하였다. 영원이 가지고 온 옷은 몇 벌이 안되어서 작은 서랍에 전부 들어갔다.

잠이 옅었다. 정 씨가 머리를 숙이고 있을 때 성수가 머리 위로 차갑게 떨어졌다. 남편은 눈을 빛내며 죄를 잘만 씻어내는데 그의 어린 인생을 망쳐둔 주범인 어린 아들은 물이 닿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한 겨울에 아무것도 못 입고 찬 물을 맞으니 보통 추웠던 것이 아니었는지 몸을 다르르 떨었다. 그러한 악몽을 꾸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책에서는 이렇게 하길래..."

영원이 분무기를 들고 무릎 꿇은 채 이불 근처에서 곤란해하는- 미안해하는 것이 느껴지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책이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중에 유머센스가 고전적이던 시설의 언니가 보여준 만화가 있었나보다 악몽을 꾸는 것 뿐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젖는다고 가볍게 말을 하자 주눅이 든 것을 다시 쓰다듬고 안아주자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보호시설을 나온 영원은 정 씨의 집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방이 작아 침대는 둘 수 없었고 페인트 색을 고민하느라 작은 방은 아직도 곰팡이를 벅벅 벗겨낸 자국이 선명했으나 그는 자신만의 방이 생긴 것이 처음이라 무섭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혹 예쁜 병아리색으로 미리 도배를 해두었다면 귀엽다고 좋아했으려나, 결국 이 집에서 첫날 밤은 둘이 큰 방에서 서로를 안고 잠이 들었다.

그가 정 씨를 새벽에 깨운 이유는 어제 농담으로 한 이른 아침에 목욕탕에 가자는 이야기를 진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 곳에서 착취당하며 산 시간이 인생의 대부분이라 영원은 현실 사회 경험이 너무 적어서 아기나 다름 없으니 걸음마부터 알려주겠다던가 어제 분위기에 취해 그런 말을 했었는데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나보다.

"목욕탕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일단은 씻을 것들을 챙겨야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키며 화장실로 향하였다.

정씨가 능숙히 짐을 챙기는 것과 달리 사창가 안과 보호 시설의 샤워 시설만 사용을 해본 영원은 헤매다가 겨우 양손에 챙긴 것이 수건이었다.

아침 일찍 간 목욕탕은 정 씨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인들 외엔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는 사회에서는 매우 어른인 그도 어린 애에 불과한 나이였다. 영원은 이제 조금씩 사용한 태가 나기 시작한 노란 운동화를 벗어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두리번거리다가 정 씨가 신발을 들고 들어가 사물함을 열고 밑에 신발 보관함이 있는 것을 알려주자 바로 옆에 있는 194번 사물함에 신발을 넣고 옷을 벗었다.

영원은 원래 정 씨의 앞에서도 사창가에서 든 버릇 때문에 참 요염하게 유혹을 하는 듯 옷을 벗었다. 그러나 요즘은 옷을 참 편하게- 여름날의 중학생과 같이 벗었다. 상의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예쁘게 정리하고 다시 바지를 벗는 것이 그 사창가의 버릇이 덜 사라진 거 같으나 아무래도 괜찮았다. 영원은 조금씩 벗어나고 정 씨도 사이비에 있을 적의 생각을 안 하게 되었다. 짐들을 두던 작은 방을 영원을 위해 비워두게 하며 사이비에서 받은 물품들도 전부 버리었으니 둘은 완전히 괜찮다고는 할 수 없지만 괜찮아지는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산한 작은 목욕탕은 앉아서 씻을 수 있는 자리가 많았다. 바로 옆의 두 자리 나란히 안아 우선 머리를 감아야 한다고 최근에 친척에게 받은 비싼 샴푸를 영원의 머리에 짜주자 정 씨가 참 좋아하는 제비꽃 향이 훅 퍼지었다. 정 씨도 늘 묶고 있던 머리를 풀고 그 샴푸로 머리를 감으며 계속 향을 맡았다. 거품이 영원의 어깨나 가슴에 툭툭 떨어졌다. 눈을 찌푸리는 모습이 거품이 눈에 들어가 아픈가보다.

아들과 함께 씻을 때면 사이비에 있었을 때도 머리 모양일 이렇게 저렇게 바꿔가며 놀았었는데, 이미 성인인- 애인인 영원과는 할 짓이 아닌 거 같았다. 그래도 샴푸 거품을 모아서 동물의 귀처럼 제 머리 위에 올리고서는,

"영원아, 고양이."

하니 그는 한쪽 눈을 찌푸린 상태에서도 귀엽다며 웃었다. 자기도 하고 싶다고 거품이 묻은 눈을 씻어 내고 샴푸 거품을 모아서 토끼 귀를 만들고는 "토끼에요." 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이 사람 마음 동하게 하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아까전의 샴푸와 같은 보라색인 바디위시도 친척의 선물이었다. 둘 다 제법 비싼 거라고 아내 대신 거들먹거리던 남자의 얼굴과 입 다물게 하는 여자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는 거 같았다. 샴푸는 매우 비싼 것이 아니라면 개인적으로 다시 사서 쓰고 싶다는 의향이 생길 정도의 물건이라서 바디워시에 대한 기대도 생기었다. 

캐모마일인가? 아니면 라벤더... 향이 꽤 좋았다. 샤워타일에 묻혀 거품을 내고 각자의 몸을 구석구석 밖았다. 레몬 향도 상큼하게 나는 것 같기조 하였다.

"영원아, 등 좀."

"아, 네."

영원은 정 씨의 등을 제 샤워타올라 부드럽게 문질렀다. 시원하지는 않으나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하야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보통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가 씻겨줄게."

영원은 등 뒤에도 상처가 많았다. 전부 학대의 흔적이다. 그것을 바디워시로 씻어낼 수는 없지만 시간으로 씻어낼수는 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조금 힘을 주었는지 새하얀 살이 붉어져있었다. 둘의 몸에서는 제비꽃과 라벤더가 섞인 그러한 오묘하고도 매력적인 향이 났다.

따듯한 온탕에 들어간 정 씨는 사이비에 들어가기 전 집에 있었던- 아들을 위한 장난감이 생각이나 허공에 고무 오리를 만지듯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영원은 이번이 첫 목욕일 텐데, 그런 중요한 처음을 이런 작은 공중목욕탕에서 시시하게 하게 한 것이 미안했다. 언제나 그에게는 최고를 해주고 싶었다. 영원은 제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물의 감촉이 신기한지 계속 물장난이었다.

"목욕 좋아?"

"네, 그런 거 같아요."

녹차탕의 냄새는 나는 것인지 안 나는 것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과 함께라는 것만으로도 진하고 향긋한 녹차 향에 감싸지는 기분이었다. 따뜻함 물에 몸이 풀어진다. 숨을 깊게 들이쉬면 어지럽다. 그러나 더 오래 있고 싶기도 했고 영원에게 너무 오래 있으면 몸에 오히려 안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하기도 했다.

다시 자리로 가서 샤워기로 몸을 한 번 씻어내고 짐을 챙긴다. 수건으로 영원의 긴 머리를 감싸준다.

바닥에 더러운 것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하고는 둘은 같은 냄새가 나는 채로 목욕탕에서 나왔다. 덜 마른 머리카락은 옷의 등판을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동네 구멍가게가 보였다. 최근에 대형마트와 인터넷 배송이 더욱 활발해졌음에도 정 씨는 그 구멍가게에 자주 들리었다.

"영원이, 바나나 우유 마실래?"

"바나나 우유요?"

"응, 목욕 끝나면 원래 바나나 우유 마시는 거야."

정 씨는 바나나우유 두 개를 사서 빨대를 꽂아 한 개는 영원의 손에 쥐여주었다.

젊은 청춘들은 아름답고 반짝거리며 빛이 난다. 정 씨는 일을 하며 백화점서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을 볼 제 그런 생각이었다. 

젊은 청춘들은 아름답고 반짝 거리며 빛이 난다면 녹이 슨, 오래된 풀 같이 시든- 백화점서 쇼핑이 아닌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자신의 삶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

어떤 때는 과거의 상처를 자랑하듯 내놓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을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30대의 정 씨도- 그때 정신적으로 또래보다 어려서 제 상처에 커다란 붕대를 감고 아프다고 울면서 제발 봐달라고, 동정이라도 해주기를 구걸했다. 지금은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아무 것도 안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생겼다.

영원은 자신처럼 만들기 싫었다. 이미 혼자서도 잘 하는 그에게- 자격증도 따고 베이커리로 정 씨를 깨우며 출근을 하는 그에게 걱정을 하는 자신이 한심하였으나 정 씨는 사이비에 있을 제 마음이 위태로운 인간들의 여러 유형을 보았고 영원의 저 어른이다 못해 초연한 태도- 세상에서 한 꺼풀 분리된 듯한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에 오면 영원과 남을 빵을 먹거나 된장찌개를 끓여 먹었다. 스팸을 먹기 좋게 잘라 프라이팬에 굽고 김치를 죽 찢어 서로의 그릇에 놓아준다.

정 씨의 우울증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십 대 일수도 있고 또는 그 이전부터였을는지도 모른다. 기분이 가라앉음이 지속될 때에는 영원이 옆에서 애교를 적극적이지 않게 부려주거나 설탕이 더 필요하다며 단 빵과 믹스커피를 주었다. 그러면 기분은 일시적으로 나아지나 두둥실 떠오르는 것은 잠시일 뿐 바다에 던진 무게 추처럼 다시 가라앉았다. 낮에 본 청춘들을 회상했다. 두 여자가 팔짱을 끼고 사이좋게 발 맞춰 걸으며 수다를 떠는 모습. 자신은 그럴 나이 때에 사이비에 청춘을 내다 버렸고 그것을 복구할 시간도 그저 흘려보냈으며 지금은 참 무뎌지고 녹이 슬어버려 감정조차 옅어져서 그렇게 슬프지도 않았다. 하얀 크림이 꽉 찬 길쭉한 빵은 달콤했다.

주말에도 일을 하는- 주말에 일이 더 바쁜 것이 백화점 청소부이다. 그리고 영원이 일하는 베이커리는 한 구석에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두고 카페도 겸하고 있어 주말에 더 바쁠 것이 분명해 특히 일요일에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둘이 시간이 나는 것은 월요일이다. 그 때에 각자 집에서 편히 차려입고 외출을 하는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원은 병아리색을 참 좋아하는 것 치고 안 어울리었으나 좋아하는 것을 입고 좋아하는 모습- 어리다는 것 자체로도 좋았으나 커플로 맞춘 후드티도 정 씨는 칙칙한 쑥색을 골랐다. 그 색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도 있으나 좋아하는 색이라는 선호는 사이비에서 무채색으로 지워져서 쑥색도 나름의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스쳐지나가는 버려진- 딱지가 붙은 깨진 거울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연인이 보였다. 자신만이 아름답지 않았다. 영원과 처음 만나게 된 계기조차 그랬다. 사창가로 매춘부를 안으러 간 남편을 잡으러 갔다가 미성년의 그녀를 동정하여 안은 그런 첫 만남과 연이 끊어진 아들 대신, 차가워진 남편 대신 삼은 것-. 영원은 죄가 없다 착취를 당하던 어린 여자일 뿐이며 아무것도 배우질 못하게 사이비에 있던 자신과 비슷한 폭이었으며 자신은 그런 여자애를 이용한 종교에서 가르치던 일테면 사탄과 비슷한 꼴일테다.

아름답지가 않았다. 흘러가는 구름 속 가려진 저 하늘이 저와 비슷하다고 느끼었다. 먹구름이 하늘에 잔뜩 끼어 곧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듯 하였다.

멍하니 바라본 영원은 입고리를 올리며 정 씨의 손을 꽉 잡았다.

"영원이는 소꿉장난 해본 적 있어?"

"네, 있어요."

그가 아이다운 어린 시절을 보낸 적 없기에 소꿉놀이 한 번 해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 정 씨는 의외라고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의심이었다. 그 소꿉장난이 과연 정상이었을까 하는,

"재미있었어?"

영원은 말 없이 고개를 저었고 다시 생각하기도 꺼려진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정 씨가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 어떠한 취향을 가진 손님과의 괴악한 행위이다. 소꿉장난에 대한 기억이 그것이라면 자신과 그 겨울 동안 했던 행위는 소꿉놀이라고 인식을 할까, 열병에 걸린 것 같이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직 꽃 피기 전인데도.

정 씨는 영원에게 뭐든 알려주려 하였고 그는 그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목욕이나 우는 법, 누워서 죄책감을 갖지 않는 법까지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이 아들을 낳았을 때가 생각이 나서 소꿉장난 기분이었고 이번에는 진짜로 소꿉장난을 알려줘야 할 때가 된 것만 같았다. 

전에 놀이터에서 소꿉장난 하는 아이들을 볼 제 정 씨는 추억에 잠기었다.

그에게도 어릴 때가 있었다. 흙을 뭉쳐 주먹밥이라 우기고 나뭇잎을 찢어 김치라고 하며 정체 모를 열매를 돌로 찧어서 놀던 유년기가 있었다고.

요즘 아이들처럼 세련된 소꿉장난을 하기에는- 또한, 고전적인 소꿉장난을 하기에도 두 사람은 꽤 많이 자랐다. 163cm, 158cm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균에 걸친 키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장난감에는 거인과도 같이 큰 몸이다.

집에는 업을 인형도 포대기 대신으로 쓸 보자기도 없었다.

소극적인 목소리로 영원이 정 씨의 이름을 불렀다.

"그럼 평범한 소꿉장난은 뭐에요?"

아, 자신이 그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던 것을 너무 티를 냈거나 하던 것을 들키었나보다. 영원이 그의 이름을 반복하며 부르며 질문했다. 핸드폰으로 소꿉놀이 하는 아이들 영상을 보여줄까 하다가 그것으로는 부족할 거 같기도 했다. 결국은,

"아이들이 부모 흉내 내며 노는 거야."

하며 간단히 설명을 하고 영원 족으로 고개를 돌리었다. 최근의 영원은 감정표현이 사창가에서 일을 할 때의 경력이 인생을 산 기간과 같은 매춘부다운 그것이 아닌 옅으나 진짜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깨달음- 흥미. 정 씨도 표현이 너무 옅어 알기 어려웠으나 있는 시간이 긴 만큼 잘 알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것일까?

"해볼래?'

"아뇨."

"알려주고 싶어."

"그럼 해볼래요."

이래서는 자신이 놀아달라고 조르는 꼴이 된 것 같아 민망하였다. 진녹색 운동화를 신은 발끝이 안쪽으로 살짝 모였다. 흔한 아이돌 노래가 머릿속에 들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건 가슴은 두근거렸다.

둘은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거리를 걸었다. 임대아파트의 복도는 제법 쌀쌀해서 몸을 조금 움츠리게 되었다.

"일단 엄마랑 아빠 역할을 정하는데-. 여러 명이면 아기나 개 역할도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엄마와 엄마네요. …평소와 다른 게 없는데."

"그러게, 평소와 다를 게 없네."

정 씨도 정말 소꿉놀이를 해도 될까 망설여졌다. 그 역시 그의 가정이 정상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교복을 입은 학생이 제 발로 사이비를 찾아갈 리가 없지 않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마음이 한 번 죽었고 아버지는 가정적인 분이었고 소꿉장난에서 넥타이를 메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 씨 역시 소꿉장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미 둘은 언제나 소꿉장난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정 씨의 뇌에 피어올랐다. 아내와 아내 역이기도 했고 이것은 인정하긴 싫으나 가끔 엄마와 딸 역이기도 했다. 그걸로 되었다.

"하지 말까?"

"그래요."

둘은 손을 잡았다. 현관에는 초록색과 노란색- 색만 다르고 같은 디자인의 운동화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세면대에서 손 세정제로 손을 씻었다. 레몬 향, 서로 냄새를 맡으며 웃는 시간은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나 귤 주세요."

"뭐야. 소꿉장난 하자고?"

"네."

"아유, 참…. 당신도 내가 못 살아."

정 씨는 쟁반에 귤을 여러 개 담았다.

이제 3월이라 귤도 끝물이다. 또 다시 봄이 오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봄은 안 좋은 일이 늘 일어나던 계절인 나쁜 때였다. 그러나 영원이 옆에 있는 것으로도 무언가 나은 거 같았다. 입꼬리가 그저 올라간다. 연심인지 모성인지는 모른다. 둘 다 아닐수도 있고 둘 다 맞을 수도 있었다.

귤의 맛은 시고도 달콤하였다. 행복이다.

밖의 온도는 아직 쌀쌀해서 몸을 움추리게 되는데 그러다가도 몸에 얹히는 따듯한 햇살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초봄의 햇살이 따듯도 하였다. 3월이다. 아직 대지는 척박하고 바람은 거칠다. 뿌리를 잘못 내린 시작을 한 두 명이었다. 그러나 봄은 아름다웠다. 개나리 피어나고 목련과 벚꽃이 피어난다. 기지개를 켰다.

4월 9일이 다가올수록 그의 마음은 벚꽃이 날리는 것 처럼 불안이었다. 영원이 또 다시 사라질 것만 같았다. 거기서 영원의 제안이 있었다. 밤에 벚꽃을 구경하자고.

그것이 또 사창가가 철거 된 그 날이었다. 안 좋았던 기억이 있으면 좋았던 기억으로 조금씩 덧칠을 하면 되엇다. 마침 둘 다 쉬는 날이었다. 낮에는 집에서 케이크에 딸기를 더 얹어먹으며 TV에서 나오는 영화를 틀어두고 나름의 데이트였다.

풀벌레 소리도 바람도 이 시간을 색칠해간다. 향기 품은 보드라운 바람이 이따금 볼을 스쳐 가고 그때에는 꽃잎이 눈과 같이 떨어져서 머리 위나 옷에 앉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평일 밤에 산책을 하는 사람은 적어서 둘이 조용히 걷다 보면 꽃 향에 어지러워 약간 졸린 듯하기도 한 그러한 공기에 바닥에서 하얀 불빛이 나와 하얀 벚꽃을 더욱 희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색만 다르게 같은 것으로 맞춘 운동화에 떨어진 꽃잎이 조금씩 밟힌다.

맞잡고 걷는 두 손이 서로 데워 주어 4월 초 공기에도 차갑지가 않았다. 여기저기 보이는 쓰레기통에는 낮에 먼저 다녀간 연인들이 버린 쓰레기로 가득했다. 공기는 내일 새벽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를 반영하듯 조금은 습기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토끼같은 구름이 둥실둥실 떠내려간다. 청소부들이 빗자루질하고 고새 또 내려앉은 벚꽃잎들을 보며 한숨이었다.

정 씨는 40이 넘도록 살았으나 이렇게 밤에 벚꽃을 구경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낮에 보는 벚꽃은 이제 별 감흥이 없을 정도였으나 밤놀이는 달랐다.

사이비에 있던 때에 그 단체생활 시설 쪽과 맞은 편 길에는 벚나무가 심겨 있어서 그때 벚꽃잎을 잡는다고 꺄르르 웃으며 수다인 여학생들을 붙잡고 말을 걸었어야 했다. 그럴 때 여학생들은 무시거나 왜 이 즐거운 때를 망치냐는 듯한 눈으로 정 씨를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벚꽃을 잡은 학생이 꺄꺄 소리를 내자 정 씨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다시 이야기하며 웃기를 시작했다.

영원의 손이 조금 더 조여오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나른하고 조금은 봄 온도를 느끼게 하는 음악이 들리는 거 같았다. 마음이 조금 감성적이게 되는 거 같았다.

"사진 찍을래?"

"찍어요."

기본가메라로 찍는 찰칵찰칵 소리가 났다. 이 풍경에 애인은 물론이고 자신도 정말 아름답다고 느끼었다.

둘은 핸드폰에 서로의 모습을 보며 살포시 웃는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4월 첫째 주에서 둘째 주 초는 유일하게 봄다운 날씨라고 할 수 있었다. 바람 한번 불자 멋을 내겠다며 원피스를 입은 영원은 혹시라도 안이 드러날까 옷을 붙잡고 정 씨는 쑥색 재킷의 지퍼를 죽 울린다.

벚꽃, 벚꽃—. 이 온도는 이렇게 밤이어도 낮에 있는 기분이라 벤치에 앉아서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을 듯이, 지금이라면 혹여 말실수를 해도 바람에 지워질 것만 같았다. 운치가 있어 좋았다. 손에는 밤에 잘 때 방해가 안 되도록 카페인이 안 들어간 주스를 마시는데 이것이 꽤 달콤하였다.

정 씨는 영원 역시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슬슬 아팠다. 핸드폰을 보니 꽤 걸었다. 운동이 되었을 것이다. 아까 낮에 데이트를 하며 케이크를 너무 많이 먹었다는 자각이 있었다.

"걸었으니 이제 괜찮아요."

영원도 그 것을 신경 쓰고 있었나보다.

"맞아, 방금 걸었으니깐."

같이 웃었다. 꽃잎이 눈처럼 날려서 분위기가 좋았다. 조금 잠들 거 같이 행복하였다. 벚구경이 끝나니 4월도 금세 지나갔다. 4월 초는 참 봄이라는 말에 어울렸는데, 중반부터는 더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 씨의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었다. 온도가 낮았고 그가 자랄 때만 해도 작은 산들 고불고불하게 들어가야 나오던 산골 마을이었다. 그 산들에 묻힌 모양이 둥지 속 알 같아서 얼마나 아늑한 모양이던가를 생각하던 10살의 정 씨는 제 생일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생일도 딱 좋은 때에 태어나 봉우리를 툭툭 트고 있는 꽃들과 함께 화사한 햇빛 아래서 생일을 축하 받던 부잣집 친구의 모습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 애의 아버지가 오늘은 좋은 날이니 닭을 잡자던가, 자전거를 타고 검은 교복을 입은 그 애의 큰오빠가 막내 공주 케이크 사 왔다 하는 것을 어린 날의 정 씨는 조금 멀어진 채 마음은 덜컥이고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며 그날을 보내었다.

오월 즘 되면 농가는 한참 바쁠 때이다. 밭일도 급하거니와 논에 모도 내야 한다. 어린이들이라고 마냥 노는 것은 아니다. 부모 일을 돕는 것 뿐이 아니라 나중에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하듯 기념일이 많아 어린이날 무엇을 받을 지 생각을 하거나 카네이션 접기를 연습하였다.

그렇다면 정 씨의 생일은 5월 8일,- 어버이날에 진통이 길어 태어나자마자 구박부터 받고 태어난 그에게 생일은 아무것도 아닌 날이었다.

어릴 적에는 산을 오르고 오를 체력이 있었고 서울에 돈을 벌라고 반 강제적으로 상경을 하자 구로공단에서 재봉틀과 피물집 고름, 꼴에 교복을 강제했던 야간학교- 그때 자취를 하던 쪽방은 56동 파출소 근처에 있었는데 그 동네도 언덕 위 판자촌이라 올라가는 길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고 때에는 꽃이 피는 것도 몰랐기에 제 생일도 몰랐다.

그렇게 생일 축하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고 종교에서도 금하던 것이 파티였다. 그렇다면 아직도 생일 축하하는 그에게 일테면 먼 외국 문화와도 같아서 정 알지 못하겠는 것이었다.

서울 집의 5월은 훅훅 쪄서 벌써 태양 밑으로 나가기 싫다 옆집 사람이 칭얼거리고 또 그걸 다그치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언젠가부터 정 씨도 아침에 일어나면 핸드폰 알림을 보는 버릇이 생기었다. 문자 주르륵 온 것에 무슨 일이라도 휘말리었나 잠이 확 깨어 눈을 크게 뜨니 생일이란다. 

정 씨는 생일을 축하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닌 그저 그런 날이고 스스로 몇 번 챙긴 날에는 오히려 쓸쓸함 맘 더해지었다. 무엇보다 출근을 해야 한다. 누군가의 생일이라고 사람이 더 오는 날은 있어도 덜 오는 날은 없다. 어버이날에 백화점이 붐빌 제 청소부들은 쉴 시간도 없다. 영원에게도 자신의 생일이라고 차마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베이커리도 백화점과 사정이 크게 다를 거 같지가 않았다.

가장 아끼는 신발을 신고 싶었으나 더러워지는 것이 싫어 더러워진 낡은 신발을 신었다. 현관문 앞에 생일 축하해요 라고 영원이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보았다. 분명 생일 축하의 의미도 모르고 일단 축하해주는 것이다. 정 씨는 부분이 안쓰러웠고 좋았다. 그 포스트잇을 떼어 주머니에 넣었다. 미소가 지어졌다.

"생일 축하하는 왜 하는 거예요?"

"…생일이니깐."

드라마를 보던 영원이 물었던 기억이 있다. 영원은 생일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도 기념하는 것도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아무리 농으로 말을 하고 웃기게 말을 해도 설명이 잘 되지가 않았었고 결국에는 실패였다. 정 씨는 생일 축하하는 그 즐거움을-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잘 몰랐다. 달콤한 케이크 입에 한 조각 넣은 적 없어서 그렇기에 동경했다. 자신도 어릴 적의 그 친구처럼 사랑받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매년 생일을 축하받았다면 설명을 잘 했을까 생각을 하며 막힌 변기를 뚫었다.

생일을 왜 축하하는가, 그건 정 씨도 몰랐다. 모두가 생일을 축하하기에 생일을 축하하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생일파티는 일테면 사이비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무의미한 의식한 의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태어난 날을 축하한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가시밭길 맨 발로 걷는 것처럼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런 삶이 시작된 날을 축하하느니 사후에 기일을 축하하는 것이 나으리라.

그런데 그 말을 영원에게도 할 수 있을까?

그의 인생은 정 씨보다도 더욱 고통이었고 현재에도 후유증을 남겨두었다. 그런 삶을 버텨준 것이 고마웠다. 기뻤다. 안 죽고 살아남아 준 것으로도 충분하다. 정 씨에게는 영원의 존재 뿐으로도 하루를 더 사는 힘을 주었다. 혹 모르나 자신도 영원에게 그런 존재일까.

고무장갑을 벗고 하늘색 청소부 복장을 벗었다. 오늘 같은 날 배달도 밀려 있을 테니 미리 치킨 배달을 집에 시켜놓았다. 집에 가는 길, 영원과 길목에서 마주쳤다. 영원의 손에는 정 씨가 저번에 취향에 맞는다고 했던 밀크 크레이프 케이크가 들려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야 알 거 같았다. 말할 수 있었다.

"영원아, 생일은 있지-. 아이에게, 사람에게 그동안 힘들었어도 지금까지 버텨줘서 고맙다고, 기쁘다고 해주는 거야. 잘 견뎌 살아온 것을 축하한다고,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생일 파티야."

그는 이제는 완벽히 깨달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평소와 같이 영혼과 몸이 분리 된 듯한 멍한 표정이 아닌 정말로 기쁜,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정말 예쁘게,

"생일 축하해요."

방긋 웃어주었다. 그래, 고마워 대답을 하고 집으로 가서 초에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빌고 훅 불었다. 박수소리가 기분이 좋다. 아무 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날 그가 사랑해주고 있다. 이제 나도 나를 사랑해볼까한다.

##아, 그동안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그걸로 충분해. ⋯잘 버텨왔어. 잘했어. 스스로에게 속으로만 말하며 케이크를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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